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경은 바스락거리는 치맛자락의 한쪽을 살짝 들어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건만 일찌감치 일어나 단장부터 하고 아침인사를 하러 다니자니 걷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감기니 미칠 노릇이었다.
태경은 눈을 비비적거리며 길안내를 맡고 있는 내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나저나 대체 어디까지 가야하는 것인지. 궁이란 곳이 넓기는 넓은 모양이었다. 걷기 시작한지 꽤 되었는데도 아직 도착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니. 졸린 눈을 하고 있는 태경으로써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옹주마마, 드셨사옵니까.”
임금이 있는 편전(便殿)에 도착하자 상궁이 나와 태경에게 꾸벅 절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에 더불어 같이 옆에 있던 나인들까지 허리를 굽혔다.
태경은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은, 그것도 머리가 희끗한 상궁이 아직 스물도 채 되지 않은 태경에게 완전히 허리를 굽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리 신분차이 때문에 그런다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전하! 옹주마마께오서 드셨사옵니다.”
태경이 방문 앞에 서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내관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태경은 잠시 방 앞에 서 있는 신하들을 쭉 둘러보았다. 내관 둘에 상궁 셋, 그리고 나인들 넷.
방문 앞에서만 이리 많은 이들이 지키고 서 있으니 구린 냄새 한번 내뿜기도 힘들 것 같다. 임금이 편한 것만도 아닌 듯싶다.
“어서 들라하라.”
드디어 방 안에서 위엄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문 양옆에 서 있던 나인들이 문을 염과 동시에 상궁들 중 최고령 상궁이 나지막이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마마.”
별세계에 떨어진지 3일 만에 처음으로 왕을 만나는 자리였다. 태경은 침을 꼴깍 삼키며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혹여 잘못하는 일이 있게 될까봐 심장이 오들오들 떨렸다. 태경은 마음을 굳게 먹고 임금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임금 앞에는 관료 하나가 앉아있었다. 누구이기에 이렇게 이른 시간에 주상전하와 독대를 하고 있는 거지?
이름 모를 이가 태경을 보고는 말없이 허리를 꾸벅 숙여 절을 하였다. 태경 역시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를 하였다. 절을 하는 이의 정체가 몹시도 궁금하였지만 태경은 눈길을 이내 거두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임금에게 입을 떼었다.
“문후 여쭈옵니다.”
태경은 천천히 큰절을 올렸다. 예절수업에 배웠던 큰절하는 법을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태경이 절을 하고 자리에 앉자 임금이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는 따뜻한 눈빛으로 태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예판대감하고 태경이 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예판대감? 태경은 임금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예판대감이라면 경빈이 말하던 태경의 시아버지가 될 사람이었다. 이럴 때는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한단 말인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하나? 아니면 오랫동안 사모하던 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니 좋다고 헤헤 웃어야하나?
경빈에게서 들은 대로라면 오랫동안 예판대감 댁으로 시집가고 싶어 안달한 태경이 아니었던가. 분명 임금과 예판대감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면 혼례에 관한 것이라 생각한 태경은 마음이 복잡해져 왔다.
그런 태경의 얼굴을 보던 임금이 허허 웃으며 뒤에 앉아있는 예판에게 말을 건넸다.
“예판! 옹주가 몹시 놀란 모양이오. 내 예판하고 사돈을 맺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주면 옹주의 얼굴이 어찌 변할까나?”
허억. 태경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자신을 쳐다보자 임금이 더욱 더 크게 웃음소리를 내며 이번에는 태경에게 말을 건넸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넣어두었던 정인과 이제 혼례를 치르게 되었으니 이제 세상이 모두 내 것 같을 것이야.”
껄껄 웃는 임금의 웃음소리에 태경은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니, 이렇게 놀려도 되는 거야? 사람을 바로 앞에 앉혀놓고.
태경은 얼굴에 벌게져 있을까 고개를 차마 들지 못했다. 행여 그러다 임금이 또 짓궂은 이야기를 할까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임금의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헛기침을 한 임금이 다시 위엄 있는 목소리로 예판에게 말했다.
“예판! 내 아비로써 하는 부탁이니 앞으로 옹주를 잘 보살펴 주시오.”
“전하!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소신, 전하의 뜻을 받들겠나이다.”
임금의 목소리와는 또 다르게 위엄 있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태경은 뒤돌아보고픈 마음이 들었다. 잠깐 얼굴을 본 것이어서 다시 보고픈 마음이 들었다. 얼굴 생김새가 참 호감 가는 형이었는데.
“내 예판의 됨됨이를 알고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는 않소. 더불어 예판이 왕실과 얽혀드는 것을 원치 않아하는 것 또한 알고 있소. 내 그대의 뜻을 받아들일 터이니 걱정은 붙들어 매도 좋을 것이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태경은 왕과 예판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제 정오께에 후원으로 산보나 나갈까 싶어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나이 어린 나인들이 자기네들끼리 쑥덕거리는 소리를 주워들었다. 다 맞는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대화를 들어보니 어느 정도는 확실한 이야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대체 예판대감의 첫째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리도 궁녀들이 얼굴을 붉히며 이야기꽃을 피운단 말인가. 궁녀들이 하는 이야기로는 태경이 옹주로써의 위엄을 버리면서까지 그 사내를 마음에 두고 있었단다. 오죽이나 야박하게 옹주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던지 여기저기서 말이 많았지만 오죽이나 사내의 외모가 여인네 못지않게 고우며 또한 문무 역시 어려서부터 출중한 것은 물론이요, 여기저기서 장성하면 나라의 큰 재목이 될 것이라는 신임을 얻고 있는 자라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또한 임금조차 사내를 흡족히 여기고 있었으니 오죽하랴. 다만 죽어나는 것은 옹주의 애끓는 순정이었으니….
만약 사내가 인물값을 하여 여인네를 희롱하고 다니는 방탕한 자였다면 옹주의 마음이 돌아섰겠지만 지금까지도 기방 한번 다녀본 적이 없다하니 말은 다한 것이었다.
남정네들은 저들끼리 모여 목석이다, 불구자다 말이 많았지만 여인네들 사이에서는 그야말로 이보다 더 잘난 사내는 없다 칭송을 하고 떠받들고 나서니 투기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밖으로 그런 투기의 마음조차 나타내지 못하고 그저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으니, 옹주가 흘리는 눈물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깝게 만든다며 궁녀들이 쑥떡거리고 있었다.
그런 탓에 옹주를 위하는 측근들은 대략 십여 년 전 예판대감의 형수였던 수연옹주로 인해 이루어졌던 두 사람의 만남이 잘못된 만남이라며 혀를 쯧쯧 차고 있었다.
어린궁녀들이 떠든 것은 이 이야기뿐만이 아니었다. 예판의 첫째 도령이 어찌나 무정한지 말로 할 수가 없다 하였다. 워낙 입이 무겁고 올곧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 터라 다정다감하지는 않는다하여도 인간미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가난에 찌들어 제대로 씻지도 못해 검은 몸뚱어리를 한 불쌍한 아이나 아무리 신분이 천것이라 하여도 나이 먹은 노인네들에게는 깍듯이 예절을 차리는 이가 바로 그 사내였다.
헌데 유독 당신에게 사모지정(思慕之情)을 갖고 있는 옹주에게는 쌩쌩 찬바람만 일으키니 아랫것들은 물론이요, 예판대감 내외가 민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했다.
어린옹주가 사모하는 마음에 어떻게 해서든 얼굴을 보게 되면 그 때마다 딱딱하게 격식을 차리니, 그에 할 말 없이 기죽어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옹주의 모습 역시 여러 번이라 하였다.
태경은 궁녀들의 말을 들으며 어째 자신의 모습과 겹쳐지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태경이 어제 들었던 이야기에 잠시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임금이 어느새 준비되어진 종이에 붓을 놀리고 있었다.
“예판! 이리 와 이것을 받으시오.”
임금이 말하자 예판대감이 가까이 다가와 두 손으로 종이를 받았다.
“이 날에 혼례를 치르도록 하시오. 날 때부터 유약하게 태어난 옹주인지라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했던 딸을 이 날짜에 그 댁으로 보내니 부디 잘 챙겨주시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잠시 정신을 놓고 있던 태경은 두 눈을 댕그랗게 뜨고서는 예판대감이 받아든 종이를 보았다. 시월 이십육일.
태경은 속으로 그때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계산해 보았다.
허억. 정확히 석 달하고도 7일 후였다. 대략 백일 정도 되는 기간이다. 태경은 속으로 열심히 빌고 또 빌었다. 제발 그 날이 오기 전까지 원래대로 돌아가기를. 이대로 혼례를 올리게 될 생각을 하며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게다가 첫날밤을 치를 생각을 하니 쓰러지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물론 들은 이야기로는 첫날밤에 소박맞을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열 계집 마다하는 남정네는 없다는 소리가 괜히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왕실과의 혼인인데 아무 일도 없이 그냥 지나갈리는 만무했다.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히자 태경은 저도 모르게 끙 하는 앓는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옹주, 왜 그러느냐. 안색이 창백한데 어디 불편한 곳이 있는 것이더냐.”
태경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태연히 웃으려 노력하며 공손히 대답했다. 하지만 속을 바짝 타들어가고 있으니. 이런 상황을 가리켜 벙어리 냉가슴 앓는다고 하였던가?
“아, 아닙니다.”
“아니기는. 분명 며칠 전에 산에서 구르지 않았더냐.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그리 험한 일을 당하였는데 성할 리가 있나.”
임금이 그리 말하고는 쯧쯧 혀를 찼다. 그러더니 이내 예판을 향해 다시 입을 떼었다.
“예판의 첫째 아들이 아니었다면 옹주가 큰일을 당할 뻔 했소. 산적패거리들이 궁궐에서 나온 가마인 줄 어떻게 알았는지…. 내 지금 다시 생각하여도 간이 철렁했소. 헌데, 내 듣기로는 예판의 아들이 옹주를 감싸 안으며 함께 구르다 몸이 상했다던데 지금은 어떠하오?”
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태경은 뒤로 홱 돌아 예판을 쳐다보았다. 함께 굴러?
왕의 질문을 받은 예판은 잠시 어두운 안색을 비추며 입을 열었다.
“경빈 마마께서 어의를 보내주시어 인제는 걱정할 것이 없다 하옵니다.”
“으음, 천만 다행이네.”
임금이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그러더니 이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싱긋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시며 태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옹주.”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더불어 옹주를 부르는 목소리는 물론이요, 갑자기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을 보며 태경은 갑자기 이 임금님께서 대체 왜 이러시나! 생각하며 우물우물 대답하였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임금이 피식피식 웃으며 놀리듯 태경에게 물었다. 태경은 순간 절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듯 하여 고개를 돌렸다. 그런 태경의 모습에 임금이 고개를 젖히고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예판! 아무래도 오늘 예판께서 일찍 퇴청을 하셔야 할 듯싶은데. 옹주가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아하니 분명 속으로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게야. 그러니 예판께서 퇴청하시는 길에 옹주를 데려가주시오. 아하하하.”
그야말로 아주 대놓고 놀리는 격이니 얼굴이 벌게질 수밖에.
태경은 왜 그 순간 얼굴이 벌게졌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이들이 태경을 옹주로 알고 있다하지만 사실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순간 얼굴이 붉은 꽃처럼 벌게지는지 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어찌되었든 태경은 임금의 말에 싫다하지 않았다. 사실 궁금하기도 했다. 이래저래 말 많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얼마나 용모가 잘났는지, 또 문무는 얼마나 출중한지, 또 얼마나 무정할지.
그래, 한번 구경해 보리라. 괜스레 궁궐 밖으로 나가 기분만 나빠져 돌아온다 하여도 궁에만 갇혀 있는 것보다는 더 나을 것이다. 바람이라도 쐬어야지. 안 그래?
편전에서 나온 태경은 처소로 돌아와 대갓집 규수마냥 차림을 하였다. 분홍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두르고 댕기를 따고, 도톰한 입술에도 붉은 것을 칠하였으며 두 볼에 정성껏 분도 발랐다.
태경의 치장을 맡은 상궁이 여태껏 한번도 이런 차림을 한 적이 없어 마냥 신기하기만 느껴져 면경으로 자신의 모습을 이리 비춰보고 저리 비춰보며 웃고 있는 태경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네었다.
“마마, 그리 자꾸 뚫어져라 아니 보셔도 되옵니다. 누가 보아도 절로 어여쁘다는 말이 나올 것이 분명하니 누군들 그리 생각지 아니하겠습니까?”
자꾸만 면경을 들여다보는 태경의 모습에 스스로 어림짐작을 하며 놀리는 듯한 상궁의 말에 태경의 얼굴이 붉어졌다. 상궁이 말하는 뜻을 모를 리 없었다. 오랜 정인에게 어여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을 알고 있으나 걱정하지 말란 뜻이 아닌가.
그게 아닌데. 그냥 이렇게 꾸며본 적이 없어서 쳐다본 것인데.
그리 변명하고 싶었으나 믿어줄 이 하나 없기에 입을 꾹 봉하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치장하던 상궁과 그 옆을 지키고 있던 다른 상궁들과 나인들까지도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모습을 보자 괜스레 태경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도 오랜 시간 사람 마음을 몰라주며 등 돌리는 이가 여기에도 또 한사람 있다는 생각에 그동안 별 생각이 없었건만 주위 사람들이 자꾸 놀려대자 점점 호기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꼭 자신이 예판의 첫째 자제를 사모하는 옹주가 된 것처럼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리니 정말 이상하였다.
아니야. 그냥 궁금하고 궁궐 밖으로 나간다 하니까 그런 것이 틀림없어.
태경은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내었다.
"이제 끝났사옵니다. 마마."
상궁이 뒤로 물러나 앉으며 말했다. 그리고 뒤이어 방문이 열리었고, 태경이 처소를 나섰다.
가마를 타고 대궐문 앞까지 당도하자 예판대감이 태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예판대감이 앞장을 섰고, 그 뒤에 태경을 태운 가마가 뒤를 따랐다.
궁궐을 빠져 나오기가 무섭게 태경은 가마 안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등 뒤로 짐을 잔뜩 인 이가 발걸음을 빨리해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도 보이고, 대갓집 마나님이라도 되는지 얼굴에서 눈과 코만 보이고 있는 여인네의 모습과 어린 아이들이 넘어질 생각은 하지도 않고 또래들과 장난치며 뛰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태경은 궐 밖 풍경과 많이 다른 모습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단 며칠뿐이었지만 조용하기만한 궐 안에 있자니 그새 어지간히 심심해졌기 때문이었다. 궁녀들이 이것저것 시중들고 맛난 음식 먹고 좋은 옷 입고 하여도, 누군가와 제대로 이야기는커녕 뭔가 할 일 하나 없으니 좀이 쑤시는 건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아씨, 이제 곧 도착하오니 안으로 들어가시옵소서.”
같이 따라 나온 박 상궁이 작게 소곤거렸다. 하는 수 없이 태경은 잠깐 지나가는 풍경에 시선을 두었다가 가마 안으로 쏙 들어갔다.
태경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닫힌 가마 안에 멀뚱히 있자니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좁은 곳에 갇혀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앉아있자니 몸이 찌뿌드드한 탓에 기지개를 펴볼까 싶지만 그럴 수도 없으니, 피곤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이리저리 흔들리니 머리도 어지러운 것 같아 빨리 나가고픈 마음이 절실해져오니 그 옛날부터 가마타고 먼 길가는 여인네들이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이리 오너라!”
꽥 소리라도 질러 내려달라 말하고픈 마음이 절정에 다할 무렵, 잠시 가마가 멈춰서며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잠시 후 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벌써 퇴청하셨습니까?”
“그렇게 되었다.”
예판대감과 이 댁 하인의 목소리로 추정되는 대화가 들려오고 이내 가마가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땅바닥에 가마가 내려앉았다.
“갑돌이 너는 어서 가 첫째를 불러 오거라.”
“예, 대감마님.”
예판대감의 말에 가마 안에 있던 태경의 가슴이 심하게 뛰어댔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몹시도 궁금하고 또 궁금하였다. 여태까지 들은 것이 오죽 많은지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철컥. 드디어 가마의 문이 열렸었고 태경은 조심스레 가마를 빠져나왔다. 꽤나 널찍한 집안 마당에 선 태경은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온 집안 하인들이 죄다 주르르 서 있었다.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푹 숙인 모습이 꼭 죄를 지은 죄인마냥 느껴지니 몹시도 불편하였다. 그렇지만 하인들 입장에서는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의 상전인 예판이 직접 옹주를 모셔온 것이 아닌가.
날 때부터 오죽이나 작고 약하게 태어나 왕께서 많고 많은 자식들 중에서 애달파 하시며 곱게 키우신 분이 바로 지금 자신들 앞에 있는 혜정 옹주. 물론 옹주가 이 댁 첫째 도령을 오래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어 몇 번 오가고는 하였지만 이렇듯 예판이 직접 모시고 온 적은 처음이라. 그러한 탓에 하인들 역시 무슨 일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래저래 옹주마마의 깊은 속내를 알아주지 못하는 첫째 도령과의 혼인 이야기가 여러 번 오갔지만 매번 흐지부지. 허지만 요 며칠 두 상전의 이야기를 몰래 들어보니 심상치가 않았다. 이제는 정녕 혼인을 하여할 나이인지라 주상전하께서 직접 나서시어 맺어주시려 한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며칠 전 깊은 산속의 절로 불공을 드리러 간다는 옹주마마의 호위를 맡으신 첫째 도령이 갑자기 나타난 산적 패거리들로부터 옹주마마를 보호하다 종국에는 같이 산 아래로 떼굴떼굴 굴렀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들의 상전인 예판이 직접 귀하신 몸, 옹주마마를 모시어 왔다는 것은 조만간 큰 일 치른다고 온 세상 다 듣도록 외치는 것이 아닌가.
나면서부터 종노릇하던 하인들,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이들보다 더 눈치 빠른 이들도 없을 터, 단박에 모두 다 짐작하였다.
예판대감의 명을 받은 갑돌이가 도령을 모시러 간 사이, 예판이 태경을 안방으로 모시고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찻잔과 다과상이 정성스레 올려졌다.
대놓고 상전들의 말을 훔쳐 들을 수 없는 하인들이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저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럼 인자 혼인을 하시는 것이겠지요?”
“아따 당연한 것 아니오? 딱 보면 모르나? 더 이상 혼인을 미룰 수 있는 나이가 아니지 않아, 안 그래?”
“호호홋! 옹주마마께오서 너무 기뻐 첫날밤에 까무러치시는 것 아닌가 몰라.”
“어허, 거 소리 좀 낮춰.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소곤소곤, 재잘재잘. 아무리 목소리를 낮췄다한들 귀 밝은 박 상궁이 놓칠 리 없었다. 박 상궁이 휙 눈 까리를 뒤집으며 노려보자 하인들이 죄다 겁을 먹어 후다닥 사라졌다. 그러자 그제야 박 상궁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길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한편, 방 안에서는 예판과 이 댁 안방마님인 정부인, 그리고 태경이 찻잔을 비우고 있었다.
“으흠, 옹주마마.”
찻잔을 내려놓은 태경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보고 있자니 예판이 먼저 입을 떼었다.
“예.”
“전하께서 소신에게 하명하시기를, 옹주마마로 하여금 혼인 전에 소신 집안의 가풍을 익히게 하라 하셨나이다.”
이게 무슨 소리이던가. 혼인 전에 가풍을 익히게 하라? 이상타. 민며느리도 아닌데.
태경은 방금 전 예판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 눈만 껌뻑였다. 그것은 안방마님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금방 그 뜻을 알아차렸다. 주상 전하께옵서 자신의 아들과 옹주마마의 사이를 가깝게 하기 위해 머리를 쓰신 것이다. 혼인을 해놓고도 전과 다르지 않을까 말이다.
오죽이나 약하신 몸으로 세상 빛을 보신 옹주마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따님이 아닌가. 그러니 그동안 마음 고생한 것으로도 모자라 시집을 가서도 변하지 않을까 걱정하시어 두 사람을 이어 붙이시려 택하신 방법이시라.
“대감마님. 도련님께서 드셨습니다.”
정부인이 입을 떼려는 차, 갑돌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뫼시어라.”
예판의 말이 떨어지고, 태경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잔뜩 긴장을 하였다.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앞으로의 길이 막막할 따름이니 당장 어찌 행동을 할지부터가 걱정이었다. 기쁜 얼굴을 해야 할까, 아니면 시치미를 뚝 떼고 있어야 하나?
휴우. 태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차마 태경은 얼굴을 들 엄두가 나지 않아 방바닥만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그리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사내가 어떤 표정으로 쳐다볼지 걱정이 되었다. 혼인 날짜가 정해졌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싫어할까? 아니면 그냥 관심조차 없을까? 어차피 누구하고든 해야 할 테니 말이다.
사내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태경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예판대감은 태경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같은 자리에 있는 것조차 어색한 사이인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있는 것을 보니 당연히 답답할 수밖에. 주상전하께오서 자신의 집안 가풍을 익히게 하라는 하명을 내리시기는 했다지만 과연 뜻이 이뤄질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옹주마마도 그렇지만 입 한마디 뻥긋 하지 않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혼례 첫날밤을 잘 치룰 수 있을지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예판 강유진은 어두운 안색을 하며 입을 떼었다.
“들어 알고 있을 테지만 주상전하께오서 혼례 날짜가 정해 주시었다. 시월 이십육일이니 그리 알고 있거라.”
“예.”
강유진은 아들이 눈길을 들지도 않고 대답하는 모습에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얼굴에 표정 하나 없었다. 어찌 저리 과묵할 수가 있을까. 어릴 적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하고 바른 성품인지라 걱정을 할 필요도 없겠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올곧아도 너무 곧았다. 너무 대쪽같은 성품이다 보니 이제는 혹여 부러질까 전전긍긍이었다. 기방을 한번 드나드나, 아니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를 하나. 정말 이래저래 걱정이 태산이니 벌써부터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궁궐의 권력을 한손에 움켜쥐고 휘두르고 있는 경빈의 소생인 혜정옹주를 며느리로 들이는 것만으로도 걱정인데 아들놈까지도 이리 속을 썩이고 있으니 그야말로 한숨이 절로 나올 상황이었다.
“허억.”
눈길을 든 태경은 낯익은 남자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어, 어찌하여. 어찌하여서 유신이….
그 순간 예판의 첫째 아들이라는 도령과 태경의 두 눈이 마주쳤다. 이렇게 똑같이 생길 수는 없다. 한 뱃속에서 태어난 이들이라도 이렇게까지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한 순간 사내의 눈빛에서도 몹시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내 곧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찌푸린 눈빛 속에서도 놀란 기색은 여전했다.
설마 하는 생각과 함께 혹시 하는 의문이 태경의 머릿속을 강하게 흔들었다. 자신을 보고 놀란 눈빛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판과 정부인은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이해할 수 없는 분위기에 의아해했다. 전에는 한번도 보지 못한 분위기였다. 그런 탓에 지금 상황이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너무나도 놀란 듯한 옹주의 표정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의 아들과 옹주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을 유심히 살펴보던 강유진은 오른쪽 옆구리에 무언가가 콕 하고 와서 박히자 몸을 움찔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정부인 최씨가 문 쪽으로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강유진은 기침 소리를 내며 입을 떼었다. 궁금해도 어쩌랴. 물어볼 수도 없는 것을.
강유진의 기침소리에 태경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붉혔다. 혹여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강유진은 별 다른 기색을 내보이지 않으며 입을 떼었다.
태경은 대답을 하며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강유진과 정부인이 나가는 격식을 차려 인사를 하고는 나가는 모습을 보며 슬쩍 유신과 너무나도 똑같이 생긴 이에게 눈길을 주었다. 또 다시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허나 태경은 금방 이내 눈길을 돌렸다. 무슨 말을 어찌 꺼내야 할지가 막막했다.
스르륵, 탁. 문이 조용히 닫히고 방 안에 두 사람만이 남자 태경은 두 손을 움켜쥐고는 꼼지락거리며 눈치를 슬슬 보았다. 고개를 차마 들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는 강유신이냐고 물어봐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태경은 이내 고개를 절래 저었다. 만약 그리 물었다가 정신 이상한 사람 취급 받게 될까 걱정이 되었다.
태경은 조용하게 한숨을 내쉬며 큰마음을 먹고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순간 태경의 눈에 사내의 오른손 약지에 천이 둘둘 감겨 있는 것이 띄었다. 산에서 유신과 함께 구르기 전에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던 태경을 붙잡으려다 생긴 상처가 분명했다.
부러졌구나. 다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천으로 감고 있는 것을 보니 부러진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태경은 저도 모르게 유신의 손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얼마나 아팠을까. 아프단 소리도 안 하고 자신 때문에 꾹 참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니 몹시도 미안했다.
“역시 그 때 나 때문에 부러진 거 맞지? 그렇지?”
태경은 저도 모르게 손을 붙들고 중얼거렸다. 그런 태경의 귀로 한숨 섞인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첫댓글 어어? 이거 예전에 연재하시다가 중단하신거 맞죠? 이거 정말 기다렸던건데..그때도 딱 2편에서 중단하셔서 담편이 무지 궁금했었는데..이번에는..중단안하시고 완결까지 해주실거죠?
와 진짜 재미있을것 같아요!! ㅎㅎ 꼭 완결까지 보고싶습니다! ㅋㅋ
헉...그 유신이가 맞는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