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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6일(주)
* 시작 기도
주님...
간밤에는 잠을 자지 못하고 까만 밤을 하얗게 새웠습니다.
오늘 주일이고 공동체로 모여 예배해야 하는데 지금 정신이 몽롱한 것이 큰일입니다.
안 그래도 주일이면 마음이 떨리고 조급해지는데 나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주의 긍휼이 아니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오니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연약하여 넘어지기 잘 하는 나에게 주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밤새 오염된 나의 영혼을 주의 보혈로 씻으사 간절히 원하오니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옵소서.
주 성령께서 나를 전후좌우로 두르사 영적 강인함을 더하여 주소서.
주의 자녀들이 영육으로 연약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의 강한 오른손으로 붙잡아 주시고 자신의 처음 상태인 먼지(히, 아파르, 땅의 흙)임을 깨달아 더욱 겸손하여 주님의 강함을 더 깊이 체험하는 이들이 되게 하옵소서.
이 하루도 하늘의 은혜를 내려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창 43:25-34
제목 : 형들이 요셉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다.
25 그들이 거기서 음식을 먹겠다 함을 들었으므로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이 정오에 오기를 기다리더니
26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
27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이르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
28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
29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30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31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32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33 그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의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34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고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 나의 묵상
애굽 곧 요셉의 집에 도착한 형들은 요셉과 약속한 정오가 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되어 요셉이 집에 들어오자 그의 형들도 요셉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요셉에게 주려고 가져온 예물을 드리고 요셉에게 엎드려 절을 하였다.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묻고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다.
이에 형들은 아버지가 평안하며 지금도 살아계신다고 말한 후에 다시 한 번 요셉에게 머리를 숙여 절하였다.
한편 요셉의 눈에 자기의 친동생 베냐민이 들어왔다.
이 아이가 막내 동생이냐고 물은 후에 그를 축복한다.
동생을 향한 그의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올라서 급히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난 후에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감정을 감추고 음식을 차리라고 명하였다.
하인들이 요셉의 상과 형제들의 상 그리고 함께 먹는 애굽 사람들의 상을 따로 차렸다.
그 이유는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 앞에 앉을 때 요셉이 그들의 나이 순서대로 앉히는 것을 보고 서로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또한 요셉은 자기의 상에 있는 음식을 형들의 상에 갖다 주었고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다섯 배나 많이 주었다.
이에 요셉의 형들은 요셉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다.
요셉은 아직 자기의 형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그들이 자신의 형들임을 본인은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요셉은 자기 앞에 형들과 자기의 친동생 베냐민이 있다는 것에 굉장히 감격하며 속으로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게다가 지난 첫 번 양식을 사러 왔을 때도 이미 그의 형들이 자기에게 절을 하였던 것은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확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요셉은 형들이 자기에게 절을 하는 것을 볼 때에야 자신이 20여 년 전에 꾸었던 꿈을 생각해내었다.
(창 42:9a)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이제 그들이 두 번째 양식을 사러 온 지금도 요셉에게 절을 한다.
그것도 한 번만 아니라 요셉의 집에 가서도 또 한다.
이는 요셉의 꿈이 하나님이 주신 언약적 꿈이었음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요셉은 아버지의 안부를 물음과 동시에 그의 동생 베냐민을 보면서 그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안방으로 들어가 실컷 울고난 후에 그 감정을 가라앉히고 형들에게로 나왔다.
그리고 형제들과 잔치를 벌인다.
그들을 나이 순서대로 앉히고 자기 상에 있는 음식을 형들의 상에 갖다 놓아준다.
그리고 자기의 친동생인 베냐민에게는 먹을 음식은 다른 사람들보다 다섯 배나 많이 갖다준다.
그들이 요셉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다.
이는 영락없는 하나님이 배설하시는 잔치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 모여 하나님과 언약식을 가진다.
이 언약식은 짐승의 피로 맺는 언약이다.
짐승의 피로 맺는 것은 곧 그 짐승을 죽여야만 얻을 수 있다.
이것은 곧 요셉의 형들에게는 무덤과 같은 상황을 표상한다.
그들은 이미 요셉에게 올 때부터 무덤과 같은 상황이었다.
양식만 아니라면 단연코 오고 싶지 않은 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 번 자기들이 양식을 사려고 가져간 돈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다시 자기들의 양식을 담은 자루에 넣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한 사람이 없었지만 그것으로 트집을 잡으면 영락없이 걸려들 것이 뻔하기 때문에 훔치지 않았음이 확실함에도 그들이 덫에 걸린 쥐 마냥 마음을 졸이며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뿐 아니라 막내 동생인 베냐민을 데리고 요셉에게로 가면 그가 베냐민을 어떻게 할지 알 수 없기에 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그들의 가슴을 졸이는 또 하나의 무덤이었다.
이런 무덤의 상황에서 그들은 전전긍긍하면서 요셉의 앞에 선다.
그런데 애굽의 총리인 요셉이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아버지의 안부와 베냐민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하고 음식을 차리라고 한 다음에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이처럼 짐승의 피로 언약식을 맺은 이스라엘 곧 모세와 아론,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70명의 장로들은 하나님의 산, 시내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과 잔치를 가진다.
(출 24:9-11)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70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본디 하나님을 뵙는 자는 죽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이 흡족하시고 기쁘셨던지 그들이 하나님을 뵈었음에도 그들을 손대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들과 함께 잔치를 즐기셨다.
요셉의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던 형제들 역시 요셉으로부터 언제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서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음식을 차리고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다.
물론 요셉은 아직 자신의 정체를 말하지 않았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횃불 언약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그의 자손들의 상태와 상관없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일방적인 언약을 맺으신다.
이를 가리켜 신학적 용어로 편무(片務) 언약이라 한다.
요셉 역시 그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지만 이제 그의 형제들과 아버지 그리고 그의 모든 가족들을 책임질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 흡족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창세전에 말씀으로 존재하셨다.
그는 항상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를 기뻐하는 존재였으며 아버지 또한 그 아들을 보면서 너무 기뻐하셨다.
(잠 8:22-23;30-31)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아들)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아들)가 세움을 받았나니/ 내(아들)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요 15:10a)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그 아들과 함께 창세전에 한 가지 약속을 하셨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어 그들에게 영생을 주자는 약속이었다.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창세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이처럼 창세전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아담을 지으셨다.
그리고 이 아담이 영생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창세전에 아들을 육신으로 보내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작정하심대로 아들이 오셔야만 했다.
그러면 그 아들을 믿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은 말씀이신 아들이 육신으로 오시기 전에 범죄하고 만 것이다.
때가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육신을 입고 오신 아들에게 한 가지 사역이 추가된다.
그것은 아담의 범죄를 말갛게 씻어줄 십자가를 먼저 지시고 또한 무덤에 장사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죽음과 함께 무덤에 장사되셨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부활의 능력을 입혀주셨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여러 제자들과 형제들에게 나타나시는 현현의 은총을 베푸셨다.
이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존재적인 복음과 함께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아들이 메시야로서 행하신 구속사건(십자가죽음, 무덤에 장사됨, 부활, 현현)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
나아가 나도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그 사건 안에 함께 참여할 때 영생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런 영생의 삶을 누리는 것이 우리 주님과의 연합이며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삶이다.
(요 6:54-57)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곧 아들의 살과 피를 먹는 자는 날마다 그와 함께 영생을 누리며 천국의 기쁨을 누린다.
나는 이 진리를 알지 못하였다.
그저 막연하게 예수 믿고 이 땅에서 잘 되는 복을 얻고자 애를 쓰는 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끊임없는 고통이 지속되었다.
나는 나름대로 예수를 잘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왜 도대체 이런 고난이 끊이지 않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기를 예수를 믿어도 삶은 그저 그런 것이구나 하고 체념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체념하며 살던 나에게 복음이 찾아왔다.
이 복음이 나를 살게 하였다.
나에게 고난이 찾아온 것은 그저 우연히 온 것도 아니요 나를 하나님께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부르심의 사인이었던 것이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저 우연히 나에게 그런 고난과 고통을 주실 리 만무하시잖은가?
분명 어떤 이유와 목적이 있으실 것이다.
나는 복음을 통하여 그 이유와 목적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릎을 치며 쾌재를 불렀다.
과연 그러면 그렇지, 하고 말이다.
이 복음이 나를 살게 한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 아들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으며 그 사랑이 그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 사랑이 내게 복음이 되어 찾아오셨으며 주님의 못 박힌 손과 발을 나의 온 몸으로 받게 하신 것이다.
나는 그 분의 흘리신 피와 장사되신 그 무덤에 함께 연합한다.
나 비록 먼지요 티끌 같은 존재일지라도 온 몸으로 우리 주님을 용납한다.
그리고 나 또한 용납할 수 없는 나를 용납한다.
내 안에 우리 주님 곧 아들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 생명으로 오늘 이 시간이 기쁨과 평화로 가득한 영생을 누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의 죄로 인하여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나이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이 나를 지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일어나 아버지 품으로 들어가나이다.
고개를 들 염치도 없고 주께로 나아갈 면목이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뻔뻔스러울지라도 파레시아로 담대히 아버지 품으로 나아가는 일이오니 나를 붙들어 주소서.
내 영으로 주를 기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내가 영으로 주를 예배합니다.
다함이 없는 아버지의 사랑 앞에 오열하며 나아갑니다.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시면서 즐거워하였던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이 부러운 것은 왜일까요?
하지만 나는 우리 주님의 얼굴에 비친 아버지의 영광이 내 마음에도 임하여 그 영광을 보오니 참으로 감격스럽고 영광스럽습니다.
주님의 구원이 어찌 죄인 중에 괴수인 저에게도 미쳤을까요?
그저 감사와 감격뿐입니다.
날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