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동백꽃의 그리움」을 읽고
우승순
단풍이 절정을 지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춘천은 벌써 낙엽이 지고 앙상해진 가지가 을씨년스러웠을 때인데 기후변화로 가을도 2~3주 정도 늦춰진 듯하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늦가을 정취를 더하고 뒷산의 벚나무, 단풍나무 등도 빨갛게 물들었다. 아파트 정원의 온갖 나무들도 저마다의 색깔로 마지막 자태를 뽐낸다.
간혹 유명 관광지에 단풍 구경을 갔다가 주차난과 인파에 밀려 보는 둥 마는 둥 다녀와서 뒷산이나 정원에서 아름답게 물든 단풍을 보고 감탄한다. 어쩌면 행복도 그럴 수 있다. 평생 신발이 닳도록 밖으로 찾아 헤맸던 것들이 어느 날 문득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할 때가 있다.
오늘 소개하려는 책은 한정남 수필가님의 책 「빨간 동백꽃의 그리움」이다. 예전 춘천문화원 문예창작반에서 저자와 함께 공부한 적이 있었다. 늘 온화한 미소와 함께 조용하시면서도 목소리에는 당당함이 묻어나는 분이셨는데, 이토록 드라마틱한 사연과 강한 의지가 있는 분이란 것은 몰랐다.
이 책은 총 5부로 나누어 50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평생 한두 번 겪을까 말까한 사연을 저자는 여러 번 겪었고 켜켜이 쌓였던 그 내면을 판소리나 글로라도 풀어내지 않았더라면 못 견뎠을 것 같다.
책의 내용으로 정리해 보면, 저자의 고향은 충북 충주였고 16세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어머님께서는 남은 가산을 불려 자녀들을 돌보려 했으나 친하게 지내던 이웃에게 모두 사기 당하고 그 충격으로 뇌출혈로 쓰러져 돌아가셨다. 딸만 셋 인 집안에서 맏딸인 저자는 졸지에 두 동생의 보호자가 되었고, 이웃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를 삭이려 자주 설악산을 찾았던 것 같다.
울분에서 탈출하기 위해 나는 바다가 있는 아름다운 설악산에서 홀로 민박을 하며 분노를 삭여냈다. 흔들바위나 비룡폭포를 올랐고 홍련암을 찾기도 했다. 굳어진 바위덩어리 같은 내 마음의 분노를 푸른 바다는 서서히 부수었다.
-의상대에 올라- 중에서
충주가 고향인 저자가 처음 춘천에 어떻게 정착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수녀가 되고 싶은 생각에 ‘긴 머리에 까만 치마저고리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성당을 다녔다’고 술회 했는데 그런 그녀를 늘 눈여겨보며 짝사랑했던 총각이 있었다.
어느 날 지인의 권유로 영월 상동으로 맞선을 보러 가는 길에 원주 친구 집에 들려 하룻밤 묵으면서 기막힌 사연이 연출된다. 친구가 춘천에 돈 받을 일이 있으니 함께 가자고 간곡히 부탁하여 춘천으로 와서 극장엘 갔고 거기서 그녀를 짝사랑하던 남자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친구의 집요한 간청으로 함께 그 남자의 집에 갔는데 아뿔싸! 이게 무슨 상황인가?
조금 있으니 생각지도 못했는데 떡 벌어진 저녁상이 나왔다. 저녁을 먹고 빨리 가자고 재촉하니 친구는 꿈쩍도 안 한다. 조금 후 슬금슬금 그의 가족들이 들어오더니 방안 가득 찼다....조그만 상에 물이 담긴 대접이 나오고, 언제 준비했는지 금반지 목걸이에 루비 반지다. 야밤에 물 떠놓고 약혼식을 하겠다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다.
변함없는 내 친구- 중에서
저자의 친구와 그 남자가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한 시나리오대로 흘러갔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부님께서 주례를 선다는 청첩장을 받는 순간 그건 운명이 되었다. 부모님도 안 계시니...... 졸지에 남편이 된 그 분은 다행히 저자의 두 동생을 정성으로 돌봐 주었고 친척에게도 만점짜리 사위가 되었단다.
수필 ‘돈벼락 맞은 엄마’ 편에서는 일제 강점기 때 외할아버지께서 엿공장을 운영하셨는데 버는 돈을 외할머니도 모르게 어딘가에 현금으로 몰래 숨겨 두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삼촌이 이사 가던 다음 날, 헌집을 헐다가 천정에서 돈 벼락을 맞는다. 그런데 또 아뿔싸! 평생 모아두었던 그 돈다발이 화폐 개혁으로 이미 휴지 조각이 된 뒤였다. 부인이었던 외할머니의 분노와 배신감은 상상키 어렵다.
출가한 딸에게도 아까워 주지 못했던 그 돈에 성냥불이 던져졌다. 붉은 불꽃으로 타는 돈 냄새가 밤하늘에 하양 연기로 올라갔는데 (만약 할아버지가 보고 계셨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 벌겋게 타오르는 불꽃이 바람 타고 하늘로 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들판에서 통곡을 했다.
- 돈 벼락 맞은 엄마- 중에서
저자가 8살 되던 해에는 할머니께서 돌아 가셨는데 글쎄, 다시 살아 나셨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믿기지가 않는다. 그 후 할머니께서는 5년을 더 사셨다고 한다.
예쁘게 꽃단장한 상여가 마당에 놓여 있었다. 아침에 발인 제사를 지내는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관속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다고 했다. 관을 열고 망자에게 입혀 놓은 삼베옷을 벗겼다. 거짓말같이 할머니가 살아나셨다. 그 바람에 장사를 지내려다 잔치가 벌어지는 진풍경이 일어났다.
장삿날 살아나신 할머니- 중에서
30여 년 전에는 1캐럿짜리 반지와 금을 싼 종이를 남편께서 쓰레기인줄 알고 버렸다. 당시 잘 지은 한옥 한 채에 1,600만 원 정도 할 때인데 1캐럿의 시세가 800만 원이었다고 한다.
근화동 청소차 담당을 수소문하여 전날 버린 장소가 장학리인 것을 확인하고 찾으러 우리 두 부부와 친구 남편 그리고 넝마중이 4명에게 20만원을 주며 내용을 설명하고 하루 종일 뒤졌다. 어리석인 일이지 그들이 찾은들 돌려주었겠는가!.......종이 쓰레기와 구역질 는 생리대를 9일 동안 미친 듯 파헤친 것이 우리 집 2층보다 더 높은 산이 되어 있었다.
-남편이 버린 1캐럿 다이아반지- 중에서
이 수필집을 펼치는 순간 보통 사람은 평생 한두 번 겪을까 말까 한 사건과 사연이 펼쳐지면서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위에 소개한 특별한 사건 외에도 저자 자신도 산후조리를 잘 못하여 죽다 살아난 일을 ‘인생은 더불어 사는 삶’에 묘사하였고, 급발진 교통사고로 골반이 부러지고 갈비뼈가 11조각으로 부서지고 간과 폐가 손상당하는 큰 사고를 겪고 극복해낸 사연은 ‘생에 마지막 걸음마’에 절절하게 쓰여 있다.
수필은 꾸며낸 이야기를 쓸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작가와 독자 사이에 늘 역설이 존재한다. 행재요화(幸災樂禍)까지는 아니더라도 저자의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경험일수록 독자들은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이다. 저자는 용서와 내려놓음, 지극한 정성과 불굴의 의지로 수많은 역경과 난관을 헤쳐 나왔고 사업과 봉사, 공연 그리고 글쓰기까지 하며 바쁘게 살아왔다. 경기민요를 시작으로 판소리 춘천지부를 운영하면서 ‘다사모’ 예술단을 만들어 병원, 노인복지관, 요양원 등을 찾아다니면 봉사 공연도 수없이 해왔다.
저자는 연노랑 수술이 박힌 빨간 동백을 유난히 좋아했던 것 같다. 큰 화분에 키웠던 동백이 남편을 간호하느라 제 때 돌보지 못해 말라죽은 것을 두고 늘 애석해 했다. 빨간 동백에 대한 그리움이 남편을 향한 사랑과 오버랩 되면서 그 애틋함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빨간 동백꽃의 그리움’이라는 수필에 묘사되어 있다. 저자가 가끔 부른다는 남도 민요의 ‘동백 타령’ 중 한 소절이다.
“빨간 동백 따다가는 님 계신 방에 꽂아 놓고, 하양 동백 따다가는 부모님 방에 꽂아 놓세......”
깊어가는 가을밤, 「빨간 동백꽃의 그리움」을 읽으며 인생을 배우고, 붉게 타올랐던 지난날의 연정을 회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2024.11.5. 우승순
첫댓글 「빨간 동백꽃의 그리움」을 다시 읽는 기분입니다.
이렇게 설명 글이 덧붙여지니 콕콕 가슴에 들어와 박히는데요.
아무튼 대단한 우승순 선생님! 평론가로의 대성을 기원하며...
한정남 선생님께도 거듭 축하드립니다. 건강 건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