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오마오산과 홍산문화
제단과 무덤, 여기도 동이의 흔적…
“우한치 쓰자쯔(四家子) 차오마오산(초모산·草帽山) 유적에서 5500년전 홍산문화 시기의 제단+무덤 결합형식의 의례(儀禮) 건축물이 발견됐다. 이는 원시종교와 장례풍습, 제사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새로운 자료다.”
가장 최근에 확인된 차오마오산 유적. 이형구 교수와 기자가 석관묘를 실측하고 있다. 차오마오산/김문석기자
2006년 6월5일, 네이멍구 츠펑 방송은 ‘5500년전 홍산문화(BC 4500~BC 3000년) 시대 적석총의 발견’ 소식을 숨가쁘게 전했다.
그로부터 1년여 뒤인 올 7월 28일. 경향신문 탐사단은 폐부를 뒤덮는 자욱한 황토먼지, 그리고 뜨거운 불볕더위가 숨을 턱턱 막아버리는 따끈따끈한 유적, 바로 차오마오산을 찾았다. 늘 그랬듯 목표지점은 오리무중이다. 탐사단은 2m가 훌쩍 넘는 남의 집 옥수수밭을 헤치면서 정처없는 발길을 옮겨야 했다.
-‘따끈따끈한’ 피라미드-
“제기랄, 길이 만날 이 모양이야?”
불평불만이 절로 나왔으나 환갑을 훌쩍 넘긴 이형구 선문대 교수와 주채혁 세종대 교수 또한 노구를 이끌고 힘겨운 길을 재촉하니 비지땀을 흘리며 갈 수밖에…. 또하나 마냥 투덜거릴 틈도 없는 이유. 국내 학자들 가운데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처녀지. 그래서 학자‘적’인, 그리고 기자‘적’인 의식이 발동하니 야릇한 흥분감이 발길을 바삐 잡아끄는 것이다. 중국 땅에서 중국이 발굴한 유적을 1년여 만에 볼 수 있는 기회가 오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터이니….
“다 왔네요.”
저만큼 앞서간 윤명철 동국대 교수가 자리를 잡는다. 학자들 또한 흥분에 도취된 듯하다. 차오마오산은 그야말로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하는 천혜의 곳이다. 해발 40m의 낮은 구릉인데 정남쪽 500m 앞에는 다링허(大凌河) 지류인 라오후산허(老虎山河)가 흐르고 있다.
홍산문화의 이름을 낳게한 네이멍구 츠펑시 잉진하 유역에 있는 홍산.(위)
츠펑대 박물관 유물관리실에 진열된 홍산문화·샤자뎬 하층문화 유물들.(아래)
원래 이 유적은 1983년 처음 발견되었지만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였다. 당시 제2지점에서 석관묘 7기, 제단 1기와 돌로 만든 여신상 1점, 남성생식기 모양의 돌인형(石祖), 뼈로 만든 피리(骨笛), 그리고 토기 표면에 ‘미(米)’자, ‘십(十)’자로 읽을 수 있는 수수께끼의 부호가 확인했다.
발굴단은 “3층으로 잘 쌓은 제단과 돌무덤떼가 발견됐는데, 이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금자탑(피라미드의 중국말)”이라고 의미를 두었다. 지난해 제3지점 발굴 때도 비슷한 양상의 유구가 발견됐다.
-빙산의 일각-
원형제단 중간에 사각형의 대형 석관묘가 있었는데, 석관묘 앞에는 불에 탄 붉은 흙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늘 와서 불을 피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증거였다. 결국 이 적석총 안에 누워있었던 이가 숭배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대량의 토기들이 띠를 이루며 무덤 주위를 둘렀다.
홍산문화의 토기.
이는 특수한 장례 풍습을 웅변해준다. 이 풍습은 앞선 문화인 싱룽와에서도 보이며 수천년 후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도 그 전통이 이어진다. 그런데 라오후산의 양쪽 강가 10㎞ 인근에는 샤오구리투(小古力吐) 등 차오마오와 같은 유적들이 즐비한데, 제단과 돌건축물들이 대부분 층층이 높아지는 피라미드 형태이다.
“보세요. 석판을 차곡차곡 쌓고, 판석을 덮는 형식이네요. 전형적인 석관묘네요. 그리고 저기 적석총도 있고…. 저기 3단으로 쌓은 제단도 있고….”
이교수는 “장례풍속과 제사 유적 등을 미뤄볼 때 발해문명의 출현과정을 추론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보고 있다. 중국 학계가 가장 최근까지 발굴한 차오마오산 유적에 비상한 관심을 두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차오마오산 유적은 홍산문화의 ‘단적인 예’일 뿐이다. 탐사단은 맨처음, 4000년전 조성된 고조선의 성일 가능성이 짙은 싼줘뎬(삼좌점·三座店)·청쯔산(성자산·城子山) 석성을 실마리로 발해문명 탐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8000년전 동이의 본향인 차하이(査海)-싱룽와(興隆窪) 마을을 지나 이제 홍산문화의 땅, 바로 차오마오산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토기 가운데는 남녀가 춤을 추면서 구애 혹은 성접촉을 상징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홍산문화는 차하이·싱룽와 문화-홍산문화-하가점 하층문화(고조선의 석성들)로 면면이 이어지는 발해문명 계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황허문명=중화문명이라는 철옹성 같은 관념을 마침내 버리고 발해문명이 중국문명의 기원이며, 홍산문화에서 이미 초기 국가의 형태인 고국(古國)이 탄생했다”(쑤빙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 학계도 인정하듯 발해문명의 창시자는 우리 민족을 포함한 동이족이다.
-붉은 봉우리-
그렇다면 홍산문화란 대체 무엇인가. 홍산문화에 대한 연구·조사가 시작된 것은 올해로 딱 100년이 됐을 만큼 깊지만, 제대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지는 불과 30년전부터다. 지금까지 츠펑, 링위안(凌源), 젠핑(建平), 차오양(朝陽) 등에서 500여곳의 홍산문화 유적이 쏟아졌다.
홍산문화의 토기들.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1908년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였다. 이쯤해서 사족 하나. 제국주의 침략에 앞서 필수적인 과정이 있는데 바로 식민지로 지목한 곳에 대한 철저한 인류학적인 조사다.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해서다.
“전율을 느낄 정도죠. 1868년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은 조선학을 시작했는데, 급기야 조선을 합병했잖아요. 또 만주 침략을 획책한 일제는 20세기 초부터 교토대를 중심으로 만주학이라는 걸 만듭니다. 그후 동북3성을 점령하잖아요(1931년).”
도리이 류조 역시 마찬가지 목적으로 당시 네이멍구 동남부 츠펑(赤峰·당시엔 열하성) 잉진허(英金河) 유역 일대를 조사했다. 이 유적은 훗날 홍산허우(后) 유적으로 일컬어졌다. 그는 당시 일련의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를 발견하고는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홍산(紅山)이란 명칭은 홍산허우 유적이 있었던 암홍색 화강암산에서 비롯됐다. 츠펑(赤峰)이라는 도시이름도 이 산의 ‘붉은 봉우리’에서 유래됐다.
-일제의 야욕-
각설하고 저우커우뎬(주구점·周口店)과 양사오(앙소·仰韶)문화 발견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스웨덴의 안데르손은 1921년 6월 아주 중요한 발굴을 수행한다. 랴오닝성 후루다오(葫蘆島)시 사궈툰(沙鍋屯) 동굴유적에서 갈지(之)자와 줄무늬가 새겨진 토기와 귀가 두개 달린 붉은 토기 등 갖가지 유물, 그리고 40여명분의 인골을 발굴한 것이다. 이 유적은 중국 고고학 역사에서 정식 발굴을 거친 최초의 유적이라는 점에서도 각광을 받았으나 층위 구분의 과학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폄하됐다. 하지만 최근들어 사궈툰에서 30㎞ 떨어진 카줘에서 비슷한 문화층을 가진 동굴을 발견함으로써 다시 주목을 끌고 있다.
둘 다 범상치 않은 제사유적일 가능성이 크다. 계몽운동가인 량치차오(梁啓超)의 아들인 고고학자 량쓰융(梁思永)은 1930년 그 혹독한 겨울에 츠펑 일대를 샅샅이 훑었다. 그는 츠펑에서 발견된 양사오식 채도에 큰 관심을 가졌다. 채색토기는 중국 중원인 양사오 문화의 대표 유물. 그런데 왜 만리장성 이북에서 채도가 발견되는가. 만리장성 이북은 중국인들이 오랑캐 문화라 해서 무시했던 곳이 아닌가. 량쓰융은 바로 양사오와 장성이북 문화(후에 홍산문화)의 문화접촉에 관심을 기울였다. 량쓰융은 장성 이남과 이북의 문화 접촉 지역이 어디인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펑톈(봉천·奉天·선양의 옛이름) 서남부이거나 즈리(직예·直隸·지금의 베이징 부근)일 가능성이 큽니다.”(량쓰융)
당시 량치차오는 이를 위해 동북고고탐사계획을 세웠으나 일본군의 동북침략(1931년)으로 수포로 돌아간다. 2년 뒤인 1933년 집총한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야하다 이치로(八幡一郞)가 중심이 된 제1차 만몽 학술조사연구단이 들이닥치고, 35년엔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가 주축이 된 일본동아고고학회가 ‘쳐들어온다.’
“일제의 의도는 뻔했어요. 만주 역사를 중국의 역사에서 떼어내, 일제가 점령하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이었어요. 바로 만주국을 세우는 것. 일제관학이 그래서 무서운 거죠. 1935년 일제는 원래 청동기시대 석관묘를 위주로 조사했는데, 홍산허우 유적 조사과정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을 대거 발굴했죠.”(이형구 교수)
이곳에서 대량의 홍도와 채도, 세석기(중기구석기~초기 신석기까지 유행한 잔석기. 폭 1~1.5㎝, 길이 5㎝ 이하의 잔석기), 동물뼈, 옥구슬, 골기, 그리고 아궁이터 등 신석기시대 유물이 터져나온 것이다. 일제는 1938년 ‘츠펑 홍산허우’라는 발굴보고서를 냈다.
-문명의 3조건-
지금과 같은 ‘홍산문화’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은 1955년이었다. 고고학자이자 역사학자 인다(尹達)는 저서 ‘중국신석기시대’라는 책을 내면서 ‘홍산허우 유적’을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장(章)을 마련했다. 그는 이 책에서 “홍산문화는 남북문화의 접촉후 생겨난 일종의 새로운 문화”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1970년대 말까지도 홍산문화 연구는 토기와 세석기 등에 집중됐고, 그저 넓은 의미의 북방 세석기문화, 즉 일종의 변경문화로만 인식됐다. 그러나 1979년 카줘 둥산쭈이(동산취·東山嘴)에서 임신한 여인의 소조상을 포함한 엄청난 제사유적이 발견되고, 83년에는 뉴허량(우하량·牛河梁)에서 제단(壇)과 신전(廟), 무덤 등 이른바 단묘총 유적이 3위일체로 출현한다. 두 유적과 후터우거우(호두구·胡頭溝) 유적에서는 세계가 깜짝 놀랄 대량의 옥기로 도배되다시피했다.
“제단, 신전, 무덤은 문명탄생의 세 조건이라 하죠. 옥기로만 도배되다시피한 무덤은 사회분화, 계급탄생의 신호죠. 결국 쑤빙치를 중심으로 한 중국학계는 홍산문화를 중화문명의 기원을 상징하는 문화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이형구 교수)
그런데 조상숭배와 하늘숭배, 적석총·석관묘를 포함한 홍산문화는 다름아닌 동이의 문화였다. 중국학계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차오마오산에서 홍산문화의 맛을 살짝 본 탐사단은 바로 그 유명한 뉴허량 유적을 찾아 발길을 돌렸다.
〈차오마오산|이기환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