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래, 하나님의 응답
시편 117:1-2, 야고보서 5:13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성령강림 후 제13주일이다. 색동교회 여름수양회를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이를 위해 준비하신 분들의 특별한 수고와 헌신에 감사드린다.
어제 찬양집회는 마음껏 찬양하는 기회였다. 찬양집회가 가능하기 위해 준비한 찬양팀의 수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열 명의 찬양팀이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주일 오후마다 찬양의 식탁, 주님의 만찬을 차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들은 ‘찬양하는 사람들’, 곧 천사와 비슷한 ‘찬사들’이다.
어제 덕분에 찬양을 마음껏 부를 수 있었다. 우리는 살면서 환호성을 지를 일이 별로 없다. 소리 높여 찬양하는 일이 쉽지 않다. 나이가 들수록 어색하다. 행여 마음이 상했거나, 약간이라도 실망감이 있거나, 남의 눈치를 보면 환호성을 지르지 못한다.
여러분은 환호성을 지를 대상이 있는가? 행여 인생이 밋밋하여 그럴 마음의 여유도, 그런 놀라움도 없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시편은 하나님을 향해 환호성을 지르라고 한다. 사람에게도 거북하고, 쑥스러운 그런 환호성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한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사랑, 정의, 진실, 은혜, 자비, 온갖 좋은 것으로 만나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1)
개혁교회의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조는 이렇게 고백한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그리스도교는 노래가 풍성한 종교다. 거의 유일하다. 무신론에는 노래가 없다. 불가지론은 노래할 것을 지니고 있지 않다. 각종 형태의 우상숭배는 곡조가 아름답지 못하다.
시편은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자”라고 말한다.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셨을 때 천사들은 주님의 탄생을 찬양으로 축하했으며, 교회의 역사와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노래는 날로 풍성하고 강력해졌다.
시편은 찬양이고, 기도이며, 곡조가 있는 묵상이다. 예배자들은 시편의 찬가들을 예배에서 낭송하였고, 절기 때마다 불렸다. 시편은 ‘찬송, 탄원, 감사’ 등을 주제로 하는데, 한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응답의 노래이다.
‘나의 노래, 하나님의 응답’이란 구조를 갖고 있다.
놀랍게도 시편의 찬가는 기쁨과 감사는 물론, 인간의 슬픔과 아픔까지 하나님을 향해 노래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비이다. 시편은 세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주제들로 편편절절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구약시대 시편은 제2성전시대 찬송가이다. 스코틀랜드 개혁교회 찬송은 바로 시편에 운율을 붙인 것이다.
오늘 첫 번째 본문인 시편 117편은 전형적인 찬송시로, 시편 150편 중에서 가장 짧다. 구약과 신약 1,189장에서 중간쯤 위치한다. 겨우 두 절에 불과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만이 아닌 “너희 모든 나라들... 너희 모든 백성들...”(1)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은총은 그때와 오늘, ‘모든 나라’와 ‘모든 사람’에게 임하고 있다. 바로 나를 향하고, 우리 공동체를 향하신다.
시편 117편은 그러한 은총을 찬양한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1).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구약 한복판에서부터 선민(選民)에 머물지 않고, 만민(萬民)으로 확대되고 있다. 하나님은 만민의 하나님, 온 세상의 하나님, 우주적인 하나님이 되신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그것은 심판이 아니라, ‘인자’(헤세드)와 ‘진실’(에메트)을 통해서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진실’을 받을 자격이 없으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 이제 구체적인 ‘한 사람’과 ‘한 민족’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신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2).
시편 117편은 가장 짧은 고백 안에 가장 커다란 세상을 품고 있다.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은 하나님의 자비 안에 속한다. 하나님은 인류와 만물의 찬양을 받으실 분이다. 그
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찬송은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에게 마땅한 일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 그 진실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시편 117편은 ‘나의 노래와 하나님의 응답’으로 이루어진 시편의 모델과 같다. “찬양하라!”라는 명령법으로 시작되고, 그런 다음 “왜냐하면”(ki)으로 받는다. 찬양으로의 부름과 이에 대한 예전적 응답이란 형식과 구조를 갖추고 있다.
선창: 너희 모든 백성들아,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후창: 그의 사랑 우리에게 뜨겁고, 진실하심 영원하시다.
시편을 모두 살펴보면 많은 내용이 한 개인의 구체적인 삶을 반영하고 있다. 공교회의 예배도 많지만, 지극히 사적인 고백도 많다. 그래서 나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내 마음을 다해, 내 믿음을 통해,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시와 찬양들이 합류하여 공동체 전체의 신앙을 대표하고 있다. 마치 다양한 기원을 지닌 노래들이 오늘날의 찬송가 속에 담겨져 교회에서 사용되는 것과 같다.
나는 예배하는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한다. 예배하는 공동체는 감사의 문, 찬양의 문, 그리고 탄식하는 가슴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게 주신 은총이며, 특권이다. 그러니 찬양에 힘쓰는 일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무엇보다 찬양은 기쁨으로 하나님께 내 존재를 보여 드리는 일이다. 내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최선의 삶을 다시 다짐하는 기회이다.
2)
오늘 두 번째 본문은 야고보서이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종결 권면에서 교회 생활 중 특별히 기도에 대해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란 생활이며, 권리이자, 의무라는 것이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13).
기도와 찬양은 둘이 아니고,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이다. 누구나 고난당할 때면 기도하고, 즐거울 때면 찬양할 수 있다. 물론 반대로 고난당할 때에도 찬양할 수 있고, 즐거울 때 기도할 수 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또 믿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능력을 주셨다. 믿음의 기도는 능력이 있어서 병든 자를 구원하며, 죄인을 용서하신다.
일찍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병자를 치유하는 능력을 주셨다. 그리고 병자의 아픔에 다가가 그들을 고치도록 위탁하셨다. 신앙공동체는 아픔과 고통을 겪는 이들을 위로하고 회복하도록 힘써 기도하고, 돌보아야 할 사명이 있다.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16).
바울 사도에 의하면 기도와 치유 활동은 교회에 주어진 은사이다. 또 야고보는 병자들이 건강을 회복하도록 그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장로들의 과업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장로는 오늘의 장로와 문자적 개념이 다르나, 다만 교회의 모든 리더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야고보는 한 마디로 진지한 기도의 힘과 기도를 통해 역사하는 능력을 설명한다. 한마디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의인은 누구인가?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의뢰하며 모든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굳게 매달리는 사람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이러한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 당하였다. 바야흐로 지금은 의인의 기도가 필요한 시절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하시면서 3대 사역으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며, 고치셨다. 무엇보다 치유 행위는 복음의 의미를 더욱 사람들에게 가까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도록 인도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론 현대 목회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이를 통해 치유의 주체이신 하나님 앞에 간구함으로써 육신과 마음, 영혼의 병이 나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고,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를 더 강화시키고 새롭게 할 수 있다.
야고보서는 치유를 위해 네 가지 신앙적인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기도와 안수, 기름 바름 그리고 성찬’이다. 특히 “서로 기도하라”(16)는 권면은 중보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중보 기도는 다른 사람의 짐을 서로 나누어지는 일이다.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으로 하여금 합심하고 연대하게 한다. 예수님은 나를 향해 그 짐을 가볍게 하시고, 고단한 삶에 쉼을 약속하셨다.
좋은 신앙공동체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이다. 교우 간이든, 심지어 서로 소원한 사이에도 서로를 위해 중보 기도하면, 더 이상 미워할 수 없다. 진심으로 기도하는 순간 이미 화해하고 사랑하게 된다. 하물며 부부 간에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면 더 뜨겁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은 생각에 머물지 않고, 실제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놀라운 능력이다. 그래서 믿음 생활을 하는 우리들은 주님한테서 오는 능력을 체험하면서 살기 때문에 이 세상을 이기며 사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해야 한다.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동정을 사는 것이 더 행복한 일이다”(리차드 베커).
3)
엊그제 러시아에서 양결과 양설의 엄마 아쎌이 한국을 다녀갔다. 며칠 전 저녁에 광화문에서 만나 콩국수를 함께 먹었다. 어머니 이나탈리아 선생님의 안부를 물었더니, 수심이 가득하다. 지난 봄에 오빠가 우크라이나 전쟁터로 징집을 당했다고 하였다. 그 일로 어머니가 너무 속이 상하고, 아파한다고 했다.
그 댁은 오빠와 아쎌 남매를 두었는데, 남매 사이에 나이 차이가 있다. 오빠는 올해 50세이다. 배가 많이 나온 아저씨라고 한다. 그런데 징집이라니? 그만큼 러시아 사정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50세 중년이 전쟁에 징집되었으니 어머니와 그 가족의 근심은 얼마나 클까? 비록 최전선은 아니라지만, 그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나는 러시아 노래를 좋아한다. 애잔하고, 가슴을 아릇아릇 벼리는 감정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흥은 흥대로, 그 신명에도 맛이 배여 있다. 노래 좋아하는 모습은 한국 사람들과 비슷하다. 아픔과 한이 많은 민족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겨울의 길고 긴 밤과 추위, 가난, 농노의 삶, 차르가 벌인 숱한 전쟁,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눈물... 러시아정교회의 음악과 예배에도 그 아픔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떼제공동체는 찬양의 대명사와 같다. 공동체의 찬양에는 공식이 있다. 그들은 “아픔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창이다”라고 하였다. 가장 아름다운 찬양은 상한 심령으로 부르는 찬양이다. 마음은 찢어질 때, 곧 상한 심령은 하나님 앞에서 비로소 최선이 된다.
하나님이 나의 노래에 응답하시길 믿는다. 내가 부르는 찬양이, 내가 드리는 기도가, 내가 고백하는 삶의 현실이 언제나 하나님만을 향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기뻐할 때나, 아파할 때나, 즐거운 순간이나 고난을 통과하는 시간에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간구할 수 있다. 그것은 내게 주신 믿음의 특권이다.
무엇보다 서로 기도하는 우리 색동공동체이길 빈다. 하나님은 나를 기도하도록, 찬양하도록, 은총의 사람으로 살도록, 사랑과 진실로 나아가도록 불러주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신다. 내 삶에 기쁨의 환호성을 주신다. 내 삶을 고쳐주시고, 새롭게 하신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