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2주간 금요일
1사무엘 24,3-21 마르코 3,13-19
성경에서 ‘산’은 지형적으로 평지보다 높은 곳만을 가리키지 않으며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산은 구약 성경에서부터 하느님과 가까운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 하느님께서는 하늘 위에 앉아 계시는 분이시고, 산은 그분께 다가가
만나는 장소입니다.
또한 산은 모세가 하느님께 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나이산에 올랐던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십계명을 받은 이 사건은 하느님의 뜻이 직접 전해지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져
성경 전반에서 자주 언급됩니다. 신학에서는 이를 모세의 예형론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로, 하느님의 뜻이 계시된 장소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한 산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장소이기도 합니다(마르 6,46 참조).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셨다는 것은 이미 이런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산에 올라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산에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부르심은 온전히 예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르시고 제자들은 응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신 첫째 목적은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분과 함께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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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식 토마스 신부
연중 제2주간 금요일
1사무엘 24,3-21 마르코 3,13-19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두셨던 열두 사람을 뽑아 당신의 제자로 세우십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깊은 친교를 나눕니다.
열두 제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고, 인간적인 면에서 본다면 똑똑하지도 않고,
이른바 ‘스펙’이 좋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신앙을 성숙시켜 나아갔습니다.
제자들은 때로는 성격이 급하고 또 어리석으며, 어떤 때는 현세의 권력과 이익에 눈이 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친교를 통하여 죄의 회개와 용서
그리고 사랑을 배웁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큰 죄를 지은 베드로가 우리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이 나약한 사람임을 알고 회개하여,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자신의 고향을 떠나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합니다. 주님께 선택받는다는 것은 어떤 합당한 자격과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아 사랑이 가득한 마음,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의 실천과 회개와 뉘우침 그리고 용서하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현실적 삶의 풍요로움과 마음의 평화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고 더욱 노력함으로써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에 넘쳐 살아가는 신자들은, 미사 전례 때 참회를 통하여 자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청하고 다른 이들의 잘못을 용서하며,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를 통하여
매번 파견되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은총이고 감사기에,
미사의 마지막에 하는 응답으로 이렇게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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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2주간 금요일
1사무엘 24,3-21 마르코 3,13-19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전에 앓던 이가 빠지는 기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비슷한 말로 ‘뜨거운 감자’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회계사께서 2022년에 새로운 제안을 하였습니다. 신문사는 비영리 단체이기에
현금보다는 체크를 사용하라고 하였습니다. 직원들은 모두 체크로 급여를 받았습니다.
다만 저의 활동비와 주방 자매님은 현금을 사용하였습니다.
저도 활동비를 체크로 받기로 하였습니다. 문제는 주방 자매님이었습니다.
어르신은 체크를 받으면 문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라에서 받는 보조금을
못 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회계사께서 좋은 방법을 알려 주었고,
어르신도 체크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앓던 이가 빠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뜨거운 감자를 잘 넘긴 기분이었습니다.
친한 친구 사이에도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랑해야 하는 부부 사이에도
감정이 쌓일 때가 있습니다. 작은 계기로 오해가 풀리고, 묵은 감정이 봄눈처럼 녹으면
말 그대로 앓던 이가 쑥 빠지는 기분이 될 것입니다.
새해에는 앓던 이는 빠지고, 뜨거운 감자는 잘 넘기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는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사울은 충실한 부하 다윗, 아들 요나탄의 친구인 다윗, 딸 미갈의 남편 다윗을 시기하였습니다.
사울의 시기는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울에게 다윗은 앓던 이가 되었고, 뜨거운 감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터넷에서 시기와 질투에 대한 글을 보았습니다.
“시기는 자신의 화살로 자신을 죽인다. 질투 속에는 사랑보다 이기심이 더 많다.
세상 사람들은 나보다 나은 사람들을 싫어하고 나에게 아첨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모든 격정 중에 가장 추악하고, 반사회적인 것, 그것은 시기이다.
공기처럼 가벼운 사소한 일도, 질투하는 이들에게는 성서의 증거처럼 확정적이다.
나는 내 실망은 견딜 수 있어도 남의 희망은 참을 수 없다. 시기심은 살아있는 자에게서 자라다
죽어서 멈춘다. 시기심을 나타냄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모욕이다.”
이중에서 가장 제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공기처럼 가벼운 사소한 일도, 질투하는 이들에게는
성서의 증거처럼 확정적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사울이 마음을 바꾸기만 하면 다윗은 여전히 충실한 부하이고, 아들의 죽마고우이고,
믿음직한 사위였습니다. 그만 시기가 마음에 들어와서 다윗이 뜨거운 감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선한 마음을 가진 다윗에게 사울은 앓던 이가 아니었습니다. 뜨거운 감자도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기름 부어 주신 왕이었습니다. 친구 요나탄의 아버지였고, 사랑하는 아내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제야 나는 너야말로 반드시 임금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너의 손에서 일어설 것이다.” 그렇습니다. 앓던 이는 시기와 질투였습니다.
뜨거운 감자는 교만과 오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12제자에게 3가지 권한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 병자를 고치는 능력, 마귀를 쫓아내는 힘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제자들은 앓던 이가 아니었습니다. 뜨거운 감자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도
앓던 이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진흙 속에서도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라는 안경을 벗어버리고 사랑과 나눔의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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