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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 문명에 대한 사기 제자백가 춘추 좌전 등 춘추전국시대 기록된 문헌에 기록된것이사실이라고 한다면 기원전
5000년경에 복희같은 수학바코드 창시자가 출현하고 삼황오제같은 실존인물이 나타나고도의 유교적 덕목을 갖추고
광역의 행정구역을 지배하며 고도의 문명과 제도를 만들었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허의 갑골문 출현으로 이같은
환상론은 깨지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춘추전국시대 이후 기록된 수십권 의 고대기록은 모두 실제상을 과장 한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당대기록 보다 춘추전국이후 문헌에 대한 착각을 가지고서 이리두 문화를
하나라 유적으로 간주한다거나하나라가 실존했으니 요순 삼황오제도 실존했다고 믿고싶어 하는 현상을 볼수 있다 이같
은 터무니없는 믿음은 갑골 문에 의해 상당부분 부정된다고 보인다. 왜냐면 중국인이나 한국인 에 이르기까지 춘추전
국이후 문헌이 조작이 가해졌다는 전제를 무시한채 고대사를 논단하여 왔으되 춘추전국에 선행하는 은나라 갑골문 기록이
고대의 참된실상을 보여준다는것은 두말할 나위없으며 갑골문에 부정되거나 후세의 기록과 다른내용은
모두 갑골문을 기준으로 복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은의 역사는 은 후기인 반경부터(기원전 1300년경) 그역사의 잔재가
갑골문 을 통해 나타난다 갑골문을 통해 기존의 기록과 통설과 차이및 오류몇개를 재고하여보았다
Ⅰ.사마천 사기의 오류
A : 始祖에 대한 誤謬
사마천 사기에는 殷始祖가 제곡고신의 아들 契부터 契卒,子昭明立. 昭明卒,子相土立. 相土卒,子昌若立.
昌若卒,子曹圉立.曹圉卒,子冥立. 冥卒,子振立.振卒 子微立.微卒
되어 있지만 갑골문에는 高祖王亥 로 되어 있으며 微 는 죽서기년에 上甲微 로 되어있는 데 사마천사기의 微
를 죽서기년에 따라 상갑으로 볼 경우 상갑왕부터 비로소 갑골문 계보와 일치한다 은왕실에서 는 오직 고조왕해로부터
시작하여 상갑이하왕들에게만 역대로 제사지냈으므로 왕해이전의 왕명은 모두 허위기록이라 간주할수 있다
[ 왕해명 갑골문 예 고조해 갑골문 .합집 34289 왕해명각자 갑골문 합집 14728 .14732 이외에 다수]
B : 계보순서의 오류
사마천 사기에는 微 ( 上甲) 로부터 湯.에이르는 역대계보가 기록되어 있다
,子微立.微卒, 子報丁立. 報丁卒,子報乙立. 報乙卒,子報丙立. 報丙卒,子主壬立. 主壬卒, 子主癸立. 主癸卒,
子天乙立,是爲成湯. (史記殷本紀 ) 이같은 순서가 잘못된것이며 갑골문의 제사기록에 의해
사기의 보정 -보을 - 보병 -주임 -주계 의순서가 아니며 다음과 같이 사기의 오류를 복원하였다
上甲 → 報乙 → 報丙 → 報丁 → 示壬 → 示癸 → 大乙
이처럼 사기에는 역대순서가 뒤바뀐경우가 종종 있다는 사실이다
C:변조 누락된 왕명
사기의 沃甲 은 갑골문에 羌甲 사기의 陽甲 은 象甲 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虎甲 과 같이 누락된 왕명이 있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羌 象 虎 등 명칭은 부족명으로 은주변에 있던 羌方 象方 虎方 의 약칭임과 동시에 그 部族神 명칭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타 부족신의 명칭을 왕명으로 사용한적이 있었음에도 사기에는 이같은 사실을 은폐하거나 누락시켰다 왜 그랬을까 ?
Ⅱ 三皇五帝는 모두 實存人物이 아니다
사마천 사기에는 은 시조가 黃帝軒圓 - 帝嚳高辛 - 契 로 대를 이은 계보를 기록하였으며 契 은 舜 임금으로부터 司徒
슬을 받고 상에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帝舜乃命契曰:「百姓不親,五品不訓,汝爲司徒而敬敷五敎,五敎在寬.」封于商,
史記 殷本紀 ]
그럼에도 조상인 황제와 고신 설 에 대한 전혀 제사를 지내지 않을뿐더러 시조는 왕해라고 분명히 기록하였으니
하를 멸망시켰다는 탕왕( 갑골문 대을)에 관한 수십개의 갑골문에도 夏 에대한 단 한글자도 나타나지 않는다
소위 천명을 받아 역성혁명을 일으킨 성군의 위업이 갑골문에 나오지 않다니 이상한 일이라고 볼수 있다
그같은 위업은 나오지 않는반면 탕왕의 소소한 강족정벌은 수시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 건국자인 요 순 우
따위는 갑골문에서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으며 하 라는 국명 자체도 기록되지 않았다 거슬러 요 순 우의 시조인 황
제나 제곡고신 소호 따위도 은갑골문에서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거나 그런존재는 실존한바 없었기 때문에 일체 기록
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억지로라도 삼황오제를 찾아보려 애쓰면서 간혹 삼황오제를 암시하는 듯한
갑골문자로 추정 하는데 그같은 문자의 예를 들어보면
1. 갑골문 夔(기)를 어떤 사람은 제곡으로 어떤 사람은 설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설령 그런 추정이 맞는다 하더라도 자연신일 뿐 전혀 인간조상신이라 볼수 없다 전설상 성왕이라는 舜을 갑골문
俊 이라고 중국에서는 주장한다 그런데 俊 의 갑골문 자형은 짐승머리에 잘룩한 꼬리 구부정한 짐승의 몸체에
비정상적인 손과 발을 단 괴이한 신의 모습으로 산해경에 흔하게 나오는 神獸에 지나지 않는 다 즉 사람이 아니라
자연괴수신의 일종 이란 것이다 聖王이란 터무니 없는 날조에 지나지 않은데 괴이한 動物神을 聖王으로 만드는 것은
대단한 創作력이다 이같은 괴수에게 풍작을 기원하거나 질병을 물리치는데 비는목적으로 기록에 남게되었던것이다
몇가지 단편적인 사실을 통해 삼황오제는 물론 堯 舜과 같은 존재도 갑골문에 나타나지 않으며 혹 그런인물로 추정되는
문자도 모두 自然神에게 제사지낸기록일뿐 전혀 인간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 그런데 갑골문은 모두 은중말기인 반경
기원전 1300년 이후부터 의미를 전달하는 문장으로 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같은 갑골문에는 삼황오제 따위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거나 설령 보인다 해도 전설상 성왕이 아닌 모두 자연신 부락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볼수
있는 삼황오제의 활동상은 모두 은 반경이후~ 주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모두 지방에 떠돌던 전설에다 픽션을 가감
하고 또는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날조되기도 하면서 만들어진것에 지나지 않으며 은나라 당대에는 만물을 주관하는관념
신인 帝 를 최상의 존재로 간주하고 왕실고조 王亥를 다음으로 하여 왕계보순서대로 신통력의 등급을 정한후 실제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신령한 존재로 받들어 모시면서 제사를 지냈을뿐인 것이다 물론 거기에 3 황 5제는 끼지도 못하였으니 불
가사의한 일이다
Ⅲ 상족과 동이족
동이족을 일컬어 說文解子에는 <夷>
【東方之人也 從大從弓】
라고 하였스며 몇몇 춘추전국 이후서적과 後漢書등에는 君子의 나라이니 뭐니 기록되어 있는데 과연 그것이
사실적 기록이 아니라고 한다 갑골문에의하면 산동 제수 회수일대의 종족을 東尸 라고 불렀으며
[※ 尸란 후세의 시체의 의미가 아니라 사람이 무릂을 꿇은 모습임 ]
殷 말기에는 人方이라고 하였다 東夷라고 부르기 시작한것은 周나라 시기부터 이며 尸 는 주나라때부터 시체란
의미로 사용되기시작하였고 동방일대의 종족에 대한 은나라 명칭인 尸方 東尸 人方을 대신 尸 의 음만 대체하여
夷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이로서 큰활 . 군자이미지 때문에 생긴명칭이 아니다
[갑골문 이야기 - 김경일저 -p253~254 바다출판사1999년 참조 -]
흔히 상족의 지배층문화는 대문구문화유적과 유사하고 피지배층문화는 하남용산문화와 유사하기 때문에 대문구
문화를 계승한 산동,제수 유역의 일족이 정복왕조를 세웠다는 보는게 정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서등에 上甲
왕까지는 발해만 일대의 易水 일대에서 활동하는사실이 보이며 탕이전에 8차례 거주지를 옮겼다는 기록과 은건국
. 이후에도 5차례이상 거주지를 옮겼다고 나와있다 그렇기 때문에 은족은 대문구 문화를 기원으로 하지 않으며 왕해
및 상갑왕이 거주하던 발해만 일대를 기원으 로 하는데 이동과정에서 한때 문구문화 지역에 거주하면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는 볼수 있다 대문구 문화지역인 산동 회수일대는 전설상 팔괘를 만들었다는 복희족인 태호족과 봉조를 숭배
하던 태호족 아류 소호족 일족이 주류가 되어 거주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모두 복희든 소호든 실존인물이 아닌
복희족 소호족이 숭배하던 부족신들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산해경에는 이들이 모두 괴이한 짐승의 형상으로 나타나
있다. 모두 실존 인간이 아닌 토템신들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 ※ 만약 복희가 상고시대 八卦를 만들었다면 殷에서 그같이 편리한 역학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낙후되게도 거북껍질을 쑥불로 태워 갈라지는 금을 보고 점칠 필요가 없었을것이다 아마도 괘를 응용해 주역을 만든것은
西周 초기로 고래로 내려오던 부호문자를 응용종합하여 주역을 창안하면서 전설상 神인 복희를 가탁해 권위를 높이기
위해 용마 하도 낙서출현 등 거짓 신화 를 날조하였다고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주역의 가치가 떨어지는것은 전혀 아니다
누가 만들었건 그것이 컴퓨터 과학 생 물학 양자역학등 광범위한 분야에 지금까지도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 으니 그가치는
높게 평가할수 있다] ]
이들 산동 제수 회수유역의 종족을 東尸라고 부르다가 人方으로 바꿔부르면서 殷말 에는 갑골문에 의하면 수십차례 人方과
전쟁이 나타나고 있으며 은왕조 멸망은 기록처럼 주왕 의 폭정때문도 아니라 인방과 전쟁에서 국력을 소모시켜 약화된 결과 서방의 周나라 [ 갑골문에는 周方 周寇 로 나타남] 에게 멸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갑골문에는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기록이 다수기록되어 있는데 기록된숫 자만 15000명 정도이며 人方 포로들도 다수 여기에 포함된다. 물론 이들은 오늘날 한국인과 직접적인 하등의 연관도 없스며 고조선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은나라의 동쪽에 거주하는 東尸 尸方 人方 으로 불리던 종족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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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부 역사학자와 네티즌 중에 이 상족을 한민족의 선조 혹은 그 갈래 라고 생각하시는데 이들은 지금의 우리랑 인종학적 문화적으로 관련이 없습니다 난생신화 가지고 우리민족 혹은 우리민족과 관련이 깊은 알타이민족이다 하는 것은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이점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김욱 교수님의 산동성 사람과 한국인과의 체질적 비교를 한 논문이 있습니다 찾아 보시기를....
윗분 말씀하신 김욱교수는 단국대 김욱교수가 맞나요? 그 분은 유전자 인류학을 하신 분인데, 체질인류학 논문을 내셨다니, 좀 믿기 어렵네요. 자세한 논문명과 출처를 알려 주시겠습니까? 만일 그런 논문이 있다해도, 그리고, 현재의 산동성 사람과 한국인의 체질적 비교 결과가 다르다하여, 상족과 한국사람이 틀리지다는 것은 성급한 결론입니다. 현재 산동성 사람이 당시 상족과 별 관련이 없는 이주인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제갈량의 집안도 원래 산동성이고, 유명한 낭야 왕씨도 원래 산동성이 세거지입니다. 현재 산동성 주민은 명,청대 서남지역주민 사민정책이 낳은 후손들이 많습니다
위의 글에 말미에 적은 문장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들은 오늘날 한국인과 하등의 연관도 업스며...' 어떻게 해서, 이런 결론이 나오는 지 도저히 윗글만 읽어서는 이해가 안 됩니다. 윗글로서 추론할 수 있는 근거, 1) 東夷는 활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활 잘 쏘는 한국인의 조상이 될 수 없다. 2) 동이는 상왕조의 지배층이 아닌 주변민족이다. 그러므로, 동이의 지배층임을 자랑하는 한국인과 관계없다???, 활 못 쏘는 한국사람과 관계있을 수도 있고, 상왕조의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엄격히 다른 종족이 아니라, 단지 문화나 언어상의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위 글의 본문에서 서술한 것은 사기의 기록과 갑골문의 기록이 틀리다는 것이지, 이것으로 무슨 오늘날의 한국인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지? 활 잘 쏘느깐 동이가 한국인이라는 주장만큼이나 황당한 말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주장을 명확히 하고, 그에 맞는 증거를 보여 주고, 현재로서 잘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게 자신이 쓴 다른 글에도 신뢰성을 줍니다. 해석 안 된 갑골문이 더 많고, 유전자인류학이나 체질인류학적 연구도 아직 충분히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등의 연관도 없는' 이런 식의 절대적 부정의 표현은 지양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사지선다형이면 거의 틀린 답이 이런 문장이지요^^
갑골문에 나나타는 문자는 총5000여자로 그중 확실하게 밝혀진게 1000자이며 1700 자는 이견이 있으나 추정가능한 자이며 밝혀지지 않은 자는 .... 전체문맥속에 등장하는 그당대의 인명 지명등 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사실상 갑골문을 해석하는데 밝혀지지 않는 특수인명 지명을 제외한 문장은 대다수 밝혀졌다고 합니다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즉 종족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주류가 아니라는것입니다 대체로 명확히 밝혀진것은 아니지만 한국인의 종족은 퉁구스계통 고아시아계통 남아시아계통을 주종족으로 해서 인도 아랍 유전자도 소수포함되어있다고 합니다
4500여자 중 단지 3분의 1만 밝혀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님이 위의 글에서 인용한 것들 갑골문 해석에 나온 글자들 거개가 인명,지명아닙니까? 왕국유가 갑골문해석의 출발로 삼은 것도 왕해라는 인명임을 모르시지 않을테죠? 님의 말은 스스로 위에 써놓은 글의 신뢰성까지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아직 안 밝혀진 인명, 지명이 안 중요하다고 누가 보증할 수 있습니까?
갑골문의 어떤 기록으로 한국인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까? 제가 위의 댓글에 님이 근거로 제시할만한 것1),2)을 써놓았습니다. 님이 스스로 한 번 갑골문 해석으로 동이,현대한국인의 관련없음을 증명할 만한 자료를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인의 종족이 퉁구스,고아시아,남아시아계의 혼합이라는 것은 갑골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유전자인류학,체질인류학, 언어학 연구의 결과입니다. 상나라 은족이 이 범위에 해당되지 않는다 것을 갑골문해석에서 근거를 찾아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산동지역이 명 청대 서남지역주민의 사민정책은 잘못된 이야기건 같습니다 명대에 집중적 사민정책 지역은 산서성과 요동반도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헀듯이 산동지방은 오랜 전란의 끝에 많은 산동성인이 남중국으로 이주하였고 한국인의 선조 고구려 신라 발해인 거주하기도 하였고 선비족과 여진족의 집단 거주지였습니다 그러나 산동성 사람은 02b 비율이 적고 한국인형인 단두형보다 중두형입니다 자고로 유전적 체질적으로 말하자면 이주민 세력이 그리 우세라고 말은 못하겠습니다
산동성 주민 분포에서 유전적 체질적으로 이주민세력이 우세인지 상나라 때부터 본토민이 우세한 지 어떤 걸로 증명할 수 있다는 건지?님은 대문구 문화나 주변 문화에서 출토된 유골의 체질인류학, 유전자 인류학 논문을 읽어 보시기라도 한 건지? 님의 희망사항이 아닌 근거를 가지고 주장을 하시기 바랍니다. 명대의 산서성지역민의 산동성 대량 이주(山西洪洞大槐树)나 산동성 교동반도가 小云南으로 불리는 것은 중국사의 인구변동사에 하나의 상식입니다.님 머릿속 소설과는 실제 이민의 방향도 다릅니다.
서남지역민의 산동성 이민에 대한 자료는 제가 찾는 대로 보여 드리기로 하고, 명초 산서지역민의 산동성이민에 대한 자료를 하나 보시죠. 이것도 논문은 찾는 데 시간이 걸리네요.http://syly.blog.sohu.com/602766.html 이글 보고도 만족 못하시면, 귀찮지만, 논문도 찾아 보여 드리겠습니다. 제가 말하는 골자는 이민이 명초만 한 시대만해도 산동성의 인구변동이 엄청났고, 상나라 때부터 생각해 보면, 지금 산동성 주민이 상나라 후예라고 주장이 맞는 지 충분히 의심해 볼 만하다는 것입니다. 제 주장 중 잘못된 '이야기'가 무엇인지 밝혀 주시겠습니까?
新编《蓬莱县志稿》载:“元末明初,山东为元,明争夺要地,山东半岛人口被杀戮殆尽,残存土著极微。明朝建立后,开始向半岛大批移民。”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산동성에 많은 이주민 인구가 유입되었다는 사실 처음 알았습니다 몽고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저는 주원장부터 영락제 시기 지금의 강소성과 호남성 사천성사람을 대량으로 산서성으로 이주시킨 거와 지금의 요동지방에 산동성 사람과 고려 여진 몽고(나하추 투항세력)을 대량으로 이주시킨 것과 요동지방만이 토착인보다 이주민의 민호가 더 많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명대요동지배정책연구 남의현 강원대학교... 논문이랑 사이트 찾아주신거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의 산동성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럼 이주민 우세론의 견해를 가지고 계신데 만약 기록으로 그렇다면 고구려 유민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당서 구당서 기록만 보면 많은 고구려 유민이 중국으로 이주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 집중 사민 지역인 사천성과 청해성 산서성 서안 근방에서의 02B 비율은 어느 정도로 나와있나요? 이건 O2를 대세유전자형으로 잡았을 경우입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가장 큰 평균키와 좀 넓은 얼굴면적으로는 한국과 제일 유사하다고 생각되지만 기후학적으로 북방지역이기때문에 같은 계통보다는 수렴진화로 생긴 전혀 다른 인종입니다 그리고 한국인은 얼굴이 길지만 산동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인과 유사한 사람들은 만주족이고 그다음이 서일본인 부리야트족입니다 그리고 그 논문제목은 산동성인과 한국인의 체질비교연구? 인가 할 것입니다 읽은 지도 1년반이 넘었군요 제가 정확한 논문 알려 들이겠습니다
님이 언급한 논문을 정확히 알려 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실제 그러한 논문이 존재하는 지도 의심스럽지만, 김욱교수가 쓴 논문은 분명히 아닐 겁니다. 소설을 좋아하는 분이니 공상속에 충분히 그런 논문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님의 체질인류학은 한국인의 고두라는 변수 하나로 연관관계를 설명합니다. 체질인류학의 논문이나 개설서를 찾아 보시고, 님의 그러한 설명이 요즘에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A multivariate analysis of measurements recorded in early and more modern crania from East Asia and Southeast Asia Michael Pietrusewsky*,Department of Anthropology, University of Hawaii, 2424 Maile Way, Saunders 346, Honolulu, Hawaii 96822, USA
죄송합니다 지금 네이버랑 야후를 좀 뒤져보았지만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꼭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전 소설 안 좋아합니다 그리고 공상도 안 좋아합니다 전 인생 자체가 전쟁입니다 그리고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시간이 나면 꼭 읽겠습니다 그리고 소설이라던가 공상 이런 말은 자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체질적으로 머리치수는 각 인종과 민족의 고유특성이지 않나요? 인종학 측면에서 머리치수는 변이성이 적고 고유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 논문제목에 나온 crania가 무슨 뜻인지 사전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님의 말에 동감합니다 일단 표본집단이 한정적이고 각기 다른 결과도 물론 나올 수 있습니다 저도 단정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지만 글쎄요 설사 산동지방에서 북상하여 만주와 한반도까지 밀려온 동이족과 그 문화가 과연 지대한 문화를 끼쳤을 까요? 고고학적으로도 이미 신석기 부터 다른 문명권입니다.
님의 생각은 신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외부인구의 유입이 없거나, 혹 유입되었더라도 한반도의 인구구성이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주장과, 동이족이 어떤 종족이고 신석기, 청동기, 역사시대 한반도인이 어떻게 구별되는 지 안다는 전제하에 성립됩니다. 그걸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님에게 있는 지? 고고학상 유물의 변화상이 인구 주체 구성의 변화인지, 단순 문화전파의 결과인지를 말해 줄 수 있나요? 다른 문명권이 되는 경로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만일 고대 산동성의 동이인이 어떤 원인으로 다수가 한반도로 이주하고, 그 후 산동지역에 다른 세력이 다수로 자리잡아도 역시 마찬가지로 상이한 문화권이 될 수 있습니다.
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럼 반대로 다수 고대의 산동인(동이족)이 한반도 이주했거나 유전적으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