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애굽기 3장
출애굽기 3:1-12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1절)라는 말씀은 애굽에서 도망한 모세의 형편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과거에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했던 모든 열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이제는 장인 이드로에게 얹혀 살면서 가족이나 돌보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상태가 되었다. 할 수 있는 재주라곤 양을 치는 것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의 궁에서 배웠던 학식은 이제 더 이상 쓸모없는 것으로 변했다.
사도행전 7:30에서는 “40년이 차매”라고 언급하고 있다. 모세의 나이가 80세라는 얘기다.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는 생각이 포기될 시점이 된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부질없는 세월을 소비해 가면서까지 자신들의 부족을 발견해야 했던 것과 유사하다. 이런 형편에 있는 모세를 찾아오신 분이 하나님이셨다.
여기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모세가 힘을 쓸만한 때에, 재주가 있고 뭔가 할 수 있을만한 때에 부르셔서 일하도록 하면 될텐데 왜 나약한 모습일 때 아무 쓸모 없을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부르시는가? 이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고 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은, 모세가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도록 하시는 데에 있었다.
즉 모세가 안된다고 할 때에 하나님은 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힘을 빼놓고 일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일하심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과 40년간 분리시켜 버려진 상태로 놓으셨고 그런 자에게 찾아오시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쉽게 판단할 수 있는가?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과 배치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늘 하나님이 나에게 많은 능력을 주셔야 주님을 위해서 크게 헌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큰 일을 하고자 많은 것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죄인의 욕심일 뿐이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죽이는 자를 들어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시는 것이다.
호렙 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떨기나무에 붙은 불의 모습이었다(2절). 그리고 모세에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고 하신다. 세상과 하나님의 세계와는 단절되어 있었다. 죄악 때문이었다. 그런데 거룩한 하나님께서 죄악된 세상을 찾아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속된 자리가 거룩한 자리로 바뀌어진 것이다. 모세는 신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세계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선악체계의 세상에서 거룩의 세계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거기에는 오직 하나님의 뜻만 통용되는 곳이다.
이런 점에서 신을 벗는다는 것은 종의 자세를 말한다. 이제 모세는 오직 주인에게 속한 자로 주인의 일을 하는 존재이지 자신의 일을 하는 자가 아니다. 거룩의 세계에서는 인간적인 방식이나 자신의 힘은 결코 개입될 수 없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원하시는 것은 자기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삶의 방식에 합류하는 것이다. 자신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있어서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헌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교인들의 기도와 정성, 힘, 열광, 용기 이런 것들이 없으면 교회 일이 안되는 것처럼 가르친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일년에 몇 차례씩 부흥회를 열어주는 서어비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다 교인들을 가끔씩 기도원으로 데리고가서 배터리 충전을 하듯이 에너지를 충전해 준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다. 그러나 그런 일은 고무줄을 당겼다가 놓는 것과 같은 일이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반복되는 허무한 일이 될 뿐이다.
참으로 무서운 것은, 교인들이 그런 종교생활에 자신을 몰아넣고 다른 사람보다는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인간의 열의와 힘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고 여기는 교회는 분명 가짜교회이다. 교회일을 많이 한다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됨을 알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를 보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6절)으로 계시하신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 이삭과도 약속하셨던 하나님, 야곱과도 약속하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자신의 약속을 분명히 지키신다는 선언이다. 지금 모세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즉 이스라엘의 구원이란 이미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것이었다. “···보고···듣고···알고”(7절)라는 표현은 이미 하나님의 관심이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있었기 때문에 나타내실 수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당함을 보고,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 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8절)으로 들어가게 할 것을 말씀하셨다.
창세기 11:7의 바벨탑 사건과 18:21의 소돔과 고모라 성 사건에서도 이러한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심판을 행사하심과 동시에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약속 성취에 대한 의지의 표명이다. 하나님의 약속 성취의 궁극적인 면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당연히 심판과 구원의 양면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요 3:16-18).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내려 오신다는 것이 여기서는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는 것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하셨다(10절). 그렇다면 모세의 사역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대로 선포만 하면 되는 사역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귀환되는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다.
그러나 모세는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11절)라고 대꾸하고 있다. 모세는 아직도 자기가 하는 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12절)고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모세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증거를 주셨다.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12절). 이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다.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세상적으로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증거로 제시하셨다. 그 미래의 일을 현재로 말씀하시면서 증거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이다. 즉 모세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다가 도리어 쫓겨 나온 이 자리를, 하나님은 자신의 일방적인 힘으로 이스라엘을 건져내어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로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3:13-22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어쨌든 빠져보려고 변명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그런 의사를 전혀 반영하지 않으신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불신할 것이 분명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할 근거로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다. 그 때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14절)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15절)로 나타내셨다.
여기 “스스로 있는 자”란,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바로 그런 존재가 될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한 마디로 “나는 나다!”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따라 일하시는 분이며, 자신의 뜻에 따라 자신을 나타내는 분이시다. 즉 여호와 하나님 그분은 자신이 약속한 것이라면 자신의 이름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이루어 내는 속성을 지닌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고통을 해소하는 차원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약속의 성취에 대한 차원에서 주어지는 구원이다. 하나님은 자기 약속에 충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약속의 실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란,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이루시는 구원이다(엡 1:5,9,11). 하나님은 철저히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시 23:3).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구원의 요소가 될 수 없다. 결국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맞는 것만 남기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궁극적인 영광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엡 1:6,12,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복음과 맞지 않는 인간의 것을 자꾸 덧붙이고 있다. 인간의 방법론을 추가하고, 인간의 경험을 개입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복음이란 순수하게 하나님 편에서 주어진 것이기에 인간의 것을 제거하는 과정을 밟아가지 않는다면 주님과 상관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은 앞으로 행하여질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계시되어지고, 그렇게 계시되어진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될 하나님의 표가 된다(15절). 즉 앞으로 알게 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구원의 하나님으로 알려지고 불려지게 된다는 것이다.
16-22절에서 하나님은 앞으로 할 일을 모세에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서 비쳐지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출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 것은 아니었다. “애굽인의 손”(8절)에서 건져내는 것은 “하나님의 손”(20절)을 들어 칠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애굽인의 손보다 하나님의 손이 강하다고 하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9절). 그것이 여호와의 전쟁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구원은 모세의 말 한 마디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단순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이기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애굽을 여러 가지 이적으로 치시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이루어지는 구원으로 나타내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구원의 자랑거리가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나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행위라는 사실이다.
결국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는 애굽 사람들로부터 많은 은 금 패물을 얻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전쟁의 탈취물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는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게 하시는 은혜였다.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십자가 싸움에서의 탈취물이다. 다시 말해서 그분의 포로된 자이다. 나는 그분께 포로된 자로 살아가고 있는가?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