이 달의 동문
2대에 걸친 평창의 꿈, 올림픽으로 승화하다
서울고 총동창회 뉴스레터 14호(2018. 3. 12)
김지용(44회, 45세) 평창올림픽 한국선수단장
평창동계올림픽이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3수 끝에 유치한 이 올림픽이 국내외의 갖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세계인의 겨울축제로 거듭났다. 선수들의 성적도 좋았다. 금5, 은8, 동4, 종합7위. 쇼트트랙종목을 제외하고 동계올림픽에서 메달 따는 것은 꿈도 못 꾸던 시절에 비하면 양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괄목성장이다.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 이상화 선수가 금메달을 딴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 동계스포츠가 화려한 비상을 시작하더니 이번 평창올림픽 때 정점을 찍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역사적 스포츠이벤트의
한복판에서 활약한 서울고 동문이 있다. 바로 평창동계올림픽
선수단장을 맡았던 44회 김지용 국민대 이사장이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40여년전 평창에 그 초석을 다진 주역 또한 서울고 동문이자 김이사장의 부친이다. 2대에 걸친 평창과의 인연을 듣기 위해 김이사장을 북한산기슭에 자리잡은 서울 성북구 정릉동 국민대에서 만났다.
인터뷰 날은 마침 평창올림픽선수단
해단식(2월26일)이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래서인지 선수단에게 나눠준 백팩이 김이사장 사무실 책상 한 귀퉁이에 놓여있었다. 태극기가 꽂힌 백팩을 짊어 메고 대회기간 내내 평창과 강릉 사이를 누볐을 김이사장도 아직은 평창올림픽의 열기와 흥분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듯했다.
“선수단 숙소가 강릉(빙상종목)과 평창(설상종목)에 하나씩 있었는데 저는 평창에 묵었습니다. 오전7시30분 회의로 일정을 시작하는데, 하루에도 강릉에 두세 번씩 왔다 갔다 했죠. 강릉과 평창, 정선까지 우리나라 선수들이 뛴 경기에는 대부분 갔다고 보면 됩니다.”
선수단 본단과 함께 2월5일 평창에 입성한 김이사장은 해단식까지 20여일 넘게 강원도에서 지냈다. 하루4~5시간 ‘쪽잠’을 자는
강행군이었다. 이번 평창올림픽경기는 방송주관사인 미국NBC가
미국의 새벽시간 중계를 피하려고 경기일정을 잡는 바람에 밤늦게 경기가 끝나기 일쑤였다. 또 선수단장은
선수 뒷바라지도 해야 하지만, 각국에서 온 VIP는 물론이고
선수단장과 만나 스포츠외교도 해야 한다.
김이사장은 대회기간 93개 참가국 가운데 절반 이상의 선수단장과 접촉했다고 한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때 선수단 부단장을 지낸 게 평창올림픽선수단장을 맡게 된 계기다.
당시 대한빙상경기연맹회장이었던 김재열 제일기획스포츠사업총괄사장이 선수단장이었고, 그가 부단장으로 선수단 살림을 도맡았다.
당시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었던 모교동문 유진룡(27회) 국민대 석좌교수는 “김이사장은 소치올림픽선수단 부단장 시절 처음 봤다”며 “당시에는 후배인줄 몰랐는데 선수들에게 헌신적으로 봉사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김이사장은 올 1월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열린 동계유니버시아드에서도 한국선수단장을
맡으며 평창으로 향하는 경력을 예열해 두었다.
선수단장을 맡은 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염두에 두고 한 일은 아니었다. 동계올림픽의 주역은 대표선수들이고, 선수단장은 뒤에서 묵묵히 선수들을 챙기는 게 본연의 역할이라는 게 그의 신념이다. “선수단장이 시합 전에 선수들 챙긴다고 일일이 만나고 다니면 선수에게 부담이 됩니다. 선수들 컨디션은 코치와 감독이 이미 잘 알고 있죠. 선수단장은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서 경기에 영향을 미칠까 봐 시합 전에 선수들 만나는 것은 되도록 피했어요. 대신 잘하든 못하든, 경기가 끝난 뒤에는 반드시 찾아가 ‘수고했다’는 얘기를 해줬습니다. 제가 선수생활을 해봐서 압니다.”
김이사장은 서울고 스키부 출신이다. 지금은 없지만, 스키부는 1998년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당시에는 체육관 안에 스키부실이 따로 있을 정도였고, 겨울에는 스키훈련, 여름에는 전지훈련을 다녔다. 물론 소속선수가 많지는 않았다. 김이사장이 학교에 다닐 때는 각 학년 마다 1명씩 선수가 있었다. 이렇게 배출된 서울고 출신 스키부 선수들은 꽤 된다. 현재 대한스키지도자연맹에 소속돼있는 인사만해도 10여명이다. 손에 꼽는 학창시절 추억도 스키부와 관련된 내용이다. 그는 “스키부실에서
같은 반 친구들과 도시락을 까먹던 기억이 가장 많이 난다”고했다.
스키와의 인연은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스키를 처음 탄 것은 세 살 때다. 초중고에 걸쳐 선수생활을 했고, 동계전국체전에서 메달도 땄다. 20대 때는 고모부(이승원)가 대한스키협회장을 맡은 인연으로 세계스키연맹회의를 자주 다녔고, 2014년 대한스키협회관리위원장도 역임했다. 현재 그는 대한스키지도자연맹회장을 맡고 있다. 당연히 스키 없는 인생은 논하기 어렵다. 지금도 시간만 나면 스키를 탄다는 그는 “올해는 선수단장 자격으로 올림픽개회식입장을
해야 해서, 혹시 몰라 스키를 한번도 안 탔다”며 웃었다.
스키와의 운명적 연결고리는 바로 평창군 대관령면에 자리 잡고 있는 용평 리조트다. 2000년대 초반 상무로 7년간 일한 용평리조트와의
인연을 소개하려면 그의 부친이자 16회 동문인 김석원 한국스카우트지원재단 이사장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75년12월3일 개장한 용평스키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스키장이다. 쌍용그룹을 한때 재계 6위까지 일궜던 김석원이사장이
‘리프트’가 뭔지도 모르던 그 시절, 용평 스키장을 만들지 않았다면 평창올림픽의 빛나는 성과도 가능하지 않았다는 게 체육계의 평가다.
“우리도 산이 있고 겨울이 있고 눈이 있는데 왜 안되느냐.” 용평 스키장은 김석원 이사장의 이런 집념에서 발아했다. 주변에서 미친 짓이라며 반대했지만 김석원 이사장은 해발 1,400여 미터 발왕산 기슭을 중심으로 지금의 용평 스키장을 조성했다. 그게 바로 스키 대중화의 시작이었다. 당시 4,000명도 안 되는 스키인구는 600만명으로 늘어났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체육계와 강원도 주민들은 올 1월29일 평창올림픽 플라자 앞에 김석원 이사장의 공적을 기념하는 조형물을 세웠다. 김석원 이사장이 평생 그렸던 대관령의 꿈을 상징화한 조형물이다. 이제 막 걸음마를 마친 김이사장이 스키를 타기 시작한 것도 이런 인연에서다. 그는 “용평 리조트의 회전 및 대회전 코스는 수도 없이 타본 곳”이라고 했다.
아버지 김석원 이사장 인생항로는 장남인 김지용 이사장의 인생에 붕어빵처럼 각인되어있다. 아버지가 지은 용평스키장이 지금의 동계올림픽선수단장으로 이끌어 주었고, 공화당 실력자에 쟁쟁한 기업인인 김성곤의원을 아버지로 두고도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고 월남전 파병까지 다녀온 아버지를 따라 1993년 해병719기로 백령도에서 근무했다.
선대 때 일군 학교법인 국민학원을 명문 사학으로 유지하는 것도 이제는 그의 몫이다. “사립학교재단은
어떻게 학교에서 돈을 빼갈까 궁리하지, 학교로 전입금을 내는 곳은 얼마 안 된다. 그 중의 하나가 국민대”라는 게 유진룡 석좌교수의 귀띔이다. 현재 국민대에는 유 전 장관을 비롯해 방하남(27회) 전 고용노동부장관, 최수현(27회) 전 금융감독원장, 한기봉(27) 인터넷한국일보대표이사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동문들이 자리잡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번 평창올림픽선수단장을 지내면서 김이사장이 느낀 소회와 동문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물었다. “우리 선수단은 올림픽 기간 메달획득 여부와 관계없이 아름다운 투혼을 펼쳐 국민의 가슴 속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올림픽의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안방에서 선수단에게 격려의 목소리를 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코리아 파이팅!”
글_ 김영화(44회) 객원편집위원
사진제공 김지용(44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