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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보릿길(박 정 애)
아버지!
아버지께서 이 좋은 세상 더 살고 싶다는 말씀을 남기고 가신지도 3년 후면 50년 이 되어옵니다.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뀐 세상은 아버지께서 상상도 못 하실 만큼 물질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여유롭고 풍요로움을 누리면서 정말 잘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떠나실때 보다 22년이나 더 사는 딸이 아버지께 글을 올려봅니다. 스무 살, 요즈음 같으면 부모의 보호 아래 살아야 할 겨우 고등학생 나이에 결혼해 4대가 한집안에 살아야만 했던 몰락한 집안에 가장으로 살아오신 세월, 그 짐이 너무 무거워서 일찍 가셨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지금도 가슴이 멥니다.
경북 청도 신지동 여느 시골과는 다르게 우리 고향에는 아버지 연배이셨던 집안 친척 분들이 그당시 소학교를 졸업하고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신 분들이 대소 가내에 여러 명이 되고 대학을 나오신 분도 세분이나 되었습니다. 그시대의 동경제대를 나와 경제학박사도 배출한 박 씨 집성촌이 나의 고향이었습니다. 아버지, 삼촌, 고모, 공부시키기 위하여 나의 증조부님을 비롯해 대구에 가족을 이끌고 오셨던 할아버지께서 불과 몇 년 만에 사업으로 살림은 거덜 났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카톨릭 재단인 지금 대구효성 소학교를 졸업하시고 공부를 잘 했지만 진학은 엄두도 못냈고 아버지 누나인 두 분의 고모가 홍진으로 돌아가신 후라 부모님의 아픈 상처를 안고 고향에 돌아왔을 땐 정말 알거지 신세였다는 친정댁 가족사를 할머님 어머님의 푸념이 저의 가슴속으로도 기억이 되어왔습니다. 홍진으로 두 분의 고모가 가시고 삼촌이 6.25 때 전사하셨어 어느 순간에 무매독자가 되신 아버지셨습니다. 부모님의 아픔과 가난을 함께 감당하셔야 했던 아버지의 두 어깨가 너무 힘들었음에도 자식들에게 내색하지 않으시려고 근검절약으로 살아 오심을 보고 자랐습니다. 너무 일찍 철든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좋으신 아버지로만 기억했던 그 모습을 가시는 날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아버지의 희생과 사랑을 잊지 못합니다.
경주 양동인 진외가와(여강이씨) 칠곡 웃갓을 외가로(벽진이씨) 둔 친정댁 혼사는 할머니 어머니 두 분 다 명문가 따님답게 어려운 가정을 잘 이끌어 오심은 늘 나의 교훈이 되었습니다. 항상 할머니께서 어머니를 우리 보배라고 칭찬하시던 모습이 시어머니가 되어보니 더욱 사랑을 베풀어주신 할머님과 그 사랑을 한없이 감사하게 받들어주신 어머님의 고부간의 관계가 존경스럽게 느껴집니다
가문으로 이어진 혼사, 부잣집딸과 갑자기 기울어진 가세를 모르고 한 중매결혼, 증조부께서는 개교 100년이 된 고향초등학교 초대교감 선생님이 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15살에 결혼 후 입학한 1회 졸업생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어릴때 할아버지께선 일본 소설을 읽어실 정도로 그 당시로는 지식인이라 누구네집 자손만으로 혼사를 정했다고 합니다. 외할아버지의 순간 실수가 우리집안을 일으킨 초석이되신 어머니 셨기에 사랑받는 며느리 사랑받는 아내가 되었고 심성이 착하신 어머니는 한 살림을 물러 받았지만 시부모님과 남편께 순종하시면서 사셨어 할머니께서 며느리를 보배로 여겨셨나 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음씨가 착한 아버지께서 맘고생이 얼마나 컸겠나 짐작이 갑니다. 토호의 아들이며 대구고보를 나와 젊은 나이에 양조장 사장인 외삼촌, 중앙청, 도청에 다니는 이모부들, 웃갓 고향집에는 추수철이 되면 소작자들이 달구지에 지은 농산물을 바리바리 싣고 왔다고 합니다. 엄마가 결혼하실 당시는 봉산동에서 꽤 큰집에 살면서 그 당시로 신식문화 생활을 누리면서 살았다고 하셨습니다.
한편 시골에서 외할아버지께 물려 받은 재산으로 가족의 생계를 이끌 수 있었던 아버지의 자존심은 알뜰과 성실함이 외할아버지께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시면서 열심히 사신 분이라고 기억됩니다. 농사일은 못 배웠으나 독학으로 한문이며 산술 능력이 있으시기에 면에서 군에서 보를 막는 공사, 저수지, 사방사업 등 공사 일을 맡기시면 빈틈없이 철저하게 잘 하셨어 늘 일을 맡아 하셨습니다. 한 번은 공업전문학교 나온 사람이 자격 없는 아버지를 걸어 잠시 일감을 놓쳤지만, 아버지의 세밀함과 정직함이 전공을 한 사람 못잖게 일을 잘 하셨어 다시 일을 계속 하실 수 있었음은 아버지 바탕에 깔린 심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라 생각이 됩니다.
부잣집 따님을 아내로 맞이해 고생하시는 엄마를 아버지께서는 늘 미안해하시는 아버지의 여린 마음을 가신 후 엄마는 못 잊도록 그리워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마음고생을 알아차린 엄마는 친정에 아버지께서는 처가에 잘 가시지 않았다고 하시니 두 분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나 지금 생각하니 이해가 됩니다. 집안에 부리던 군식구들도 잘 나가시던 이모부들과 가난한 가장인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것을 느낀 엄마는 친정집보다 시댁을 내가 살집이라고 느끼면서 친정걸음을 의도적으로 걸음을 줄였다고 하셨습니다.
가족 모두가 근검, 절약, 성실한 노력 이외엔 별 도리가 없는 시골생활, 그 어려운 형편에 대구에 삼 남매를 공부시키신 것은 할아버지를 비롯해 가족 모두의 희생이 따라야 했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오빠와 내가 돈을 벌어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를 누리며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작은 도움을 줄 형편이 되었을 때 늘 좋은 세상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월급을 받으면 봉투째 아버지께 드리며 네가 돈 벌지 않아도 살았다고 하시면서 잡비를 따로 장만해 주시면서 봉급을 몽땅 저축해 결혼자금이라고 하시던 아버지셨습니다. 삼 남매가 마루가 딸린 방 두 개를 얻어 자취할 때 자주 오셨던 아버지께서 눈에 선 곳을 손봐 주셨던 그 무렵이 아버지 일생 제일 행복하셨던 때라고 느껴집니다. 일요일 시골로 나가시려는 아버지를 모시고 팔도강산 영화를 구경시켜 드리고 식당에 가서 점심을 사드리면 흐뭇해하시던 그 모습이 50년 이 다된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집 같이 평화로운 가정이면 시집가겠다고 했던 저를 보고 “더 좋은 집으로 가야지” 라고 하시던 아버지께서 결혼적령기인 저를 두고 가셨으니 지금도 하늘 나라에서 잘 살고 있는 맏딸을 지켜보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아버지 계실 때 보다 열배는 더 살기 좋은 세상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딸은 그리워 합니다.
2017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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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훌륭하신 아버님에 대한 애잔한 사랑이 묻어나는 글입니다. 열심히 살아가시는 큰 따님의 성원으로 팔도 하늘강산을 유람하며 편히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감동적인 글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담담한 필치로 그려냈습니다. 부모님이 살아왔던 시절의 정경과 살아왔던 모습이 활동사진처럼 펼쳐집니다. 따뜻한 가족애가 묻어나는 글 잘 읽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희망과 어머니의 배려가 눈물겹습니다. 한평생 자식들을 위한 삶을 살다 돌아가셔서 지금은 효도를 하고 싶어도 못 하니 안타깝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정말 훌륭하신 부모님 밑에서 가정생활의 산 교육을 몸소 체험하시며 살아 오신것 같읍니다. 성실하시고 자상하시던 아버님을 일찍 여의신 애절함이 구구절절 합니다. 하늘 나라에서도 따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내려다 보시며 흐뭇해 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아버님의 뜻을 이어가는것도 효도가 아닐는지요. 좋은 글 잘 읽었읍니다. 감사합니다.
자식에 대한 무한정인 사랑을 배푸시고 가정에 모범을 보이신 아버지의 자애로움을 애닯아 하시는 감동깊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훌륭하신 아버님을 두셨습니다. 아마 하늘나라에서도 선생님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고 계실 듯 합니다. 여인 삼대의 지혜로움도 느껴집니다.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넉넉한 양반댁 규수와 결혼하여 짧은생을 나름 행복하게 잘 사셨을것 같습니다. 다정다감한 부모님의 자양분으로 잘 성장한 따님의 애절한 부정을 흐뭇하게 보고 계실것 입니다. 더욱 건강하시고 잘읽었습니다.
옛날 아버지는 후세를 위해 헌신적인 희생을 하셨으며. 그 덕분으로 지금의 살기 좋은 세상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면서 잘 읽엇습니다.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자식사랑이 남달랐던 훌륭한 아버님의 잔흔이 새록새록 묻어나는 글입니다. 부창부수라고 그런 아버님의 자존심을 잘 챙겨드린 어머님도 대단하셨던 분이셨네요. 감동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