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연중 제2주간 목요일
1사무엘 18,6-9; 19,1-7 마르코 3,7-12
예수님께서는 몰려오는 군중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고백하여도 “조용히 하여라.” 하고 엄하게
이르십니다. 마르코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께서는 왠지 멀리 계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살갑게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마르코 복음에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 ‘거리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사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아드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어 세상에 구원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영광과 기쁨 가득한 자리를 꿈꾸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며 건강한 몸과
현실적 축복을 갈망하였던 군중은 십자가와 하느님의 아드님을 도무지 연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군중과의 ‘거리’는 예수님을 향하여 내던지는 우리 욕망의 투사만큼
깊고 먼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내용과 지향점은 십자가와 맞닿아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의 영광과 맞닿아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 모든 이와 함께 사랑을 이루는 데 쓰여야 합니다
(코린토 1서 1장-2장 / 13장 참조).
제 이익과 신념만을 위한 기도라면, 그냥 침묵하는 편이 낫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침묵하기를 바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려는데,
우리는 십자가는커녕 제 영광과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도구로 삼는다면 참으로 죄송한 일입니다.
제대로 된 기도를 하기 전에 침묵을 배웠으면 합니다.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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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주간 목요일
1사무엘 18,6-9; 19,1-7 마르코 3,7-12
시기심과 질투심은 인간의 마음을 옹졸하게 만들고, 사리를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게
만드는 마음의 병입니다.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이겨 이스라엘에 승리를 안겨 준
다윗의 치적과 비교당한 사울의 마음에는, 용맹스럽고 충성스러운 다윗의 모습은 사라지고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인물로만 보입니다.
시기심에 눈이 어두워져 다윗을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다행히 그의 아들 요나탄의 설득에 마음을 돌리지만 한번 생긴 마음의 병은
치유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명성을 들은 수많은 군중이 먼 지방에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들은 병들고 지쳤으며 가난하고 고통을 겪고 있었기에 오직 예수님의 치유만을 원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알아본 것은 역설적으로 ‘더러운 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기쁨과 치유의 하느님이 아닌, 두려움과 회피의 대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우리는 주변에서 칭송받을 만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을 부러워하고, 본받고 싶어 하지만, ‘더러운 영’이 슬그머니 내 마음속에 들어와
상대방을 헐뜯고 폄하하려는 교만이 생깁니다.
세계 교회는 오늘부터 25일까지 역사 안에서 가톨릭 교회와 갈라진 형제들,
곧 정교회와 개신교인들과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을 보냅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습니다.
하나의 세례와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과거 역사의 상처로 생긴
오해와 편견의 벽을 허물고 복음의 기쁨 속에서 “하나가 되기를”(요한 17,21 참조) 기도합니다.
비록 종교 개혁이라는 과거에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지만,
그 사건을 다르게 기억하고 되새기는 법은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우리를 갈라놓는 것보다 일치시키는 것이 훨씬 크다는 점을 잊지 맙시다.
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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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2주간 목요일
1사무엘 18,6-9; 19,1-7 마르코 3,7-12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는 것은 배가 아픈 것과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에는 큰 영향을 줍니다. 마음이 아프니, 마음을 따르는 몸도 아픈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못했던 친구가 동네로 이사를 왔는데 집도 나의 집보다 크고,
배우자의 직업도 나의 배우자의 직업보다 좋고, 얼굴도 훨씬 젊어 보이면
축하해주어야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동창은 큰 본당으로 가고, 보좌 신부님이 있는 곳으로 가는데,
나는 늘 작은 본당으로 가고, 성당에 빚만 많은 곳으로 가면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왜 나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옆집 아이는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친구도 잘 사귀는데,
우리 집 아이는 놀기만 좋아하면 건강해서 좋다는 생각보다는
‘누굴 닮아서 그런가!’라는 걱정이 앞섭니다.
우리의 삶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서에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경우가 있습니다.
카인은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였다고 기분이 나빴습니다.
더욱 정성껏 제물을 바치면 좋으련만, 동생을 죽이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배가 아픈 것을 넘어서 ‘살인’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그렇습니다. 사울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다윗이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면 축하해 주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다윗을 더욱 칭찬하자
배가 아프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충실한 부하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다행히 아들 요나탄의 말을 듣고 다윗을 죽이지 않지만, 마음은 이미 변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열 제자는 더 높은 자리를 원하는 야고보와 요한을
시기하였습니다. 제자가 아니면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들을 시기하였습니다.
민수기 11장 26에서 29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진영에 남아 있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은 엘닷이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메닷이었다. 그런데 명단에 들어 있으면서 천막으로 나가지 않은 이 사람들에게도
영이 내려 머무르자, 그들이 진영에서 예언하였다.
한 소년이 달려와서, ‘엘닷과 메닷이 진영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하고 모세에게 알렸다.
그러자 젊을 때부터 모세의 시종으로 일해 온,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였다.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 모세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모세는 온 백성이 예언자가 되면 좋겠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만 한다면, 다른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마르코 복음 9장 38절에서 40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은총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성령은 바람이 부는 대로 임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하고 하십니다.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제로 살아가면서 많은 경우에 주님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주님께서 하신 방법을 따라 하기보다는, 나를 위해서,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움켜진 손을 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명예, 권력, 자존심, 욕심’ 이런 것들을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움켜쥐면 쥘수록 우리는 세상에서 덮쳐오는 유혹을 이겨내기
힘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가면
우리들 또한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버리는 삶입니다. 주는 삶입니다.
오늘 화답송은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이 내 편이심을 나는 아네. 하느님 안에서 나는 말씀을 찬양하네.
주님 안에서 나는 말씀을 찬양하네.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움 없으니,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뜻이 아니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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