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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좁고도 넓은 것이 세상사다.
충북 괴산땅에 공림사란 유서 깊은 고찰이 있다는 걸 느림보 산행지를 보고서야 겨우 알게 된다.
여차직하면 미륵산성이 있는 안부에서 낙영산은 눈산행만 하고 도명산으로 즉방산행 한다는 얄팍한
꼼수를 가슴에 보듬어 안고는 화양구곡 학소대에서 도명산으로 오르는 삐이팀과는 사요나라를 하곤
낙영산 공림사를 들머리로 하는 에이팀에 일찌거니 방부를 디 밀어 본다.
포장이 되지 않은 공림사 주차장엔 평일이여서 그런지 차나 사람의 그림자 조차 보이지 않아
그 고즈녘한 분위기가 절 입구에 있는 연못의 연꽃들과 함께 어우러 지면서 마치 고향땅에 온 듯,
아니면 내 자신이 어느 생에선가 살았던 그 절집으로 다시 온 듯한 얄궂은 감회가 온 몸을 휘 감는다.
산행을 하다 보면 도명산 정상의 암봉 같은 곳엘 오르는 수가 왕왕 있는데 이때 느끼는 그 기분과
참으로 유사하다. 꼬치끄치 째릿 째릿 하면서 오줌이 질금 거리는 그 느낌 말이다.
우선 꽃님 대장님이 인솔하시는 느림보 모델들과 찍사님들은 공림사 옆으로 나 있는 등산로로 바로
접어 들고 염 고문님과 금목서님,푸르나님 그리고 나 이렇게 네분의 느림보 대원은 참으로 안온한 느낌을
주는 공림사 경내로 소리없이 스며 든다.
절집 전체 분위기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질그릇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며 에지간하면 이곳에서 구냥 퍼 질러 앉았으면 하는 생각만이 뇌파를 강타한다.
대가리가 반백이 되도록 살아 온 이번 생을 뒤 돌아 보면 한심하기가 그지 없는 삶이다.
공부 한번 욜씌미 한 적이 있나? 남들 처럼 돈 한번 지대로 벌어 본 적이 있나? 온 세상을 다 준대도
마다 할 어떤 여인네와 연애 한번 딱소리 나게 해 본 적이 있나?...
그것도 모잘라서 젖은 짚단 태우듯 하는 이너무 생을 쫴꿈이라도 더 살아 보겠다고 4년 전에는 부엌
강아지 꼬치끄트머리 빨듯이 열심히 빨아 대던 담배를 끊었고 그 후유증으로 뱃때지에 비계가 들러 붙기
시작하자 먹던 숟가락을 반토막으로 분질러 버렸고 마른 장작이 화력이 좋다고 하더니만 뱃때지가 튀어
나오면서는 아무런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여자 마져 끊어 버리곤 남은 건 고작해서 640 미리 펫트 쐐주병을
나발 부는 재미 외엔 낙이라곤 아무 것도 업따.
소박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공림사의 전체 분위기를 일거에 반전으로 몰고 가는 오층 석탑이 대웅전 바로
앞에서 수문장 처럼 그 화사한 자태를 나투신다. 공림사 석탑은 석가탑 같은
민무늬 석탑 형태가 아니라 기단부에서 상륜부 까지 탑신 전체가 아름다운 조각으로 휘 감겨 있다.
북한산 사모바위 밑에 있는 승가사의 구층 석탑과 원각사지 즉 파고다공원의 10층 석탑의 분위기와
너무나도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한국 전통
불탑들은 이 사 육 팔 장이 아닌 일 삼 오 칠 구 즉 홀수 층으로 만들어 지는데 탑골(파고다)공원의 석탑은
참으로 특이하게도 짝수층인 10층 석탑이다.
먼저 떠나 보낸 꽃님 대장님 후미팀을 뒤 쫒을려고 오랫만에 발걸음을 재촉하여 구슬땀을 흘리며 바쁜
걸음을 옮기니 공림사 종각의 범종 울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걸음을 멈추면 종소리가
끊어 지고 발걸음을 내 디디면 종소리가 또 다시 울린다.
풀이 포옥 죽은 가운데 토막이 뒤에 들러 붙은 다마를 두드리는 소리가 이렇게도 요란해 본 적이 있었던가?
미륵산성이 있는 안부에서 염 고문님과 진짜 수선화를 보는 듯한 청초롬한 모습이 압권인 수선화 형수님은
당초 계획대로 도명산으로 직진을 한다. 고바위를 한번 더 돌아야 하는
낙영산을 경유하느냐 아니면 염 고문님을 따라 가야 하느냐 이쯤 해서 김 상진의 이정표 없는 거리란
노랫말이 생각 난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헤매이는데 꽃님 대장님께서
몬가를 줄 듯 말 듯한 얄랑궂은 미소를 흘리시면서 무조건 자신을 따르라고 부축인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마 부딪히는 소리 요란하게 울리며 죽을 힘을 다 하여 낙영산엘 오르니 양귀비님과 들꽃님께서
낙영산에서 도명산으로 건너 뛰는 능선 코스가 폐쇄되어 있다며 길을 잃어 개고생을 할 수도 있으니 후진을
하자는 것이다. 세 다리 모두 매가리가 하나도 없어 진다.
암벽이 보이는 도명산 밑 어느 안부에서 점심상을 펼치게 되었는데 에구머니나 총각 딱지 떼던 그날 밤의
악몽이 재연된다. 무교동에 있는
스타 더스트 호텔(흐 흐 왜 웃는지 딱 한분의 느림보 여성 대원만 그 이유를 안다.) 의 어느 침대방 꺼증은
지대로 잘 들어 갔는데 빌어 묵을 넥타이를 푸는 방법을 몰라서 밤새도록 덫에 걸린 쥐새끼 처럼 넥타이
푸느라 쌩땀만을 흘리다 날밤을 새우곤 새볔녘에서야 그때 꺼증 침대 머리맡에서 오들 오들 떨고 있는
여자분 청바지 벨트를 겨우 풀고 나니 이미 훤 하게 날이 새서 총각 딱지를 이마빡에 그대로 붙인 채
호텔방을 나서게 되었는데 오늘도 예외없이 등산의자가 말썽을 부린다.
오래 전에 동창 모임에서 얻은 철제 등산 의자가 낡아서 연결끈이 끊어 져 버려 척 하고 펼치면 바로 앉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 위로 분리된 다리 부분의 암 수 네 구멍을 잘 맞춰서 끼워야 되는데 배는 고푸고
마음은 급하니 지대로 구멍 맞히는 일이 맘대로 되질 않는다. 한참을
헤매이다 겨우 철제의자를 결합해서 자리에 앉으니 여러 느림보 대원님들이 무얼 하느라 그리 늦었냐고
묻길래 이노무 철제의자가 어쩌면 주인놈의 신세와 이리도 똑 같은지 지대로 삽입이 되는 꼬락서니를
본 적이 없다며 혼자서 중얼 거렸는데 자리에 있던 모든 느림보님들이 박장대소를 한다. 영문을
몰라서 혼자 처음처럼을 한꼬뿌 입빠이 따루어서 원샷을 하곤 멀리 화양구곡을 내려다 보면서 나도 모르게
또 한번의 말실수를 하게 된다.
군대 제대하고 첫 직장생활을 충북 청주지점에서 하게 되었고 어느 물 좋은 여름날 물어 물어 화양구곡엘
직장 동료들과 놀러 와선 개구신이 되도록 술을 쳐 먹던 그 아름다웠던 청춘의 어느 순간만이 아니라
계곡가에서 야쿠르트 아줌마들을 꼬셨던 지고지순한 추억을 얘기 했을 뿐인데 식단에 앉은 모든 느림보님들이
도끼눈을 치 뜨곤 나를 건너다 보며 총각놈이 무어 할 일이 없어서 야쿠르트 아줌마와 어울리냐는 것이다.
그 아줌마들이 야쿠르트 아줌마들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음료수를 전부 야쿠르트만 싸서 와서 알게 되었고
이 아줌마들은 한국야쿠르트유업에서 근무하는 정식 여사원이였고 그날은 이 여성분들이 요즘 애들 말하는
엠티 차원에서 온 것 뿐이다.
아마도 내 얘기를 듣던 모든 느림보님들은 내 껄쭉한 상판대기의 선입견 때문에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야쿠르트는 덤으로 팔면서 중요한 그 무었을 파는 그 야쿠르트 아줌마로 착각을 했었던 가 보다.
첨성대 바위를 통과하여 화양 구곡 계곡길을 내려 오니 다행히도 이룬 모진 가뭄에도 계곡엔 제법 많은
물이 흐르고 있다. 한폭의 겸재 정선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절경과 수려한 기와의 만동묘와 화양서원이 그 찬연한 역사와 함께 한순간에 우리에게 다가 온다.
만동묘는 명나라 황제를 화양 서원은 우암 송 시열의 사당이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고 이 여송의 명나라 군대가 조선땅을 지켜 주게 되어 그 고마움으로 만동묘를 모시게
된 것은 모두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와 비슷한 서울의 동묘역에 있는 동묘가 무었인지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다. 동묘는
사후에 왕으로 추증된 중국 촉나라의 장수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데 관왕묘 또는 관성묘라고 한다. 서울엔
서쪽과 북쪽에도 있었지만 지금의 동묘는 동쪽에 있는 관왕묘란 뜻이다. 이 관왕묘 또한 임진왜란 때
중국 장수들의 요청으로 만들어 졌으며 제 고향땅 안동과 남원 등지에도 현존하고 있습니다.
멀리 주차장에 우리 느림보 리무진의 음전한 자태가 보이고 주차장 입구의 매표소가 이십여년이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때 그 모습으로 자리를 하고 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서울 아산병원에서 큰수술을 무사히 마친 아버님을 모시고 고향땅 안동으로 가는 길에 이곳 화양 구곡엘
들렀었고 매표소에서 차량통제를 하던 젊은 청년에게 연세 드신 노인네가 수술을 하신 터라 보행이 어렵다며
차량 출입을 요청하니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차량으로 얼른 모시고 들어 가서 어르신네 맘껏 구경하게 해
드리란 것이다. 그때 그 충청도 청년의 얼굴이 안즉도 기억에 생생하며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 한 순간도 잊어
본 적이 없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절박한 순간이 불치병을 선고 받아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되었을 때다.
공식 의료진에서 사망 선고를 받게 되면 병원에선 달리 도리가 없어지게 되고 흔히들 대체의학이라고 말하는
비선치료에 의지하게 되는데 이너무 대체의학이란게 그 종류가 쇠털 처럼 많다.
특히나 가진 거라곤 돈 밖에 없다 미나리깡에 용 났다 메롱 메롱 거리며 여유로운 삶을 사는 강남 졸부들의
이 대체의학에 대한 의존도와 그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박 근혜 대통령 탄핵 문제에도 주사 아줌마니 기치료 아줌마니 머니 하는 그 정체 불명의 인물들이 전부
대체의학 추종자들인데 대한민국 최고의 의료진을 주치의로 곁에 두고 있는 대통령이 이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은 볼 것도 없다.
삼성의 창업주 이 병철 회장님은 말년에 캬톨릭 신부님께 공식질의를 한다. 종교와 죽음에 대한
이 질문은 송곳처럼 날카로운데 냉철하고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인 이 회장님은 유언으로 자신이 공식
의료진에서 치료가 불가하다는 진단을 받았을 경우에 호흡기 등을 비롯한 의료기구를 몸속에 삽입키
위해 몸에 구멍을 뚫는 일 등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이 회장님이 현대의학에서 사망선고를 받았을 때 대체의학과 종교에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는 어떤 인물이
삼성가에 등장하게 된다.
이 회장님은 한국의 조강치처 외에 일본에는 조강지까이가 있었는데 이 여인네 집에 장자인 이 맹희와
삼자인 이 건희 회장이 일본 유학시절 기숙을 했으며 오래 전에 미국에서 마약을 하던 어떤 젊은 여인네가
검거되면서 본인이 삼성의 이 병철 회장의 외손녀라 주장했고 삼성에선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 무시해
버렸지만 알만한 사람은 이 여인네가 이 병철 회장과 일본여자 사이에서 나온 친딸임을 알고 있고
또 다른 조강지까이는 이 회장이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하여 한창 사업하던 시절 요정에서 만난 기생
이고 이 기생과 몸을 섞어 낳은 딸과 결혼한 정식사위가 아닌 서사위가 삼성에서 근무를 했었는데
이 회장의 병환이 깊어 지니 마지막 몸부림으로 이 서사위가 찾아 간 곳이 우리가 지난 번 태백산 산행
때 들렀던 봉화땅 태백산 현불사의 설송 스님과 일반인들에게 소금을 대나무통에 넣어 아홉번을 찌는
구증구포로 유명한 죽염을 대중화 시킨 경남 함양땅의 인산 김 일훈 선생 두 분이다.
현불사의 설송 스님은 이 서사위에게 월천공덕을 권해 드렸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절 앞에 큰다리를 놓아서 공덕을 쌓으란 것이고 인산 김 일훈 선생과의 만남에선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밝혀 진 바가 없지만 인산은 우선 환자를 보면 치료가 가능한지 아닌지를 명백히 밝힌다고 한다. 여타
돌파리 처럼 고칠 수 없는 병을 치료가 가능하다면 돈을 뜯는 행위를 하지 않았던 분 이므로 아마도 치료를
권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버님은 임종 직전 까지 좋아 하시던 담배를 입에서 떼지를 않았고 제 형님의 무릎을 베고 마지막 숨을
쉬시던 아버님은 오랜 세월을 살아 오신 노인답게 인생이란 무상한 그 무었인가를 깊이 깨달으시곤
은은한 미소와 함께 조용히 이 세상을 뜨신다.
계곡에서 대충 씻곤 느림보 리무진 옆에 있는 뒷풀이 장소로 오니 껄떡찌근한 돼지고기 두루치기 냄새가
진동을 한다. 급한 김에
등산 가방을 어깨에 걸친 채 션한 쐐주를 거푸 목구녕에 밀어 넣노라니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들꽃님께서
가방을 벗으면 본인이 자리에 갖다 두겠다고 하신다. 세상에 늘그막에 호사도 이룬 호사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 처럼 여자란 가장 여성스런 여자가 최고란 말이 생각난다.
느림보 따라 산행을 오는 날이면 세상구경 다 하지 건강에 좋은 운동하지 맛있는 것 묵지 이룬 절세의
미인들이 케어해 주면서 쎤한 쐐주 꺼증 권해 주지...
솔제니친이 쓴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란 글이 생각난다.
오늘 하루 너무도 즐거웠고 보람차다.
분당 탄천변 왕다마 선생 돌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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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0.1톤의 멋진몸매에 산행도 거뜬히... 잠깐의 휴식시간에 힘든걸 잊게해주시는 21금 개그감각 탁월하세요.
화요일 저녁 탄천은 잘 건너가셨는지요.
아직 장마가 아니라서 물이 넘치지는 않지만
빠지면 우글대는 잉어들이 몰려들어 이 무슨 횡재냐 뜯어먹으려 몰릴테고
빠져 허우적거리면 오리역 부근 돌삐님 나와바리인데 소문 쫘악 날테니..곤란할테고..ㅎㅋㅎㅋ
공림사 아늑한 절집 못보고 온게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