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께 충성하는 달☜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冕旒冠)을 네게 주리라(계2:10) 계1:17-20절) 요한에게 주신 명령 사람은 어두운 곳에 혼자 있거나 혹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혼자 있게 되면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워서 위축(萎縮)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곳에도 친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훨씬 힘이 나고 용기가 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때로‘더 이상 나 혼자가 아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더 많은 힘을 내게 됩니다. 운동선수들은 중요한 경기를 할 때, 물론 관중석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서 자기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경기를 합니다.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 선수들이 경기를 하는 장면은 전 세계 사람들이 시청하고, 우리나라 국민들 중에서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운동 시합을 하는 선수 본인은 자기 혼자 경기장에 나와서 경기를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선수가 열심히 경기를 해서 금메달을 따게 되면, 갑자기 대통령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시간에 대통령도 다른 일을 하지 않고, 그가 하는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가 그가 우승을 하니까 너무 기뻐서 격려하는 전화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주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세상(世上)사람들은 나를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낙심해서 내 멋대로 살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지 못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보고 계시며, 우리를 위해서 열심히 격려를 하고 계십니다.
아마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엄청나게 놀라게 될 것입니다. 즉 우리 각 사람은 마치 하나님 나라의 대표 선수로 이 세상(世上)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世上)에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 세상(世上)은 너무 경쟁적이고, 세상(世上)에는 우리보다 더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은 천국에서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요한은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다가 로마 당국(當局)으로부터 *성경을 설교해서는 안 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證據)를 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불복(逮捕)했기 때문에 체포(逮捕)되어 밧모섬에 유배(流配)되어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 유배(流配)지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이 이 모든 영적(靈的)전쟁(戰爭)을 지휘하고 계신 것을 모든 교회에 편지(片紙)로 알리게 하셨습니다.
요즘 많은 믿음의 청년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이 직장을 구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世上)에서 직장을 구하고 인정받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는데, 주님과 우리가 직접 통화를 하게 된다면, 아마 우리는 매우 부끄러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나는 진리(眞理)를 위해서 죽기까지 했는데, 너는 왜 먹고 사는 것만을 위해서 그렇게 집착하느냐?’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또 우리가 세상(世上)에서 직장을 가지려고 애를 쓰는 이유는 정상적인 사람 취급을 받고 싶어서 일 때가 많습니다.
그때 주님은‘내가 세상(世上)에 있으면서 정상적인 취급을 받지 못했는데, 너희들은 왜 그렇게 이 세상(世上)에서 정상적인 취급을 받으려고 하느냐?’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이며, 예수님의 무릎에 누워서 예수님께 말씀드릴 정도로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한이 밧모섬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보고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을 때, 너무 충격을 받아 기절(棄絶)을 해버렸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영적(靈的) 전쟁(戰爭)이 얼마나 실제적이며, 심각한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으로부터 단절(斷絶)되어서 나 혼자의 힘으로 이 세상(世上)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세상(世上)에 보내셨고, 주님은 나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Ⅰ.예수의 환란에 동참하는 자(상)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정의하자면, 요즘은‘그리스도의 축복에 동참하는 자’라고 정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그리스도의 환란에 동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환란(患亂)은 흔한 일이었고, 누구나 다 받는 일이었습니다. 1:9절)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요즘 교회에 나가는 것에 대하여 그렇게 심한 박해를 받지는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이 세상(世上) 어느 곳에서든지 예수 믿는 사람은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처음 복음(福音)이 증거(證據) 되는 곳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나 복음(福音) 전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환란(患亂)과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찬송가 336장 *환난과 핍박 중에도* 그 이유는 복음(福音)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는 아직도 미신(迷信)과 사탄(詐誕)의 세력(勢力)이 지배(支配)를 하고 있는데, 거기에 복음(福音)의 빛이 들어오니까 사탄(詐誕)의 어둠 세력(勢力)이 반격(反擊)을 가하는 것입니다.
사탄(詐誕)은 그동안 기존의 정치인(政治人)이나 무당(巫堂)이나 지배(支配)층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 사회 사람들을 지배(支配)하고 있었는데, 복음(福音)의 빛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자기 손 아귀에서 빠져 나가니까 더 이상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박해를 하는 것입니다. 세상(世上) 사람들에게 가장 심각한 것은 사탄(詐誕)의 존재(存在)를 잘 믿지 못하는 이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종교(宗敎) 단체(單體)에서 나온 만화책을 보니까 사탄(詐誕)을 뿔이 있고, 꼬리가 있는데, 너무 귀여운 사탄(詐誕)으로 그려놓은 것을 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은 오늘날도 여전히 사탄(詐誕)이 있고, 하나님의 백성과 사탄(詐誕)의 세력(勢力) 사이에 치열(治熱)한 전쟁(戰爭)이 있다는 것을 잘 인정(認定)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생명의 말씀을 붙들어서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고 또 밖에 나가서 열심히 전도(傳道)하면, 사탄(詐誕)이 얼마나 우리를 싫어하며, 우리와 싸우기 위해서 좋지 않은 일을 얼마나 많이 벌이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은 먼저 자기 자신을‘너희 형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인 것은 단순히 핏줄이 같아서 형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형제인 것입니다. 즉 우리는 모두 마귀(魔鬼)에게 인질(人質)로 붙들려 있었다가 예수님의 피 값으로 풀려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친 형제보다 더욱 가까운 사이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귀(魔鬼)의 인질(人質)로 붙들려 있다가 풀려났다 해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이 세상(世上)에는 여전히 사탄(詐誕)과 그의 세력(勢力)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기 자신을‘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하나는‘예수의 환란’이고, 둘째는‘나라’이고, 셋째는‘참음’이었습니다. 여기서‘예수의 환란’이라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환란(患亂)을 말합니다. 우리 주위에 나름대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많고, 사고로 죽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것은 모두 자기 자신의 환란(患亂)이요, 고통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환란(患亂)을 당하고 고통을 당한다면, 이것은 예수의 환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높은 가치(價値)로 인정(認定)하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혹은 복음 때문에 고통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칭찬(稱讚)과 상급(賞給)을 받으려면, 절대로 편하게 믿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환란(患亂)을 받아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편하게 믿으려고 하는데, 그렇게 믿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아무런 상급(賞給)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금 전혀 어려움이 없을 때는 자기 스스로 자원(自願)하여 어려움을 찾아서 만들어내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때문에 욕(辱)을 먹기도 하고, 반대를 당하기도 하고, 고생을 하기도 해야만, 주님 앞에서 잘하였다고 칭찬(稱讚)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나라’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觀點)으로 승화(昇化)를 시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우리 인생을 내 개인의 행복(幸福)을 위해서만 쓴다면, 그것은 아무 유익(有益)이 없습니다.
우리가 단지 이 세상(世上)에서 돈을 벌고, 좋은(아파트)집에서 살고, 향락(享樂), 놀러 다니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여서 예배드리고 수련회를 하고 전도를 나가고 선교를 나가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며, 예수님이 관심(觀心)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며, 예수님이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즘 우리 주위에서 보게 되는 모든 일들은 단숨에 결판(決判)이 나는 것들입니다.예를 들어서 어떤 기업(企業)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은 단번의 정책(政策)에 의해서 결판(決判)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일은 그렇게 빨리 결판(決判)이 나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변하는 것이 결코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 인내(忍耐)를 해야 합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인내(忍耐)가 필요합니다. 왜냐면 논이나 밭에 씨를 뿌려놓은 후에 하루아침에 열매가 맺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농사는 밭에 씨를 뿌리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함으로 인하여 밧모섬에 유배(流配)되어 있었습니다. 가끔 성도님들 중에서 터키를 방문하신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밧모를 가는데 풍랑이 얼마나 심한지,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면 배(船)가 아예 출항(出航)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한의 죄목(罪目)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證據)였습니다. 즉 요한은 로마 정국(政局)으로부터‘성경을 가지고 가르치지 말고, 예수를 증거(證據)하지 말라’는 명령(命令)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證據)는 교회의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에게 숨을 쉬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은 로마 당국자(當局者)의 명령(命令)을 받고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傳)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증거(證據) 했을 때, 로마 군인들에게 붙들려가서 노인(老人)의 몸으로 조사(照査)를 받고, 취조(取調)를 당하고, 고문(拷問)까지 당한 후에 살아서 나오지 못하도록 풍랑이 심한 밧모섬에 유배(流配)당했던 것입니다.
이제 요한은 더 이상 어느 누구에게도 설교 할 수 없었고,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證據)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룩의 묵시를 보여주심으로 더 중요한 말씀을 아시아의 여러 교회에 보내게 하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다 보고 계시며, 우리가 이런 가운데 겁을 먹지 않고 용감하게 주님을 위하여 싸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1:10절)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주의 날’이라는 것은 현재 우리가 지키고 있는 주일(主日)과 같은 날입니다. 처음에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안식일(安息日)을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을 주의 날로 지키기 시작했는데,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미워하니까 자연스럽게 *주의 날*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주의 날이 되었지만, 섬에 유배(流配)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교인들은 주의 날이 되었는데도 교회에 갈 수 없으면, 얼마나 교회의 모임을 사모(思慕)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아마 군에 간 형제들은 주일이 되었는데도 군대라고 해서 교회에 가지 못하고 보초(步哨)를 서거나 사역(使役)을 해야 할 때, 얼마나 교회가 그리운지 모릅니다.
이때 요한은 성령의 감동(感動)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것은 요한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마음이 극도로 흥분이 되었고, 마치 날아갈 것처럼 마음이 들떠있었던 것을 말합니다. 대개 성도들은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중에 큰 은혜를 받고서 성령에 충만해지게 되는데, 요한은 혼자 있으면서도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요한을 말씀의 세계로 데려가시기 위해 영적(靈的)으로 감동(感動)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요한은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音聲)을 듣게 되는데, 이것은‘네가 지금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해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대개 남자들이 군대 입대해서 훈련(訓練)을 받으면, 큰 소리로 *충성* 인사하고 보고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상관(上官)이 뭐라고 말 하면, 온 힘을 다해서 고함을 치듯이 말하게 됩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스울지 모르지만, 군인들은 더 이상 사적(私的)인 관계에 있지 않고, 오직 명령에만 복종(服從)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축구 경기하는 것을 보면, 선수들이 자기 위치를 잘 지키지 않거나 감독(監督)이 지시하는 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감독(監督)이 운동장 옆에 서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 예수님이 나팔 소리같이 큰 음성(音聲)을 내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자신의 문제에 빠져있지 말고, 정신을 바싹 차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문제에 빠져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바라보는 동안에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지만,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힘을 잃게 됩니다. 그렇다 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전혀 보지 않을 순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보는 집중 훈련(訓練)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염려를 하면, 끝없이 침체(沈滯)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이것을 누군가에게 전(傳)해주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요한이 이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요한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받아서 그것을 성공적으로 일곱 교회에 전(傳)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받는 이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偉大)한 일은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기도(祈禱)하는 것이 가장 위대(偉大)한 일입니다.아-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서로 사랑하라💖 ※ 하나님의 백성의 기본 상식 기도는 능력, 아멘은 축복, 감사는 저축. 다음 날 계속 ⇨ 💖진리의 복음💖 †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심방(尋訪) 및 궁금한 내용 문의 ☞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