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역에서 승차한 느림보 리무진이 수원 톨게이트를 통과하자 이내 강 대장님께서 따끈한 원두커피와
함께 난생 처음 먹어 보는 노란색 스폰지 떡을 나누어 주신다.
옥수수와 호박을 콩과 함께 버무린 듯 한데 어찌나 맛있던지 두어 입을 베어 무니 큰떡이 금새 반 이하로
줄어 들 무렵 갑작스레 예폔네와의 악몽이 떠 올라 떡에서 잠시 입을 떼곤 차창가로 눈을 돌린다.
집에서 쥔종일 서방 잡아 묵을 궁리만 하던 예폔네와 어쩌다 자동차 여행을 가는 경우가 있는데 울 예폔네는
들르지 않고 건너 뛰는 휴계소란 존재하지 않는다. 먹신의 혼을 담아
그 지역 특산음식 한가지를 기여코 드시고서야 길을 떠나는데 소고기 국밥을 먹은 걸로 보아 아마도 안성 인근
어느 휴계소 였었던 가 보다. 국밥 한그릇 후딱 해 치우고
나오시던 예폔네가 가판대에서 파는 스폰지 술떡을 한아름 사오셔서 오랑 우탄 같은 발을 조수석 등받이에
터억 걸치곤 정신없이 먹더니만 그너무 똥배도 한계란게 있기는 있나 보다. 좀 전 꺼증
쉼 없이 콧구녕을 들락 거리며 비공 청소를 하던 그 손꾸락으로 술떡을 돌돌 말더니만 아 하고 입을 벌리란다.
우웩.
장령산 입구에서 긴 여정을 계획하신 일진을 내려 드리고 한참을 달리다 이어 대성산을 들머리로 하는 이진을
뿌리곤, 남은 우리 삼진 부시래기(?)들은 영국사 주차장에 당도하여 잠시 산행 준비를 한다.
천태산 영국사는 신라 때 원각국사가 창건을 하고 고려 때 문종의 넷째 아드님이신 대각국사 의천이 크게 중창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원래
중국 천태산에서 수나라 때 지자대사가 개창한 불교의 한 종파가 천태종인데 우리나라엔 원래 화엄종 승려였던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크게 융성시켰다.
영국사를 중창한 의천 그리고 산이름이 천태산으로 바뀐 그 상관 관계가 엿 보인다.
천태종은 불교를 배척한 이씨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거의 그 존재가 없어 졌다가 해방 되던 해에 단양
소백산에서 구인사를 창건하셨던 상월 원각 대조사께서 천태종을 중창하여 현재는 대한민국에서 조계종
태고종에 이어 교세가 세번째로 큰 종파다. 우리 분당에도
불곡산 아래에 구인사 말사인 대광사란 천태종 사찰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교세인 조계종이란 이름도 중국 선불교의 육조 혜능대사가 이 조계산 아래에서 오랫동안
주석을 하였기 때문에 그리 명명되었다고 한다.
영국사 법당 참배는 하산길로 미루고 우측으로 접어 드는 등산로를 들어 서니 군대 유격훈련장을 방불케 하는
직벽바위들이 살벌한 기세로 우리들을 내려다 보고 있다.
왕년에 군바리 훈련 받으면서 유격훈련 받았던 얘기 백번 꺼내 봐야 무용지물이다. 우리
느림보의 모델학교 여학생들이 직벽바위를 줄을 잡고 올라 가는 잠시 틈을 보아, 잽싸게 우회로로 체면 불구하고
꼬랑지 바짝 내리곤 그림자 처럼 스며 든다.
지난 태백산 산행기의 이바구를 잠시 이어서 마무리를 하고 넘어 가죠 무어.
아시다 싶이 천태산 인근의 옥천은 육 영수 여사님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1974년
장충체육관에서 있는 8.15 경축행사장에서 문 세광의 흉탄에 운명을 달리 하신 육 여사님의 현충원 내의
장지를 평소 친분이 있던 청오 지 창룡이란 지관의 손을 빌려서 쓰게 되었는데 후일 경쟁관계에 있던,
터라는 소설을 써서 풍수지리에 약간의 바람을 일으켰던 육관 손 석우란 지관이 육 여사님의 묫자리는
악터 중의 악터라고 하면서 시신이 썩지도 않았고 대가 끊어 질 정도의 흉지란 것이다.
이 무렵 내고향 안동에 들렀더니 선친께서 하시는 말씀이 며칠 전에 육관 도사란 사람이 안동땅에 와서 강연을
한다고 하여 여러 어르신들이 참석을 하였는데 결론은 완전 엉터리란 것이다. 이유를 물은 즉
당시 건강이 좋이 않았던 중국의 등소평의 장지를 본인이 점지해 주고 거액의 선불을 이미 받았고 막상
등소평이가 사망을 하게 되면 최종적으로 향을 잡는 등 장례절차에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전용
비행기가 중국 공항에 상시 대기 상태에 있다고 한다. 물론 육관 도사에게
지불할 거액의 잔금과 함께 ... 중국 쨩꼴라 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구렁이 알 같은 돈을 지불하는 것도
모잘라서 전용 비행기 꺼증 준비해 두냐는 것이 선친의 말씀이셨는데 육 여사님의 외동 아드님이신
박 지만 회장은 대가 끊어 지는 것이 아니라 쌍동이 자식 꺼증 보았고 누님인 박 근혜 전 대통령은 어찌 되었건
아버지에 이어 대통령에 당선이 된다.
박 정희 대통령 내외분이 무덤을 잘 써서 그 따님이 대통령이 된 것만 생각하면 그 무덤은 길지가 틀림없고
결혼도 하지 못한 노처녀가 청와대에서 쫒겨 나와 가막소에서 몸을 닦고 있는 신세만 생각한다면 흉지가
명백하다. 과연 조상의 묫자리로 인해 자손들이 발복하는
동기감응론이란 것이 실재로 존재하는 것일까?
묫자리 문제하면 제일 먼저 대두되는 것이 아버지의 산소를 잘 이장하여 2대의 황제를 배출한 대원군이
대표적이다.
정 만인이란 지관이 지목한 2대 천자지지는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가야산 내의 가야사 인지라 이 사찰을
허물고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이장케 되는데 아드님인 고종과 이어 순종까지 2대가 황제가 된 것만을 따지면
길지가 틀림없지만 이씨왕조는 말할 것도 없이 나라를 송두리채 왜놈들 손에 빼앗겨 버린 그 일은 대체
무슨 말로 부연 설명이 가능하냐 이거다. 고종의 아들
순종은 고자라 자식이 당연 없었고 덕혜옹주는 일본으로 끌려 가 대마도주의 아들과 결혼을 했지만
정신분열증을 심하게 앓다 비참한 생을 마감케 되고 아관파천시 러시아 공사관에서 엄 상궁을 건드려 낳은
마지막 황세자 영친왕은 어릴 적 부터 이등박문의 손에 의해 철저한 일본인으로 조련을 받아 일본 왕실의
여인네인 이 방자 여사와 결혼하여 일본 육군 중장 군복을 자랑스레(?) 입고 다니는 신세가 된다.
일본 낭인들의 손에 무참하게 도륙된 여걸 민비의 국가적인 수모는 만고에 그 예가 없는 경우이다.
대원군의 사저 운현궁을 들렀던 원조 백 운학이가 마당에서 팽이를 치고 있던 이 명복(고종 황제의 아명)을
보자 넙죽 엎드리면서 상감마마 절을 받으십시요 라고 했다고 한다. 백 운학의 이름은 워낙
유명해서 짝퉁 백 운학이가 전국에 늘상 2~30 명은 설쳐 대고 있었다고 하는데 김 종필씨가 중앙일보에 연재한
소이부답이란 회고록에 보면 5.16 혁명을 앞 두고 육사 8기 동기생인 석 정선씨와 함께 종로에 있는 여관엘
들러 백 운학을 만나게 되었는데 대뜸 혁명이 성공한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그리고 후일 혁명이
성공하고 박 정희 대통령과 함께 만나는 시간을 가졌는데 약 20년은 무난하니 소신껏 잘 하시라고 하길래
박 대통령이 자리를 뜨자 김 종필씨가 20년 후는 어떻게 되냐고 물었더니 그 최후가 아주 비참하다고 하더래나
그리고 또 어떤 백 운학이가 등장을 한다.
세무 공무원을 하던 한보그룹 정 태수 회장을 본 백 운학이 직장을 때려 치우고 사업을 하면 떼돈을 번다는
것이다. 얼마 뒤에 혹시나 해서
백 운학이를 또 찾아 가니 정 태수 회장을 대뜸 알아 보곤 왜 사업을 벌리지 않고 멀 하고 있냐는 것이다.
강원도에서 탄광에 손을 대자 말자 노다지가 쏟아 졌다고 한다. 이후 대치동 은마 아파트의 신화를 거치지만
말년에 철강에 손을 대다 알거지가 되면서 늘그막에 가막소 신세가 된다.
정상석에서의 사진 촬영이 끝난 느림보 모델 학생들과 안부로 내려 와서 점심상을 펼쳤는데 어느 선배 산악인의
말씀이 맞긴 틀림없이 맞는 말이다. 철암님 푸르나님
영애님 타쟌님 그리고 야생화님과 함께 점심을 먹었는데... 미모가 뛰어난 분의 등산가방엔 푸짐한 먹거리만
항거석 들어 있고 얼굴이나 몸매가 쳐지는 분들의 등산가방엔 구찌베누나 화운데이션 여벌 모자 고글 등등만
잔뜩 들었단 것이다. 높은
산상에서 회덮밥과 함께 쐐주 한꼬뿌 해 보신 분이 과연 몇 분이나 있겠습니껴? 그것도 미인들이 손수 따루어
주시는 술을...
영애님 음식은 몇년 전 설악산 화암사 뒷산에서 보온병에 넣어 오신 불고기를 뱃때지 터지게 얻어 먹었고
야생화님표 멸치뽁음은 어느 해 여름 지리산 계곡산행에서 얻어 먹어 보았는데 그때는 고추장을 약간 넣은
중멸치 였었고 요번에 간장으로만 조리한 잔멸치라 멸치덮밥을 하여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그리고
영애님이 오늘해 오신 닭요리는 듣도 보도 못한 천하의 명품이였다.
그래도 제법은 가파른 하산길을 힘겹게 내려 오니 영국사 법당과 천년 세월의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나이도 있는
은행나무의 잎사귀들이 너무도 푸르고 싱싱하다. 놀랄 지경이다.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 또한 유명한데 용문사에서 들은 얘기다.
천년 세월의 은행나무 비결은 첫째 가까이 수량이 풍부한 계곡물이 흘러야 하고 둘째론 지형적으로 벼락이
떨어 지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고 세번째론 영양분을 항시 공급할 푸세식 화장실인 해우소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인데 영국사의 은행나무도 양평 용문사의 은행처럼 그 구비조건이 절묘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참고로
해우소란 말은 양상 통도사의 경봉 스님이 처음으로 하신 말씀인데 남자들만 들락거리는 소변기 화장실은
휴급소라 합니다.
벼락 하니깐 갑자기 몸이 후덜덜 떨립니다. 나처럼 절멋던 시절
숱하게 많은 여성들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했던 놈들이 제일 무서워 하는 것이 마른 하늘에 떨어 지는 날벼락
입니다. 안즉 꺼증은
운이 좋아서 벼락을 대가리에 정통으로 맞은 적은 없지만 전 벼락이 떨어 지고 나서 하늘에서 어떤 영감님이
목에 가래가 걸린 듯한 음성으로 으르렁 거리다 싶이 하면서 내 뱉는 말을 여러번이나 들었습니다.
에잇 뜨발 오늘따라 졸라 안 맞넹. 잘 맞추면 제 대가리가 틀림없어 보입니더.
다음 주 화양구곡과 도명산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원래 의성 육쪽마늘은 6월 하순이나 7월 초순에 출하가 되니 몇해 전 느림보와 함께 간 도명산도 아마 지금쯤
인가 봅니다. 내가 싸서 간 의성 육쪽마늘을 조선된장에 원 없이 찍어 드시던 꽃님 대장님 생각이 불현듯
나네요. 그렇게 마니 묵고도 배는 터지지는 않고 약간 쓰리기만 하데나 ... 놀라울 일입니더.
분당 탄천변의 방외지사 돌삐 드립니다.
첫댓글 멋진 글,ㅎㄷㄷ 엄지 척~~
돌삐님과 첫 산행이 2010년 사량도니까
햇수로 치자면 벌써 7년 세월입니다.
산행 열심히 하셨으면 지금쯤 느림보를 책임지실 대장님이 되셨으련만..
가뭄에 콩나듯 하시니
같은 고향 꽃님은 대장 무전기 차셨건만.돌삐님은 ..ㅎㅋㅎㅋ
아무렴 어떻습니까..
한달지나 만나도 석달 지나 만나도
어제 만난 사람들처럼 이야기가 통하고 편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산에 가면 산 이야기하고
동네서 만나면 세상이야기하고..
그렇게 편하게 지내면 되는거지요.
걸판진 이야기 풀어내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번 글은 스님 얘기가 많아서인지 49금이 별로 없네요 ㅋ
주말에 쐬주 한잔 사겠습니다.ㅎ
이처럼 걸쭉한 예기들,진국입니다. 질퍽하게 글들
쓰는 비결좀 알려주시지요?
근데 안동삼걸중 한사람은 칩거중이군요?
기억력도 엄청 좋으십니다.
도명산 2010에 갔더라구요.
마늘에 고추장 고향맛 향수맛 느낌이었는데~~~속쓰려 비몽사몽~
밤에 응급실~~~갈뻔.ㅋㅋ
육쪽마늘 드시고 힘좋우신 돌삐님
새해부턴 후미대장 어떠하신지요?
안동삼걸 !
@산과바다 오잉?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7.06.24 1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