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교회는 성탄 다음 40일째 되는 날, 곧 2월 2일을 예수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감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낸다. 이 축일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한다. 예루살렘에서는 386년부터 이 축일을 지냈으며, 450년에는 초 봉헌 행렬이 여기에 덧붙여졌다. 6세기에는 시리아에서 이 축일이 거행되었고, 로마는 7세기 후반에 이를 받아들였다. 8세기 중반에는 ‘성모 취결례(정화) 축일’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18세기 프랑스 전례에서 ‘주님 봉헌’으로 바뀌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날을 ‘봉헌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다. 이에 따라 교황청 수도회성은 해마다 맞이하는 이 봉헌 생활의 날에 모든 신자가 수도 성소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고, 봉헌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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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루카 2,22~40)
When the days were completed for their purification according to the law of Moses, Mary and Joseph took Jesus up to Jerusalem to present him to the Lord,
말씀의 초대
말라키 예언자는 주님께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는 주님의 길을 닦을 것이며, 레위의 자손들을 정화하여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지난날처럼 주님의 마음에 들게 할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과 깊은 연대감을 지니고 계셨다. 그분께서는 죽음의 공포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또한 대사제가 되시어 당신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는 분으로,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 있다(제2독서).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려가 성전에서 주님께 봉헌한다. 시메온 예언자는 아이를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한 뒤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 아기가 많은 사람에게 반대받는 표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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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젊은이들이 즐겨 부르는 『가톨릭 성가』 469번 ‘사랑하면 알리라’라는 젠 성가의 가사는 이러합니다. “언제나 나는 물었다. 언제나 주께 물었다./ 세상은 사랑 찾는데 왜 고통이 있냐고?/ 오직 한마디 내게 주었네, 마치 물음에 답하듯이./ 사랑하라 알고 싶거든 빛이 솟음을 너 보리라./ 사랑하라 말해 주네. 사랑을 하면 알리라./ 사랑하라, 슬픔 가고 기쁨을 찾으리.” 오늘 주님 봉헌 축일에 교회는 ‘봉헌 생활의 날’을 지내며 주님께 봉헌된 삶을 선택한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들은 위 성가 가사처럼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찾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십자가의 주님께 세상의 모순과 고통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정직하고 강렬하게 물었던 이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논리와 복음의 가르침 사이의 적당한 타협에 만족할 수 없는, 뜨거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리에 대한 추구는 사랑의 선택 안에서만 그 참된 길을 발견하는 것임을 깨닫고 그 길을 걷기로 결심한 이들입니다. 독일에 머물렀던 시절, 오랜 숙고 끝에 봉헌의 삶을 선택한 한 분과 교분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욕심과 바람이 아니라 오직 정직하게 ‘진리와 진실을 찾는 이’가 되기를 바라던 성실한 젊은이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공동체와 이웃을 위한 사랑의 삶에 그토록 애타게 찾던 진리가 있음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많은 수도자가 자신의 서원을 더욱 새롭게 다지는 이 복된 날, 문득 자신의 응답의 결실에 감사하고 있을 그가 떠올랐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봉헌 생활의 길은 수도자들만이 아니라 조금은 다른 방식이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주어져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인생살이에서 실천할 사랑의 소명을 주님에게서 부여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봉헌된 맏아들
_김유겸 신부-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 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
요한 1서가 우리에게 밝혀주듯이 봉헌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누가 맏아들을 내보였는지, 누가 맏아들을 바쳤는지를 생각한다면 그건 분명 하느님이다. 봉 헌이란 것은 자신에게 속한 것을 치명적으로 누군가와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숨겨야 할 것을 드 러내는 것이고 남과 나누지 말아야 할 것을 나누는 것, 혹은 그 이상이다.
그래서 상처와 왜곡과 파괴를 동반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이 일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은폐와 소유를 포기하면서까지 진정으로 함께해야 하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 치명적으로 나눌수록 함께 함의 정도는 커진다. 맏아들을 내어주신 분은 하느님이고 그래서 상처받은 분은 하느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함께하길 원하신다. 요한 1서는 이것을 하느님께서 드러내신 사 랑이라고 강조한다.
주님 봉헌 축일이 보여주는 신비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봉헌을 하느님 당신만의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행위를 인간의 손으로 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주님의 신비스러운 행위에 인간을 동참시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해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서 신비를 행하게 된다.
주님 봉헌 축일에 교회가 복음 말씀을 통해 열어주는 장면은 마리아 와 요셉이 예수님을 하느님 앞에
봉헌하는 장면이다.
마리아와 요셉은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고 자신의 공간을 열어 개방하고 말씀이 현실이 되도록 출산한 이이며 그의 신심 깊은 배필이자 협조자이다. 이는 곧 교회와 그와 혼인한 배필들이자 협조자들을 의미한다. 그들이 현실이 되신 말씀을 성전에 모시고 오자 성전은 그 참된의미를 되찾는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맡기신 그일들은 교회를 통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그행위로 인해 성전은 그 의미를 되찾는다.
교회와 그의 신심 깊은 협조자들은 미사성제를 통해 사람이 되신 말씀을 예물로 바친다.
그 순간 인간은 하느님의 행위를 자신들의 손으로 행함으로써 차원을 건너뛰게 된다. 봉헌은 우리에게 내려진 하나의 선물이다.
선물인 이 행위는 시메온의 말처럼 영혼이 칼로 꿰찔리는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행위는 분명 우리를 거룩함으로 인도할 것이다.
-서공석신부-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의 부모들이 모세의 법이 명하는 대로 아기를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들이 태어나면 출생 40일 만에, 딸이면 출생 80일 만에 어머니는 정결례 절차를 밟아야 하는 당시 유대교의 법이었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시므온의 노래는 루가복음서를 쓴 사람이 채집하여 수록한 초기 교회의 노래입니다. 루가복음서는 마리아의 노래(1,46-55), 즈카리아의 노래(1,68-79), 시므온의 노래, 이렇게 세 개를 채집하여 수록하였습니다.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하였다는 예언,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라는 말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공동체가 겪은 갈등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겪어야 했던 아픔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언 내용은 예수님을 체험한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역할을 해석하면서 발생한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원의대로 살고 싶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와의 이해관계 안에서 보려합니다. 배우자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도, 그 사랑 안에는 어느 정도의 자기중심적 생각이 감춰져 있습니다. 자기의 직장이나 사회를 보는 우리의 눈은 더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 한 사람이 잘 되는 데 필요한 재물이고, 지위이며, 권력이라 생각합니다. 신앙도 그런 것을 얻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다는 말은, 사람이 자기중심적으로 주변을 보지 말고, 하느님 중심으로 주변을 보라는 뜻입니다. 그 하느님은 심판하고 벌주고 군림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데리고 나온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탈출 33,19) 선하신 분입니다. 사람도 하느님을 본받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을 하도록 유도하는 지침인 율법이었습니다. 하느님에게 봉헌하라는 말은 사물을 하느님의 시선 안에서 보고 처리하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봉헌하면서 자기중심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선한 실천을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맏아들을 봉헌하는 것은 이제부터 태어나는 모든 자녀를 하느님의 시선 안에서 보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시선과 실천을 바꾸기 위한 봉헌의례입니다.
일반 종교 현상에서 봉헌은 인간이 신에게 무엇을 바치는 행위입니다. 인간은 그 봉헌으로써 신의 마음에 들고 신은 그에게 어떤 혜택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과 신 사이에 거래를 성립시키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높은 사람 혹은 강한 사람으로부터 혜택을 받아내기 위해 하는 행동과 같습니다. 신에게 먼저 무엇을 바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신으로부터 얻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교로부터 비롯된 봉헌은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 마음을 움직여서 혜택을 받아낼 대상이 아닙니다. 신앙은 인간이 하느님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변하는 데에 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에게 봉헌하는 것은 하느님의 시선이 그 봉헌된 것 위에 내려오게 해서, 그 시선으로 자기가 가진 것을 보고 처리하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현세적 사물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시선으로 부모와 주변을 보고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효도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쉽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형제자매가 서로 상대방의 시선으로 보는 것을 우애(友愛)라고 말하고, 부부가 서로 상대방의 시선으로 보는 것을 부부애(夫婦愛)라고 말합니다. 모두가 쉽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실천하신 병 고침과 용서는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하느님에게 봉헌된 사람들입니다. 세례에서 끊어버릴 것과 믿을 것을 약속하면서 하느님에게 봉헌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시선이 우리 위에 내려오도록 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분의 생명을 살겠다는 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우리 위에 내려오셨다는 사실도 우리는 믿었습니다. 현세적인 우리 욕심의 시선을 접고, 하느님의 숨결을 존중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봉헌생활이라는 말은 수도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인은 세례에서 봉헌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숨결로 새롭게 살도록 노력해야 하는 신앙인들입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자기와 자기 주변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 세상의 한 생명체로서 누릴 수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과 주변을 보면서 그분의 숨결이 이 세상에 살아있게 노력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를 비우고 베풀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세례로써 봉헌된 사람이면, 우리도 그 하느님의 일을 실천합니다. 우리 자신만 보는 시선과 우리 자신만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을 넘어, 하느님의 시선이 우리 안에 스며들어 그분과 같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높이기보다는 비우고, 많은 것을 가지기보다는 베풀고, 이웃을 미워하고 무관심하기보다는 사랑하는 새로운 마음을 찾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교회의 오랜 관례에 따라, 오늘은 앞으로 일 년 동안 사용할 초를 축복하여 성당과 각 가정에 비치합니다. 하느님에게 봉헌된 우리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촛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당 전례 때나, 가정에서 함께 기도할 때 즐겨 촛불을 밝힙니다. 우리가 세례에서 봉헌되었다는 사실은 하나의 빛으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비우고, 베풀고, 사랑하는 우리의 노력은 연약하지만, 하느님의 빛으로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촛불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빛입니다.”(마태 5,14).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의 일이 나타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세상을 버리고 하느님을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삽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세상에 작고 약한 빛 하나를 더 밝히는 것입니다. ◆
< 봉헌하면 생명, 가지려 하면 독 >
-전삼용신부-
조두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소원’을 보았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엔 ‘상처’에 관한 내용인줄 알았는데 영화를 다 보고나서는 ‘치유’에 관한 영화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원이네 문방구, 그리고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아빠, 이들은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원이는 늦게 학교에 가게 됩니다. 문방구 앞에서 기다리다가 자존심 때문에 소원이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고 말하며 먼저 학교로 뛰어갔던 같은 반 남자친구, 바쁜 탓에 소원이 머리를 묶어줄 수 없었던 엄마, 아빠. 그리고 자신을 해치려는 못된 아저씨에게 우산을 씌워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소원이의 착한 마음. 이 모든 것들이 되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의 발단이었습니다.
소원이는 결국 그 악마 같은 사람 때문에 대장까지 파열되어 평생 옆구리에 호스를 차고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살아난 것만도 기적입니다. 그러나 언론은 한 아이와 가족의 피해는 생각지도 않고 카메라를 들이밉니다. 그렇게 비싼 일인 실에 입원을 해야만 했고 가족은 마음고생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고통을 받게 됩니다. 소원이는 우산을 씌워준 것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고 자신에게 상처만 주는 세상과 담을 쌓게 됩니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치유는 작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친구가 적금을 털어 도와주고 아이들까지 소원이를 위해 모금을 합니다. 혼자 학교로 갔던 같은 반 남자 친구는 자기가 함께 갔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후회 섞인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치유되기는 소원이의 상처는 너무도 큽니다. 특히 옆구리로 변이 새어나와서 그것을 닦기 위해 바지를 벗기려는 아빠가 그 무시무시한 범죄자처럼 느껴집니다. 아빠가 병실에 들어오면 부끄러워 이불로 얼굴을 가리고 둘이 있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아빠는 소원이가 냉장고나라 코코몽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코코몽 인형 안으로 들어가 조금씩 소원이와 친해지려 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을 좋아합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도 점심시간에 밥도 먹지 않고 소원이만 볼 수 있는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코코몽 인형 속에서 소원이를 응원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이 보이면 그 무시무시한 학교 앞 길도 힘 있게 걸을 수 있습니다. 소원이는 코코몽 덕분으로 학교도 갈 수 있었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나쁜 아저씨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원이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 코코몽이 아빠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소원이는 누군가가 자기를 아프게 한 만큼 그만큼 큰 사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소원이는 아빠의 희생 덕분으로 잃어버렸던 말도 되찾아 말을 하게 되고 아이들과도 이전처럼 자신의 사탕을 나누어주며 아빠에게 농담도 하는 그런 아이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면 이렇게 줄 수밖에 없습니다. 소원이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던 범죄자는 짧은 쾌락으로 자신의 온 인생을 맞바꾸었습니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을 주어야지 그것을 내 것으로 삼으려다가는 그것이 내 안에서 독이 되어 나를 죽이게 됩니다.
봉헌은 사랑하면 당연히 주어야 하는 내 자신이고 내 자신의 희생입니다. 소원이 아빠는 소원이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소원이는 그 제물을 받아들였고 다시 인형 속에 들어가 있는 아빠의 땀을 닦아주었습니다. 봉헌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소진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향이 자신을 태워 아름다운 향기를 올려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랑한다면 자신을 소진시키고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초에 우리 조상들은 가난해지려 하지 않고 부자가 되려 했습니다. 부족함이 없었지만 금지된 것까지 가지려 했습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니 관계는 끊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이 아담과 하와의 죄를 당신의 봉헌으로 기워 갚습니다. 당신 아드님을 당신 것이라 여기지 않고 다시 하느님께 봉헌해 드립니다. 그분이 당신의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봉헌은 우리 죄와도 직결됩니다. 죄란 마땅히 봉헌해야 할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려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라푼젤’이란 디즈니 만화영화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는 불로초와 같은 꽃이 한 송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로초는 수백 년을 산 마녀의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불로초를 감추어놓고 자신만 사용하여 항상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임신을 한 왕비가 큰 병에 걸렸습니다. 왕비와 아기까지 생명이 위험해지자 온 나라 사람들은 그 생명의 꽃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마녀가 감추어둔 꽃을 뿌리째 뽑아서 왕비를 낫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예쁜 공주가 태어났는데 그 공주의 머리카락은 공주가 노래 부를 때마다 금색으로 변하며 그것을 만지는 사람은 누구나 치유되고 젊음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마녀는 그 공주를 몰래 훔쳐서 자신이 살고 있는 깊은 산 속 높은 탑 위에 가두어 두고 자신만이 또다시 그 생명과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탑 위에 한 도둑이 숨어들면서부터입니다. 그 도둑은 왕궁에서 왕관을 훔쳐 달아나다가 그 탑까지 숨어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공주는 몰래 그 훔친 물건을 감추고 자신을 밖으로 내보내 주면 나중에 그 왕관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엄마라고 속여 왔던 마녀는 사랑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주가 그 왕관을 돌려주면 그 남자는 바로 떠나버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도둑은 자신이 훔친 왕관을 버리고 목숨을 걸고 라푼젤을 참 부모님에게 돌려줍니다. 그렇게 되자 마녀는 더 이상 공주로부터 오는 생명력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애니메이션이 다 그렇듯이 왕과 왕비는 자신의 딸을 찾아준 그 도둑과 자신들의 딸을 혼인시킴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됩니다.
라푼젤이라는 공주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긴 했지만 결국 우리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봉헌할 줄 알면 그것이 비로소 우리 것이 되어 그것과 하나가 됩니다. 이 생명나무가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로 나타나십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를 봉헌하시기에 그분을 되돌려 받습니다. 우리 또한 그 분을 영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들면서 주인에게 도조를 바치지 않는 못된 소작인들 때문이 주인의 외아들인 당신이 돌아가셔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봉헌하지 않고 내 것으로 가지고 있으려고 한다면 그 생명나무는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되어버립니다. 마녀가 라푼젤을 자기 혼자의 것으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왕국과의 관계단절을 경험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소원이를 자기 것으로 취하려고 했던 어린이 성추행범이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오늘 봉헌축일은 우리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그분께서 주신 것임을 깨닫고 오롯이 다시 바쳐드릴 수 있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분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지 못하고 내 것으로 소유하려 하면 그것은 내 안에서 독으로 변하여 나를 죽이게 됩니다.
경주 최씨가 오랫동안 만석꾼 집안으로 이어져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집 가보가 ‘돈을 똥처럼 여겨라!’라는 집안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합니다. 생명의 양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오래 있으면 그것이 대변이 되어서 그것을 밖으로 밀어내지 않으면 똥독이 옮아 나를 죽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생명은 나에게 생명을 주는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봉헌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양승국신부-
<폭풍 속에서 마음 다스리기>
요즘 각 교구나 수도회에서 인사이동이 한창입니다. 여러모로 힘겨운 곳으로 발령받아 떠나가는 형제에게 한권의 책을 권했는데, 제목이 정말 멋있습니다.
‘폭풍 속에서 마음 다스리기’(에크낫 이스워런 저, 도서출판 바움)
저자는 한 평생 자신의 내면에 깊은 저수지 하나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한 사람입니다. 그는 오랜 수련 끝에 강한 확신과 함께 이렇게 외칩니다.
“진정으로 고요한 마음은 어떤 폭풍도 잠재울 수 있습니다.”
저자가 한번은 구식 여객선을 타고 큰 바다를 건너갈 때였습니다. 사흘내리 불어오는 강한 비바람에 그 여객선은 끊임없이 요동쳤습니다. 계속되는 풍파에 승객들의 고초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고생 끝에 어느 항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퀸 메리’호라는 좀 더 나은 배로 바꿔 탔습니다. 놀랍게도 구식 여객선과는 대조적으로 아무런 동요도 없이 거친바다를 늠름하게 해쳐나가더랍니다.
저자는 한 선원에게 물었답니다. “왜 이 배는 큰 파도 앞에서도 요동치지 않는 것입니까?” 그 선원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답니다. “평형장치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설치했는데, 이젠 거친 파도에도 끄떡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요동치는 우리네 인생, 큰 시련의 파도에 보다 당당히 맞서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평형장치가 필요합니다. 그 평형장치는 우리의 신체 어딘가에 설치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내면에,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설치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폭풍이 부는 곳은 우리의 내면이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는 것은 우리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정작 중요한 곳은 외부의 혼란이라기보다 우리 내면의 날씨입니다.
우리 내면만 잘 정리정돈하고 있다면, 우리 영혼만 늘 푸르고 당당하다면, 우리 안에 하느님의 영이 굳건히 자리하고 계신다면 그 어떤 외부의 자극, 혼돈, 폭풍 속에서도 잠잠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평화롭지 못한 사람, 내면이 흔들리는 사람, 영혼의 빛이 바랜 사람은 작은 외부의 자극에도 민감하게, 까칠하게 반응합니다. 별것도 아닌 아주 사소한 사건에도 마음을 크게 상합니다.
마하트마 간디 같은 분은 얼마나 내면을 잘 갈고 닦았으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폭풍을 좋아합니다.”
여객선이 출항한 후 갑판위로 올라가보면 ‘난간’이란 것이 있습니다. 배가 심하게 요동칠 때 꽉 붙들라고 여기 저기 설치해놓았습니다.
인생의 폭풍을 헤쳐 나가는 우리에게 고맙게도 든든한 난간이 하나 있습니다. 흔들릴 때 마다 꽉 움켜쥐고 의지해야 할 난간,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이것 놓치면 죽음이다, 이것 놓치면 끝이다, 하는 마음으로 죽기 살기로 잡아야 할 난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인을 만나다
-박대남 신부-
영국의 한 대학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종교학 마지막 시험에서 교수님께서 내신 문제는 “카나의 혼인잔치에 대해서 논하시오.”였습니다. 그 문제를 받고 많은 학생들이 머리를 써가며 답안을 작성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한 학생만이 답을 쓰지 않고 창밖만 바라보았습니다. 시험 시간은 다 끝나가는데 그 학생만은 여전히 답을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그 학생에게 다가가 왜 시험을 치르지 않느냐고 말을 했습니다. 시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남은 시간에 최선을 다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습니다. 시험이 끝나기 3분 전, 그는 결심한 듯 시험지에 한 줄을 쓰고 제출했습니다. 교수님은 채점을 시작하면서 그 학생의 답이 제일 궁금했습니다. 낙제 시킬 결심을 하고 그 학생의 시험지를 편 교수님은 그 학생의 시험지에 A+라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학생의 답은 “물이 그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다.”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풍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다면 비바람은 주인 앞에서 조용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체를 통해 매일 모시는 주님을, 우리의 주인을 얼마만큼 체험하고 계십니까? 물이 얼굴이 붉어져 포도주가 되고, 풍랑은 그 목소리에 잠잠해지는, 그 주인을 모시는 우리는 지금 어떤 마음입니까?
왜 겁을 내느냐 ?
- 박공식-
언젠가 한번 교리교사들과 놀이동산을 갔다. 바이킹을 같이 타자고 하는데 나는 무서움 때문에 기둥을 잡고 끝까지 저항했다. 결국 그들만 타고 나는 혼자서 유유히 회전목마를 즐겼다. 평소 단단하고 용감하며 돌격대다운 나의 캐랙터와 완전히 상반되지만, 무서움을 자극하는 놀이기구를 나는 아주 싫어한다. 기구를 타다가 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그냥 기구에 모든 것을 맡기고 즐기면 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무섭고 불안한 것은 싫어 지금도 놀이동산을 가면 회전목마나 동물원이 나의 단골 코스가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 저쪽으로 가시다가 거센 풍랑을 만난다. 물이 배에 가득 차자 제자들은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주무시는 예수님을 격앙된 목소리로 몰아붙인다. 이에 예수님은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고요하게 하신 다음 믿음이 없는 제자들을 나무라신다. 모든 영혼과 육신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그들과 함께 계시는데 제자들은 풍랑의 위험 앞에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잊고 만다. 우리도 인생의 풍랑을 만날 때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작은 것에 의지해 자신의 안전을 맡기면서도, 심지어 놀이기구에 몸을 맡기면 어떤 극한의 무서움도 극복하고 놀이기구를 즐기면서도 유독 모든 영혼과 육신의 주관자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데 인생의 작은 풍랑에도 아우성을 친다. 우리는 그분이 어떤 존재인지 머리로만 이해하지 몸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다. 인생은 항해와 같다. 그 인생의 항해에 주님께서 동행하고 계신다.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인생의 풍랑은 계속되며 때로는 우리 존재를 위협할 때도 있다. 아니 지금이 그런 풍랑의 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잊지 말자. 주님의 존재를,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
믿음은 희망의 보증
-김찬선신부-
오늘 히브리서는 믿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사실 옛 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바라는 바는 어떻게 이루어지나? 이에 대해 오늘 히브리서는 믿음이 바라는 것의 보증이라고 얘기합니다. 우리에겐 보통 물건을 판 사람이 써준 보증서가 보증이지만 신앙의 경우에는 바라는 대로 이뤄질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 바로 바라는 것의 보증(guarantee)이라는 얘깁니다. 사실 바라는 대로 이뤄질 것이라고 믿지 않으면 아예 바라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어야 희망하고 믿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믿지도 못하고 그래서 희망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어떤 때 너무 답답합니다. 무엇을 하자고 하면 늘 부정적이고 소극적입니다. 의미가 없어서 그러냐고 물으면 하면 좋기야 하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안 될 것이라고 믿기에 바라지도 않습니다. 자신을 보고 이웃을 보면 희망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께 믿음을 둬야만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는 대로 이뤄질 것을 믿는 것이지만 사실은 바라는 대로 이뤄 주실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믿음은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이라고 합니다. 사실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요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도 희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뻔히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믿더라도 대단한 것이 못 됩니다. 희망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일수록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고 참된 희망일수록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이때 보이지 않는 것이란 미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런 예측을 할 수 없는 실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이사악은 실체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대로 진짜 태어나기는 하는 것인지, 어떤 아들일지, 건강한 아이일지 장애아일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란 마치 있기는 있는데 안개 속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현재로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그래서 알지 못하는 실체를 믿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께서는 보신다는 믿음을 갖고 하느님께만 보이고 나에게 보이지 않는 실체를 믿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희망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아브라함처럼 당신의 자녀로 인정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지만 아비 이상으로 좋으신 하느님께서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어련히 알아서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지, 믿으면 얼마나 믿는지, 아브라함만큼 믿는지 오늘 반성할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어서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어떤 할머니께서 방문교리를 받은 뒤에 세례를 받고 처음으로 영성체를 하게 되었습니다. 교리 선생님께서는 걱정이 되셨지요. 왜냐하면 성체를 영할 수 있도록 나눠주시는 신부님께서 워낙 젊어서 할머니께서 함부로 하시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래서 할머니에게 자세히 가르쳐 드렸습니다.
“할머니, 할머니께서 보시기에 신부님이 무척 젊을꺼에요. 하지만 신부님은 예수님의 대리자고 또 신부님께서 나눠주시는 성체는 예수님의 몸이니까 함부로 하시면 절대로 안 되어요.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신부님을 대하셔야 해요. 알았죠?”
할머니께서는 “내가 예의 빼면 시체지. 걱정하지 마. 내가 얼마나 예의바른데?”라고 말씀하시면서 교리 선생님을 안심시켰습니다.
드디어 성체를 처음으로 모시는 날이 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할머니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성체를 할머니의 손에 얹어드리려고 했지요. 바로 그 순간 할머니께서는 이렇게 예의를 갖추어 말씀하셨다고 하네요.
“신부님, 신부님께서 먼저 잡수세요.”
할머니의 이 모습이 맞는 것일까요? ‘먼저 잡수세요.’ 라는 말 대신 ‘아멘’이라고 응답해야 맞는 것이지요. 그러나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처럼, 모르기 때문에 하는 실수가 얼마나 많은가요? 그렇기 때문에 알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실수를 줄이면서 함께 어울려 살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있는데 거센 돌풍이 일어 물이 배에 가득 차게 되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피곤하셨는지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만 계실 뿐이었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따집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사실 제자들의 대부분이 어부 출신입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은 목수 출신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물에 대해서 잘 알까요? 따라서 예수님께 의지하기 보다는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바쁘게 움직이는 자신들에 비해서 편하게 주무시고만 계시는 예수님을 섣부르게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이렇게 섣부르게 판단하는 것. 그것은 예수님을 잘 몰랐으며,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멈추게 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을 잘 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생길 수가 있으며, 예수님께 대한 실수도 줄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예수님과 하나 되어 함께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실수는 지푸라기처럼 물위로 흐른다. 진주를 찾는 사람은 물속으로 들어가야 한다.(존 드라이든)
영원한 동행
-김연희 수녀-
마르코 복음 저자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시는 모습을 세 번 전해줍니다. 배 안에 있는 제자들은 큰 위기에 빠져 있고,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구해주십니다. 여기에 많은 상징이 담겨 있습니다. 거센 풍랑이 이는 호수는 우리네 삶을 비유하고, 호수 건너편으로 노 저어 가는 배는 연약한 인간, 위태로운 교회입니다.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저녁에 항해가 시작됩니다. 정녕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우리들 삶의 모습입니다. 풍랑 한가운데에 배의 요동에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이러한 평온한 모습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현대인에게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하느님께 대한 그분의 깊은 믿음을 보지 못하고 폭풍우에 놀라 불안해하고 겁먹은 제자들처럼,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님께서 무관심하게 우리를 외면하고 계신다고 계속 불만, 불평과 불신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삶의 거센 풍랑이 잠잠해짐을 체험하고 나서야 주님은 우리의 여정에 언제나 동행하시고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뒤늦게 고백하게 됩니다.
두려움을 넘어서
-전삼용신부-
제가 어렸을 때 개울에서 놀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수영을 못해서 친구 등에 엎여 있었는데 왠지 수영이 될 것 같아서 그냥 수영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꾸 몸이 물 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물 밑으로 내려가니 발이 땅에 닿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차고 올라오면 간신히 물과 공기를 동시에 들이마실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장난치는 줄 알고 저를 구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물은 계속 입으로 들어오고 이러다 죽는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살아 온 삶이 필름처럼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정말 한 순간에 모든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특별히 후회스러운 일들이 다 기억났습니다.
친구가 저를 구해주기는 했지만 그 때부터 저는 물을 무서워하게 되었습니다. 물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광고에서 아기들이 물속에서 눈을 뜨고 헤엄쳐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냥 놓아두면 그 아이들은 익사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물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9개월 넘게 엄마 배의 양수에서 살았으니 오히려 물이 더 편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도 조금만 크면 그 물이 자신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인간이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 것이 언제일까요? 바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이후였습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부르시자 그들은 두려워하며 숨게 되었습니다.
죄는 하느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 손을 댈 때 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것 자체가 죄의 시작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하느님의 시선을 무시하고 죄를 짓게 되었을까요? 바로 눈이 밝아져 하느님과 같이 된다는 뱀의 유혹 때문이었습니다. 교만은 자신만 생각하게 만들고 하느님을 잊게 합니다.
오늘 제자들도 심한 풍랑이 몰아치자 막 가라앉을 것 같은 배 위에서 심하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지라 아직도 주님이 함께 계심을 깨닫지 못하고 찾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그들이 찾아주고 불러주기 전까지는 그저 잠자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들이 잊어버렸으니 그들이 다시 기억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이 오자 그들은 교만을 버립니다. 평생 어부생활을 해 왔던 그들이지만 죽음의 공포가 눈앞에까지 와서야 자존심을 버리고 결국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호수를 평온하게 하시고 그들의 약한 믿음을 꾸짖으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은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자신을 버리는 겸손이 바탕이 되어야합니다. 교만으로 죄를 짓고 두려움이 온 것처럼 그 반대로 겸손으로 다시 그분이 함께 계신다는 믿음을 지니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엔 사람들 앞에서 무엇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강론이나 강의를 할 때 저는 주님께서 함께 해 달라고 기도하고 제 영광이 아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내 자신을 위해 하지 않으니 떨리거나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내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긴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머무는 것이 기도입니다. 겸손과 믿음의 증표는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주무시고 계신 그분을 깨워 대화하고 도움을 청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면 어떤 두려움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도가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지면 살아가면서 단 한 순간도 그분의 존재를 잊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기들이 물에 빠져죽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예 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부모가 함께 있어주며 보호해 줍니다. 그러나 조금 컸다고 혼자 물장난을 하다가 익사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주님께서 항상 함께 계시다는 그 믿음, 그래서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면 정말 두려워 할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부모가 무슨 일을 저지를 줄 모르는 아기를 항상 주위에서 돌보는 것처럼 주님께서 항상 옆에서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지가 아닐까요?
-김찬선신부-
오늘의 히브리서에는 “믿음으로써”란 말이 네 차례 나옵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믿음으로써, 그는 천막을 치고 머무르면서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믿음으로써, 사라는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지금 저희 수도회는 인사이동의 때입니다. 이번 인사회의가 끝난 다음 형제들 간에 오가는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습니다. 다름 아닌 실시간 인터넷 검색이라는 말입니다. 요즘은 공문이 서면으로 나오기 전 인터넷으로 먼저 발표되는데 인사이동 내용이 발표되었는지 어떤 형제는 매 시간, 또 어떤 형제는 30분마다 실시간 검색을 하였다 하며 농담을 한 것입니다. 새로운 풍속도이긴 하지만 앞으로 적어도 3년 어디로 가게 될지, 누구와 살게 될지, 무슨 일을 하게 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몇몇 형제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입니다. 사실은 애초부터 관구장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
제가 관구장일 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이 형제들에게 의견을 물으면 이 형제들은 알아서 보내야 할 곳에 보내라고 합니다. 대단한 순종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대단한 믿음입니다. 대단한 믿음에 대단한 순종인 것입니다. 대단한 믿음이 없다면 대단한 순종이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관구장이 가장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에 보낼 것이라고, 관구장이 자기에게 가장 좋은 곳으로 보낼 것이라고, 관구장이 공동선을 위해 가장 좋은 곳으로 보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것이고 그렇게 믿기에 어찌하든 상관없다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제가 그렇게 믿을만한 사람이기에 믿는 것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지요. 저는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잘못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고 의도적이지 않더라도 인간적인 선입관이나 인간적인 감정으로 그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저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저의 뒤에 있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돌멩이를 가지고도 빵을 만드실 수 있으시고 악을 가지고도 선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가라고 하는 대로 떠납니다. 이런 믿음으로 같이 살라고 하는 사람과 같이 삽니다. 이런 믿음으로 하라는 일을 합니다. 지금은 왜 그곳으로 가라고 하시는지, 왜 그 사람과 살라고 하시는지, 왜 그 일을 하라고 하시는지 알지 못하지만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요셉과 마리아처럼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말씀하시는 대로 떠나고 믿음으로 말씀하시는 대로 봉헌합니다.
아름다운 임종
- 이창걸-
K씨는 폐암으로 수술·방사선 치료·항암제 치료를 받고 지내던 중, 다시 재발하여 항암제 치료를 하는 2년 동안 2차·3차 약까지 사용했고 신약도 사용해보았지만 점점 악화되었다. “항암제 치료가 듣는 것 같지도 않고 정말 힘든데 더 해야 할까요?”라고 나에게 물었다. 이제 항암제 치료도 효과가 별로 없고 무엇보다 식사도 잘 못하는 정도라면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이제는 현실을 직시하고 마무리를 잘하여 남아 있는 시간을 귀하게 써야 한다고 권했다. 그리고 호스피스 완화 의료 프로그램에 등록하면 환자에게 통증을 포함한 증상완화치료를 적극적으로 하고 정신적·영적 고통도 상담을 통해 환자와 가족에게 도움을 드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환자와 가족은 너무나 힘들게 지내왔기 때문에 솔직하게 모두 이야기 해준 것에 감사하고 오히려 편안하다고 말했다.
L씨도 역시 폐암 환자였고 오랫 동안 항암제 방사선 치료를 받아오다 뇌로 전이되어 방사선 치료를 받게 되었다. 오랜 투병 생활 중에 나와 친해진 L씨는 어쨌든 치료를 받으면 계속 생명이 연장될 줄 알았고, 점점 몸이 꺼져가는데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환자가 정말 말기임을 알렸고 그 이유는 자신을 정리할 시간이 없이 임종을 맞게 되면 너무 큰 혼란이 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끝까지 투병 의지를 불태우던 환자는 너무나 실망하고 식사를 잘 못하더니 며칠 뒤 사망하고 말았다. 내가 잘못 말한 것일까라고 자문해 보았지만 너무 늦게 이 사실을 알려준 것이 더 문제라고 생각되었다. 죽음이 임박해 오더라도, 두렵더라도 주님의 사랑 곧 호스피스에 의지하면 그 두려움은 잠잠해지고 평안한 가운데 아름다운 임종을 맞을 수 있다. 호스피스 완화 의료는 가톨릭 수도회에서 사랑의 마음으로 종교와 관계없이 말기 환자를 돌본 데서 시작되어 이제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되었으며 우리나라도 곧 제도화되어 보험급여가 될 전망이다. ●
-박철현신부-
복음에서 어둠에 묻힌 호수를 건너가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거센 돌풍을 만납니다.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는 표현은 일행이 처한 상황이 얼마만큼 절박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긴박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자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들도 이 세상에서 이와 똑같은 체험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역경과 빠져 나갈 수 없는 곤경에 처하여 우리는 하느님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잠자고 있는 듯한 하느님의 침묵을 체험합니다. 더군다나 처한 상황이 절박하고 긴급할수록 더 깊은 ‘하느님의 침묵’을 우리는 체험합니다. 하지만 ‘잠자는 하느님’은 ‘하느님의 부재’나 ‘신은 죽었다’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자 예수님은 일어나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는 말 한 마디로 상황을 반전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침묵’에 익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개 침묵하는 하느님을 만나면 사람들은 절규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침묵에 자비로운 이유가 있음을 믿음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인생의 바람과 파도는 늘 우리를 위협합니다. 하지만 하느님만이 우리의 주인입니다. 때때로 하느님이 나의 삶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더라도 그 때야말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이 필요한 때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새벽을 열며
다섯 살인데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머리가 좋은 꼬마가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 서점에 가요!”
“응? 서점은 뭐하게?”
꼬마는 이유도 말하지 않고 계속 졸라대기만 하는 것입니다. 엄마는 할 수 없이 꼬마를 데리고 서점에 갔고, 꼬마는 교육 코너에서 ‘어린이 양육법’이라는 제목의 책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엄마는 책의 제목을 보고서 궁금해 하며 물었지요.
“우리 아들, 왜 그 책으로 골랐어?”
그러자 태연한 표정으로 이 꼬마가 말했다고 합니다.
“응? 내가 올바로 양육되고 있는지 조사해 보려구!”
당찬 아이의 모습이지요?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에구 우리 아기 똑똑하기도 하지…….’하면서 칭찬하시겠습니까? 부모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이기에 결코 좋게 받아들이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이 하느님께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고 있을 때가 많더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과 언제나 함께 하면서 계속해서 많은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주고 계신데, 이에 반해 우리들은 끊임없는 불평과 불만을 던지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돌풍을 만난 제자들이 자고 계신 예수님을 향해 던지는 말처럼 말이지요.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치고 있는데도 배 안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지요. 한 번 자면 세상모르고 자는 스타일이라서 그랬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배가 요동을 치고 있는데, 또한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도 잘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계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제자들을 믿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어부 출신이 많은 예수님의 제자단이지요. 따라서 그들의 힘으로 충분히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냥 가만히 누워 계셨던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문제는 오히려 예수님께 불평과 불만을 던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어부 출신이었던 그들이 목수 출신인 예수님을 안심시켜야 하는데, 오히려 거꾸로 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요.
지금 나는 과연 어떨까요? 혹시 나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행동들은 하지도 않고 주님께 책임전가를 하면서 불평과 불만을 던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들을 끝까지 믿으시는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다시금 키워야 할 것입니다. 그때 삶의 거대한 풍랑에서도 우리들은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그 위험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온전히 의탁함
-이중섭 신부-
바다의 풍랑은 악의 세력이 날뜀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 세력을 무력화시켰습니다. 하느님께 저항하는 세력으로 상징된 바다의 물결을 잠잠하게 만든 것은 더러운 악령을 굴복시키는 그분의 신적인 권능을 뜻합니다(마르 1,27 참조). 이런 업적은 제자들이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경찰에 쫓기던 유다인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농가의 헛간으로 도망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헛간 밑으로 뛰어내린 다음, 아들에게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밑을 내려다보니 컴컴해서 아버지는 안 보이고 목소리만 들렸습니다. 무서운 생각이 들어 주저주저하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얘야, 내가 여기 있다. 나만 믿고 뛰어내려라!’ 아들은 아버지를 믿고 밑으로 뛰어내렸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분 품안으로 뛰어드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참으로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굳은 신앙, 그분께 철저히 의지하고 의탁하는 자세, 이러한 믿음만 있다면 다른 것은 모두 덤으로 주어집니다.
모든 고통에는 끝이 있다
-최연석 목사-
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해답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때로 성경의 의문점을 이해하는 데, 우리 인생의 의문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풍랑이 일고 죽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왜 풍랑이 일기 시작하는 시간에, 날이 어두워져 가는 시간에 주님은 호수를 건너가려고 하신 것인가? 본문의 앞뒤를 다른 복음서와 함께 살펴보면 해답이 나온다. 이 풍랑 이야기 앞에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있고 제자들을 부르신 이야기가 있다. 다른 복음서에는 장정만 해도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이 따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수가 열두 명, 칠십 명으로 줄어들고 마지막 골고타에서는 그나마도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간단하다. 주님의 말씀과 기적 앞에서는 그렇게 넘쳐나던 사람들이 풍랑 앞에서는 ‘마포 바지에 방귀 빠지듯이’ 하나 둘씩 사라졌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착각한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데는 비난과 핍박, 적대와 음모라는 풍랑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다. 하느님은 그것을 통해 가라지와 알곡을 추려내고 계시는 것이다. 곧 제자 되기를 원하는 자가 그 풍랑과 큰 물결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주님은 보신다는 것이다. 인생의 앞길이 어두워지고 풍랑이 일고 큰 물결이 일어날 때 나는 친구의 이 말을 떠올린다. 진통제로도 잘 듣지 않는 통증으로 고생할 때 의사인 친구가 전화로 들려준 말이다. ‘육체의 모든 통증에는 끝이 있다!’ 그렇다. 어둠도 풍랑도 큰 물결도 반드시 그 끝이 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어찌하여 고통의 끝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느냐?”
노력은 우리의 몫
- 강인봉-
제 나름대로 괴롭고 고민되는 일이 있어 평소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시던 신부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신부님, 요즘 이러저러한 일이 있어서 참 많이 힘듭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여쭈었더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제 마음이 알아서 할 일이지."라며 참으로 맥 빠지는 답을 주시더군요. 그러더니 곧 세상일이란 늘 우리에게 힘든 숙제를 던져주기 마련이라며 제아무리 신앙심이 깊다 해도 다가오는 어려움을 막을 수 없으니 웬만한 흙탕물이 들어와도 영향 받지 않도록 마음의 호수를 넓게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바르고 옳게 살아가려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세상과 부딪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적당히 타협하며 살기는 쉬워도 자신의 의지대로 올곧게 살기는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이 더욱 넓어진다면, 믿음이 더욱 굳건해진다면 그깟 시련이나 고통쯤은 겁내지 않고 웃으며 넘길 수 있을 겁니다. 폭풍을 막을 수는 없어도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일어설 수 있을 겁니다.
조그마한 시냇물은 한나절만 비가 쏟아져도 물이 불어 넘쳐흐르고, 조금만 가뭄이 지속되면 말라붙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넓은 바다는 심한 비바람이나 가뭄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바다와 같은 넓은 마음이나 굳은 믿음을 갖기는 쉽지 않지만 그런 마음과 믿음을 갖기 위한 노력은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얼마 전, 본당의 청년들과 볼링을 치러 갔습니다. 정말로 오랜만에 치는 볼링이었지요. 2000년 이후로 쳐보지 못한 볼링이었습니다. 2000년에 보좌신부로 있으면서 본당신부님과 함께 열심히 쳤거든요. 자주 치다보니 실력도 많이 향상되어서 웬만한 사람들과 쳐도 못 친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었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닺지 않아서 오랫동안 치지 못한 것이지요. 그런데 청년들과 우연히 가게 된 것입니다.
솔직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예전에야 좀 쳤었지만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예전만큼의 실력이 과연 나올까 싶었지요. 그러나 생각보다 성적이 괜찮았습니다. 십여 명의 청년들을 다 누르고 제가 일등을 했으니까요. 그러면서 자신이 좀 생겼습니다.
그리고 지난 수요일, 2000년에 함께 했던 볼링 동호회의 정기전에 참석했습니다. 그때만큼의 실력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망신은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참석했던 것이지요. 10년 전에 함께 쳤던 분들이 아직도 계시더군요. 그런데 그분들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 당시에는 저보다 훨씬 못 쳤던 분들인데, 이제는 완전히 고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되었냐고요? 저야 당연히 형편없는 점수가 나왔지요.
10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10년 동안 열심히 볼링을 쳤던 형제님들과 10년 만에 볼링을 친 저와는 커다란 간격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신앙도 이렇지 않을까요? 즉, 단 한 번에 신앙이 생기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세례를 받자마자 두터운 신앙심이 생길 것으로 착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하고, 주님의 뜻에 맞게 생활하려는 노력이 쌓이고 쌓여야지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간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 제자들의 모습에 큰 실망을 품게 됩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심사숙고해서 직접 뽑은 제자들일 텐데 그들의 믿음은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중에 많은 이가 어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센 돌풍에 우왕좌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깨우며 이렇게까지 말하지요.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께서 바람을 멈추게 하시고, 호수를 잔잔하게 만드신 뒤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우리의 믿음도 나를 흔드는 이 세상의 돌풍에 쉽게 흔들리곤 합니다. 이 돌풍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유혹들입니다. 주님과 함께 한다는 믿음만으로도 충분히 이러한 유혹을 이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조그마한 어려움이 주어지면 주님께 불평과 불만을 던질 뿐입니다.
불평과 불만을 던지기에 앞서 더 노력하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과 함께 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그대가 하는 좋은 일은 내일이면 잊힐 것이다. 그렇더라도 좋은 일을 하라(마더 데레사).
책임전가
-조명연-
마치 주님의 뜻이 내 뜻인 양 생각하고 말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느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너무도 쉽게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또한 내 뜻대로 주님께서 처리해주시지 않는다고 원망의 기도를 바칠 때도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 중의 많은 수는 어부였지요. 즉, 그들은 바다 생활만큼은 프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만큼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아울러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께 따지듯이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자유의지란 것을 주신 이유는 우리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해결하라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주님의 활동으로만 당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활동을 통해서도 주님의 뜻이 이 세상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런 자신들의 몫을 예수님께 전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판단하고 예수님께 원망의 목소리를 던집니다. 혹시 우리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것인데도 하지 않고 주님께 책임전가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래서 당신은 저의 주님이십니다.
-김찬선신부-
제가 들어 아는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상담을 잘 하기 위한 두 가지 요령이랄까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담자의 고통과 감정에 대한 공감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러면서도 내담자의 그 고통과 감정에 같이 휩쓸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누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우리는 모른 척하고 지나가서도 안 되지만 급한 김에 무작정 뛰어 들어가면 안 됩니다. 건져준다고 덮어 놓고 물속에 뛰어들면 같이 죽을 수도 있기에 물에 빠진 사람의 위급한 상황에 신속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 대처하면서도 냉정해야 합니다. 줄을 던져 주던지 나오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큰 문제에 부닥친 사람에게 상담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든지 해결해주려는 따듯한 마음이 있어야겠지만 문제와 해결의 본질을 침착하고 냉정하고 꿰뚫어보고 정확이 해법을 제시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객관적 주관화 또는 동감적 냉정함이라고 해도 될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대범한 사랑만이 이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점인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다른 사람이 큰 고통을 당하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내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도망치고, 겁이 나서 도망치고, 귀찮아서 도망치고는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저를 자학하곤 하였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많았습니다. 제가 무슨 구세주인 양 여기도 나서고 저기도 나서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담담하게 돕는다고는 하였지만 같이 허우적거리다가 끝나고 만 적도 많았습니다. 그리고서는 저를 창피해 하곤 하였습니다. 지금도 이런 약함과 무모함은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이제는 창피해 하거나 저를 자학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저이고 이렇지 않으시기에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고 저의 구세주가 아니시겠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다만 저의 약함 때문에 주님의 강한 능력을 더 믿고, 저의 고통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더 갈망할 뿐입니다.
고난 속에 있는 하느님의 빛
-- 윤준원 신부 - 어떤 분이 영세를 받고 난 뒤 그랬습니다. “아아, 영세를 받고 나니 빌 곳이 있어서 참 좋구나.” 누구에게 빈다는 말입니까? 하느님이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빌 수 있지만 특별히 인생이 어렵고, 힘들때, 우리는 하느님께 빌어야 합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어둠이 심연을 덮고 있는 그 혼돈의 순간에 하느님의 영이 그 물위를 감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창세1,2). 마찬가지로 내 인생의 혼돈의 순간, 아무런 희망도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그 위기의 순간일지라도 어둠 속 언저리에는 하느님의 영이, 하느님의 빛이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빛을 찾고 다시금, 희망의 길, 삶의 길을 가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가는 길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걱정이 되어 깨우시니, 주님께서는 바람과 호수를 잠잠하게 하시고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무슨 믿음입니까?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지켜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주님께서는 그냥 제자들에게 도움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당신을 깨우셨을 때에야 비로소 도움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 없이 나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을 향한 깨움, 당신을 향한 기도 없이 나의 어려움을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냥이 아니라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며 부르짖을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신 후에야 선조들과 맺었던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탈출 2,23-25). 시편에서는 ‘내가 주님, 너희의 하느님이다. 너를 이집트 땅에서 끌어 올린이다. 네 입을 한껏 벌려라, 내가 채워주리라’(시편 81,11).하셨습니다. 그냥이 아니라 정성껏 기도하면서 한껏 벌린 그 입을 보시고 소원을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감옥에 갇힌 괴로운 순간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불러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대답해주고, 네가 몰랐던 큰 일과 숨겨진 일들을 너에게 알려 주겠다(예레 33,3)고 하셨다. 곤경에 빠졌을때 주님을 부르고 정성껏 기도하면 내가 몰랐던 큰일, 숨겨진 일들을 나에게 알려주셔서 새로운 길을 안내해 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7-9)하셨습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 하느님을 향한 깨움이 있어야 도움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이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잘 아실 것입니다. 젊었을 때 마니교에 빠져서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까의 기도에 힘입어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님을 찾았나이다.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있었나이다.” 절망과 회의 방탕과 쾌락에 빠져 허우적거렸지만 그 가운데에 하느님의 빛, 하느님의 영이 함께 계셨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일찍 하느님을 깨달았더라면 죄도 덜 지었을 것이고, 하느님을 위해서 더 큰 일을 했을 것이라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자들도 물이 배에 가득 차고 난 뒤에야 주님을 깨웠습니다. 만일 미리 깨웠더라면 더 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요? 혹시 아직도 주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우구스티노성인처럼 주님을 떠나 내식으로만 살면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러면 빨리 주님께 나아와 기도드리고 다시금 복된 삶을 살도록 마음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뿌리
-이수철신부-
우리의 믿음은 나무의 뿌리와 같습니다.
믿음의 뿌리가 튼튼해야
희망으로 푸르른 나뭇잎들이요 사랑으로 활짝 피어나는 꽃들입니다.
그러니 ‘살기 위하여 믿는다.’라는 말이 맞습니다.
나무의 뿌리가 죽으면 통째로 나무도 죽듯이
믿음의 뿌리 죽으면 살아있다 하나 실상 죽은 목숨입니다.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몇 날 동안에 큰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듯
평생 꾸준히 하느님께 믿음의 뿌리 내리면서 성장, 성숙하는 우리들입니다.
흙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 뿌리들이듯
하느님 안에 묻혀있어 보이지 않는 우리 믿음의 뿌리들입니다.
믿음의 뿌리, 그대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뜻합니다.
과연 내 믿음의 뿌리는, 하느님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믿음의 뿌리 튼튼해야
내적 변형에 내적 치유요 튼튼한 영혼들입니다.
믿음의 뿌리 약하면 불안과 두려움으로
정신질환은 물론 온갖 육신의 병들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믿음보다 더 귀한 보물은 없습니다.
돈 주고 살수도 빌려 올 수도 없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느님과의 관계인 믿음을 돈 주고 살 수 있겠어요.
또 믿음 있어 마음의 평화요, 초연함이요 너그러움이니
믿음은 고귀한 인간 품위의 기반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자들의 믿음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거센 돌풍으로 물이 배에 가득차자
두려움에 싸인 제자들의 울부짖는 기도에
잠에서 깨어난 예수님,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 졌다 합니다.
예수님의 태산과 같은 믿음임을,
하느님께 참으로 깊이 뿌리내린 믿음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어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질책하는 주님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과연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 몇이나 될까요?
우리 모두를 향한 질책 말씀 같기도 합니다.
애당초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아마 믿음 부족으로 공포와 불안에 떨었던 이 제자들,
이런 체험의 과정을 통해 믿음도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오늘 1독서의 믿음의 선배들, 우리에게는 든든한 위로가 됩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주님의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여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났습니다.
믿음으로써, 사라는 약속해 주신 분을 성실히 믿어 임신의 능력을 얻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모든 선배들,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으며
모두가 하늘 본향을 갈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 역시 이 지상에서 잠정적으로 살아가는 이방인들이요 나그네들입니다만
하늘 본향을 갈망하며 하느님께 깊이 뿌리 내려 힘차게 살아갑니다.
이 믿음 있어 허무주의나 상대주의, 세속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푸르른 나무들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매일 계속되는 미사와 기도의 은총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깊게 하면서
하느님께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게 합니다.
“주님을 바라는 이에게,
주님을 찾는 영혼에게 주님은 좋으신 분이시도다.”(애가3,25).
아멘.
海印三昧
-강영구신부-
+ 고요하고 잠잠해져라! 그대에게 당신은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합니까? 폭풍우 몰아치는 호수 위의 작은 쪽배 안에서 태평스럽게 잠을 자는 예수를 보고 어떤 사람은 하느님 아들답다고 할 것입니다. 한편 어떤 사람은 예수야말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초인(超人)이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는 이 셋 중 하나입니다.
호수의 파도나 바람 때문에 내면(內面)의 평온을 잃고 허둥대는 제자들의 모습과 태평스럽게 잠자는 예수의 모습은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예수는 나자렛의 목수출신인 평범한 보통 사람입니다. 물에 빠지면 그분도 죽습니다. 다만 호수의 파도나 바람이 그분의 내면(內面)을 흔들지 못했을 뿐입니다.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요한 바다 해면 위에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있는 그대로 비춰 보이고 깊은 물 속 바닥까지 투명하게 꿰뚫어 보이는 절대 평화의 경지를 이르는 말입니다. 목수출신 예수는 하느님께 귀의(歸依)하고 하느님 안에 깊이 뿌리내린 큰 나무입니다. 비바람 몰아치는 언덕 위에 서있지만 뿌리 깊은 나무 예수는 끄덕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해인삼매(海印三昧)의 경지에 머무는 분입니다. 당신은 오늘 평화롭습니까? 만일 당신이 평화롭지 못하다면 무엇이 당신의 내면을 흔들고 있습니까? 당신의 가슴에서 욕망의 파도가 일렁이고, 당신의 가슴 속에 미움과 증오, 원망과 원한, 시기질투와 분노의 물결이 출렁거리고 있다면 당신은 깊은 산속 토굴 속에서 면벽참선(面壁參禪)하더라도 평화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스승 예수를 닮아 하느님께 귀의(歸依)하고 그분 안에 깊이 뿌리내리면 소란스러운 시장 바닥 한가운데서도 평화를 누립니다.(一明)
두려움과 고요함의 교차
-박상대신부-
우리는 지금까지 마르코복음 4장에 기록된 4편의 비유설교를 들었다. 모두가 하느님나라의 신비에 관한 비유였다. 예수님의 도래로 말미암아 하느님나라는 땅에 심겨진 씨앗처럼 아무도 모르게, 그러나 확실하게 그 완성을 향하여 자라나고 있다. 마치 작은 씨앗과도 같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나라는 하느님께서 스스로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세우시는 나라이며, 그분 스스로가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하느님의 통치가 아들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징을 통하여 드러나며, 거꾸로 이 표징들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통치를 현존시키신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징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통치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마르코는 비유설교에 이어 네 가지 기적사화(4,35-5,43)를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풍랑을 가라앉힌 기적, 게라사의 악령 들린 사람의 치유한 기적, 하혈병 여인을 고치신 기적,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기적이다. 우리는 복음서에 수록된 기적사화를 크게 치유·구마기적(이적)사화와 자연기적(이적)사화의 두 가지로 나눈다. 치유·구마기적사화는 사람을 병이나 신체의 불편함이나 악령으로부터 구제하는 기적을 보도하는 것이다. 자연기적사화는 죽은 사람이나 사람이 아닌 생물이나 자연물을 대상으로 예수님의 신적(神的) 능력을 드러내는 기적이다. 자연기적사화에 관한 대표적인 예로는 소생(蘇生)의 기적, 빵, 물고기, 포도주의 기적과 물위를 걷는 기적, 풍랑을 잠재운 기적 등이 있다. 그러나 어떤 모양으로든 이러한 기적들이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증명하려는 수단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의도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적을 통하여 신성에로의 신앙을 강요하실 의도가 없으셨고, 오히려 함구령을 내려 자신의 신성과 메시아성을 되도록 감추려고 하셨다. 이는 무지하고 단순한 당대의 사람들에게나 비판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탐구의 기본으로 삼는 현대인들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예수께서 바라시는 것은 믿음이다. 여기서 믿음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이라는 사건 속에서 인간과 자연에게 말을 건네시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수긍이다. 하느님의 세상에 대한 관심과 통치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비유설교를 마치신 예수께서 타고 계시던 배를 돌려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다. 예수께서 호숫가에 모여든 군중을 배에 앉아 가르치셨던 곳은 가파르나움 근처로 갈릴래아 호수의 북쪽이다. 잠시 갈릴래아 호수에 관하여 살펴보자. 갈릴래아 호수는 그 모양이 고구마 같기도 하고, 구약성서에서는 하프와 비슷한 모양이다 하여 ’긴네렛 호수’(민수 34,11; 신명 3,17; 여호 12,3) 라고 불렀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갈릴래아 호수, 겐네사렛 호수(1마카 11,67; 마태 14,34; 마르 6,53; 루가 5,1)로, 요한복음에서는 티베리아 호수(요한 6,1; 6,23; 21,1)로 불린다. 갈릴래아 호수의 호면은 지중해의 해수면보다 낮은 -212m, 깊이는 50m, 가장 긴 폭은 남북으로 22Km, 동서로 14Km, 둘레는 52Km, 호수면적은 약 170㎢에 달한다. 사람들은 이 호수를 바다라고도 한다. 예수께서 호수의 건너편으로 가신다고 함은 호수 북쪽에서 남쪽이 아니라 동편, 골란 지방을 말한다.(이에 대하여는 다음 복음에서 다루겠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예수님과 제자들을 태운 배가 호수 동편으로 항해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다. 배를 파산직전으로 몰아붙인 세찬 바람과 풍랑은 북쪽 헤르몬산(2,814m)에서 형성된 골란고원에서 불어오는 돌풍으로 갈릴래아 호수에 종종 있는 일이다. 12제자 중에 4명(시몬,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은 전직(前職)이 뱃사람들이라 이에 능통했을 일이지만, 다른 제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였으리라. 돌풍이 몰아치고, 풍랑이 일어 배에 물이 차서 사람의 목숨이 촌각(寸刻)을 다투는데 예수님은 뱃고물을 베개삼아 주무시고 계신다.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이지만 난리와 태평, 두려움과 고요함, 불신과 신뢰의 극적인 교차(交叉)를 충분히 실감할 수 있는 장면이다. 예수께서는 마치 마귀가 들린 사람에게서 악령을 쫓아내시듯, 바람과 바다를 향하여 호통을 치셨고, 이에 그들은 잠잠하고 고요해졌다. 예수님의 권위에 바람도 바다도 복종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중요한 것은 기적보다 제자들에게 ’아직도 없는 믿음’(40절)이다. 같은 배를 탔다면 우리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 길지는 않지만 막 태동한 그리스도 교회가 바다 위의 배와 같이 돌풍과 풍랑에 시달리는 모습을 마르코복음사가가 미리 내다 본 것일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그 배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승선하여 계시다는 것이며, 바람도 바다도 모든 자연도 하느님 통치의 손길 안에 있으며, 이들도 하느님 현존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주님의 신성과 인성을 보면서 - 믿음의 갈등 †
-- 두올 묵상 - 우리는 연중3주간 내내 마르코 복음(4장)에서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신 하느님 나라의 비밀"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그동안의 묵상내용을 다시한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비유 -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복음 전파 과정에서 방해하는 사탄의 다양한 저항 방법과 이를 극복하는 복음의 승리 방법 두번째 비유 - '등불의 비유'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비밀은 본질상 알려지도록 되어 있다는 의미로서 등불(빛)로 비유하셨으며. 세번째 비유 - '헤아림의 비유"에서는 복음이란 받아들이는 자의 태도에 따라 구원과 심판을 준다는 가르침을 비유로 하셨으며. 네번째 비유 - '자라는 씨앗의 비유'에서는 복음이란 성령 안에서 스스로 자라는 능력이 있다는 비유말씀을 하셨으며, 다섯번째 비유인 어제 복음에서는 '겨자씨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복음운동은 시작은 미약하나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복음과 다음주 복음(마르 5장)에서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확증하는 기적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르코복음 4장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다면, 5장에는 예수님의 신적인 주권과 능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다양한 계층에게 가르치신 이후에 그런 말씀들을 능력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 되심을 증거해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5가지 이적 중 하나인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신적인 주권과 능력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다음주에도(연중5주간)에도 더 많은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주님께서 자연과 사탄, 그리고 질병과 죽음을 주관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적들은 주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다음주에도 성령께서 우리 눈을 열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주시도록 함께 묵상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복음을 렉시오디비나를 통해서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첫번째 내용은 '풍랑으로 인해 위급해진 제자들'입니다.(35-37)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예수께서 타고 계신 배를 저어 가자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갔다. 그런데 마침 거센 바람이 일더니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해안에 모인 군중들을 배에서 날이 저물 때까지 가르치셨습니다(마르4,2). 날이 저물게 되자 주님은 제자들에게 배를 저어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35). 그 이유는 주님께서 바다의 건너편 마을에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호수를 건너자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하는 제자들 중에는 바다 일에 많은 경험을 가진 어부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평생 갈릴레아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타신 배를 돌려 바다 건너편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 때에 주변에 있던 다른 배들도 주님이 떠나는 것을 보고 함께 그 배를 따라갔습니다(36). 그런데 그 배가 바다 한 가운데에 있을 때에 갑자기 큰 폭풍이 불어와서 파도를 일으켰습니다. 그 파도는 사납게 배를 몰아쳤으며 이로 인해 배에는 물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37).
갈릴래아 바다는 주변이 높은 산들로 둘러 싸여 있어서 마치 분지같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서남쪽에서 바람이 불어와서 남쪽 계곡을 통과하여 분지 같이 생긴 갈릴래아 바다로 들어오면 큰 폭풍으로 돌변하기도 하는 지형적 특색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이 바람은 대개 오후에 불어서 저녁 때쯤이면 약해졌기 때문에 어부들은 주로 밤에 고기를 잡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저녁 이후에 폭풍이 불 때가 있는데 이 바람은 매우 강렬합니다. 이런 폭풍은 엄청난 힘으로 수면을치쳤기 때문에 높은 파도를 일으켜서 배를 덮치곤 합니다. 그렇게 되면 배를 탄 사람들은 순식간에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되곤 합니다. 오늘복음에서 제자들이 탄 배에 몰아쳤던 폭풍이 바로 이러한 폭풍이었습니다. 그래서 위험과 고통을 심히 느끼는 상황입니다.
두번째 내용을 묵상하겠습니다. - 풍랑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38-39) 입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선생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시지 않습니까?” 하고 부르짖었다.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하여 “고요하고 잠잠해져라!” 하고 호령하시자 바람은 그치고 바다는 아주 잔잔해졌다." 주님께서는 보통 배를 타고 가실 때에는 배의 선미 쪽에서 피곤한 몸을 쉬셨습니다. 주님은 이 날도 하루종일 가르치시고 피곤하셨기 때문에 뱃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주님의 인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신성을 가지셨지만 또한 동시에 인간의 몸을 가지셨기 때문에 피곤을 느끼셨고 이로 인해 쉬고 잠을 자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레아 바다에서 수많은 풍랑과 싸워 이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날 바람은 너무 거세고 혹독했기 때문에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그들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힘과 경험을 동원해서 배를 위험에서 건져보려고 하였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없이 주무시고 계신 주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 이렇게 하소연했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시지 않습니까?"(38)...하고 울부짓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해결되지 않는 위험이 닥쳐오면 주님께 울부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다급한 절규의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풍랑으로 인해 배가 위험에 처한 것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사태가 위급해진 것을 보시고 즉시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해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고요하고 잠잠해져라!"하고 호령하시자, 즉시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39). 이런 주님의 명령은 "날뛰던 귀신에게 내린 명령"과도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날뛰는 악령을 온전하게 하신 것 같이, 미쳐 날뛰는 바람과 바다도 잔잔하게 만드셨습니다. 이 사건은 주님께서 "자연과 역사를 주관하는 분"임을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의 길을 막는 홍해를 마른땅으로 만드셨고, 요르단 강을 육지로 만드셨던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창조주시기 때문에 홍해와 요르단강은 그 길을 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창조주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친 듯이 날뛰던 바람과 바다도 주님의 명령 앞에서 순한 양같이 잠잠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풀랑 사건을 통해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창조주라는 것을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복음의 마지막 묵상구절입니다. - 왜 두려워하느냐? 어찌 믿음이 없느냐?(40) "그렇게 하시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왜 그렇게들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책망하셨다.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할까?”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주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후에 풍랑 앞에서 두려워하던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주님께서 창조주 하느님이심을 알지 못합니다. 만일 그들이 하느님이심을 믿었다면 풍랑이 주님께서 타신 배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풍랑 앞에서 두려워하며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바다를 잔잔케 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고(포베오마이) 겁에 질려 떨었습니다(데이로스). 라고 성서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초자연적인 권세 앞에 심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눈이 휘둥거리게 하며 바라보면서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할까?" 하며 서론 수군거립니다. 이 내용에서 보더라도 제자들은 아직도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상이 오늘복음의 묵상내용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정말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실 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지금도 만물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위기를 만날 때에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가정과 교회를 덮쳐오는 위협 앞에서 담대하게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한 믿음을 자기 감정의 잣대로 둘쑥날쑥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이렇게 호통치십니다. "어찌 그리 믿음이 약하냐!!!"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 또는 우리 주변에 어찌할 수 없는 고난에 빠져서 허덕이는 분이 보이지 없습니까? 만일 이런 분이 계신다면 즉시 찾아가서 믿음을 권하시고 주님을 부르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즉시 그 환경에게 명령하시어 잠잠케 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주님을 믿는 자세가 되면 주님의 신성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창조주 하느님이십니다..........(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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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