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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파이카치 익산 남성 한가족 원문보기 글쓴이: 안종수
▲ 김제 만경초등학교는 1909년 사립만경보통국민학교로 개교했다. 1911년 만경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이 인가됐고, 같은 해 제1회 졸업생 4명을 배출했다. 사진은 1970년 당시 체육실기대회. |
△학교가 걸어온 길
김제 만경초등학교(교장 이종민)는 1909년 사립만경보통국민학교로 개교했다.
1911년 만경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이 인가됐고, 같은 해 제1회 졸업생 4명을 배출했다.
이후 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1936년 장흥공립간이학교를 새로 개설했고, 1941년 만경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1996년 일본제국주의 잔재 청산을 위한 정부 정책에 따라 만경초등학교로 교명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 벌판은 '징게 맹갱 외에 밋돌(김제 만경 넓은 들)'이라고 불리는 김제 만경평야."(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
소설 '아리랑'의 주무대이기도 한 만경평야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평야에서 수확한 작물은 당시 조선의 젖줄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만경지역은 일제의 수탈의 손길이 가장 많이 미친 곳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만큼 일제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도 거셌다.
1919년 4월 4일 만경장날을 맞이해 당시 만경공립보통학교 교사 임창무는 3·4학년 학생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학생 100여명이 교사들의 인도 아래 숨겨둔 태극기를 꺼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의 여파로 만경공보는 1921년 단 한 명의 졸업생도 배출하지 못했다. 다수의 학생들이 일본경찰에 붙잡혔기 때문이다.
이처럼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지역민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것이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탱해온 만경초의 원동력이다.
한편 올해 제102회 졸업식을 연 만경초를 거쳐간 학생은 현재까지 모두 1만1579명이다.
△학교를 빛낸 인물
만경초는 김제지역 정·관계 인사의 산실이다.
김윤기(4회) 전 건설부장관은 일본 와세다대 이공학부 건축학과를 나온 뒤, 고등관기사로 조선철도국에서 17년간 근무하면서 철도건축 전반에 관한 계획과 설계의 책임을 맡았다.
광복 뒤 운수부 기술서장, 교통부의 자재국장·시설국장·철도건설국장을 거쳐 국립항공대학장·교통부 차관을 지냈으며, 6·25 뒤 철도복구와 산업선 건설에 크게 이바지했다.
1960년대에 교통부장관·건설부장관, 그리고 정무담당·경제담당으로 두 번 무임소장관을 지냈다.
1966년 9월에는 과학기술분야의 학회와 협회를 망라해 발족한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의 초대회장으로 선임됐다.
한양대에서 명예공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자유훈장·금탑산업훈장·서울특별시문화상을 수상했다.
장경순(22회) 전 국회부의장은 만경읍 화포리 출신으로 배재중학교, 일본 동양대학 척식과를 졸업했다.
이후 학도병으로 차출됐고 상해에서 민족해방을 맞자, 광복군에 투신했다.
귀국 후에는 잠시 교직에 몸담았고, 이후 군에 투신 6·25를 맞아 혁혁한 전공을 세워 장성 반열에 올랐다.
이후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 쿠데타에 가담해 군사정부의 농림부장관을 지냈다. 민정 이양 후에는 공화당에 입당, 김제를 지역구로 제6대부터 10대까지 5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3년부터 1971년까지는 최장 기간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1980년 전두환, 노태우 등 당시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신군부가 들어서자 정계를 은퇴했다.
상훈은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3회), 화랑무공훈장(3회), 보국훈장통일장, 청조근정훈장, 독일대십자훈장, 바티간대훈장 등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농업협동조합론' 등이 있다.
김택하(34회) 전 국회의원은 남성고, 중앙대를 졸업한 후 제9대 총선 때 정읍·김제지역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는 고려목재주식회사 대표이사, 대한제재협회 부회장, 한국핸드볼협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지냈다.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이자 유불도 3교에 능통한 석학으로 꼽히는 탄허(13회) 스님은 당시 최고 선승 한암 스님과 3년간 학문에 대한 서신 문답 끝에 22세 때 그의 제자가 됐다.
탄허는 스승의 법통을 계승했고, 이를 불교학 연구와 불교의 중흥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또한 상원사의 대화재로 소실된 한암의 연구와 관련 자료도 복원했다. 화엄경의 완역인 '신화엄경합론'은 그의 여러 업적 중 가장 높이 평가된다.
이와 함께 김용호(52회) 한민대 학과장, 원행(54회) 금산사 주지스님, 최연호(57회) 주 벤쿠버 총영사 등이 학교를 빛냈다.
△도약을 위한 노력
▲ 1939년 만경초 제28회 졸업사진(왼쪽). 만경초는 전통예절교육 등 인성함양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
만경초는'효'사상을 중심에 둔 인성교육을 표방하고 있다.
이에 인근 만경향교 및 학성강학와 함께 선비문화체험·전통예절교육 등 다양한 인성함양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효 실천 활동으로 사례발표대회와 글짓기대회, 실천기록장 작성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삼성꿈장학재단의 교육복지중점사업에 선정돼 '치유와 나눔'을 주제로 한 락밴드, 합창부, 미술 치료, 상담·연극수업 등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합창단은 지평선아카데미 식전행사에 참여해 학생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줬다.
이와 함께 상대적으로 교육혜택이 적은 지역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맞춤형 지도를 통한 기초학력 신장 프로그램, 원어민 강사가 진행하는 영어수업을 연중 실시하고 있다.
이 같은 활동에 힘입어 만경초는 2012년 JB교육과정우수학교로 선정돼 교육감상을 받았다.
같은 해에는 제2기 혁신학교로 지정되면서, 지역 특색에 맞는 특성화프로그램 개발과 민주적인 학교문화 조성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이종민 교장은 "우리 학생 하나하나는 각기 다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소중한 존재"라며 "학생들의 재능을 발현시켜 미래 사회를 주도하고 선도할 수 있는 글로벌 인재로 키우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