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시 연재 칼럼 12 (2024년 8월)
후회는 없다
그 대학으로 진학한 것은 거의 우연이었고 구태여 필연적인 요소가 있었다면 서울로 올라가고 싶은 지방 청년의 막연한 도피 심리가 전부였다. 그 대학에 저명한 박목월 시인이 교수로 재직하고 계셨다는 건 면접시험 때 비로서 알았다. 대학에 들어가긴 했지만, 학교엔 자주 가지 못했다. 생계와 학비를 온전히 혼자 해결해야 하는 사고무친(四顧無親) 신세였으므로. 밥벌이와 학비는 주로 학교 근처 성수동에 산재되어 있던 공장의 여공들 상대로 화장품 외판을 해서 충당했다.
시를 쓴다는 생각은 엄두도 못 냈지만 은밀히 일기처럼 시를 쓰곤 했다. 학교 성적은 물론 엉망이었다. 다만 운이 좋아 몇 번의 휴학을 거친 후 졸업했고, 교직 과목을 이수해 2급 정교사 자격증도 땄다. 4학년 2학기에 공채 시험을 통해 들어 간 모 신문사에는 적응하지 못했고, 학교 졸업 후 시골 학교 국어 선생으로 시작해서 약 35년간 비교적 덜 비겁하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학교에서 밥을 먹었다.
스물여덟 살에 결혼했고 마흔 살에 외동딸을 얻었으며 마흔다섯 살에 당시엔 희귀 암이었던 편도암 4기까지 다녀오면서 암을 잡는 대신 침샘을 잃어 늘 목 안 깊숙히 마른 거즈가 있는 것 같다. 그 후 물병을 차고 다니는 것은 일상의 필수였고, 수술한 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밥은 물을 말아야 목 안으로 넘어간다.
노래할 땐 들기름으로 목 안 깊숙이 적시고 부른다. 그런 목으로 왜 노래를 부르냐고? 나는 노래 부르는 일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고 노래할 때 제일 행복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지녔던 제대로 된 직업은 35년 동안 학교에서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고학 시절부터 여러 직업을 전전했지만, 고학생 시절 가장 오래 지녔던 직업은 성수동, 뚝섬 근처에 난립 되어있던 공장에 근무하던 여공들을 상대로 한 화장품 외판원(쥬단학 한국화장품)이었고 수입도 교사 월급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만 둘 무렵엔 빚을 지고 말았다. 수시로 일터를 이동하던 시절의 여공들에게 외상으로 준 화장품값을 떼어먹히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진 빚은 교사생활을 하며 만 삼 년 동안 갚아야 했다.
자유분방하고 다혈질적인 성격을 타고난 필자가 늘 단정해야 하는 교사란 직업을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동안 놓지 못했을까? 사고무친 고학 시절 경험한 험하고 외로운 세상을 도피하고 싶었던 갈망과 그저 별 탈 없이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직장에 안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생업으로 삼기엔 불안했고 불안을 극복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인생에는 가정법(If)이 통하지 않는다. 살아온 그 자체가 인생이기 때문이다. 행복하게 살아왔다고 할 순 없어도 별 후회는 없다.
상식
마음 한번 접으면 그뿐이라고 난 도피처럼 말하곤 했다. 말 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의식했던 의식하지 않았던 저질스러운 입에서 나오는 말들에 종종 모욕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생각의 바탕이 천박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아집처럼 굳어진다. 하지만 오늘 필자는 이 아집조차 내려놓고 싶다. 그냥 그 자리에 두고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고 싶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내가 질타하거나 판단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상식의 선에서 이미 재단되고 응징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똥은 똥끼리 모여 똥밭을 이루기 때문에 가능한 똥밭은 가지 않거나 부득불 똥밭에 가게 되더라도 천연 비료밭에 왔으려니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구태여 모질게 스스로를 몰아붙일 체력도 쇠진되었다는 말도 된다. 누군가에게 이해를 구할 생각도 없다. 왜냐하면 똥은 똥끼리 이해하거나 이해 받을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유산
부모 사망 후 유산 갈등으로 형제 간에 칼부림이 있다는 얘기는 티브이에서만 보았다. 권좌(權座)를 쟁취하기 위한 왕자의 난도 드라마로만 보았다. 뒷일이 두려워 권좌를 겁박으로 양위받은 권력으로 어린 조카를 죽인 얘기도 남의 일처럼 그럴 수 있으려니 하고 읽었다. 그리고 이들은 한결같이 불치의 불안과 공포, 우울증과 동거하다 어김없이 고통스럽게 죽었다는 이야기도 그러려니 하고 읽었다. 지금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권좌에 위협이 되면 혈육조차 가차 없이 도륙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도 남의 일처럼 비현실적으로 읽혔다. 그런데, 비교적 필자와도 다정하게 지내고, 사람들에게도 인성 좋은 성품의 소유자라고 알려진 지인이 그리 많지도 않은 부모의 유산 문제로 형제간에 원수처럼 지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난생처음으로 필자에게 사고무친이라는 유산을 물려준 필자보다 훨씬 젊은 얼굴로 필자 속에 남아있는 부모님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