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2주간 수요일
1사무엘기 17,32-33.37.40-51 마르코 3,1-6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마르 2,28).
오늘 복음도 여전히 안식일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누구인가?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잡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있어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고집 때문에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혹 나도 지금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어 형제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데 나는 그것을 언제부터, 대체 왜 손에 쥐게 되었을까?
그런데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손을 꼭 쥐게 된 것일까?
묘한 것은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분명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쥐었을까? 사실 그것을 따먹고 높아지려고 한 것이지만,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움켜쥔다는 것은 곧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곧 원죄를 뒤집어쓴 그리스도인을 표상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숨어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단지 움켜쥔 것을 내려놓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빈손에 못을 박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단지 움켜쥔 것을 내려놓는 것을 넘어 자기 자신을 건네주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께서는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셨습니다.
죽음과 어둠을 몰아내시고 생명과 빛이 되셨습니다.
하여, 당신은 참으로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오늘 저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움켜쥔 것을 내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손을 뻗어 상처를 입고 구원의 피를 흘려야 할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손에 구원의 못을 받아들였듯이 말입니다.
사랑으로 상처 입을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건네줄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손이 당신 구원을 전해주는 손,
당신 사랑을 건네주는 손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저희가 움켜쥔 것을 나누어주고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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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2주간 수요일
1사무엘기 17,32-33.37.40-51 마르코 3,1-6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요즘 트라우마(상처)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상처가 다 아물었지만 우리의 마음에 남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 몸에도 몇 곳에 상처의 기억이 있습니다. 어린 날 연탄재 던지기 놀이를 하다가
눈가에 연탄재를 맞고 병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50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뜨거운 물이 담긴 보온병을 실수로 눌러서 다리에 화상을 입은 적도 있습니다.
40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그날의 뜨거움이 생각납니다.
사제가 된 후에 유행성 출혈열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서품 받은 지 보름 만에 있었던 일입니다.
30년이 넘었지만 얼굴이 부었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육체적인 상처도 있지만 정신적인 상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뜻밖의 재난, 갑자기 찾아온 질병,
사업의 실패는 정신적인 상처를 깊게 남기기 마련입니다.
유명한 행동 연구가인 안탈 페슈테틱스(Antal Festetics)는
‘인류의 세 가지 트라우마’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바꾸게 하였습니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별이며, 태양은 우주의 변방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합니다. 물리적인 우주에서 지구는 우주의 변방이고,
작은 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에,
하느님의 사랑이 머무는 곳이기에 충분이 우주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지구는 우주의 중심입니다. 인간의 가치와 인격은 수치와 수량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사제 가야파는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이스라엘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예언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은 온 우주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되찾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과 원숭이가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틀렸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의 삶은 풀잎 끝에 맺혀 있는 이슬과 같다고,
천년도 주님의 눈에는 마치 지나간 어제와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쉴 때까지는 실로 나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무의식의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자칫 우리의 의식과 자유의지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나온 아주 작은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나온 이들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아주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우리의 의식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신앙의 신비는 우리의 의식을 초월하여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줍니다.
교회의 영성가들은 바로 그 신앙의 신비를 체험하였습니다.
골리앗은 어떻게 보면 코페르니쿠스, 다윈, 프로이트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골리앗 앞에서 무서워 떨었습니다. 골리앗은 막강한 힘으로 싸움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다윗은 아직 어렸고, 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느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코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싸움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다윗은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어떻게 보면 코페르니쿠스, 다윈, 프로이트와 같습니다.
율법과 계명으로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율법과 계명을 독차지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의 권위와 독선을 나무라십니다.
그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빛이 드러나면 어둠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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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주간 수요일
1사무엘기 17,32-33.37.40-51 마르코 3,1-6
예수님께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한쪽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언제 한쪽 손을 움켜쥐는지 생각해 봅시다.
화가 났을 때, 뭔가 앙심을 품었을 때,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를 때,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할 때 우리는 한쪽 손을 움켜쥡니다.
오늘 복음의 병자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그는 신체 결함 때문에 사람들에게 무시당했고,
선뜻 손을 사람들에게 내밀지도 못했고, 제대로 노동을 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오그라든 한쪽 손은 분노와 좌절, 절망과 앙심의 표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눈여겨보시고 회중 가운데 서게 하십니다.
그를 무시하는 사람들 가운데 세우시어 백성 가운데 소외되지 않은 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병자의 치유보다는 안식일 규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을 노기를 띠고 둘러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신체 결함보다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을
더 슬픈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손을 뻗어라.”는 예수님의 외침은 병자를 치유하기 위한 말씀만이 아닙니다.
편견과 아집으로 완고해진 이들에게,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못하는 이들에게, 내게 손을 뻗으며 용서와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미움의 상처 때문에
외면하는 이들에게 회심을 요청하십니다.
손을 뻗어 이제 사람들과 공감하고, 그들을 도우며,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초대하라는 외침입니다.
나는 얼마나 자주 손을 움켜쥐고 살고 있습니까?
내 손을 뻗어 펼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 주시는 하루를 살아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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