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나이 먹은 재고품이다. 옷을 사서 몇 년이 되어도 몇 번밖에 안 입었다. 일 년에 고작 한두 번 정도 입은 셈이다. 새 옷이나 다름없는데 오래된 헌 옷이 되었다. 양복을 정장할 일이 거의 없다. 간소복이나 약식으로 입는 것이 편안하다. 대부분이 그처럼 자연스럽게 따라간다. 세월이 가면서 본의 아니게 재고상품 이월상품으로 전락한다. 집에 걸어둔 시계는 며칠 지나면 자연스럽게 헌 시계나 고물 시계라고 한다. 하지만 시계점에서 일 년을 벽면에서 가고 있어도 새것이라 한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당연하다고 여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떤 편견이나 선입감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시대가 바뀌었다. 갈수록 사고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다소 여유가 있을 만큼 그 폭이 넓어졌다. 대중의 안목이나 인식이 달라졌다. 그만큼 진보한 것이다. 바람직 한 일이다. 양복도 맞춤복에서 기성복으로 바뀌었다. 맞춤으로 하나밖에 없다가 기성복으로 다량으로 생산된다. 자신의 몸에 편안하고 취향에 맞는 것을 선택하며 다양해졌다. 그런데 옷장에 고립되어 있으면서 혼자 외롭게 잠만 자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작스럽게 호출받고 외출을 한 번 다녀오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누가 불쌍한지 모르겠다. 일 년이 흘러가면서 옷은 멀쩡한 새 옷이나 다르지 않아도 헌 옷으로 분류돼 천덕꾸러기가 된다. 작은 씨앗으로 아무리 악조건이라도 최소한 적당한 온도와 습도와 영양분이 있으면 싹을 틔울 수 있다. 다만 어느 한 가지 조건이라도 부족하게 되면 그 씨앗은 헛나이만 먹고 남아있게 된다. 마냥 기다리며 조건이 충족되어야 비로소 싹을 틔우게 된다. 어렵사리 싹을 틔우고 나면 새로운 조건이 생겨난다. 그래야 새싹이 자라서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운다. 그냥 혼자의 힘으로 절로 되는 것 같아도 주위의 여건이 맞도록 도움을 받아야 비로소 햇빛을 보게 되고 자라면서 우람한 나무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자연 속에 살아가는 기본 이치다. 살아가며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빛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