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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이 뚜렷하다 / 문인수(1945∼ )
해 넘긴 달력을 떼자 파스 뗀 흔적 같다.
네모반듯하니, 방금 대패질한
송판냄새처럼 깨끗하다.
새까만 날짜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나가,
땅거미처럼 먹물처럼 번진 것인지
사방 벽이 거짓말 같이 더럽다.
그러니 아쉽다. 하루가, 한 주일이, 한 달이
헐어놓기만 하면 금세
쌀 떨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 해가 갔다.
공백만 뚜렷하다.
이 하얗게 바닥난 데가 결국,
무슨 문이거나 뚜껑일까.
여길 열고 나가? 쾅, 닫고 드러눕는 거?
올해도 역시 한국투자증권,
새 달력을 걸어 쓰윽 덮어버리는 것이다.
문 시인의 집에는 방마다 '기증용 달력'이 걸려 있다. 약 속이 있으면 숫자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연락처를 적기도 한다. 바깥일을 보다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 달력에 쓴 메 모를 불러달라고 한다. 익숙했던 우리 가정의 풍경이다
살가웠던 달력을 뗀 자리. 시인의 흰 머리처럼 허옇다 "빈자리를 처음 봤을 때 우리네 삶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 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삶의 현장을 드나드는 문짝이나, 삶의 끝에 만나는 관 뚜껑 같기도 했습니다.
하얀 문은 저승으로 통할 것 같다. 시인은 껄껄 웃는다. "사방 벽을 더럽히는 삶의 내용이야말로 싫든 좋든 산자 의 몫이요, 희망이죠. 누가 저 문을 열고 나가고 싶어 하 겠어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지요.
김요일 시인은 "문인수의 시는 번지르르하지 않다. 곳곳 에 세월의 때, 상처의 때, 욕망의 때가 덕지덕지 붙어 있 다. 하지만 그는 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언어를 통해 비루 한 일상을 깊고 아름다운 사유로 치환시킨다"고 추천 이 유를 밝혔다 "앞으로 살아야 할 저 새까만 날짜들이 흰 여백을 더욱 분명하게 하리라, 뒤에 숨어 있는 적막이 남은 시간들을 더욱 간절하게 하리라. 이것이 가난한 시인이 지닌 지상의 유일한 '투자증권'인 셈이다." 손택수 시인의 추천사다.
이원 시인의 추천 사유는 이렇다. "해 넘긴 달력을 떼어 낸 자국이 있는 곳에 `올해도 역시 한국투자증권'을 아무 렇지 않게 내걸 수 있다.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다만 시간을 살아가고 싶은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