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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운대사(虛雲大師)일대기
송찬문 번역
(선정과 지혜 수행입문 부록에서 전재함)
현대 중국불교사에서, 고행기간이 100여 년에 이르고 15개의 도량에서 공부했으며, 6대선사(禪寺)의 사원을 중흥시키고 한 몸에 선문5종(禪門五宗)의 법맥을 이었고, 가르침을 받은 신도가 수백만에 달하는 고승으로는 선종의 태두(泰斗)라고 찬탄 받는 허운대사이다. 허운대사(1840~1959)는 남조(南朝)의 양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의 후손으로 속성이 소(蕭)씨이며 조상의 본적은 중국 호남성 상향현(湘鄕縣)이다. 근세 한국의 고승 경허선사(鏡虛惺牛, 1846∼1912)와는 동시대인이다. 허운대사는 남회근 선생과 황념조 거사가 이 귀의한 사부이다. 인광대사는 허운대사를 진정한 승려라고 말씀했다.
아편전쟁이 일어난 해인 청나라 도광(道光) 20년(1840년) 7월 30일, 허운대사는 복건(福建)의 천주부(泉州府) 막료 관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고기나 마늘 먹기를 싫어하고 성격이 담박함을 좋아했다. 12살이던 해에 부친을 따라 생모와 조모의 영구(靈柩)를 모시고 호남의 상향현 고향으로 가 안장했다. 장례 중에 처음으로 삼보(三寶)의 법물(法物)을 보았는데 환희심이 났다. 그로부터 점점 세속의 책을 버리고 불경을 좋아했다. 그리고 세속을 버리고 출가할 원이 싹 텄다.
16세 때, 단신으로 남악(南岳) 형산(衡山)으로 출가하기 위해 떠났으나 중도에 가족에게 붙들려 돌아왔다. 뒷날 또 부친에 의해 억지로 복주(福州)로 이사하고 전(田)씨와 담(譚)씨 두 여자에게 장가들어 한 방에 지내도록 강요당했다. 허운대사는 함께 지냈지만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출가의 뜻은 더욱 굳어졌다.
19세 때 (1858년)인 청나라 함풍(咸豊) 8년, 피대가(皮袋歌)를 지어 두 부인에게 남겨두고 사촌 동생과 몰래 고산(鼓山) 용천사(涌泉寺)에 가서 상개(常開)노인에게 예배하고 출가했다. 법명은 고엄(古嚴), 또는 연철(演澈)이라고 했으며 법호는 덕청(德清)이라고 지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받들고 경서를 독송하고 계율을 학습했다. 다음 해에 묘련(妙蓮)화상을 의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부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산 뒤의 바위굴에서 3년 동안 은거하였다.
23세 때 (1862년), 부친이 노령으로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를 듣고, 스승의 명을 받아 고산으로 돌아와 직사(職事)를 맡고 수두(水頭) · 원두(園頭) · 행당(行堂) 등의 직무를 4년 넘게 맡았다. 그 뒤 또 바위굴로 들어가 다시 고행을 닦았다. 한 벌의 누더기와 바지로 장좌불와 하면서 초목을 먹고 계곡의 물을 마셨다. 3년 뒤 밖으로 불교사원 참배를 떠났다.
31세 때 (1870년), 천태산 화정(華頂) 용천암(龍泉庵)으로 가서 융경(融鏡) 노법사의 가르침을 받들며 경전교리를 연구 학습했다. 처음에는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우고 다음에 선종의 의식제도를 국청사(國淸寺)에서 배웠다. 이어서 참학하고자 악림사(岳林寺) · 천동사(天童寺) · 보타사(普陀寺) 등에 갔다.
36세 때 (1875년), 고민사(高旻寺)에서는 민희(敏曦)법사의 법화경 강의를, 악림사에서는 아미타경 강의를 들었다. 37세 때는 천동사에서 능엄경종통(楞嚴經宗通) 강의를 들었다.
43세 때 (1882년), 부모의 깊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발원하고 절강성의 보타(普陀) 법화암(法華庵)에서 7월 1일 삼보일배(三步一拜)로 출발, 산서성의 오대산(五臺山)으로 참배를 떠나 22개월 동안 그 노정이 여러 개의 성(省)을 지났다. 삼보일배 하며 가는 길에,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면서 큰 눈 속에 갇히고, 이질에 걸려 설사하고, 입에서 선혈이 흐르는, 세 차례의 큰 병이 나서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렀다. 그 때마다 문길(文佶)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도움을 주었다. 그 밖에도 갖가지 고난을 다 겪었지만 마음은 변함없이 한결같고 도업(道業)은 날마다 높아졌다.
45세 때 (1884년), 5월 하순 오대산 현통사(顯通寺)에 도착했다. 7월 10일 오대산을 내려와 화엄령(華嚴嶺)으로부터 북행하여 북악항산(北岳恆山)으로 향했다. 호풍구(虎風口)에 이르러 곧바로 북방의 제일산인 석방(石坊)에 오르니 산봉우리가 구름을 뚫고 올라가 공중에 비석들이 우뚝우뚝 서 있는 듯했다. 평양부(平陽府)에 이르러 남북선굴(南北仙窟)과 요임금의 사당을 참배하고 남쪽으로 포주(蒲州)에 이르러 관우(關羽)사당을 참배하였다. 황하를 건너고 동관(潼關)을 넘어서 태화산(太華山)에 올랐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거룩하고 깨끗함을 추모하며 수양산(首陽山)을 유람하고 감숙성(甘肅省)으로 들어가 공동산(崆峒山)에 이르렀다.
46세 때 (1885년), 서행하여 대경관(大慶關)을 지나 함양(咸陽)에 이르렀다. 소백(召伯)의 감당고수(甘棠古樹)를 둘러보고, 자은사(慈恩寺) · 화엄사(華嚴寺) 두 곳을 참례하였다. 남 오대산에 이르러 초가집을 지어 행각을 쉬고 3년을 머물렀다.
48세 때 (1887년) 2월에 하산하여 취미(翠微)에 이르러 황유사(皇裕寺)와 구마라집 도량에 이르렀다. 태백산(太白山)을 유람하며 한중부(漢中府)에 이르러 한고조(漢高祖)의 배장대(拜將台) ․ 제갈공명의 사당 ․ 장비의 만년등(萬年燈)을 참관하였다. 용동배(龍洞背) · 천웅관(天雄關) ․ 소아미(小峨眉) ․ 검문관(劍門關)을 거쳐 신도(新都)의 보광사(寶光寺)에 이르렀다.
49세 때 (1888년), 성도(成都)에 이르러 문수원(文殊院)을 참배하고 아미산(峨眉山)에 이르렀다. 서쪽으로 출행하여 타전로(打箭爐) ·이당(裏塘)을 거쳐 북으로는 찰목다(察木多)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석독아란다(碩督阿蘭多) 및 납리(拉里)에 이르렀다. 오소산(烏蘇山)을 넘고 라싸하(拉薩河)를 건너 티베트의 정교(政敎) 중심인 라싸에 들어갔다. 서북쪽 포탈라산에 높이 13 층에 달하는 포탈라궁이 있었다.
궁전은 장엄하고 금빛과 푸른빛이 휘황찬란하였다. 그곳에 달라이 라마 활불과 라마승 2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또 다시 서행하여 공갈(貢噶) ․ 자강(孜江)을 거쳐 일객칙(日喀則)에 이르렀다. 서쪽에 찰십윤포(扎什倫布)가 있는데 건축물이 크고 화려했으며 규모가 몇 리나 되었다. 이곳은 뒷날 후장(後藏) 정교의 영수인 판첸 활불이 거처하는 곳으로 라마승이 약 5천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50세 때 (1889년), 남행하여 납갈(拉噶) ․ 아동(亞東)을 거쳐 인도에 들어갔다. 부탄을 거쳐 히말라야 산을 넘어 양포성(揚甫城)에 이르러 붓다의 고적(古跡)에 참배하였고 맹가요에서 스리랑카로 건너가 불교성지에 참배했다. 미얀마에 들어가 대금탑(大金塔)을 참배하였다. 7월에 귀국을 시작하여 납수(臘戍)로부터 한용관(漢龍關)을 거쳐 대리(大理)에 이르렀다. 계족산(雞足山)을 참배하고 가섭존자가 선정에 들어 계시는 곳에 예배하는데 홀연히 큰 종이 스스로 세 번 울리자 그 지방 사람들은 모두 환호하며 예배하였다.
이렇게 오대산을 하직한 후 산서성을 떠나 섬서성을 지나 사천성을 거쳐 티베트에 이르고, 다시 운남성으로 들어간 후 국경을 넘어 부탄 · 인도 · 스리랑카 · 미얀마에 이르렀던 허운은, 이 여러 해 동안 명산대천을 참방하면서 세 벌의 옷과 발우 하나로 외로이 홀로 여행하였다. 산수를 한가로이 유람하니 그 어디에도 얽매임이 없었다. 물길 산길에서 바람과 서리와 비와 눈을 만나도 피곤한 모습이 조금도 없었다. 행각으로 체력은 증강되어 발걸음은 가볍고 빨라졌으며, 없어진 것은 일으켜 세우주고 끊어진 것은 이어주는 인간세상의 사표로서 자신을 양성하였다.
허운은 귀국한 후 묘련화상의 의발을 이어받아 임제종 제43세가 되었다. 또 요성(耀成)화상의 법맥을 이어 조동종 제47세가 되었다.
53세 때 (1892년), 보조(普照) ․ 월하(月霞) ․ 인련(印蓮) 등 여러 스승들과 함께 구화산(九華山)에서 지내며 화엄종 교리를 3년이나 연구했다.
56세 때인 청나라 광서 21년(1895년) 겨울, 강서성 고민사(高旻寺)에서 선칠(禅七 : 7일 단위 참선용맹정진법회/역주) 중에 깨달음을 기약하고 용맹 정진했다. 섣달 초하루 저녁 향을 피울 때 눈을 뜨니 홀연히 대 광명이 보였다. 안팎이 훤히 보였는데, 가까이는 벽 밖의 사물들이 보이고 멀리로는 강 가운데 배가 다니고 강 양쪽 언덕의 수목이 보이는 게 마치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또렷하지 않는 게 없었다. 8주째 선칠 기간 중 법회공양담당 스님이 끓인 물을 잔에 따라주는 과정에서 뜨거운 물이 허운의 손에 튀겨 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그 깨지는 소리에 홀연히 화두의 의근이 단박에 끊어지면서 평생 중 가장 경사스럽고 기쁜 게 마치 큰 꿈에서 막 깨어난 것 같았다. 그래서 스스로 다음과 같이 게송을 말했다.
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니 杯子撲落地
쨍그랑하는 소리 또렷하구나 響聲明瀝瀝
허공은 산산조각이 나고 虛空粉碎也
미친 마음은 당장에 쉬어버렸네 狂心當下息
뜨거운 물에 손 데어 잔이 깨짐에 燙著手 打碎杯
집이 부셔지고 사람이 죽으니 그 경지
말로 열어 보이기 어려워라 家破人亡語難開
봄이 오니 꽃향기 어디가나 피어나고 春到花香處處秀
산하대지는 그대로 여래로세 山河大地是如來
58세 때 (1897년), 모친의 은혜를 갚기 위해 영파(寧波) 아육왕사(阿育王寺)에서 왼손의 약손가락을 태워 부처님께 연지(燃指)공양을 올렸다. 초산(焦山) 지통(智通)화상의 명을 받들어 능엄경을 강의하였다.
59세 때 (1898년), 영파 아육왕사에서 법화경을 강의하였다.
61세 때 (1900년), 북쪽으로 올라가 다시 오대산에 참배하고 북경에 이르렀다. 전쟁을 만나 읍비로(邑跸路)를 따라 서행하여 서안(西安)에 다다른 후 길을 돌려 종남산(終南山)에 올랐다. 사자암(獅子岩)에서 초막을 짓고 홀로 참선 수행했다. 어느 날 끼니를 준비코자 솥에 토란을 삶는 중에 선정에 들었는데, 반 개월이 지나 깨어나 보니 삶던 토란이 곰팡이가 한 촌이 넘게 자라있고 얼음처럼 단단했다. 원근의 승려나 속인들이 많이 와서 찾아봄으로 세속의 방해를 피하고자 자호를 허운(虛雲)에서 환유(幻游)로 바꾸었다.
63세 때 (1902년), 다시 사천성에 들어가 아미산에 오르고 운남성에 들어가 계족산(雞足山)에 올랐다. 다시 곤명(昆明)에 이르러 복흥사(福興寺)에서 폐관(閉關)하고 경전 읽기에 몰두하면서 각고 수행했다.
65세 때 (1904년) 출관(出關) 후 귀화사(歸化寺)에서 원각경과 사십이장경을 강의하였는데 귀의하는 자가 3천명이나 되었다. 이 해 가을 축죽사(築竹寺)에서 능엄경을 강의하고 전계(傳戒)를 한차례 하였다. 전계가 끝나고 대리(大理) 숭성사(崇聖寺)에 가서 법화경을 강의하였는데 귀의하는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조금 뒤에 계족산 가섭존자 도량을 중흥하기로 발심하고 주지로 청하는 것을 받아들여 낡은 폐습을 고치고 시방총림(十方叢林)으로 바꾸었다.
66세 때 (1905년), 석종(石鐘)에서 전계하니 계를 받으려는 자가 8백여 명이나 되었다. 정애사(鼎崖寺) 건축 모금을 위해 단신으로 남양(南洋)으로 갔다. 가는 길 내내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갖은 고생을 했다. 남전(南甸) 태평사(太平寺)에 이르러 아미타경을 강의하고 또 빈랑(檳榔)에 이르러 법화경을 강의하고 말래카에 이르러 약사경을 강의하고 쿠알라룸푸르에 이르러 능엄경을 강의하였는데, 전후로 귀의하는 자가 만여 명에 이르렀다.
같은 해, 기선(寄禪)선사의 전보를 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배로 귀국하면서 대만에 들러 기륭(基隆)의 영천사(靈泉寺)를 참방하였다. 귀국 후 북경에 들어가 사원의 재산을 보호할 것을 상소하였다. 숙친왕(肅親王)의 도움을 얻어 허락을 받고 아울러 용장(龍藏 : 대장경) 한 부와 호국축성선사(護國祝聖禪師)라는 편액, 자주색 옷, 발우, 옥인(玉印), 석장(錫杖), 여의(如意), 전폭난가(全幅鑾駕)와 불자홍법대사(佛慈弘法大師)라는 봉호를 하사 받았다.
67세 때 (1906년), 북경에서 나와 묘련화상의 골회(骨灰)를 남양으로 호송할 것을 부촉 받았다. 돌아가는 길에 만여 명이 귀의 하였다.
68세 때 (1907년), 단나(丹那)에서 반야심경을 강의하고 태국에 가서 지장경 ․ 법화경보문품 · 대승기신론을 강의하였다. 한 번은 가부좌하고 9일 동안 선정에 들어있자 태국의 수도를 떠들썩하게 하였다. 국왕과 대신들 그리고 선남선녀들이 무리지어 와서 예배하였다. 선정에서 나오자 태국 국왕이 궁전으로 경전 강의 초빙을 하고 여러 가지로 공양하며 엄숙 경건하게 귀의하였다. 귀국한 후에는 여전히 계족산에 머물렀다.
69세 때 (1908년), 다시 빈랑의 극락사에 가서 대승기신론과 보현행원품을 강의하였다. 귀의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이 해에 극락사에서 폐관수행에 들어갔다.
72세 때 청나라 헌통 3년(1911년), 폐관수행을 마치고 귀국하여 계족산에서 전계하고 49일 참선법회를 결제하여 좌선과 하안거의 모든 법식을 제창하였다. 또한 사원의 재산을 보호하고 군인들이 승려를 쫓아내고 사원을 훼손하는 일을 없애기 위해, 완강함을 무릅쓰고 홀로 운남성의 군사책임자인 이근원(李根源)을 만나 말로 논변하고 도리로 분석하여 그를 불교에 귀의시켜 큰 힘으로 불법을 돕도록 했다.
73세 때 (1912년), 많은 승려들의 전보 요청으로 상해에 도착, 승려계에 연락하고 대표가 되어 영하(寧夏)에 가서 손문(孫文) 선생을 만났다. 다음 해에 중화불교총회 조직준비에 참가하고 그 성립 대회에 출석했다. 운남성으로 돌아와 중화불교총회 운남성 분회의 사무를 주관했다.
79세 때 (1918년), 곤명 운서사(雲栖寺)의 수리 복구를 주관하고 흥복사(興福寺) · 축죽사(築竹寺) · 승인사(勝因寺) · 송은사(松隱寺) · 태화사(太華寺) · 보현사(普賢寺) 등의 수리 복구에도 참여하고 주관했다.
80세 때 (1919년), 운남성 도독 당계효(唐繼堯)의 청에 응하여 곤명 충렬사(忠烈寺)에 가서 수륙도단(水陸道壇)을 열었다. 49일 기간을 원만히 마치니 온 도단의 촛불마다 연꽃이 피고 그 노을빛에 눈이 부셨다. 성중(聖衆)을 전송하는 의식을 할 때는 공중에 당번(幢幡)과 보개(寶蓋)가 나타나 구름 가운데서 펄럭거리니 성(城)의 온 민중이 땅에 엎드려 예배하였다. 법회가 끝나고 계속 경전을 강의하고자 단을 설치하니 눈이 내렸다. 아울러 운서사를 중수할 계획을 세웠다.
운서사에서 84세 때는 칠중해회탑(七眾海會塔)을 세웠고, 85세 때는 금산조탑(金山祖塔) ․ 칠금탑(七錦塔) 등 모두 열여섯 개의 탑을 중수하였다.
86세 때 (1925년)부터 88세 (1927년) 봄 이후까지 여전히 운서사에서 경전강의를 하였는데, 대웅전 앞의 늙은 매화나무의 마른 가지에 돌연히 하얀 연꽃 수십 송이가 피었다. 그 크기가 발우만큼 이었고 미묘한 향기가 그지없이 맑았다. 정원의 푸른 채소에는 모두 푸른 연꽃이 피었다.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 애써 일하기를 10여 년이나 했다.
95세 때 (1934년), 복건성 주석(主席) 양유경(揚幼京) 등의 요청에 응하여 복주 고산 용천사 방장에 취임했다. 천 년 묵은 소철이 처음으로 꽃을 피웠다. 이로부터도 18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온 마음으로 선종의 사찰을 보호 유지했다. 규범을 일으키고 사원의 기풍을 정돈하며 규약을 반포하였다. 불학원(佛學院)을 창립하여 승려 인재를 양성했다. 동시에 외부와의 인연에 응하고 맺어 여러 방면으로 시주헌금을 모아 사원의 건물을 보수하고 누각을 다시 세우고 농지를 사서 늘렸으며 산림육성장을 마련하여 선농(禪農)기풍을 발전시켰다. 수년 뒤에 사원의 면모가 일신되어 명성이 원근에 들렸다. 그 사이 몸소 불교서적 정리를 주관하고 비본(秘本)을 중시하고 산지(山志)를 편찬했다.
같은 해, 어느 날 가부좌하고 앉아 있는데 육조(六祖)대사가 앞에 나타나 말하기를 “때가 되었다. 그대는 마땅히 돌아가야 한다.” 고 했다. 얼마 있지 않아 광동성 정부 주석 이한혼(李漢魂)이 보내온 여러 차례의 초청전보를 받았다. 육조대사의 도량이 폐허가 된지 오래되어, 명나라의 감산(憨山)대사가 중수한 이후 이제 다시 중수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초청에 응해 조계(曹溪) 남화사(南華寺)로 옮겼다. 처음 도착했을 때 사원의 건물이 퇴락했고 승려들이 흩어져 버린 것을 목도하고 마음이 몹시 아팠다. 중흥하겠다고 발원하고는 시주에게 연락하여 오두막집을 만들어 승려 대중들을 안주시켰다. 이어 조사전(祖師殿)을 북돋우고 수리했으며 전당(殿堂)을 재건하고 불상을 새로 빚었다. 다음 해 봄 도량을 중수하자 사방에서 대중이 구름처럼 모였고 고관들도 즐거워하며 병사를 데리고 온 자도 있었다. 그런데 정전(正殿)에 단(壇)을 만들고 보살계를 설하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문 밖에 나타났다. 대중들은 와~ 하며 소란을 피우고 병사들은 총을 겨누어 쏘려 하였다. 대사가 제지하자 호랑이는 계단 아래 엎드려 삼귀의(三皈依)를 받은 후 돌아갔다.
96세 때 (1935년), 홍콩 동화삼원(東華三院)의 초빙에 응하여 홍콩에 가서 수륙도단을 열었다.
97세 때 (1936년)부터 103세 (1942년)까지는 남화사에서 전계하고 경전강의를 하면서 지냈다. 여러 해를 지나 사원건물을 복원하여 그 기상이 다시 새로워졌다. 아울러 사원규약을 개정하고 율사(律師)학원을 창립했다. 매년 계율 전하기를 법과 의식대로 하니 사방에서 듣고 사람들을 모아 찾아왔다. 당시는 중일전쟁 중이어서 국난이 눈앞에 닥친 때라 대사는 난민을 구호하기 위하여 사원 대중은 저녁 식사를 하지 말자고 제창하고 솔선수범했다. 그리고 운관(韻關) 대감사(大監寺) 수리 복구를 주관하여 난민을 안치했다. 전쟁이 이미 심각한 단계에 이른 1942년, 국민당정부 주석과 중앙 장관들이 대일 항전을 위하는 한편, 인심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굴영광(屈映光) · 장자렴(張子廉) 두 거사를 특파하여 대사를 중경(重慶)으로 모셔와 호국식재법회를 열고 주관하게 했다.
104세 때(1943년), 중경에서 남화사로 돌아왔다.
105세 때(1944년), 대사는 광동(廣東)의 운문산(雲門山) 대각사(大覺寺)에 도착했다. 온통 담장과 벽은 허물어져 있고 가시덤불이 무성한데다 운문 문언(文偃)대사의 육신도 위태로운 건물 속에 꼿꼿이 앉아계시는 것을 보고는 슬퍼 눈물이 흐르는 것을 금치 못하고는, 다시 일으켜 세울 뜻을 즉시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승려들을 인솔하고 더러움을 청소하고 터를 파고 담장을 쌓아 7년이 안 되는 시간 내에 180여 동의 전당을 새로 건축하고 100여 존의 불상을 새로 조상하여 금 등으로 장식하니 대단히 장엄했다. 동시에 대각육림장(大覺育林場)을 만들어 선농병중(禪農并重)을 실천했다. 그리고 과거에 끊어졌던 운문종의 법맥을 자신이 멀리 계승하고 제자 10여 명에게 법을 전해 주었다.
항일전쟁에 승리한 다음 해인 1946년 대사는 정혜사(淨慧寺 : 즉 육용사六榕寺임)에 도단을 설치하고 법회를 주관하였다.
110세 때 (1949년) 여름, 초청에 응해 홍콩에 가서 경전강의를 했다. 그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홍콩에 머무르기를 권했으나 대사는 단호히 거절하고 법회가 끝나자 곧 운문으로 돌아왔다
112세 때 (1951년), 춘계(春戒) 기간 중 불법적인 무리들이 운문사에서 소란을 피우며 절을 뒤져갔다. 대사는 심히 구타를 당하여 늑골이 부러졌다. 3월 초하루에 발병하여 예전처럼 가부좌한 채 9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다. 초열흘 새벽에 길상와(吉祥臥) 자세로 누운 채 꼼짝 않고 하루 주야가 지났다. 시자가 등초를 콧구멍에 대어 시험해 보니 숨결은 거의 멈추었고 호흡은 아주 미약했다. 좌우의 맥을 짚어보니 역시 정지한 것 같았으나 안색은 살아있는 듯 하고 체온도 남아 있었다. 11일 정오 대사가 약간 깨어남에 시자가 시간을 알려주자 대사는 “나는 겨우 몇 분이 지난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곧 시자 법운(法雲)에게 자신이 말하는 내용을 기록하라고 했다. 그리고 남에게 가벼이 알려 의심이나 비방을 받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조용히 말했다. “나는 짧은 꿈속에서 도솔천 미륵내원에 이르렀는데 그 장엄하고 유달리 아름다움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륵보살이 자리에서 설법하는 것을 보았는데 듣는 자가 매우 많았다. 그 중 십여 명이 강서(江西) 해회사(海會寺)의 지선(志善)화상, 천태종 융경법사, 기산(歧山)의 항지공(恆誌公), 백세궁(百歲宮)의 보오(寶悟)화상, 보화산(寶華山) 성심(聖心)화상, 독체율사(讀體律師), 금산(金山)의 관심(觀心)화상 및 자백존자(紫柏尊者) 등 이었는데 모두 이전부터 알고 있던 분들이었다. 나는 세 번 째 빈 자리에 앉았다. 아난존자는 유나를 맡고 있었는데 나와 가까이에 앉아 미륵보살이 유심식정(唯心識定)을 강의하는 것을 들었다. 다 끝나지 않아 미륵보살이 내게 ‘그대는 돌아가라.’라고 말했다. 내가 ‘제자는 업장이 깊고 무거우니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미륵보살이 ‘그대는 업연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니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 다음에 다시 오도록 하라.’라고 말했다.”
대사가 죽도록 맞고도 죽지 않으니 불법적인 무리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감히 소란 피우지 못했다.
113세 때 (1952년) 4월, 북경의 제자들의 초청에 응해 대사는 호북성 무한(武漢)을 거쳐 북경에 갔다. 동년 9월 26일, 북경 광제사(廣濟寺)에서 단을 주관하고, 아시아평화회의 소집 개최를 옹호하기 위하여 거행한 세계평화축원법회를 열었는데 따라서 기뻐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10월 1일 중국불교계를 대표하여, 아시아태평양평화회의 대표단에 출석한 스리랑카의 다르마 라타나 법사가 헌공한 부처님 사리와 패엽경과 보리수 등의 법물을 받았다. 10월 15일 수석 발기인으로서 중국불교협회 발기인회의에 출석했다. 동년 겨울, 초청에 응해 남하하여 상해에 도착, 옥불사(玉佛寺)에서 세계평화 축원 법회단을 주관하고 수륙도단을 열었다. 행사 장면이 장관이었으며 따라 기뻐하며 귀의한 자가 4만여 명에 달했다.
114세 때 (1953년) 5월, 대사는 북경에서 중국불교협회 성립대회에 출석하고 명예회장으로 모셔졌다. 회의가 끝난 후 대사는 산서성의 운강(雲崗)석굴에 가서 예배하고 무한을 거쳐 6월에 강서성의 여산(廬山)에 도착, 대림사(大林寺)에서 병 요양을 했다. 이 때 대사는 강서에서 머물 뜻이 있었지만 대림사는 사람들의 내왕이 많아 맑고 조용히 지내기 어려웠다. 10월 2일 시자를 데리고 비를 무릅쓴 채 운거산에 올라 오두막에 들어가 머물렀다. 그날 밤 승려들과 상의하여 직사(職事)를 모셨다. 수 일 후에 대중을 이끌고 황무지 개간에 나섰다. 얼마 후 사방의 납자가 백 명 가까이 소식을 듣고 왔다.
115세 때 (1954년), 백장선사의 가풍을 홍양(弘揚)하기 위해 진여선사승가농장(眞如禪寺僧伽農場) 성립을 주관하여 승려 대중을 농림대(農林隊)와 건축대(建築隊)로 나누었다. 농림대는 봄 시작과 함께 개간 일을 하여 논은 수 십 묘를, 밭은 10여 묘를 일궈 씨앗을 뿌리고 가을에 벼를 수백 짐 수확했다. 밭에 심은 고구마도 풍성한 수확을 했다. 건축대는 땅을 파고 벽돌을 굽고 화로를 만들어 쇠기와를 주조하여 연내에 2층짜리 철기와 벽돌 목조 구조의 장경루(藏經樓) 건축을 마쳤다. 여기서 위앙종(潙仰宗) 종판(鐘板)을 걸고 매일 저녁 불전에 올라 좌선을 익혔다. 이후에도 여전히 승려대중을 이끌고 법답게 수지했다. 선농을 함께 중시하여 농사를 짓고 사원을 건축하기를 한 해 한 해 하루하루 이어가 1957년에 진여선사(眞如禪寺) 재건 수리 복구공사를 대체로 완성했다. 사원의 건물은 모두 예전의 조계 남화사의 짜임새와 격식을 모방하도록 계획하여 앞에는 다시 지은 조주관(趙州關)을, 뒤에는 산문(山門) · 천왕전 · 위태전(韋駄殿) · 대웅보전 · 법당 · 장경루 등을 한 줄로 배치하고 좌우 양측에는 허회루(虛懷樓) · 운해루(雲海樓) · 객당(客堂) · 공덕당(功德堂) · 조사전(祖師殿) · 가람전(伽藍殿) 등을 건축했다. 동서의 선당 · 방장실 · 고방(庫房) 등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 각 전당의 불상은 제도를 따라서 조상하고 불상마다 금을 칠하고 꾸며 단정 장중하면서 엄숙했다. 아울러 사원의 규율 정돈을 주관하여 도풍을 엄숙히 하여 매년 여름에는 경전을 강의하고 겨울에는 선칠법회를 열었다. 그리고 불학연구원을 창립하여 승려인재를 양성했다.
116세 때 (1955년), 많은 사람들의 청에 응해 자서수계방편법문(自誓受戒方便法門)을 열어 수백 명의 계자들에게 삼단대계(三壇大戒)를 주었다. 이와 함께 백여 세의 고령에도 몸소 승려 대중을 이끌고 선농병중을 실천하고 수천 묘의 산림과 논밭 100여 묘를 경영했다.
117세 때 (1957년), 사원 내에 식량 자급자족을 실현하였고 매년 대나무와 나무, 그리고 차 잎의 생산 수입도 볼만 했다.
120세 때 (1959년) 년 초에 허운대사는 몸이 날로 쇠약해져 감을 스스로 느껴 관련 사무는 안배하고 잠학려(岑學呂) 거사가 재편집한 운거산지(雲居山誌) 발간 유통을 주관하고 친히 서문을 지었다. 대사는 따로 진여선사의 여러 직사들 각각에게 당부하고 최후에는 시자에게 순순히 훈계하기를, “이후에 스승이 되거나 행각하거나 반드시 이 한 벌의 승가리 법복을 굳게 지켜가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영원히 보전할 수 있느냐는 오직 한 글자에 있다. 그것은 바로 계(戒)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가 죽은 후 뼈와 재는 수중에 뿌려 물속 동물들과 인연을 맺어 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음력 9월 13일 운거 오두막에서 원적했다. 세수는 120세, 승랍은 100세였다. 다비한 후 5색 사리 수백 알을 얻었다.
허운대사는 일생동안 뜻이 크고 기상이 굳세었다. 대비 원력이 깊고 고행을 했다. 교리의 이해와 실천을 병진하며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두타행을 행했다. 불법을 널리 전파하고 경전을 설하는 등 그 공적이 탁월했다. 앞서 말한 조동종과 임제종 법맥 전승 이외에도 호남의 보생(寶生) 등이 위산의 법제(法第)를 이어 줄 것을 청하자 그에 응하여 흥양(興陽)선사의 법맥을 계승함으로써 위앙종 제8세의 조사가 되었다. 복건의 팔보산(八寶山) 청지(靑持)의 청에 응하여 법안종의 원류를 이어 양광(良廣)선사의 뒤를 계승함으로써 법안종 제8세의 조사가 되었다. 운문사를 중흥할 때 멀리 이암심정(已庵深净)선사의 법을 계승하여 운문종 제12세 조사가 되었다. 이렇게 대사는 한 몸에 선문5종의 법맥을 계승하여 지혜의 해가 다시 빛나고 선종의 기풍이 거듭 진작되었다. 경전문헌의 정리 보호 면에서도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능엄경현요 · 법화경략소 · 유교경주역 등 10여 종의 저술을 완성했었지만 운문사건 때 유실되었다. 일생중의 경전강의와 설법 횟수는 헤아릴 길은 없다. 단지 잠학려 거사와 정혜(淨慧)법사가 각각 편집한 허운화상법휘(虛雲和尙法彙), 허운화상법휘속편(虛雲和尙法彙續編)이 백만 여 자에 달한다. 중국불교협회 전 회장인 조박초(趙朴初)가 “여기저기 많은 도량을 세웠어도 머물지 않았고, 널리 불법의 요점을 설했어도 저술은 남아있지 않네.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이 얻을 바가 없으므로 지혜의 등도 이을 바가 없네.” 라고 찬송한 꼭 그대로였다. 대사가 열반하자 4부 대중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선후로 강서의 운거산, 홍콩의 부용산, 운남의 곤명시 등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 1991년에는 또 운거산에 허운화상기념당을 세워서 사람들이 현대의 선종태두인 대사를 추억할 수 있게 했다.
다음은 허운대사가 겪은 열 가지 고난[十難] 이야기이다.
첫째 고난 : 한 뭉치 고기 덩이로 태어나다
허운대사는 청나라 도광 20년(1840년) 7월 30일 인(寅)시에 복건성 천주부 관아에서 태어났다. 그때 그의 부친은 천주부의 관리로 있었다. 대사가 태어날 때 한 뭉치 고기 덩어리 같았기 때문에 모친은 크게 놀라고 슬퍼했다. 다시는 아이를 못 가지리라 여겨 결국 기가 막혀 죽었다.
가족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세상일을 많이 겪어본 여러 노인들에게 물어보아도 모두 그 까닭을 모르고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 괴상한 태아를 불길한 징조로 생각했다. 그 다음 날 이 고기 덩이를 내다 버리기 위해 가려고 하는데, 때마침 약 파는 어떤 노인이 나타나 자기가 고기 덩이를 해부해 보겠다며 한 칼에 쪼개니 거기서 포동포동한 남자 아이가 나왔다. 사람들은 너무 애통해 하던 차에 뜻밖의 모습을 보고는 기쁨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유모 왕 씨로 하여금 양육케 하였다. 그러나 생모의 죽음은 다시 돌이킬 수 없었다. 만약 당시에 보살이 약 파는 노인으로 화신하여 나타나지 않았다면, 온 세상을 감동시키고, 멸망한 것은 일으켜 세워주고 끊어진 것은 이어주는 훌륭한 대사가 어떻게 세상에 계셨을까? 이것이 노화상이 겪은 첫 번 째 고난이었다.
둘째 고난 : 굶주림과 추위를 겪으며 큰 눈 속에 갇히다
대사는 청나라 함풍 8년, 19세에 집을 나와 복주 고산 용천사에 가서 상개노인에게 삭발하고 승려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고산 묘련화상에게서 구족계를 원만히 받았다. 세월은 정말 빨리 흘러갔다. 대사가 애정을 끊고 가족을 버리고 출가한 지가 눈 깜작 할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20여 년이나 흘렀다. 하지만 스스로 헤아려보니 도업은 성취하지 못하고 종일토록 바람 따라 떠돌아다니니 부끄러운 마음이 일어났다. 그래서 산서성의 오대산까지 삼보일배하여 예배함으로써 부모가 길러주신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발심하였다.
1882년 43세 때인 청나라 광서 8년 7월 1일, 절강성 보타산 법화암에서 삼보일배를 시작 출발하였다. 당시 같이 떠난 사람으로 편진(遍真) ․ 추응(秋凝) ․ 산하(山遐) ․ 각승(覺乘) 등 네 분의 선승들이 있었다. 바다를 건넌 후 매일 걸음이 느려지더니 중간에 호주(湖州), 소주(蘇州), 상주(常州) 등에서 쉬면서 네 분 모두 중도에 포기해버리고 노화상만이 삼보일배를 계속해 갔다.
대사는 남경에 이르러 우두법융(牛頭法融)조사탑에 절하고 강을 건너 포구(浦口)의 사자산사(獅子山寺)에 이르러 설을 지냈다.
이듬해 사자산에서부터 다시 고행을 시작하여 소북(蘇北)에서 하남성(河南省)으로 들어가 봉양(鳳陽) ․ 호주(毫州) ․ 호릉(昊陵) ․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를 거쳐 낙양(洛陽) 백마사(白馬寺)에 이를 때까지, 낮에는 삼보일배하며 걷고 밤에는 잠을 잤다. 비가 오나 바람 부나 맑으나 흐리나 가리지 않고 이와 같이 계속 삼보일배로 가면서 일심으로 보살님의 성스러운 명호를 외우되 괴로움이나 즐거움, 배고픔이나 배부름 같은 것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12월에 황하(黃河) 철사도(鐵卸渡)에 이르고 광무릉(光武陵)을 지나 첫날은 어느 가게에서 머물렀다. 둘째 날 황하를 건너 강변에 이르자 날은 어두워져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사방에 인적이란 없고 단지 길 옆에 조그마한 난전 오두막이 하나 있을 뿐인데 사는 사람도 없었다. 대사는 그곳으로 가서 다리를 쉬고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그런데 밤이 되자 큰 눈이 끝없이 내리면서 추위가 온 몸에 파고들었다.
다음날 새벽 눈을 들어 바라보니 세상은 온통 유리세계로 변해 있었다. 쌓인 눈은 몇 자 깊이나 되어 길도 없어지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으며, 더더욱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더욱 알 수 없었다. 오두막에는 바람막이가 될 만한 것도 없었다. 대사는 처음에는 꼿꼿이 앉아서 염불을 하다가 배고픔과 추위가 더욱 심해지자 몸을 구부려 웅크렸다. 눈이 많이 내릴수록 추위도 심해지고 배도 더 고파왔다. 숨은 곧 끊어질듯 하였지만 정념(正念)을 잊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이렇게 계속되는 눈과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점점 혼미상태에 빠져 들었다. 여섯째 날 오후에야 눈이 그치고 조금씩 해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이미 병으로 쓰러져 일어날 수 없었다.
이레째 날 어떤 거지가 와서 보니 대사가 눈 더미 속에 병으로 누워 있으며 말도 하지 못했다. 거지는 대사가 동상에 걸린 것을 알고는 눈을 치워버리고 오두막 주위의 짚더미로 불을 피워 녹여주고 쌀겨 죽을 끓여 먹였다. 그러자 대사는 온기가 회복됐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노화상은 눈 속에서 동사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허운대사가 겪은 두 번째 고난이었다.
이 거지는 자기 성씨는 문(文)이요 이름은 길(吉)이며 오대산에서 왔다고 했다. 대사에게 권하기를, 길은 멀고 날씨는 추우니 삼보일배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대사가 말하기를 “이미 서원하였으니 몇 년 몇 개월이 걸리든 아무리 멀던 가깝던 따지지 않고 반드시 끝까지 삼보일배 하겠습니다.” 하였다. 나중에 오대산에 도착하고서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그 거지가 바로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첫 번째로 대사의 마음을 시험해보고 그 고난에서 구해주었던 것이다.
셋째 고난 : 이질에 걸려 죽음을 기다리다
청나라 광서 10년(45세) 1월 2일, 대사가 홍복사(洪福寺)에서부터 다시 삼보일배를 시작하여 회경부(懷慶府)에 도착하였는데, 성내(城內) 소남해(小南海)에 들어가니 절간에서 유숙을 허락하지 않아 부득이 성 밖에서 노숙을 하였다.
이날 밤 복통이 극심하였지만 4일에도 일찍부터 삼보일배를 계속하여갔다. 그날 저녁 몸에 오한이 들었다. 5일에는 이질에 걸렸지만 매일 삼보일배를 계속해서 강행하였다.
13일, 황사령(黃沙嶺)에 도착하였다. 산꼭대기에 쓰러져 가는 사당이 하나 있는데 몸을 가릴 만 한 곳이 없었다. 여기에 이르자 더 이상은 움직일 수가 없어 쉬었다. 음식도 넘어가지 않고 밤낮으로 설사만 수십 차례나 했다. 움직일 힘조차 없고, 더구나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도 없어서 그저 눈을 감고 죽음만 기다릴 뿐이었다.
15일 깊은 밤, 서쪽 담장 아래서 어떤 사람이 불을 피우고 있는 게 보였다. 처음에는 그를 도적으로 의심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문길이었다. 마음이 크게 기뻐서 “문선생!” 하고 부르니 문길이 불을 들고 와서 비추며 대사에게 말했다. “큰 사부님, 당신은 왜 아직도 여기에 계십니까?” 대사는 겪은 일들을 하나하나 그에게 들려주었다.
그날 저녁 문길은 허운대사 옆에 앉아 있었으며 물도 한 컵 가져다 먹여주었다. 16일에는 또 대사가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을 빨아 갈아입히고 약 한 컵을 주었다. 17일에는 병이 물러나고 쌀 겨죽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그러자 땀이 크게 나면서 몸이 가뿐해졌고, 18일에는 병세가 적지 않게 가벼워졌다. 대사는 문길에게 감사하며 말했다. “두 번의 위험한 고비에 모두 선생이 구해주셔서 그 은혜가 이루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문길은 말했다. “이것은 하찮은 일이니 언급하실 필요 없습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이 작년 섣달부터 지금까지 삼보일배로 온 길이 많지 않은데 어느 해에 삼보일보를 다 마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더구나 당신은 몸도 좋지 않아서 계속 하기가 절대로 어려울 것 같으니 꼭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대산에 참배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대사가 대답했다. “당신의 고마운 뜻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세상에 태어나서 모친을 뵙지 못했습니다. 모친은 저를 낳았기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부친은 저를 아들 하나로 얻었지만 저는 결국 부친에게 등을 돌리고 집을 나왔습니다. 저 때문에 부친은 관직을 그만 두셨고 오래 사시지 못했습니다. 하늘같은 부모님의 은혜를 언제나 잊지 않고 마음에 둔지 이미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이에 발원하기를, 오대산에 참배하여 보살님의 가피를 구하여 저의 부모님이 고통에서 벗어나 하루빨리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기로 하였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앞에 닥치더라도 성지(聖地)에 도달하지 못하면 죽더라도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문길이 또 말하기를 “당신같이 효심이 대단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내가 오늘 오대산에 돌아가도 별로 바쁜 일도 없고 하니, 내가 당신을 대신해서 짐을 들어주며 동행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삼보일배만 신경 쓰시면 피로도 많이 줄어들고 마음에도 다른 생각이 없을 겁니다.”라고 하였다.
대사가 말했다. “만약 그렇게 해 주신다면 당신의 공덕은 한량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오대산에 도착하거든 이번 삼보일배의 공덕을 그 절반은 부모님께 회향하여 하루 빨리 보리를 증득하시게 하고, 나머지 절반은 당신에게 드려서 나를 구해주신 은혜에 보답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문길이 말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당신은 부모님께 효도하려는 생각에서 하는 것이고 나는 그저 가는 길에 함께 가는 것뿐이니 감사를 표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길이 나흘 동안 돌봐주자 병은 크게 나아졌다.
이것이 문수보살이 두 번째로 나타나서 대사의 마음을 시험해보고 고난에서 구해준 것이다.
넷째 고난 : 입에서 선혈이 멈추지 않고 흐르다
청나라 광서 10년(1884년) 정월 19일, 허운대사는 병을 딛고 황사령의 쓰러져가는 사당에서 다시 삼보일배 행을 시작하였다. 가는 길 내내 짐을 메고 음식을 만드는 일은 모두 문길이 대신해 주니 대사는 망상도 단박에 사라졌다. 밖으로는 물질적인 성가심이 없고 안으로는 망념이 없으니 병은 하루하루 나아져 가고 몸은 날이 갈수록 강건해져 새벽부터 저녁까지 사오십 리를 삼보일배 해도 조금도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3월 말 태곡현(太谷縣) 이상사(離相寺)에 도착했다. 지객승과 인사를 마친 후 그 지객승이 문길을 보고 대사에게 물었다. “이 분은 당신과 어떤 관계입니까?” 이에 대사는 사실대로 이야기 하였다. 그러자 지객승이 사나운 소리로 말했다. “절문 밖을 나서서 행각하면서 지금 시절을 모르는구먼. 요 몇 년 동안 북쪽 지방은 기근이 들었는데 참배는 무슨 산 참배요? 또 무슨 고관대작이나 된다고 시중드는 사람이 필요해요? 복을 누리고 싶다면 절문 밖을 나설 필요가 어디 있겠소? 어느 절집이 속인을 유숙시키던가요?” 대사는 그 자리에서 꾸중을 듣고 감히 대답도 못했다. 그저 잘못을 인정하고는 떠나겠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지객승이 말했다. “어찌 이런 법이 있단 말이요! 당신 마음대로구먼! 누가 당신더러 그러라 그랬소?” 대사는 그 말을 듣고 잘못되었음을 알고 돌려 말했다. “그러면 이 문 선생을 여관에 가서 머물게 하고 저는 이곳에서 신세를 좀 지면 어떻겠습니까?” 지객승은 그렇게는 된다고 했다. 그러자 문길이 말했다. “이곳에서 오대산까지는 멀지 않으므로 내가 먼저 돌아갈 테니 당신은 천천히 오십시오. 당신의 짐은 머지않아 어떤 사람이 대신하여 오대산으로 가지고 올라 올 것입니다.” 대사는 애써 만류할 수 없었다.
문길이 간 후 지객승은 얼굴을 바꿔 기쁜 표정을 지으며 부드럽게 맞이하였다. 토방 아궁이에 가서 차를 끓이고 손수 국수까지 만들어 와 함께 앉았다. 대사는 그가 조금 전에는 거만하더니 이제는 공손해진 거동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몹시 이상했다. 좌우에 사람이 없는 것을 살피고는 지객승에게 물었다. “이곳에 사는 대중들이 얼마나 됩니까?”
지객승이 대답했다. “나는 양자강 일대에서 여러 해를 지내다 여기 돌아와 주지로 있는데 여러 해 흉년이 들어 겨우 나 혼자만 머무르고 있습니다. 식량도 이것으로 바닥입니다. 그래서 조금 전 내 행동은 장난으로 그런 것이니 언짢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때 대사는 아주 난처하여 웃지도 울지도 못할 심정이었다. 억지로 국수 반 그릇을 먹고는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곧바로 길거리의 여관으로 가서 문길을 두루 찾아보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였다. 때는 4월 18일 밤, 달은 낮처럼 밝았다. 대사는 문길을 쫓아가고 싶어 별이 총총한 밤에 태원부(太原府)를 향하여 삼보일배를 계속해갔다. 마음속은 불이 난 듯 초조했다.
다음날 머리에 열이 나고 입안 콧구멍으로 피가 멈추지 않고 흘렀다. 20일에 황토구(黃土溝) 백운사(白雲寺)에 도착했다. 지객승이 대사의 입에서 선혈이 흐르는 꼴을 보고는 유숙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절 밖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21일 아침 태원성(太原城)으로 들어가 극락사에 도착했는데 욕만 실컷 얻어먹고 유숙하지 못했다.
22일 아침 태원성을 나와 삼보일배 하면서 가다가 북문 밖에서 우연히 젊은 승려를 만났는데, 이름이 문현(文賢)이라 했다. 그는 대사를 보고 가까이 다가와 인사하고는 짐을 받아 들고 열흘을 돌봐주며 쉬게 했다. 병이 점차 나아지고 몸이 회복되자 삼보일배를 계속했다. 이것이 대사가 겪은 네 번째 고난이었다.
다섯째 고난 : 실족으로 물에 빠지다
청나라 광서 18년(1892년)에서 20년(1894년)까지 허운대사는 구화산(九華山) 취봉(翠峰) 오두막에서 불경의 교리를 연구하였다. 광서 21년(1895년, 56세)에 양주(揚州) 고민사 주지승 월랑(月朗)법사가 구화산에 와서 말하기를, 고민사에 주(朱)씨가 시주하는 법사(法事)로, 이전의 4주간 선칠법회를 이어 모두 12주간 열 예정이라며 대사께 참석하기를 바랐다. 대사가 승낙하고 하산하여 대통적항(大通荻港)에 이르러 강을 따라 걷다가 물이 불어나 강을 건너려고 하니 뱃사공이 뱃삯을 요구했다. 하지만 대사는 몸에 한 푼도 없었다. 그러자 뱃사공은 노를 던지고 가버렸다.
대사는 할 수 없이 걷고 또 걷다가 뜻밖에 발을 잘못 디뎌 물에 빠지고 말았다. 하루 밤낮을 물에 뜨다 가라앉다 하면서 채석기(釆石磯) 부근까지 흘러갔다가 고기 잡는 사람의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그는 보적사의 스님을 불러 확인하고 넘겨주었는데, 그 스님은 대사가 적산(赤山)에서 같이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 스님은 대사를 보자마자 크게 놀라며 급히 사람들을 불러 절로 모시고 가 생명을 구해드렸다. 그 때가 6월 28일이었다. 이것이 대사가 겪은 다섯 번째 고난이었다.
여섯째 고난 : 갑자기 큰 병이 나다
청나라 광서 23년(1897년, 58세) 11월, 갑자기 큰 병이 나서 예불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몸이 점점 무거워져 누워만 있을 뿐 앉을 수도 없고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었다. 그 때 대중들은 모두 그가 낫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여 그를 여의료(如意寮)로 옮겨 놓고, 아육왕사의 수좌 현친(顯親)법사와 감원 종량(宗亮)법사, 그리고 노(盧)씨 아가씨 등이 여러 방법으로 구해보려고 돈도 쓰고 힘을 써 보았지만 병은 여전히 차도가 없었다. 대사는 스스로 세상과의 인연이 다해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하였다. 하지만 아직 연지(燃指)공양을 다 하지 못하여 마음이 조급했다.
며칠 지나 여덟 명의 사람들이 와서 17일이 연지공양 하는 날이라고 알려주자 대사는 꼭 참가시켜 달라고 간청하였다. 하지만 수좌승 등 모두가 생명이 위험할까 두려워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대사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샘물처럼 쏟으면서 말했다. “태어남과 죽음을 누가 피할 수 있겠는가? 내가 어머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어 연지공양을 발원했는데, 만약 병 때문에 중지한다면 살아도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감원인 종량법사는 그 당시 나이 겨우 21살이었는데 대사의 슬픈 목소리를 듣고 그 효심에 감복하여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이루도록 제가 당신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내일 재(齋)는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준비를 해 놓으면 되겠지요?” 대사는 그에게 깊이 감사했다.
17일 아침, 종량법사는 그의 사제 종신(宗信)법사더러 대사의 연지를 도와 드리라 부탁하고, 몇몇 사람이 돌아가면서 대사를 부축하여 대전에 올라가 예불을 드리고 여러 가지 의식을 치루고 대중이 참회문을 읽었다. 대사는 일심으로 모친을 천도하기 위해서 염불했다. 처음에는 고통을 느꼈지만 계속할수록 마음이 점점 맑게 가라앉고 마침내는 지각(智覺)이 밝아졌다.
염불이 ‘법계장신아미타불(法界藏身阿彌陀佛)’ 이라는 구절에 이르자 전신의 팔만사천 개의 털구멍이 일제히 곤두섰는데, 그때 손가락은 이미 다 타버렸었다. 대사는 스스로 일어나서 예불을 드렸다. 부축하는 사람도 필요 없고 자기가 병이 있는 지도 몰랐다. 그래서 여러 사람 앞에 걸어 나아가 감사드리고 거처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모두 희유한 일이라고 경탄했다.
일곱째 고난 : 밧줄이 끊어져 강물에 빠져 떠내려가다
청나라 광서 28년(1902년, 63세), 대사가 아미산(峨嵋山)에 이르러 금정(金頂)에 올라가 불광(佛光)을 바라보니, 계족산의 불광처럼 밤에 수많은 밝은 등이 보이는 게 오대산에서 지혜등(智慧燈)에 예배하던 것과 다름없었다. 석와전(錫瓦殿)에 가서 진응(真應)노화상에게 인사를 드렸다.
진응노화상은 아미산의 영수(領袖)이며 종문(宗門)의 거장으로 당시 70여 세였다. 며칠을 같이 지내면서 흉금을 털어놓고 얘기를 나누니 아주 즐거웠다. 산을 내려와 세상지(洗象池) ․ 대아사(大峨寺) ․ 장로평(長老坪) · 비로전(毗盧殿) ․ 아미현(峨嵋縣) · 협강현(峽江縣)을 따라 은촌(銀村)에 이르러 유사하(流沙河)를 건너려 하는데, 때마침 물이 너무 불어나 아침부터 정오까지 기다리자 배가 왔다. 대사는 계진(戒塵)법사에게 먼저 배를 타게 한 후 자신도 짐을 넘겨주고 막 배를 타려는 순간 갑자기 밧줄이 끊어져 버렸다. 물살은 매우 급하였고 대사는 오른 손으로 뱃머리를 잡았다. 그런데 배는 작고 사람은 많아 사람들이 조금만 한 쪽으로 치우지면 배가 뒤집어질 것 같았다. 대사는 감히 꼼짝도 못하고 물에 빠진 채 흘러 내려갔다. 저녁이 되어 배가 강기슭에 정박하자 사람들이 비로소 대사를 끌어 올렸다. 옷은 다 젖어 있고 두 발은 작은 돌에 여기저기 긁히고 찢어져 있었다.
이것이 대사가 겪은 일곱 번째 고난이었다.
여덟째 고난 : 복부가 해부될 위험을 만나다
청나라 광서 31년(1905년, 66세) 허운대사가 미얀마의 수도 앙광에 도착했다. 대금탑(大金塔)을 유람하고 여러 성지를 참관하고 말레이시아 빈랑섬을 경유하여 귀국을 하는데 배가 부두에 도차하자, 배안에 전염병으로 죽은 여객이 있었기 때문에 출입통제 깃발을 달고 배에 탄 사람들을 모두 멀리 떨어진 산 위에서 검사를 받게 한 후에야 육지에 오르도록 허가했다.
배에 탄 여객이 약 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산에 올라가게 후 낮에는 햇볕을 쪼이고 밤에는 비를 맞도록 내버려두었다. 햇볕과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곤 없었다. 매일 쌀 한 줌 정도와 무 두 개를 나누어 주고는 스스로 밥 해 먹으라 했다. 의사는 매일 두 번 와서 살펴보았다.
일주일이 지나자 사람들 절반이 떠나갔고 열흘이 지나자 사람들은 모두 가버리고 대사 혼자만 남았다. 그때 대사는 마음이 초조해지며 병은 더욱 심해졌다. 몰골은 처참하고 고통스러우며 점점 음식도 먹을 수 없었다. 18일째 의사가 와서 아무도 살지 않는 깨끗한 방으로 옮기게 하니 대사는 몹시 기뻤다. 잠시 후 어떤 노인 한 분이 순시를 하러 왔는데 대사가 그에게 본관을 물어보니 천주(泉州) 사람이었다. 그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방은 곧 죽을 병자를 지내게 하여 복부를 해부할 준비를 하는 겁니다.”라고 하였다.
대사가 극락사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노인은 마음이 움직여 일러주길 “내가 약을 줄 테니 먹으시오.”라고 하면서 신곡차(神浀茶)를 한 사발 끓여 와서 이틀을 먹었더니 조금 좋아졌다. 노인이 또 말했다. “의사가 오면 내가 기침 소리를 낼 테니 빨리 일어나 정신을 차리고 의사가 약을 주더라도 먹지 마시오.” 얼마 후 의사가 오더니 과연 말대로 약을 억지로 먹이니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가 가자 노인이 와서 약을 먹었는지 물어 보았다. 대사가 사실대로 알려주자 노인이 놀라면서 말했다. “이젠 살기 힘들게 되었구려! 내일 사람이 와서 배를 가를 것이오. 내가 약을 줄 테니 먹으시오. 부처님이 보우하시길 바랄 뿐이오.”
그 다음날 아침에 노인이 또 와서 보니, 대사가 마당에 앉아 있는데 눈을 뜨고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노인이 그를 안아 일으키니 바닥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노인이 다시 약을 가지고 와 먹이고 급히 옷을 갈아입힌 다음 바닥을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어제 그 약물을 먹으면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배를 가르게 되는데, 당신은 죽지 않게 되는 것을 보니 부처님이 영험이 있군요. 9시에 의사가 당신 배를 가르러 올 테니 내가 기침 소리를 내면 정신이 있는 척 하십시오.” 라고 일러 주었다. 9시가 되니 과연 의사가 왔다. 대사가 손짓하는 것을 보고는 웃으면서 돌아가 버렸다.
노인이 말했다. “그가 웃었으니 당신은 죽지 않겠소.” 대사는 의사에게 돈을 좀 보내서 자신을 나가게 해달라고 노인에게 부탁하면서, 앙광에서 고(高) 거사가 자신에게 공양한 돈에서 40원을 의사에게 주고 20원을 노인에게 드려 보살펴 준 은혜에 감사하였다. 그러나 노인이 말하기를 “나는 당신의 돈을 받지 않겠소. 오늘 의사는 서양 사람이니 말을 꺼낼 수 없고, 내일은 이 고장 사람이니 얘기가 될 것이오.” 이 날 밤 노인이 와서 이미 이야기가 잘되어 24원을 주었고 내일이면 나갈 수 있겠다고 알려 주었다.
다음날 아침 의사가 와서 진찰을 끝내고 배를 불러 바다를 건너게 하였다. 노인이 대사를 부축하여 배에 올라타게 하고 또 수레 하나를 불러 광복궁(廣福宮)까지 보내 주었다. 한바탕의 고난이 비로소 지나갔다.
아홉째 고난 : 온 몸이 고목처럼 굳어지다
청나라 광서 33년(1907년, 68세)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9일 동안 선정에 들었었다. 그런데 선정에서 나온 후 두 다리가 마비되었다. 처음에는 단지 행동할 때 불편할 뿐이었는데 나중에는 전신이 고목처럼 굳어서 젓가락을 집을 수 없어 밥을 먹여 주어야 했다. 신도들이 한의사와 양의사를 불러 진단하고 치료해드려 약도 먹고 침도 맞았지만 모두 효과가 없었다. 말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지만 의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대사의 몸과 마음은 청정하면서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모든 일은 놓아버렸어도 한 가지 일만은 대사가 놓아버릴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일이었는가 하면, 불경을 구입하고 계족산의 전각을 건립하기 위해 받은 기부금의 환어음을 옷깃 속에 넣고 꿰매어 놓았는데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대사는 입으로 말을 할 수도 없고 손으로 글씨를 쓸 수도 없으니 만일 죽게 되면 불에 타 없어져 버릴 것인데 이 인과응보를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니 눈물이 흘러내려 묵묵히 가섭존자께 가피해주시기를 기도하였다.
그때 묘원(妙圓)스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이전에 종남산에 같이 지냈던 분이었다. 그는 대사가 눈물을 흘리고 입이 미동하는 것을 보고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이고 들었다. 대사는 묘원스님더러 가섭존자에게 차를 올리고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 차물을 마시니 마음이 시원하면서 곧 꿈에 들었다.
꿈에 가섭을 닮은 노승 한 분이 대사 옆에 앉아서 손으로 대사의 머리를 만지면서 말했다. “비구여! 승복과 발우와 계율이 몸을 떠나지 않았으니 그대는 걱정할 필요가 없느니라. 그저 승복과 발우만을 베개로 삼으면 좋아지리라.” 대사는 듣고 나서 곧바로 스스로 승복과 발우를 베개로 하고 머리를 돌려보니 존자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온 몸에 땀이 한 바탕 쏟아지더니 당장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한없이 기쁘고 즐거웠다. 혀가 점점 풀리기에 묘원스님더러 의원에게 가서 약 처방을 구해달라고 했더니 단지 목즐야명사(木櫛夜明砂) 이미(二味) 처방만을 해주었다. 복용하고 나니 눈이 보이고 말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한 처방을 구하니 붉은 팥으로만 죽을 쑤어 먹고 다른 것들은 못 먹게 하였다.
이틀을 먹고 나니 머리를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다시 처방을 구하니 이번에도 역시 붉은 팥이었다. 이때부터 콩으로 식사를 계속하니 대소변이 시원하게 뚫려 나오는데 검은 옻칠처럼 더러웠다. 점점 아픔과 가려움을 알고 일어나서 걸을 수 있었다. 20여 일에 걸친 이번의 고난이 비로소 몸에서 빠져 나갔다.
열째 고난 : 가혹한 구타를 당해 거의 죽음에 이르다
노화상은 68세 되던 해(1907년)의 고난에서 벗어난 후부터 중화민국 39년(1951년) 111세까지의 기간 동안은, 불법을 넓히고 중생을 이롭게 하며 사찰을 건립하는 일 등을 하면서 평안하게 지나갔다.
불행하게도 1951년 봄 운문에서 전계 법회기간에 갑자기 100여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온 절을 구석구석 수색 검사했다. 또 대사를 한 방에 감금시켜 놓은 채 음식을 끊어버리고 대소변도 나와서 볼 수 없게 하였다. 밤낮을 등잔 불 하나로 캄캄한 속에서 생활하니 마치 지옥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사흘이 지나자 건장한 사내들 열 명이 방으로 들어와 대사에게 금은보화와 무기를 내 놓으라고 협박하였다. 대사가 없다고 말하자 마침내 모질게 때렸다. 처음에는 나무 몽둥이로 때리다가 나중에는 쇠몽둥이로 때리니 결국 머리와 얼굴에 피가 흐르고 갈비뼈가 부러졌다. 그들은 때리면서 심문하는데 대사는 가부좌를 틀고 이미 선정에 들어가 있었다. 쇠몽둥이와 나무 몽둥이가 번갈아 내려치니 퍽!퍽! 소리가 났다.
이 날 연달아 매를 네 차례나 때리고는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그리고는 대사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호각을 불고 가버렸다. 깊은 밤 시자가 대사를 부축하여 침상에 앉혔다.
하루가 지나자 그들은 대사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와 대사가 여전히 단정히 앉아 선정에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더욱 화가 난 그들은 대사를 바닥으로 끌어내려 큰 나무 몽둥이로 혹독하게 때렸다. 그들 10여 명이 구두 발로 차고 밟아 대사가 눈 ․ 코 ․ 입 등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있으니 모두 죽었음에 틀림없다고 여기고 호각을 불고 가버렸다.
시자가 다시 대사를 안아 침상에 앉혀 놓고 5일이 지나니 대사는 점점 부처님의 열반상처럼 길상와 자세로 누었다. 그렇게 하루 낮과 밤이 지나도록 전혀 기척이 없었다. 시자가 등초를 가지고 콧구멍에 대어보아도 요동이 없었다. 다만 체온만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얼굴도 살아있는 것 같았다. 하루가 지나자 비로소 작은 신음소리를 하므로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 지금까지 선정에 들어있고 누어 잠잤던 시간을 말씀드렸다. 대사는 시자에게 자신의 신식(神識)이 도솔천에 올라가 노닐며 법문을 들었던 일을 말했다. 요 며칠이 지나면서 그들은 대사의 행동이 이상한 것을 보고 의심과 두려움이 점점 일어나 서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두목처럼 보이는 한 사람이 주위의 스님들에게 말했다. “저 늙은이는 왜 때려도 죽지 않지?” 스님이 대답하기를 “대사께서는 중생을 위하여 고통을 감수하고 당신들의 재난을 소멸시켜주기 위해서 때려도 죽지 않는 것입니다. 오래 후에 당신들은 자연히 알게 될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 두목이 이 말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여 이로부터 다시는 감히 대사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이것이 대사가 중생을 구제하는 시기에서 가장 큰 고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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