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를 맡은 노종
(창 24: 1-9)
주요내용 - 성령론
설교형태 - 영적비유설교
자료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주소 - http://cafe.daum.net/agaser
(요약)
아브라함의 노종이 하란으로 이삭의 신부감을 구하려 갔듯 성령께서는 택한 자를 예수님의 신부 삼으려고 역사하고 계신다. 아브라함의 노종이 모든 것을 맡은 종이듯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적용해 주시는 분이시다. 이 종이 오직 혈족을 찾아 신부 삼듯 우리를 하늘에 속한 중생자로 만들어 주의 신부 삼으신다. 미지의 땅에 신부 데려오기 어렵듯 십자가의 길이란 쉽지 않다. 혹시 데려오지 못해도 노종에게 책임이 없듯 강제하시는 성령이 아니시니 그 감동을 소멸하지 말고 순종하라.
설교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신부감을 구하려 하란의 나홀의 집에 노종을 보내는 내용입니다. 이 때가 이삭의 나이 40세(창25:20)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나이는 140세가 되는 셈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이라는 첫 세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새로운 세대로 구속사의 무대가 옮겨지는 장면입니다.
본문이 영적 비유관점에서도 귀한 뜻이 있어요. 본문은 신부를 택하여 그리스도께 인도해 오시는 성령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얼마나 신기합니까? 구체적으로 여기 본문의 아브라함이 성부라면 이삭은 성자이고 나이 많은 종 엘리에셀은 성령의 예표입니다. 그리고 데려오는 처녀 리브가는 바로 우리 택함 받은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참고적으로 비유는 어디까지나 어떤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요 지나친 확대는 금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종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노종의 신분과 행적을 통해서 성령론을 설명하는 것 뿐입니다.
그럼, 본문이 말씀하는 성령은 무엇일까요?
1. 아버지와 아들의 모든 것을 가지신 성령의 모습입니다.
2절에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이라 했습니다.
여기 “늙은”이란 히브리어로 '자켄'으로 ‘장로’라는 뜻인데 집안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자에 대한 존칭입니다. 우리말에 군수가 젊어도 존경하는 의미에서 군수영감이라고 함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늙은이란 능멸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로 이 이 노종이 아브라함의 살림을 맡았습니다. 아브라함 얼마나 부자입니까? 전쟁터에 나갈 종들만도 수백 명이니 가속이 수천 명 되는 큰살림입니다. 이 살림의 수입과 지출이 모두 이 종의 관할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성령님께서도 꼭 그와 같으세요.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다 주실 수 있고 또 예수님의 모든 것을 다 주실 수 있어요. 그리고 이 성령이 오셔야 천국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으시면 성령을 받으세요. 아버지의 사랑이 부어집니다(롬5:5). 그리고 성령이 임하실 때 천국의 복락이 임하게 됩니다(롬14:17).
그리고 예수님의 공로를 들음에서 끝나지 않고 실재로 입으려면 역시 성령을 받으세요. 요16:13-15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면 죄가 사해집니다. 심령이 부활합니다. 하늘의 영권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합니다. 성령님이 아니고는 그리스도의 그 귀한 공로가 내게 적용되지 않아요.
그러므로 성령이 오시면 아버지가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14:20에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며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충만이 곧 예수 충만이요 아버지 충만입니다.
성령님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성령을 무시하면 중생도 성화도 교회도 영적교제도 복음전도도 승리도 인생의 행복도 그 무엇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성령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 갖고 계십니까? 성령의 충만과 권능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 우리는 아버지와 예수님의 모든 것으로 충만하게 될 수 있습니다(엡1:23, 엡3:19,엡4:10).
2. 성령님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여러 일 중에 중생의 사역입니다.
3-4절에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혈족을 찾아 결혼하려는 것은 혈통의 순수성 보장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타락한 가나안인과 통교를 방지함으로서 신앙의 정통성을 보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그는 하란에 머문 아브라함의 혈족들을 혼인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방인과 혼인금지는 그 때부터 시작하여 율법에 명문화됩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신랑 되신 주님께 데려갈 대상은 거듭난 사람입니다. 우리 부패한 죄악이 아니에요. 여기 가나안 족속은 인간의 부패한 죄의 속성입니다. 그러나 내 고향 내 족속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거듭난 영혼의 상징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우리를 불러 그리스도의 신부 삼으시러 오실 때 우리의 부패한 속성을 취하시지 않고 우리를 자기와 같은 새로운 혈통 만들어 찾으러 오십니다.
그래서 요3:5-6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 하셨습니다. 천국만 못갑니까? 거듭나지 않으면 예수님의 신부도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과 맞는 하늘에 속한 새 혈통이 아니고는 절대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대상은 결코 타협될 수 없었던 것처럼 거듭나지 않고는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3. 성령께서는 인도의 사역을 맡으셨습니다.
5절에 “종이 가로되 여자가 나를 좇아 이 땅으로 오고자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의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했습니다.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아무리 가서 아브라함의 종이라고 소개해도 혹시 거짓말일지도 모르는데 알지 못한 사람을 따라 일가친척을 버리고 800km가 되는 험한 길을 그리고 하란보다 문화가 낙후된 곳에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중매도 해보았지만 도시 사람들이 촌사람 인정합니까? 도시 쪽방에서 라면도 못 먹고 살아도 잘 사는 촌사람 무시합니다. 연애해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가능하지만 그나마 얼굴조차 모르지 않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따라가겠어요? 만약 오네시모와 같이 도망친 종들이 있다면 여지없이 속는 것입니다. 이럴지도 모르는 이 길을 누가 따라오려고 하겠습니까?
이처럼 죄인이 예수 앞으로 나가는 것 쉬운 일이 아니지요? 처음부터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것도 아니고 전혀 모르는 분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누군데 세상의 쾌락 다 버리고 주님만 사랑하는 좁고 험한 십자가의 길을 택하겠습니까? 불신자들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이 누군지는 고사하고 과연 계시기라도 한 것인지 모호할 뿐입니다. 아직도 신랑 예수님 만나러 간다 해도 감격도 없고 기대도 없고 무덤덤하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어려운 사역을 맡으셨습니다.
4.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의 위치에서 우리를 만나지 달리 만나시지 않습니다.
5-7절에 “종이 가로되 여자가 나를 좇아 이 땅으로 오고자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의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이처럼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자기에게 주신다는 약속을 믿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아들을 떠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 그 복음 안에 찾아올 때 가능한 것이지 밖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밖에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교회출석 선행 찬송 십일조 그 무엇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이것들은 주님께로 올 수 있도록 돕거나 하나님 백성들의 경배의 삶의 부분일 뿐 그것 자체가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임과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와 합하여 나를 위해 살아나심을 믿어야 합니다.
5. 끝까지 성령의 감동을 거부하면 그것은 내 책임이지 하나님 책임은 아닙니다.
8절에 “만일 여자가 너를 좇아오고자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혹시 거기서 이삭의 아내를 구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삭만 그 땅으로 데리고 가지 않는다면 된다는 아브라함의 말입니다. 아내 구하는 일에 실패해도 이삭만은 거리 데려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용기를 얻은 종은 비로소 아브라함의 명령에 복종하게 됩니다.
왜 이런 복잡한 대화가 필요합니까? 사람들이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거부하여 주님을 쉽게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 따라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몇 년이 걸린 사람도 있고 더 완악한 사람은 몇 십 년이 걸리기도 하고 아주 거부해 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순종했다라도 멀찍이 따라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성령님은 전능하시지만 그리고 최선을 다하시지만 강제성은 없다는 교훈입니다. 순종은 성도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은 결코 강제의 영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택한 백성이 불응할 때는 다른 강제의 방법도 쓰십니다. 그러나 오늘 취급하는 성령론에서 성령의 사역을 논할 때 감동의 영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겨우 구원 받은 것에 머물고 있다면 이제는 주님의 신부로서 부족함이 없는 자리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회개하여 예수를 믿고 주님만 사랑하십시오. 더 이상 세상에 잡혀 머뭇거리지 말고 주님만을 사랑하는 주님의 참 신부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