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태인 성당의 모체인 능교(능다리) 공소
신태인 성당의 모체인 능다리 공소는 신성리 본당 산하에 1899년에 세워졌고, 본당은 1929년에 세워졌다. 능다리 본당이 1934년 태인면 태창리로 옮겼다가 한국 전쟁으로 본당이 소실되자 1954년 신태인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산내면은 해발 250m인 산간벽지로서 주로 1866년 병인박해 때 탄압을 피해, 순창, 정읍 등 산간오지로 피신한 교우들이 박해가 끝난 후에 생계를 위해 이주한 곳으로 알려져 왔다. 1905년 11월 뮈텔 주교가 당시 능교 공소를 방문해 신자 337명에게 견진성사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929년 산내면 능교에 있었던 본당은 50여 평의 목조 성당과 초가 5칸의 사제관과 사무실로 출발하였다. 원래 능교 공소는 정읍 신성리 성당의 소속이었고 초대 신부로 1929년에 김창현(金昌鉉, 1902~1969, 바오로) 신부(1961년 몬시뇰이 됨)가 부임하였다.
당시 정읍군 산내면에는 능교, 새보안(일명 용암), 문수동, 평내, 매대[梅竹], 불당골, 옥천동, 백필리, 사적골, 이화동 용굴, 회문산 등지에 신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산외면과 칠보면에는 원바실[元田], 동막골[盤谷], 청당이[靑丹] 등이 있었다. 지금도 능교, 용암과 문수동 마을에 천주교 교우들이 흩어져 살고 있다.
이곳에서 산길로 10km쯤 떨어진 회문산자락에는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동생인 김난식(金蘭植, 프란치스코)과 조카(재당질) 김현채(金顯采, 토마스)의 묘가 있다. 이곳은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천주교 교우들이 정착한 곳이었다. 1982년 건립된 기존 공소 건물의 노후화에 따라 마련된 새 경당을 짓고 2008년 11월 15일 능교리 신기 마을 현지에서 교구장 이병호 주교 주례로 능교 공소 신축 경당 축복식을 가졌다. 능교 공소는 현재 칠보 선교 본당 소속이다.
▼ 쌍치 공소 - 순창지역 신앙 공동체의 출발지인 교우촌
쌍치는 순창지역 신앙 공동체의 출발지이다. 쌍치에서 10km 정도 걸어가면 반룡촌이라는 곳이 있는데 1860년 박해를 피해 피난 와서 살던 우리 선조들이 교회를 짓고 살았던 쌍치공소 모태지로 6.25 때 소실되어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그 이후 1993년에 이제는 산속이 아니라 내려와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면 소재지인 쌍치에 공소를 짓게 된 계기가 되었다.(권이복 베네딕도 신부)
1882년부터 작성된 사목방문 보고서에는 쌍치의 내동, 대판이, 아청이, 먹산 공소의 이름이 올라있고, 리우빌 신부가 사목 방문한 기록이 있다. 1996년 3월에 이농에 따른 신자 감소 공소의 활성화를 위해 쌍치 관내 학선, 종암, 내동, 석동 공소를 통합하는 쌍치공소 건립에 착수, 그 해 12월 8일에 건평 30평 규모의 5칸짜리 한옥 강당을 준공하고 봉헌(이병호 빈첸시오 주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4년도에는 한국순교성인 선교회 평신도 선교사 부부인 황명훈 요한마타, 하계옥 모니카 선교사가 15년 동안이나 70여 세대의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도왔으며 이들 부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영세한 사람이 100명이 넘을 정도롤 공소가 활성화를 띄게 되었었다.
1983년 복흥 공소가 순창군 복흥면 정산리 234번지의 부지를 매입하고 시작되었으나 자금난으로 중단되었다가 1994년에야 기공식을 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복흥 유아원이 함께 개원하게 되었다. 1997년에는 복흥 공소 어린이집이 개원하였다. 2011년 6월 5일 순창 성당 관할의 복흥 공소와 쌍치 공소가 통합되어 순창 복흥 성당으로 승격되었다.
▼ 신성 공소 - 순교자들의 가족들이 형성한 정읍 본당의 전신
신성리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병인박해(1866년) 때였지만 첫 공소를 치른 것은 1893년 배재에 있던 죠조(Joz e au, 趙得夏, 1866~1894, 모세) 신부 시절이었다. 병인박해 이후 정읍과 장성의 심산궁곡에는 상당수의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교우촌들은 순교자들의 가족이나 박해를 겪은 교우들이 형성한 공소들이었다. 정읍 신성리 본당은 1936년 정읍 본당의 전신이다.
1900년 이전의 정읍 지역에는 14개 정도의 공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신성리 신자들은 산허리에 화전을 일구어 담배 농사를 지으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곳은 황석두(黃錫斗, 1813~1866, 루카) 성인과 함께 치명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로 신부, 장주기 요셉뿐 아니라 이들의 순교 사실을 교회에 증언한 황 마르타가 살고 있었던 마을이다. 1922년 4월 6일 황 마르타는 정식 증언자로서 치명자들에 대한 증언을 하였다. 그는 황석두 성인의 종손녀(從孫女)로서, 그의 백부인 황 예로니모가 직접 갈매못에서 치명 장면을 목격하고 와서 들려준 얘기를 증언하였다.
초대 본당 신부는 1903년 6월에 부임한 김승연(金承淵, 1874~1945, 아우구스티노) 신부였다. 김 신부의 재임 기간 동안 담당 구역에서 개신교와의 마찰과 이로 인한 한국 신부에 대한 신자들의 불신으로 주임 신부가 1907년에는 프랑스의 미알롱(Mialon, 孟錫浩, 1871~1937, 알로이시오) 신부로 교체되었다.
미알롱 신부는 1903년 이곳에 부임한 두 번째 신부로 16년간의 포교 활동을 하였으며, 1909년 봄부터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8칸의 기와집 성당과 4칸의 사제관(현 공소 강당)과 6칸의 회합실을 지었고 돌로 담을 쌓았다. 당시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탄압하자 천주교 신자들이 관군의 기습에 대비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공소는 우리나라 초창기의 한옥 형태 성당 건축으로서 종교적 가치가 있다. 정읍시 문화재 자료 제180호이다.
페셀(Peschel, 白鶴老, 1887~1972, 필립보) 신부가 1924년 9월 26일 신성리 본당 신부로 부임한 후 신자 교육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1931년 페셀 신부가 전출되고 고군삼(高君三, 베네딕토) 신부가 부임하였다. 고 신부는 본당 발전상 본당을 신성리에서 정읍 읍내로 이전하였다. 이로써 신성리 본당 시대가 끝나고 정읍 본당 시대를 시작하였다.
▼ 등천 공소 - 순교자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이룩한 교우촌
등천리 공소는 1895년 라크루 신부(마르첼리노, 구마슬-具瑪瑟, 1871-1929) 때에 설립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충청도 신자들이 이주해 와 이루어진 교우촌이며 해발 654m의 입암산으로 둘러싸인 등천 공소는 정읍시 입암면 등천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예전에는 등내로 불리어졌다.
전라남북도의 경계에 자리하여 천연 요새로 임진왜란 때는 격전지였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는 충청도를 비롯하여 타 지역에서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이주해 왔다. 등천 공소는 1839년 순교한 조 안드레아, 1866년에 순교한 조화서 베드로, 조윤호 요셉 성인의 후손인 조석원 방지거 형제가 충남 당진에서 순창 오룡촌 공소로 피난을 갔다가 정읍 입암면 산부리 골짜기로 들어와 살았다. 슬하에 5형제를 두었으며 공소회장을 지냈다고 한다. 일곱 세대가 움막 같은 집에서 살았는데 점차 교우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조금 넓은 등내에 터를 잡아, 1895년 라크루 신부가 판공성사를 줄 때는 19명의 신자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조성대 요한 형제가 살고 있으며, 조승현 프란치스코 형제는 그분들의 치명을 증언하기도 했다. 또한 1866년 공주에서 순교하신 서정식 요한은 故 서석기 베드로 신부님의 증조부이시며, 후손인 서재현 사도 요한 형제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1903년 6월, 정읍 성당이 신설되고 초대 주임으로 김승연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이 부임하셨다. 본당이 설정되자 그 당시 한 면에 공소가 제일 많았던 내장면 신성리 공소(60명)와 가장 많은 신자가 살고 있었던 입암면 등천리 공소(103명)가 서로 자기 공소에 성당을 유치하려고 신성리 대표인 임정수 형제와 배사진 형제, 등천리 대표인 조명서 형제와 주명진 형제가 주축이 되어 경쟁을 했다. 하지만 정읍 시내에서 가깝고 재력이 있는 신성리에 본당이 유치되어 아쉬움이 많았다고 한다.
등천 공소는 1920년에 포교소 설치 허가가 나와 1924년 11월 4일 드망즈 주교가 4칸 겹집인 경당을 축성하고, 14처를 설치하였으며 주보 성인은 성 요셉으로 삼았다. 등천 공소는 1950년 6.25 한국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빨치산들에 의해 소실되었다. 이때 성경공부를 위해 한지에 교리를 적어 묶었던 책자를 포함하여 공소 집기가 모두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그 뒤 김영일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1956년 9월 교우들과 합심하여 입암산에서 목재를 가져다 대지 500평에 18평의 한옥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82년 리우빌 신부가 근령교, 불바라기, 갈재 등 교우촌을 방문하여 판공을 주었다.)
▼ 태인공소 (신앙선조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지역복음화의 산실)
태인 읍내 도로변에 위치해 있는 태인공소는 오랜 세월을 머금고 있는 특별함이 묻어있는 곳이다. 그리 심하지 않은 경사면 위에 단정하게 일자형으로 가로누운 오래전 건물이 옛 공소이다. 2015년 축성식을 한 새 공소는 옛 공소 건물 바로 옆에 지어졌다.
신태인성당 관할 태인공소는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산로 2924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태인성당의 전신인 태인성당이 자리했던 곳이다. 1935년 능교본당이 태인면으로 본당을 이전하면서 태인본당이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본당으로 출발하였다가 다시 한번 본당을 신태인 지역으로 옮김으로써 1955년 공소로 전환되었다.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본부로도 사용되었던 태인공소는 9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풍상을 겪었다. 허름한 목조 건물인 옛 공소가 더 이상 사용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 낡아 그동안 수차례 신축을 계획했지만 여건이 안 돼 번번이 포기해야만 했다.
옛 공소의 보존 문제로 신자들의 의견이 양분되었을 때 김봉술 신부(당시 신태인성당 주임)의 신앙유산을 지켜야 한다는 믿음이 큰 역할을 했다. 옛공소는 리모델링(약 7천만 원 소요)하여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부지 매입 비용은 들지 않지만 건축기금 7억 원을 마련하기가 막막한 상황이다. 공소 신자는 200여 명이지만 주일 미사에 꾸준히 나오는 신자가 80여 명에 불과한데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어르신들이다.
이루어질 것 같지 않던 새 공소 건립의 꿈은 2012년 이재방(요셉) 선교사가 부임하면서 조금씩 현실이 되어갔다. 이 선교사와 신자들은 오디, 산야초 효소 등 신자들이 직접 재배한 농산물을 판매하고 수도권 지역 본당을 방문해 도움을 청했다. 공소신자들은 넉넉지 않은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신축금을 봉헌하였다.
1938년 4월 18일 성전 상량식을 한 후 정확히 77년 만인 2015년 4월 18일 태인면 현지에서 이병호 주교(전주교구 재7대 교구장) 주례로 새 성전 축복식을 거행하는 벅찬 기쁨을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