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89
2월2일[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연중 제4주간 목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Mu5zrmBJqo (장우호 야고보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비록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이지만, 매일 가슴을 치면서 거듭 자신을 갈고 닦으며...>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주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억하는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삶 전체를 오롯이 주님께 봉헌하려고 길을 나선 수도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부여받은 고귀한 성소를 기쁘고 충만하게 실현하도록 기도하는 축성 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축성(祝聖, consecration)되다.’라는 말의 의미는 '성화(聖化)되다', '성(聖)스럽게 변화되다', '거룩하게 되다', '신성하게 되다', '봉헌되다'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오늘 축성 생활의 날을 맞아 세상의 모든 수도자들이 아기 예수님처럼 자신의 모든 시간과 미래, 삶 전체를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히 선별되고 축성된 수도자의 신분에 걸맞게 하루하루 모든 순간을 거룩하고 향기롭게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수도자로서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한 사도직 활동도 중요하겠습니다만, 그에 앞서 한 작은 수도자로서, 주님의 겸손한 종으로서, 기도 안에 기쁘고 환한 얼굴로 살아간다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을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수도자들이 자신이 발한 삼대 서원이 하느님 나라와 지상의 교회를 위해 큰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살아간다면,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거룩하고 맑게 살아 존재 자체로 교회와 세상 앞에 큰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수도자들의 ‘존재’ ‘신원’은 마치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양날의 검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이지만, 매일 가슴을 치면서 거듭 자신을 갈고 닦으며, 주님의 종이라는 수도자로서 신원에 걸맞게 살고자 발버둥칠 때, 우리는 존재 자체로 세상의 빛이요 등불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존재 자체로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위한 멋진 이기(利器)로 변모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수도자의 신원을 망각한 채, 흥청망청, 빈둥거리며 살아갈 때, 세상의 고통과 절규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높은 수도원 담장 안에서 우리끼리만 희희낙락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과 교회 앞에 그 어떤 증거도 되지 않고, 그저 놀림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수도자라는 존재 자체, 신원 자체가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해치는 흉기(凶器)로 돌변하게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goFQicyVAs
++++++++++++++++++
<부모가 자녀를 봉헌하지 않으면 자녀는 어떻게 될까?>
‘유퀴즈’에서 이천 시골에 사는 한 어머니(이정숙 씨)의 사연에 진행자들도 눈물을 참지 못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서울에 살던 어머니는 시골에 사는 한 남자의 끈질긴 구애 끝에 시골로 시집옵니다. 친정어머니는 딸을 시골로 보낼 수 없다며 강력히 반대했지만, 서울로 올라와 살 것이라는 사위의 말을 듣고 시골로 시집보낸 것입니다. 자기가 셋째이므로 부모를 모실 필요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자기 형이 다리에 장애가 있고 아이들이 일곱이라 지금 자기가 분가해서 밖으로 나가면 시어머니, 시아버지, 조카들까지 다 업신여김받고 살기 어려울 것이라 하여 조카들이 클 때까지만 함께 시골에 살자고 설득했습니다. 어머니는 남편의 효심에 그러자고 하였고 지금까지 평생을 시골에 살게 되었습니다.
시골에 살면서 힘든 일이 참 많았습니다. 둘째 아들이 부패한 백신을 맞아 오히려 결핵에 걸려 아이를 업고 여섯 달 동안 매일 업고 통원 치료해야 했습니다. 매일 아이를 업고 걸어야 했던 시간이 무려 네 시간입니다.
서울에 사는 친정어머니가 딸이 고생하는 것을 볼 수 없다며 도와주겠다고 시골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러나 사돈과 같은 동네에 사는 것이 아니라며 8km나 떨어진 곳에 집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딸의 집에 와서 손주들을 돌봐주시고 일을 도와주셨습니다. 임종 전날 어머니를 방문하셨을 때도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얼른 가서 사슴 밥 줘라. 나 때문에 이렇게 시간 뺏기면 어떡하냐!”
이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니 모습에서 당신을 위해 희생하신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한 시골집에 봉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봉헌은 어머니의 피 흘림이었습니다. 따님은 그렇게 한 가정에서 훌륭한 며느리요, 아내요, 어머니요,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모 마리아와 요셉 성인께서 예수님을 성전에서 봉헌하신 날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인간의 부모가 자신들의 아들을 하느님 집에 봉헌하는 것이 무엇이 중요할까요? 이는 인간이 그 부모의 봉헌을 통해 성장함을 말해 줍니다.
부모가 봉헌하지 않으면 자녀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가 성장하여 자신이 선택한 사람과 결혼하겠다는데도 반대합니다. 이것은 자녀를 어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내 품 안에 품고 살겠다는 뜻입니다. 좋은 것 같지만 실제로 자녀가 성장하지 못하게 봉헌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가 자녀를 나라와 천주께 봉헌하는 편지는 이렇습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조소거리가 된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분노를 짊어지고 있어야 한다. 네가 상소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구걸하고 마는 것이 된다.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에 이르렀는즉 죽는 것이 영광이나, 모자가 이 세상에서는 다시 상봉치 못하겠으니 그 심정을 어떻다고 말할 수 있으리…. 천주님께 기원할 따름이다.”
조 마리아의 편지가 원본이 없다는 이유로 거짓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안중근의 담당 간수였던 헌병 치바 도시치가 전한 말을 사이토 다이켄이라는 일본 스님이 『내 마음의 안중근』(1994)이라는 책에 기록한 내용과 유사하고, 황성신문 (1909년 12월 28일) 기사에서도 그 내용이 있습니다.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편지 자체가 거짓이라고 말할 근거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건 조 마리아는 아들 안중근을 천주와 나라에 봉헌하였고 그는 그렇게 성장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봉헌하지 않으면 아들은 어머니라는 감옥에 갇혀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자녀를 어디로 봉헌하는 것일까요? 새로운 정체성으로 봉헌하는 것입니다. 나의 자녀에서 나라의 자녀, 하느님의 자녀로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체성은 또한 내가 누구냐는 믿음입니다.
사람은 믿는 대로 성장합니다. 어머니는 내가 가진 아들을 향한 믿음에서 자녀를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으로 보내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믿는 만큼 성장합니다. 1990년경 에렌 랭거(Ellen Langer) 박사는 70대의 남성들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1959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전반적으로 5년 정도는 젊어진 모습이 되었습니다. 혹은 ‘아이는 부모가 믿는 만큼 자란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컴퓨터 게임 중독자인 아들을 끝까지 믿어주어 연세대 4년 장학생으로 입학시킨 『괜찮아 엄마는 널 믿어』의 저자 김민경 씨입니다.
그런데 왜 어머니, 아버지만이 자녀를 봉헌할 자격이 있을까요? 그 이유는 자녀는 부모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봉헌은 나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낳고 자신들이 키웠으니 자녀는 자신들의 것입니다. 자녀들도 부모에게 속해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아무리 봉헌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천민 아이를 사무라이로 만들겠다고 한 어머니는 자신이 성의 기둥으로 들어가 죽었습니다. 다른 어떤 이가 들어가도 자녀는 사무라이가 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가능합니다. 이 배가 가라앉아야 어쩔 수 없이 다른 배로 옮겨 탈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 배에 계속 머무르려 할 것입니다.
새끼 새를 자신이 떨어뜨리면 새가 날갯짓하겠지만, 다른 존재가 떨어뜨리려고 다가오면 몸을 움츠리게 됩니다. 봉헌은 부모만의 특권이기도 하고 부모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내가 자녀를 봉헌하지 않으면 자녀는 어떤 방향으로도 성장할 수 없음을 기억합시다. 자녀의 성장은 부모가 어디로 봉헌하느냐에 달렸습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가끔씩 찾아오는 친구처럼 ‘감기’가 찾아오곤 합니다. 기관지가 약해서인지 목이 따끔거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짧게는 이삼일, 길게는 일주일 정도 있으면 말없이 떠나곤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감기는 저와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어 했습니다. 증상도 예전과는 달랐습니다. 목이 잠기면서 말을 하기 힘들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미사 준비를 했는데 도저히 미사를 봉헌할 수 없었습니다. 부득이 신부님께 사정을 이야기 했더니 기꺼이 미사를 바꾸어 주었습니다. 몇몇 만남도 취소하고 조용히 집에 머물렀더니 감기는 예전처럼 아무 말 없이 떠나갔습니다.
이렇게 감기로 말을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언어의 문제로 말을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어에 익숙한 사람들과 있으면 아무래도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잘 알아듣지 못하기도 하지만 저의 영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박해의 경우에 많은 신자들이 ‘배교’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죽음으로 신앙을 지켰습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들었던 즈카리야는 속으로 의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이 요한을 출산할 때까지 말을 못하였습니다. 사막의 은수자들과 깊은 산중의 스님들은 자발적으로 묵언수행을 하기도 합니다. 감기와 함께 지내면서 꼭 해야 할 말은 하지 못하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많이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 칭찬과 격려의 말을 자주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봉헌과 기도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와 부유한 바리사이파의 헌금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시는 봉헌은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이었습니다. 부유한 바리사이파의 봉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와 바리사이파의 교만한 기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시는 기도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였습니다. 바리사이파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정점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아드님이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늘 겸손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제자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봉헌 축일입니다. 많은 본당에서 오늘 1년 동안 전례에 사용할 초를 축성합니다. 봉헌 축일에 초를 축성하는 것은 초가 가지고 있는 3가지 특성 때문입니다. 초의 3가지 특성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삶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첫째, 초는 밝은 빛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진리의 빛을 가려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둘째, 초는 따뜻함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나의 멍에는 가볍고, 편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외로운 이들, 슬퍼하는 이들은 모두 나에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은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셋째, 초는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서 세상을 밝게 비추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희생과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십자가의 희생은 가장 숭고한 봉헌입니다. 그것이 우리 구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매달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솔직하게 아프다고, 원망스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주님께서는 이제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신앙이 있는 곳에, 당신의 몸을 성체의 모습으로 나누어 주십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의 허물과 잘못까지도, 나의 원망과 실망까지도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봉헌은 나의 삶을 이웃들을 위해서 나누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생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입니다. 더 멀고 힘든 여행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음먹은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슴에서 발까지의 긴 여행을 기쁜 마음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22-40: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다. 맏배는 모두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 앞에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행위는 바로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작은 것이나 큰 기쁨, 심지어 아픔까지도 그분 앞에 겸손하게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더욱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께 그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하면,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지 의미마저 잃게 될 것이다.
성모님과 요셉은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하신다. 율법에 “씨를 받아”(레위 12,2 칠십인 역)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한 몸이 되었으므로,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낳은 자식과 함께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쳐야 깨끗해진다고 한다. 이 율법과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23절)는 율법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의인 시메온은 아직 아기를 보고서도, 위대한 신성을 지니신 분임을 알아보았다. 시메온은 그분을 마음으로 보고 아기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을 품에 안고 기도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29-30절)
그 아기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쓰러지게 하고 믿는 다른 민족들은 일어나게 하실 분이다.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34절) 십자가가 바로 그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구세주의 모든 것이 반대를 받고 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속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마리아는 당신의 평생 아드님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리고 아드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모두 겪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아드님이 죄인으로 몰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가슴은 칼에 꿰찔리듯 아마 그 이상으로 아팠을 것이다.
시메온의 뒤를 이어 여 예언자 한나가 등장한다. 한나 역시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한나는 일찍이 사별하였지만,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한나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이 어느덧 사십 일이 지났습니다.
성탄의 밤에 우리에게 오신 아기에 관한 기쁜 소식을 떠올려 봅니다. 그 아기는 어둠과 죽음 속에 있는 이들을 비추기 위하여 떠오른 ‘빛’이었습니다.(루카 1,78-79 참조)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주님 봉헌 축일의 역사는 무척 오래되었습니다. 동방 교회에서는 이미 4세기부터 이 신비를 기억하며 ‘만남 축일’이라고 불렀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시고, 또한 시메온과 한나처럼 하느님께서 하신 약속을 기다리며 충실히 살아온 이스라엘의 남은 이들과 만나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 성탄 대축일 빛의 예식에서, 세상의 참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억하였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베들레헴에서 목동들 위에(루카 2,9 참조), 그리고 멀리서 그 빛을 따라 동방에서 온 박사들을 통하여(마태 2,2 참조)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러난 ‘모든 민족들의 빛’이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합니다. 꼭 사십 일 전에 우리는 베들레헴의 빛을 보고 찾아온 목동들과 동방에서 온 현인들처럼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며 그 빛을 따라 살고자 다짐하였습니다. 그 빛이 우리가 보고 믿고 따라야 할 유일한 빛이라는 사실을 오늘 다시 한번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세상에는 이 빛이 아니라 예쁘고 화려한 듯 보이는 다른 빛들도 많습니다. 그 빛들을 따라 자기 희망과 꿈을 키우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베들레헴의 아기를 우리 각자의 성전에서 새롭게 만나라고 초대합니다. 시메온과 한나처럼 아기를 두 팔에 감싸 안고 그분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우리 인생의 유일한 별을 새롭게 만나고 그 빛을 저마다의 가슴속에 간직하라고 말합니다.
시메온은 ‘하느님께서 (내 목소리를) 들으셨다.’는 뜻이고, 한나는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시메온과 한나처럼 우리의 삶이 주님에 대한 희망으로 넘쳐나고,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으로 완성되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
교회는 성탄 다음 사십 일째 되는 날, 곧 2월 2일을 주님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감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낸다.
이 축일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예루살렘에서는 386년부터 이 축일을 지냈으며, 450년에는 여기에 초 봉헌 행렬이 덧붙여졌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이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주님께 자신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으셨다.
이에 따라 교회는 해마다 맞이하는 이 축성 생활의 날에 수도 성소를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고, 축성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권고한다.
한편 한국 교회는 ‘Vita Consecrata’를 ‘축성 생활’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봉헌 생활의 날’ 명칭을 ‘축성 생활의 날’로 바꾸었다(주교회의 상임위원회 2019년 12월 2일 회의).
=====================
[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예수님의 탄생 후 40일이 지난 다음, 산모였던 성모님의 정결례와 함께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봉헌되는 예수님을 향해 예언자 시므온이 이야기한 대로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신 예수님을 기념하며 우리는 한 해 동안 주님의 빛을 밝혀줄 초를 축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복음 속에 봉헌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빛이 되시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은 묵상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을 구원할 빛을 먼저 눈으로 목격한 예언자 시므온은 하느님께 예수님에 대해 증언합니다. "주님,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그리고 이 어린 아이를 안은 어머니에게 또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이런 두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의 빛의 의미가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표현하는 의미와 그 빛의 내용이 모두 우리 앞에 드러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시메온이 하느님께 고백한 것처럼 이 빛이 세상에 와 비치게 된 이유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세상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빛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두를 그 비춤의 대상으로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당신이 선택하신 그 백성에게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며 이 빛은 온 세상, 이방인의 땅으로 퍼져 나가는 방법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곧, 하느님의 말씀이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에, 인간의 사람됨을 알려주신 그 내용을 밝혀 보여주시고 모든 이가 당신을 바라보고 본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원하시는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릴 길을 열어주시고자 사람이 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인간 구원의 시작이 그러했듯 작은 백성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사람이 되시어 이스라엘 사람으로 모든 이를 구원하실 삶을 이루신 것이 곧 예수님의 삶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시메온이 성모님께 던진 이야기는 훨씬 구체적으로 그 빛의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시켜 줍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그냥 아름다움이 아니라 마치 불의 뜨거움을 나타내듯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옵니다. 또한 매우 고통스럽고 아픈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이 빛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비춰 그들을 일으키기도, 또 쓰러뜨리기도 할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 빛이 걸어야 하는 길은 수많은 반대자들의 표적이 되어 그를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가장 고통스런 삶이 되리라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 고통으로 그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이 드러나게 되리라, 곧 그들의 어둔 부분이 이 빛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리라는 이야기가 더해집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하느님 자체이시므로 하느님의 진심이 사람들에게 드러남으로써 하느님이 사랑하시던 이들이 그들의 삶에 참 힘을 얻고 그 몸을 일으켜 하느님을 바라보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수많은 예언과 말씀을 어기고 살아온 이들에게 예수님의 존재는 그 자체로 그들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위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삶 앞에서 그들이 하느님이 믿어오던 신앙의 모습이 얼마나 추하고 왜곡되었던가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둘러 예수님을 없앨 수밖에 없는 잔인한 자신들의 삶의 진실을 드러내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사랑스런 사람을 죽이려는 그들의 생각이 하느님을 죽음으로 내 모는 것이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메온의 예언은 예수님 생애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과 그분의 운명, 그리고 그것으로 이루어질 하느님의 사랑의 완성 모두 말입니다. 하느님을 밝혀주는 빛, 그것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미사에서 주님의 빛을 밝힐 초들이 축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제단에서, 또 여러분의 기도 자리에서 그 작은 촛불을 처음으로 밝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그 큰 빛이신 예수님이 성전에 봉헌되는 작은 아기의 모습으로 성모님께 안겨있듯 말입니다.
그 빛이 자라고 자라 이 세상을 구원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초들에 불을 붙일 때도 이 빛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이 이방인들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빛이시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작은 불꽃들이 됩시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어둠을 밝히는 뜨거움으로 세상을 밝히고 구원을 전합시다.
=====================
[부산교구 차성현 암브로시오 신부님]
<두 다 하느님께 바쳐진 우리들의 삶입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께서 정결례를 치르시고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예수님의 봉헌의 의미를 오늘의 삶에서 되살리고자 봉헌 축일을 '봉헌 생활의 날'로 제정하고 전 세계 교회가 이를 기념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다양한 형태의 봉헌 생활이 있는데, 특별히 오늘은 모든 수도자와 수도 성소를 위하여 기도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제가 며칠 전에 받은 편지 한통을 읽어 드릴려고 합니다. 이 편지는 수도성소를 받고 외국에서 봉헌 생활을 하고 있는 어느 수녀님의 글 입니다. 오늘이 봉헌 생활의 날인 봉헌 축일 이라 더욱 마음에 와 닿을 것 같습니다.
"성령의 바람을 타고 중국 한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저희 수녀회가 공동체에 파견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정신 지체 아동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아이들은 모두 부모가 있지만 전부 부모로부터 위탁 받아 있습니다. 수도회에 입회하여 처음으로 수도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시작하는 저의 봉헌 생활은 먼저 저 자신부터 얼떨떨하게 만들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자유롭게 선교를 할 수 없습니다. 특히나 외국인 신분으로 선교의 삶이란 국내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우선 수도자란 신분을 드러내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곳의 학부모들이 저희들의 신분에 대하여 몹시 궁금해 하였습니다.
'국적이 다른 여자들끼리 왜 여기 와서 이렇게 함께 사는 걸까?' '남편들은 얼마나 너그럽기에 아녀자들과 저렇게 오래 헤어져 있는가?'
중국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호기심이었습니다. 처음엔 질문 자체가 재미있었지만 그것도 끝이 없이 계속되니까 너무 피곤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듣다 못한 중국인 우리 공동체 직원이 적당히 둘러대 주어 피곤함은 면했지만, 그 댓가로 저희들은 졸지에 아이 서넛을 한꺼번에 가진 유부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곳에서의 저의 봉헌 생활은 법적인 구속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함께하는 순수함과 함께 더욱 맛들여 갔습니다. 아이들의 연령은 5세에서 16세, 이들은 자폐아, 대뇌 척수증, 지진아, 다운증후군의 아이들입니다.
가족적인 분위기로 교육시키기 위해 모였지만 소수의 인원으로 24시간 이들과 같이 생활함이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수없이 반복해서 가르쳐야 하고 주위의 물건들이 모두 장난감으로 여기는 아이들은 일 저지르기를 밥 먹듯이 하므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악동(?)들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이 아이들은 저의 작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기억력이 짧고 이성적인 판단력의 부족이 그들의 가장 큰 어려움이긴 하지만 서로 용서하고 빨리 화해하는 모습, 있는 그대로 자기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단순함이 저를 항상 일깨웁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 뜻을 조금 알아들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조금씩 지날수록 아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생활습관들이 늘어나고 또 저희들의 보살핌이 그들을 위하는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는 학부형들로부터 감사의 말을 들을 때면, 마음속으로부터 '주님! 당신은 사랑이십니다.' 하고 감사드리게 됩니다.
봉헌 생활의 예언자적 성격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가르침을 온몸으로 느끼며, 가장 나약한 이들의 손과 발, 마음이 되어 함께 엮어 나가는 이 삶을 통해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랑을 한껏 체험합니다.
방학 때 집에서 가지고 온 껌을 꾸깃꾸깃 구겨서 좋아한다는 말 대신에 불쑥 내미는 그 순수함을 통하여, 또 이웃집 총각이 결혼식하는 것을 보고 와서는 무작정 결혼하자고 달려드는 그들의 천진난만함에서, 큰 죄 지을 줄 모르고 늘 명랑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저는 하느님 나라를 발견합니다.
하느님께서 죄에 물든 이 세상을 자비하심으로 돌보시는 까닭은 바로 이 깨끗한 영혼들의 순수한 삶의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갑자기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는 제 동생이 생각납니다. 그곳에서 수녀님과 똑 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졸지에 자식이 생겨 유부녀가 되어버린 수녀는 아니지만 진짜 아이 둘을 둔 유부남입니다. 본성이 워낙 선한 동생이라 아마도 수녀님 못지않게 열심히 아이들을 사랑하리라 믿습니다.
수녀님의 봉헌 생활에야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동생 또한 신앙인으로서 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미약한 봉헌의 삶을 살아가리라 믿습니다.
봉헌의 의미를 가슴속에 조용히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세례받은 모든 사람은 봉헌의 삶을 살아갑니다. 모두 다 하느님께 바쳐진 우리들의 삶입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매일 매일 헤아려보는 우리들의 봉헌의 삶입니다. 아멘.
=====================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각자에게 주어진 숙제>
오늘은 주님 성탄 대축일로부터 40일째 되는 날이다. 이미 5세기초부터 동방교회는 루카복음의 전사(前史)를 근거로(2,22-40) 모세의 율법이 정하는 성모 마리아의 정결례 축제를 예루살렘에서 지내기 시작하였다.
동방교회는 처음부터 1월 6일에 주님성탄대축일을 지냈기 때문에 정결례 축일은 성탄 후 40일이 되는 2월 14일이었다. 650년경 교황 마르티노 1세가 이 축일을 로마교회에 도입하면서 '마리아 빛의 축일'로 정하여 2월 14일에 지냈으나, 얼마 후 2월 2일로 변경되었다. 그 이유는 로마교회가 이미 336년경부터 12월 25일에 주님성탄대축일을 지내왔기 때문에 이날부터 40일째 되는 날이 2월 2일이기 때문이다.
중세기를 거치면서 동방교회는 오늘 축일의 핵심을 '주님의 성전봉헌'에 맞추어 주님 성탄사건을 마무리하는 의미로 거행하는 반면, 서방교회는 초 축성과 촛불행렬을 곁들여 성모 마리아의 축제로 발전시켰다.
서방교회는 이날 성전에 필요한 초들뿐 아니라 전기가 없던 당시 가정에서 기도를 드릴 때 필요한 초들까지 축성하여 속죄와 참회의 의미로 성대한 촛불행렬을 거행하였다.
1960년 전례개혁을 통하여 오늘 축일의 원초적인 의미에 비중을 실었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축일명을 '주님봉헌축일'로 확정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축일에 마리아의 자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아버지의 집에 봉헌된 아기 예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마리아와 요셉, 시메온의 예언 말씀과 한나의 역할도 상당히 부각된다.
예수가 비록 정상적인 부부관계에서 태어난 아기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스라엘의 모든 부모는 첫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는 봉헌례와 산모의 부정을 벗는 정결례를 치러야 했다.
야훼 하느님께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이집트의 모든 맏배를 죽여버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하게 하신 바로 그날 맏아들과 맏배를 야훼께 물러내는 계명을 내리셨다.(탈출 13,1-2.11-16)
모세가 정한 율법에 의하면 그 첫아들은 출생 30일이 되면서부터 회당이나 성전을 찾아가 제관 앞에서 봉헌례를 치러야 하며(민수 18,15-16), 산모는 아들을 낳은 경우에 1주간 부정기간과 33일의 정결기간을 보내고 40일째 되는 날, 딸을 낳은 경우에는 2주간 부정기간과 66일의 정결기간을 보내고 80일째 되는 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1년 된 양 한 마리를 번제물로, 비둘기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바치는 정결례를 치름으로써 부정을 벗고 정결을 찾아야 했다. 가세(家勢)가 어려우면 비둘기 두 마리만 바칠 수도 있다.(레위 12,1-8)
이에 루카복음사가는 마리아의 정결례와 예수의 봉헌례를 한데 묶어 같은 날에 치러진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22-24절) 이는 루카가 이중효과를 노리는 의도로서 예수의 부모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동시에 아기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 등장시킴으로써 예수를 "자기 궁궐(성전)에 나타나는 상전"(말라 3,1)으로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루카는 분명 늘그막에 아들을 얻은 엘카나와 한나가 젖을 뗀 아들 사무엘을 실제로 성전에 갖다 바친 이야기(1사무 1,24-28)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루카가 보도하는 마리아의 정결례와 아기 예수의 봉헌례는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이스라엘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으로 나타난다.
루카의 의도는 마리아의 정결례와 예수의 봉헌례라는 율법준수의 틀을 통하여 예수를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로, 야훼 하느님이 현존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주인으로 현현(Epiphania, 顯顯)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예수 현현의 목적은 두 예언자를 통하여 성사된다. 바로 자신을 봉헌하여 밤낮으로 성전에서 기도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던 예언자 시메온과 한나의 증언을 통하여 예수의 메시아성과 신성을 공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 시메온은 첫눈에 아기 예수를 메시아요,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의 구세주로 알아본다. 물론 시메온의 예지는 성령에 의한 것이다.(25절, 27절)
아기 예수를 두 팔에 안아든 시메온의 예언은 하느님께 대한 찬양의 말씀(29-32절)과 마리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34-35절)으로 짜여 있다.
물론 예언의 전체 내용은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하느님 자신의 계시이다. 따라서 시메온이 자신의 예지를 통하여 예수를 메시아로 통찰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메시아로 드러난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이다.
볼 것을 본 시메온은 이제 평안히 눈을 감게 되었고 메시아이신 예수는 이방인의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우뚝 서게 된다.
예언녀 한나는 결혼 7년만에 남편을 잃고 84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면서 성전에 몸담아 밤낮 없이 단식과 기도로 하느님을 섬겨온 사람이다.
과부로서 한나의 삶은 구차하고 가난하기가 이를 데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경건했을 것이다. 가난한 자가 하느님을 먼저 공경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한나는 오늘을 보기 위해 84년을 기다려 왔다.
한나의 삶은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들의 모범이다. 이스라엘의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임박한 메시아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던 자들이다. 한나는 이들을 대표하는 자로 묘사되며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교적 과부들의 가난하고 경건한 삶을 이끌 수 있는 모범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그녀가 시메온의 팔에 안겨있는 아기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보았고, 시메온의 예언을 밖으로 배달한다. 루카는 한나가 어떤 말로 사람들에게 메시아의 도래를 알렸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그것은 시메온의 예언이 어떤 말을 덧붙일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완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빛과 영광 속에는 반대와 갈등과 고통이 함께 들어 있다. 예수의 도래로 위기가 세상에 들어왔고 예수에게 이스라엘과 모든 백성들의 운명이 달리게 된 것이다.
예수탄생을 축하하러 왔던 목자들의 말을 이미 마음에 새기고 있던(2,19) 마리아는 오늘 시메온의 예언도 마음 깊이 새기면서 예수와 함께 하는 고통의 길을 걸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마리아는 이렇게 자기에게 약속된 놀라운 하느님의 계획을 하나씩 배워하고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리가 고통을 배우는 숙제를 하는 동안, 예수도 메시아로서의 자의식을 키워가야 하는 숙제를 받았고 세상은 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할 숙제를 받았다.
예수가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육적인 건강과 영적인 지혜를 갖춘(40절) 성인으로 성장하는 것은 예수 스스로가 메시아임에 대한 인식과 의식의 성장을 의미하듯이 세상 또한 메시아와 그 현존에 대한 자신을 성장시켜야 한다.
그때까지는 예수도 세상도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 시간은 성령의 시간이다. 성령 하느님만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계시며, 성령 하느님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또 선포하는 일을 도와주실 것이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봉헌의 삶>
루카 2,22-40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다,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라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봉헌의 삶>
나를 있게 하신
하느님 뜻대로 삶
나에게 오시는
하느님께 가는 삶
나와 함께하시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
나에게 주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삶
나의 품에 계신
하느님의 품에 삶
내가 되신
하느님처럼 삶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다림의 기쁨>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빕니다. 올 한 해도 주님의 축복을 충만히 받으시길 빕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아기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모세의 율법은“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셨고 만국의 빛이 되셨습니다. 봉헌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쓰임 받기를 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봉헌되었듯이 우리도 매순간 자신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제단의 초를 바라보며 자신을 불태워 빛을 밝혀야 하는 사랑의 응답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 사랑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를 위해 모두를 내어주신 그분처럼 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초는 자신을 녹여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희생을 통하여, 더 큰 사랑을 통하여 세상은 새롭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메온 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독실한 사람으로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라는 성령의 알림을 받았고,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메시아, 구세주가 장차 오리라고 선언하였지만 시메온은 메시아를 직접 보았습니다.
이사야서를 보면“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 52,10)고 기록하고 있는데 바로 이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였고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았으며 마침내 주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시메온은 성령께 순명하였기에 성령께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고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시메온은 기다림의 열매 앞에서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안히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만났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옛말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희망하는 대로 살아감으로써‘ 죽어도 여한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백 년을 살든 천 년을 살든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깊이 알아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신앙의 목적도 바로 구원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권력과 부가 아니라 주님을 차지해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열망이 있는 만큼 하느님의 뜻에 맞갖은 삶으로 기다림을 간직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시편 50,14)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봉헌은 우리에게도 우리의 봉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봉헌은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의롭고 독실하게 살아온 시메온은 성령과 함께 기다림의 삶을 살아왔고 그 안에서 위로와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내 삶의 자리가 바로 천상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천상을 갈망하는 만큼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가 구세주가 찾아오는 자리이며, 그 자리를 가꾸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순간을 사랑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지금 순간을 주님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언하였습니다.“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제물을 바칩시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히브 13,15) 온 마음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그리고 우리에게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거룩한 삶을 봉헌함으로써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빛이 되는 데 있어서 히브리서의 말씀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브 2,17) 주님께서 우리의 눈높이를 맞추어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만민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구원을 우리가 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있는 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혹 “우리가 그분께 드릴 것이 정령, 아무것도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 자체를 드리기로 합시다.”(마더 데레사) 내 일을 하지 말고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기다림이든지 그 간절한 기다림이 하느님 마음에 들어 기쁨이 되고 축복이 되길 바랍니다. 기다림의 열매를 가지고 주님을 증거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려고 기다리시며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려고 일어서신다. 주님은 공정의 하느님이시다. 행복하여라, 그분을 기다리는 이들 모두!”(이사 30,1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책을 읽다가 여검사의 초임 검사 때의 경험을 읽게 되었습니다. 초임 검사 때이니 얼마나 사명감이 투철할까요? 그런데 조사받는 사람이 이 여검사를 향해 계속해서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이 불쾌해서 “아가씨라뇨!”라고 짜증 섞인 한마디를 했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조사받는 사람이 “아! 그러면 아줌마입니까?”라고 반문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 여검사는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검사로 보이지 않으니, ‘검사’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인데 짜증을 냈던 것이 부끄러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듣고 싶은 소리가 있고, 또 듣기 싫은 소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듣기 싫은 소리를 듣는 말과 행동이 아니라, 듣고 싶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갖춰야 했습니다. 듣고 싶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말과 행동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그런 듣기 싫은 말을 한다고 짜증 내는 것은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로 듣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칭찬, 사랑, 기쁨, 행복의 말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내가 먼저 그 말을 하고, 그 말에 적합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행동하지 않으면서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하는 부끄러운 모습은 이제 그만두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 다음 사십 일째 되는 날에 주님 봉헌 축일을 지냅니다.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성전에 예수님을 봉헌하실 때, 시메온 예언자와 한나 예언자를 만나게 되십니다. 시메온 예언자는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30-32)라고 찬미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었습니다. 아마 아기 예수님께서도 이 말을 듣고 싶어 하시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정답을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또 한나 예언자 역시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기 때문에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보기 위한 간절한 마음으로 노력했기에, 실제로 아기 예수님을 직접 보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듣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내가 먼저 듣고 싶은 말을 해야 하고, 보고 싶은 행동이 있으면 내가 먼저 보고 싶은 행동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단순히 주님을 보고 싶다는 생각만 가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그에 걸맞게 생활해야지만 가능합니다. 적합한 행동을 하지도 않으면서 주님을 만나겠다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며 지극히 부끄러운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신성에 참여하는 봉헌>
주님 봉헌 축일인데 성탄 40일 되는 날 주님의 부모가 주님을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념하는 것은 주님 봉헌이 성탄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인데 생각해보면 이 축일의 의미가 인간적으로는 인간 부모가 주님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을 기념하는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 아버지가 아드님을 봉헌하시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어쩌면 주님의 봉헌은 하느님께 당신을 바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아버지 뜻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을 바치시는 것이고, 이것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성탄의 의미이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당신을 우리에게 봉헌하심은 우리도 우리를 당신처럼 봉헌하라는 뜻인데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를 봉헌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사람이 되신 그분의 신성에 우리가 참여하라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른 것에 바치지 않고 하느님께 바치면 감히 말하지만 우리는 제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주님께서는 처음 당신을 바쳐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심으로 인간인 우리가 당신 신성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고, 마지막 만찬 때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가 당신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길을 열어주시기는 하셨는데
아무리 열려있어도 우리가 들어가야 들어가는 것이듯
열린 길에 들어설지 말지, 신성에 참여할지 말지 선택은 우리 몫입니다.
우리에게 길은 열려있지만, 갈림길이라는 뜻입니다.
술만 먹으면 개차반이 된다는 말이 있듯 우리는 자신을 마구 굴려 개차반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을 귀히 여겨 귀인이 될 수도 있는데 이 갈림길에서 신성에 참여하는 길을 택하면 될 것입니다.
오늘 저의 강론은 원래 여기까지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심청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그러니 뒤의 얘기는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효녀 심청에게 자신을 바치면 아버지 눈을 뜰 수 있다는 제안, 곧 아버지의 눈과 자기의 목숨을 바꾸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심청은 물론 많이 망설여졌겠지만, 자신을 바치는 쪽으로 고귀한 선택을 했고 그 결과는 아버지의 눈도 뜨고 자신도 고귀한 왕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진 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나 요르단강물에 들어가시어 세례를 받으신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같은 헌신의 의미이고 같은 구원의 의미라는 말입니다. 자신을 바침으로 가난하고 비천했던 그의 신분이 왕비가 되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눈도 뜨게 하고 전국 모든 눈 먼 이의 눈도 덩달아 뜨게 하였지요.
우리도 심청이처럼 자신을 헌신한다면 주님 봉헌에 참여하는 것이요, 주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것인데 이 주님 봉헌 축일에 주님과 같은 봉헌의 삶을 살려고 수도자의 길에 들어선 나는 그 길을 계속 잘 가고 있는지 지금은 어디에 헌신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저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아름답고 복된 봉헌의 삶>
-은총, 선택, 훈련, 습관-
주님 봉헌 축일은 동시에 우리의 봉헌 축일입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한몸이 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주님 봉헌 축일이면 으레 생각나는 25년전 주님 성탄 대축일날에 쓴 고백시입니다. 여러번 인용했지만 인용할 때마다 새롭습니다. 여기서 물론 당신은 주님을 가리킵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수도자는 물론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는 이런 주님 향한 봉헌의 열정과 갈망이 있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참 좋아하는 봉헌성가 210장입니다. 오늘 시간되면 찾아 5절까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마음으로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2절까지만 인용합니다.
“나의 생명드리니, 주여 받아주시어
감사하는 맘으로, 찬미하게 하소서
나의 삶을 드리니, 주여 받아주시어
선한 일을 하도록 나를 인도하소서”
2.며칠전 존경하는 선배수도사제의 영명축일에 주고 받은 일부 내용입니다. 제가 은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기에 이에 대한 제 답변입니다. 다음 같은 요지의 말씀을 드렸고 내심 만족했습니다.
“수도자에게 은퇴가 어디 있습니까? 죽어야 끝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평생 전사요 주님의 평생 학인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되는 영적전쟁에 말씀공부입니다. 죽는 그날까지 싸워야 하고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3.하루하루 날마다 수도원길,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하늘길을 걸을 때 마다 충만한 행복을 느낍니다. 아루리 하늘 높은 나무라도 하늘에서 내려보면 참 작을 것입니다. “하늘이 높다하다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양사언의 시조도 생각납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 보시기엔 사람들이 아무리 잘났느니 못났느니 해도 결국은 도토리 키재기 일것입니다. 이런 자각에서 비로소 참된 겸손입니다.
그래도 하늘높이 하늘 향해 쭉쭉 자란 가로수들을 보면 내 봉헌 삶의 내적성장을 묵상하게 됩니다. 정확히 2009년에 심은, 14년된 작은 애기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이렇게 거목이 된 것입니다. 하루하루 봉헌 삶의 충실성을 상징하는 나무들의 성장입니다. 과연 몸은 노쇠해가도 내적으로 끊임없이 하늘의 하느님 향해 끊임없이 성장하는 삶인지 묻게 됩니다.
4.또 하나는 제 집무실 커다란 초록판 게시판입니다. 흡사 초록빛 하늘을 연상케 합니다. 요즘의 각별한 이용에 행복합니다. 집무실에서 일하다 보면 참 어려운 사정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럴 때 마다 메모지에 이름을 써서 초록빛 하늘 같은 게시판에 붙여 놓고 자주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곤 합니다.
그대로 하나하나가 봉헌된 귀한 하늘의 별들같은 존재로 생각됩니다. 오래전에 써놓고 애송했던 ‘별’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아마도 우리를 그리워하는 주님의 마음이 이러할 것입니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병이 된다 하지만
당신 향한
내 그리움은
기도가 되고 별이 됩니다
당신 영혼의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수호천사 별이 되어
언제나
당신을
비출 것입니다”-1997.4
오늘은 주님의 봉헌 축일입니다. 주님의 봉헌과 더불어 우리의 봉헌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봉헌의 사랑, 봉헌의 기쁨, 봉헌의 아름다움, 봉헌의 축복, 찬미의 봉헌, 감사의 봉헌등 끝이 없습니다. 세상에 봉헌보다 더 아름답고 심오한 말도 없을 것입니다. 삶의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답도 봉헌뿐입니다. 사람이라하여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됐기에 봉헌이란 말을 이해하지만 하느님을 모르는, 믿지 못하는 이들은 도저히 봉헌이란 깊고 아름답고 신비한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봉헌은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봉헌은 우리 삶의 정의입니다. 봉헌은 인간 존엄의 근거입니다. 봉헌은 우리의 신원이자 정체성을 뜻합니다.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불림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림 받았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유대 신비주의자 랍비 여호슈아 헷쉘의 고백이 진리입니다. 시간되면 김춘수 시인의 ‘꽃’도 읽어보시며 우리의 복된 봉헌자이자 성소자로서의 신원에 대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막연한 봉헌이 아니라 우리는 확실히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대상이 있으니 바로 주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2018.10.16
이렇게 주님을 고백할 수 있음이 바로 우리의 자랑이요 행복입니다. 바로 우리는 이런 봉헌의 모범을 오늘 말씀에서 만납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 교회 하늘에는 무수한 헤아릴 수 없는 봉헌 삶에 충실했었던 성인들이 별들처럼 교회를, 어둔 세상을 환히 비추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부모가, 시메온 노인이, 한나 할머니가 봉헌 삶의 모범입니다. 다음 세 말마디가 이를 입증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예루살렘에는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평생 의롭고 독실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나이가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모두가 하루이틀 주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우리 정주의 수도자들처럼 항구히, 한결같이 평생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지금도 이런 봉헌 삶에 항구한 이들이 곳곳에 많이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하느님만이 아시는 익명의 성인들입니다.
봉헌의 축복입니다. 봉헌해서 축복도 받지만 봉헌 자체가 보상이요 축복입니다. 봉헌의 삶이 주는 깊은 내적 평화와 안정입니다. 봉헌으로 텅 비워진 내면에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니 말그대로 텅빈 충만의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도대체 이보다 더 큰 행복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봉헌의 축복은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에 있습니다. 보십시오. 제1독서 말라기의,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예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져 시메온은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고 감격에 벅차 찬미가를 부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우리가 매일 끝기도후 잠자리에 들기전 바치는 시메온의 찬가입니다. 날마다 잠자리에 들기전 이 찬가만 잘 바쳐도 선종의 은총일 것입니다. 한나 역시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 부모에 그 아들입니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의 부모는 갈릴래아에 있는 나자렛 고향으로 돌아가 평생 봉헌 삶에 충실했음이 분명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하니 그대로 봉헌의 축복입니다.
사랑의 봉헌, 봉헌의 기쁨, 봉헌의 축복, 봉헌의 행복, 봉헌의 아름다움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니, 봉헌의 삶이 바로 참행복의 열쇠가 됩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 봉헌 축일이자 동시에 우리의 봉헌 축일입니다. 하루하루 모두를 주님께 사랑으로 봉헌하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날마다 봉헌과 더불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부활의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도 있습니다. 봉헌의 빛이자 봉헌의 어둠입니다. 봉헌의 기쁨과 평화만 있는게 아니라 봉헌의 슬픔도 있고 아픔도 괴로움도 고통도 있습니다. 이 모두를 기꺼이 받아들여 봉헌할때 모두가 축복이 됩니다. 성모님 역시 시메온의 예언대로 반대받는 표징의 아드님으로 인해 늘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아픔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병고나 상실의 아픔도 괴로움도 슬픔도 불안도 두려움도 통째로 모두 주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만 아니라 부정적인 모든 것들도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님께 봉헌할 때 모두가 축복이 됩니다. 이래야 삶은 짐이 안되고 선물이 됩니다.
하루하루 일상의 봉헌 삶에 충실할 때 마지막 봉헌의 축복된 죽음입니다. 봉헌의 은총, 봉헌의 선택, 봉헌의 훈련, 봉헌의 습관입니다. 바로 이를 가능하게 하는 우리가 평생 매일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이 거룩한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봉헌 삶의 요약과 같은 제 좌우명 고백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2012.9.15.-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2,22)
<봉헌의 삶을 살자!>
오늘은 예수님의 부모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그리고 지금 봉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수도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맏아들, 곧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첫 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탈출13,2)는 모세에게 이르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오늘 복음(루카2,22-40)은 '예수님의 봉헌 모습'과 '그 축복되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직접 목격한 시메온과 한나 예언자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시메온과 한나는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가까이 했습니다. 성전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기쁨의 찬미가(시메온의 노래)를 부릅니다.
예수님의 봉헌은 이천 여 년 전에 일어났던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매일 우리를 위한 속량,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시기 위해 오시기 때문입니다. 매일 거행되는 미사가 바로 그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속죄 제물이 되어 오시는 예수님, 그렇게 하느님께 봉헌되신 예수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모시고, 우리도 하느님께 나 자신을 기쁘게 봉헌하도록 합시다!
'봉헌의 삶!'
봉헌의 삶은, 예수님의 코드에 나의 코드가 맞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일치되는 삶입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느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비오니, 사람이 되신 외아드님께서 오늘 성전에 봉헌되셨듯이, 저희도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저희 자신을 봉헌하게 하소서."(본기도)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께 바쳤다."(루카 2, 22)
제대 위의
촛불은
하느님을 향해
타오릅니다.
촛불은 촛불의
고유한 향기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바쳐진
우리들 삶입니다.
봉헌은
구체적인
봉헌 생활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는 것이
참된 봉헌입니다.
주님의 생활 방식이
바로 봉헌입니다.
기도도 봉헌이고
청빈도 봉헌이고
정결도 봉헌이고
순명도 봉헌입니다.
성숙한 삶은
자신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나는
봉헌으로
이어집니다.
봉헌은
분열이 아닌
일치의 삶입니다.
그래서
봉헌의 삶은
불만과 비판
불평과 고집을
멈추고 사랑의
삶으로 나아갑니다.
가장 깊은 근원에
계시는 사랑의
하느님께 오늘을
봉헌합니다.
사랑도 봉헌이고
창조도 봉헌이고
진리도 맡겨드림의
봉헌입니다.
형제들의 공동체는
이렇듯 다양성을
통하여 열려있으며
기도와 사랑
봉사와 말씀으로
복음화됩니다.
세속화의 중심에는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봉헌이 없습니다.
수도 생활은
공동체 생활이며
하느님의 가치를
따르는
축성 생활입니다.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릅니다.
하느님 사랑의
자녀다운 삶이란
하느님에 의해
시작되고
실현되는
축성의 고유한
가치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역동적이고
순수하며
신비적이며
직접적인 삶의
일치는 축성입니다.
축성 생활을
살아가는
수도자들을 위해
기도하여 주십시오.
초 봉헌처럼
봉헌을 먹고사는
수도자들의 삶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사랑의
선물임을
믿고 희망으로
가장 좋은
오늘을 봉헌합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