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주간 화요일
1사무엘기 16,1-13 마르코 2,23-28
인간은 일하는 기계도, 의무에 종속된 노예도 아니기에 쉼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안식일은 본디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한 대로,
“우리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쉬기까지 참된 평화란 없다.”는 고백을
기억하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내 육신을 쉬게 하는 데 잠이 필요하듯, 내 영혼은 경쟁과 적자생존의 굴레에서 벗어나
어느 것에도 매임 없이 자신을 비웠을 때 얻게 되는 하느님의 안식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생존을 위한 필요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하느님 안에 쉴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이 안식일의 제정 이유임을 확인해 주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이 배고픔을 해결하려고 밀 이삭을 뜯어 먹거나, 다윗 일행이 배가 고파 하느님의 집에서
제사 빵을 먹은 것을 두고, 단순히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에 그들이 죄인으로 취급받아야 한다는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위해 안식일을 세워 주신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님을 일깨워 주십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결코 하느님께 종속된 노예와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지옥 불에 대한
두려움이나 죄의식에 빠져 하느님의 영 안에 누리는 기쁨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자 주님의 영이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고 합니다.
우리도 세례성사를 통하여 기름부음을 받았기에 우리 영은 언제나 하느님 안에 머뭅니다.
혹시 내가 스스로 세운 규정이나 계명에 얽매여 하느님 안에 누리는 영의 자유와
기쁨을 가두고 옹졸하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봅시다.
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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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연중 제2주간 화요일
1사무엘기 16,1-13 마르코 2,23-28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인간 사회가 아무리
발전한다 하여도, 인간의 본성과 기본 욕구를 가로막고 바꾸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제도와 법규들은 인간의 본성과 욕구를 가장 인간답게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게으른 사람이라 밥을 먹을 권리가 없다는 둥, 모자란 사람이라 좋은 것을
누릴 이유가 없다는 둥, 제 기준으로 세상을 마구 단죄하고 규정하는 이들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천박해지고 비인간적인 폭력이 난무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로 챙겨 주고 보듬어 주는 것이,
인간이 지음받았을 때의 본성이자 욕구여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짚어 보아야 합니다.
본디 안식일은 나 말고 다른 이가 있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신명 5장 참조).
무엇보다 서로의 사회적 지위가 다르고 경제적 처지가 다름을 기억하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각자가 저마다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하나의 잣대로 세상을 규정하고
줄 세우기를 좋아하였습니다(창세 11장 참조).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은, 다름과 차이를 존중하지 않은 채, 제 기준을 절대화하는 완고함에서
비롯됩니다.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서로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인간, 그 인간은 하나이자 둘이고, 둘이지만 서로 하나가 되어
살아갑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나 둘로만 규정해 버리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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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2주간 화요일
1사무엘기 16,1-13 마르코 2,23-28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왼쪽 손목이 불편했습니다.
손에 힘을 주기가 힘들었고, 움직이면 찌릿하게 아팠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손목터널 증후군’이 있었습니다.
스마트 폰을 많이 하거나, 자판을 많이 사용하면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평소에 오른 손을 많이 사용하기에 왼손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손목이 아프면서 왼손이 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문서 작성에서 왼손은 오른손과 거의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자판의 반은 오른손이 사용하지만 나머지 반은 왼손이 사용하였습니다.
설거지를 할 때도 왼손은 중요했습니다. 왼손으로 그릇을 잡아야 오른손으로
씻어 낼 수 있었습니다. 뚜껑을 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옷을 입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왼손으로 잡아 주지 않으면 오른손만으로는 많이 불편했습니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어두운 땅 속에서 양분을 찾아내는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기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름을 원뿔에 채워서 ‘이사이’의 집으로 갔습니다.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지도자를 선출하여 기름을 부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이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은 겉모습, 체력, 학력,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는
달랐습니다. 겉모습, 체력, 학력, 능력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들판에 버려지는 돌로도 큰 능력을 행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 118, 25)”
하느님께서는 어린 소년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다윗은 훗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선택의 기준은 하느님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와 안식일에 대해서 몇 번 논쟁이 있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규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런 사람들은 죄인의 굴레를 쓰고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할 수 있는 일들을 말씀하십니다.
아픈 사람을 고쳐 주는 일, 복음을 선포하는 일,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는 일,
하느님 보시기에 선한 일은 안식일에도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이제 우리의 마음과 몸에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은 바뀔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뜻은 무엇을 통해서 드러날까요?
그것은 사람을 믿어주고, 사람을 사랑할 때 드러납니다.
“사람을 믿어주고,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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