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호 다미아노 신부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사무엘기 상 4,1ㄴ-11
마르코 1,40-45
측은지심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셨습니다.
제아무리 영성의 대가요 말씀의 탈렌트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의 사람됨이 부족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강론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데 그와 함께 생활하거나 일하는 사람들은
고개를 흔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독선적이고 괴팍하고 손님에겐 친절하지만 가족에겐 짜증내고….
그런 류의 사람은 참 힘듭니다. 인격이 ‘덜된 사람’입니다.
머리가 좋아서 ‘난 사람’은 되었지만 ‘인간됨’은 멀었다는 뜻입니다.
예수살이가 ‘예수의 인간성 닮기’를 수덕생활의 방법론으로 삼는 것은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이 되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됨에 완전한 분이십니다.
더 이상 좋은 품성을 찾을 수 없기에 하느님이 아니고선 그런 인간성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인간이면서 하느님’이십니다.
유학 사상에서는 ‘사람 됨’이 교육의 목적이었습니다.
예의염치를 아는 인의예지의 인간을 만드는 것이 교육입니다.
인의예지의 품성은 인간의 네 가지 본성, 즉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에서
나온다고 보았는데 그의 자양을 강조했습니다.
그중 품성론의 으뜸되는 것이 측은지심입니다.
타인의 불행한 처지를 자기 처지로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의 힘은 바로 이 측은히 여기며 손을 내미는 데서 온 것입니다.
인간의 좋은 품성은 하늘이 알아주는 덕이고,
긍휼한 마음은 기적을 이끌어내는 힘입니다.
서울대교구 박기호 다미아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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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덕 베드로 신부
연중 제1주간 목요일
1사무엘기 4,1ㄴ-11 마르코 1,40-45
찬미예수님, 우리 신자 분들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은 어떤 밥일까요? 바로 어머니가 정성을 들여서 만들어 주신
따뜻한 밥입니다. 그렇습니다. 같은 쌀과 같은 반찬이라도 서로 다른 맛과 향을 느끼는 것은
비단 기분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엄님이 해주신 밥을 먹어본지 오래되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간 이 후, 신학교에서 해주는 밥과 반찬, 그리고 사제가 되어서는 사제관 식복사
자매님께서 해주신 밥과 반찬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신학교의 밥과 사제관의 밥을 먹다가 보니
오랜만에 어머님이 해주시는 음식을 먹었더니, 전에 느껴졌던 맛과 향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많은 질문들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이 처한 환경과
그 느낌들이 달라져서이기도 하겠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나에게 분명하게 요구하시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신학교 1학년 때, 교수신부님께서 한 신학생에게 이러한 질문을 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비춰지는 하느님은 어떠한 하느님이냐고.
한 신학생은 구약 성경에서 비춰지는 하느님은, “분노의 하느님, 심판의 하느님, 그리고 정의의 하느님,
질투의 하느님”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 신학생이 일어서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자비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어머니 같은 하느님”이라고.
교수신부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실상 여러 가지 모습의 하느님을 대답한 그대로 그 신학생들의 하느님 관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우리 신자 분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어떠한 모습이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씨앗이 뿌려진 밭과 더불어 그 열매의 결실들에 대해서도 듣게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간혹 어떤 신자 분들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떤 잘못을 해서 하느님께서 이러이러한 벌을 주시는 것이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잘못을 들어서 벌을 주시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지만, 결국 아담과 하와가 에덴을 떠날 때,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셨고,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다른 이들이 카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시를 해주셨고, 세상이 어지러워 홍수로 멸하실 때, 노아와 그 가족들,
그리고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들까지도 당신은 방주에 태우고 손수 문을 닫아주십니다.
그리고 인간이 죄를 지어 악의 늪에 빠져들 때, 당신의 외아드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사랑의 참된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당신 외아드님의 희생으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 마음 좋은 토양에 뿌려져서, 복음에서 나오듯 커다란 결실을 맺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 당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 제가 대령했나이다” 아멘
인천교구 민경덕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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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1주간 목요일
1사무엘기 4,1ㄴ-11 마르코 1,40-45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개신교와 천주교는 같은 하느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습니다.
개신교와 천주교회는 믿음의 방식에서 몇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개신교회는 말씀이 중심이 되지만 천주교회는 말씀과 성사(聖事)가 중심이 됩니다.
개신교회는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성상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천주교회는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기에 다양한 성상을 인정합니다.
집에는 예수님의 고상, 성모상이 있습니다.
성당에도 제단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고, 성모상은 물론 성인들의 성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천주교 신자들은 ‘묵주’를 지니고 다닙니다.
묵주기도는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는 좋은 기도입니다.
저도 매일 아침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세례를 받는 새 신자에게 대부, 대모는 성경책과 더불어 성물을 선물해 주기도 합니다.
차를 축성하면 차에 성물이나, 묵주를 걸어 놓기도 합니다.
성물을 통해서 신앙생활에 도움을 받는 것은 좋지만,
지나치게 성물에 의지하는 것은 건전한 신앙생활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계약의 궤”를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필리스티아인들과 자주 전쟁을 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하느님의 계약의 궤’를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에서 패배를 하였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져온 계약의 궤를 두려워하면서도 단결을 하였고,
힘을 합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싸웠고, 이겼습니다.
“계약의 궤”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책’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물론 계약의 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상징이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단결과 하나 된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군사가 있었고, 계약의 궤가 있었지만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에서 패배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단합된 힘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계약의 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는 표징이나 부적이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물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신앙을 지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표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표징 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새가 좌와 우의 날개를 사용해서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서 날아가듯이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2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오늘 나병환자가 보여 주었던 예수님께 대한 확신과 믿음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자신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는 확신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그렇게 되어라.”
다른 하나는 믿음에 대한 실천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집에 있는 성모상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에 걸린 묵주가 나를 사고에서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의 전구를 구하며 성모님께서
보여 주셨던 참된 신앙의 길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묵주기도를 하면서 준법운전, 안전운전, 양보운전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성모상과 묵주는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성물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키우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최선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계약의 궤”처럼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나의 신앙을 키우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사랑을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온전히 주님께 마음을 열었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하게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병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김연아 선수가 묵주반지를 끼고, 성호경을 하는 것은 선교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한 행동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겉모습은 신앙인인데, 삶은 하느님의 뜻과 다른 모습이라면
오히려 신앙에 대한 거부감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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