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622. 묵상글 (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 유혹, 죄, 죄악. 등 )
----------------------------------------------------
230622.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유혹, 죄, 죄악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오늘 주님께서는 기도의 모범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는데
저는 오늘 마지막 가르침인 죄와 악에 대해서만 나누고자 합니다.
왜 이에 대해서 나누고자 했냐면
마지막 말씀 곧 악에서 구해달라는 말씀 때문이고,
여기서 악이란 무엇인가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됐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본 산상수훈 앞부분에서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주님께서는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악인은 하느님과 맞서고 하느님을 거스르는 악인이 아니라
나에게 악하게 그러니까 나쁘게 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얘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악한 사람은 두 가지입니다.
내가 보기에 악한 것과 하느님 보시기에 악한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악한 것은 실은 내가 싫어하는 것이지요.
악한 짓을 해서 악한 것이 아니라
내가 싫어하기에 악한 것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제게는 뱀이 그렇습니다.
보기도 싫고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해달라고 아버지께 청하라고 하신 악이 이런 것이겠습니까?
당신이 만드신 선을 악이라고 하는 저를 오히려 악하다고 하실 겁니다.
그리고 이런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면 결코,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그것을 싫어하는 네가 바뀌라고,
쓴맛이었던 나환자가 단맛으로 바뀐 프란치스코처럼 네가 바뀌라고 하실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구해달라고 청하라고 하신 것은 죄의 악 곧 죄악입니다.
그리고 구해달라고 청해야 할 죄악도 두 가지일 것입니다.
너의 죄악과 나의 죄악입니다.
너의 죄악이란 누군가가 나를 해치려고 저지르는 악입니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 음모나
나를 죄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으려는 유혹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악에서도 나를 구해달라고도 해야겠지만
무엇보다 죄에 빠지게 하려는 유혹에서 구해달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므로 사실은 너의 죄악에서 나를 구해달라고도 해야겠지만
내가 유혹에 넘어가 죄악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이미 죄악에 빠졌다면 그 수렁에서 구해달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먼저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이어 악에서 구해달라고 청하라고 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프란치스코의 주의 기도 풀이로 오늘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감춰진 유혹이나 드러난 유혹,
갑작스러운 유혹이나 끈질긴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악에서 구하소서.”
----------------------------------------------------
230622.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기도’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를 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드러내줍니다. 곧 그래서 그의 기도를 보면, 그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무엇을 목표로 살고 있으며,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를 “욕망의 해석자”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 기도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있다.”
그러니, “주님의 기도”에는 예수님이 담겨 있습니다. 곧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르치시려는 모든 말씀이 이 기도문 안에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비록 이 기도는 짧지만,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또한 “이 기도”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드리는 ‘기도의 모범’을 제시해줍니다. 곧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는 어떤 형태로든 ‘주님의 기도’를 본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 기도”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준 기도’로서,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Oratio Domini)라는 전통적인 표현에 대해서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전해 주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뜻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65)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함께 동행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드립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기도를 통해서 맨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빠, 아버지”입니다. 곧 우리는 아드님을 통하여, “아버지”를 부르면서 비로소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기도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입니다. 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중세시대로부터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님의 기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것을 순서대로 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도는 청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서까지도 형성시켜준다.”
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사실, 올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도를 올바르게 바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아빠, 아버지!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게 하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진정 바라야 할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알아야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아버지를 향하게 하소서. 아멘
----------------------------------------------------
230622.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열매를 맺는 기도
기도는 사람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찬미와 감사 청원이 다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기도하기보다 입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간절할수록 말은 적어지는 법인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마라, 떠들어 대지 마라”고 하십니다. 이는 세속의 시끄러움, 허영의 시끄러움입니다.
살아가면서 흔하게 하는 말 중에 하나가 ‘기도해 주겠다.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기억을 되살리고 약속을 지켰는가를 생각해 보면 소홀함이 많습니다. 약속도 하고 결심도 하지만 그저 흘려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간절함으로 청하고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하며 삶의 기도를 봉헌해야 효과 있는 기도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원의를 알고 계시는 분께 떼를 쓰는 것보다는 제가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니 그 바람을 ‘당신께서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 주십시오. 무엇이 주어지든 당신이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제가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씀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해야 하겠습니다.
허공에 대고 빈말을 되풀이하기 보다는 의심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들으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니만큼 어눌한 말이면 어떻고 두서없는 말이면 어떻겠습니까? 더군다나 우리 아버지신데 말입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모시고 그 앞에서 재롱을 떨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요? 그저 마음을 담고 사랑을 담아 믿음으로 올리면 그 정성을 헤아리셔서 흔들어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담을 그릇은 항상 준비해야 합니다. 사실“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 전지전능하신 이도 양보하시는 힘, 견줄 바 없는 특권, 전능하신 아버지가 그 자녀들의 필요와 염려에 관심을 나타내실 수 있는 길, 주 하느님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그 열쇠를 돌리는 것”(작자미상)입니다.
혹 누군가에게 약속한 기도를 잊었다면 오늘 그 기도를 채우시고 지나가는 소리로 청했다면 진지하게 갈망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바라는 간절함이 큰 만큼 걸 맞는 삶으로 기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지적인 사색에 있다기보다는 사랑에, 그리고 의지의 실천에 더 있기 때문입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사실 간절함이 크면 클수록 입은 다물게 되고 마음은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아직도 입에 있다면 깊은 침묵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소음이 크면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기도하려면 먼저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기도는 분명 하늘의 열쇠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남미 우루과이의 작은 성당 벽에 써있는 기도문
"하늘에 계신" 하지 말아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 하지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면서.
"아버지"라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지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지 말아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하지말아라.
내뜻대로 되기를 원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아 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말아라.
죄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도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주님의 기도에 대해 ‘완덕의 길’에서 “그 어떤 책보다도 훌륭한 주님의 기도를 정성스런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로 묵상한다면 다른 책이 아쉽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를 마음을 다해 자주 바쳐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
230622.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 사제 모임엘 다녀왔습니다. 작년에는 ‘달라스’에서 있었고, 올해는 ‘필라델피아’에서 있었습니다. 동부에 있는 신부님들은 자동차로 왔고, 남부와 중부 그리고 서부에 있는 신부님들은 항공편으로 왔습니다. 한국에서 주교님께서 오셔서 모임에 함께 하였습니다. 제일 젊은 신부님은 2020년에 서품 받았으니 저하고는 29년 차이가 났습니다. 사제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미사하고, 대화를 나누니 신학교 때 자주 불렀던 성가가 생각났습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 한지고 형제들이 오손도손 한데 모여 사는 것/ 오직 하나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 한 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 당신의 성전을 우러러보며 하느님의 사랑을 누리는 그것/ 불행한 날 이 몸을 당신 장막에 숨기고 그 장막 그윽한 곳에 나를 숨겨두시리라/ 이 내 마음 당신께 날마다 아뢰옵고 이 내 얼굴 당신을 찾고 있삽나이다.” 필라델피아 한인 공동체는 사제 모임이 잘 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물고기는 물 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사제들은 신자들의 기도와 사랑이 있기에 먼 타국에서도 잘 지낼 수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건강검진을 통해서 우리는 몸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몸에 이상이 있으면 의사의 처방에 따라서 약을 먹기도 하고, 생활 습관을 개선하기도 합니다. 주교님과 대화하면서 교구의 현안들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서품을 받은 후 20년 가까이 보좌신부로 지내야 하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기도사제’를 더욱 확대하는 방안이 있었습니다. 명동 성당에 있는 기도사제는 명동의 ‘랜드 마크’가 되었다고 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명동 성당에서 기도하고, 성당 주위를 수단을 입고 걸어 다니는 사제들에게 면담을 청하기도 하고, 함께 사진을 찍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교구는 특수사목 사제관에도 ‘기도사제’를 정하겠다고 합니다. 수도사제 출신인 교구장님의 ‘영성’이 느껴졌습니다. ‘협력사목’ 제도를 추진하겠다고 합니다. 몸과 마음이 아픈 사제들에 대한 도움도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덕망이 있는 사제와 함께 지내는 방안도 있었고, 전문가를 통한 상담도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잠시 쉬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치유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란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슬기로운 사제생활’을 생각해 봅니다. 예전에 선배들은 3가지 ‘슬기로운 사제생활’의 덕목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건강’입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건강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규칙적인 생활’입니다. 적당한 운동과 균형 잡힌 식사가 중요합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감사하는 마음이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두 번째는 ‘지식’입니다. 컴퓨터도 업그레이드를 해 주어야 하듯이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도 계속 업그레이드 해 주어야 합니다. ‘시대의 징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우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책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기도는 뿌리가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제는 때로 고난과 시련이 찾아와도 흔들리지 않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제는 유혹에 빠질지라도 곧 하느님께 의지하여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기도의 뿌리가 있어야 건강이라는 나무에서 지식은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시대의 징표를 깨닫고 기도하는 사제는 ‘슬기로운 사제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자주 바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가장 큰 핵심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성모님도 천사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기도 했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주님의 뜻이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치워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성모님과 예수님은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어려움이 없어지기를 기도하기 전에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는 기도를 하면 좋겠습니다.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 나가듯이,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는 살면서 고난과 역경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고, 유혹에 빠지지 말며, 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
230622.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기도
-기도가 답이다-
사랑만 아니라 기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밖엔 길이 없습니다. 사랑엔 영원히 초보자이듯 기도에도 바로 그러합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잘하는 비법은 따로 없습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기도도 깊어집니다.
진리는 반복해 읽어도 들어도 늘 새롭습니다. 성서가, 고전이 그렇고 좋은 시나 강론이 그렇습니다. 베네딕도 규칙이 바로 그러합니다. 새벽 일어나 강론을 준비하고자 베네딕도 규칙을 펼치는 순간 주옥같은 말씀들이 처음 만나는 듯 반가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시편을 외울 때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 목소리와 조화되도록 할 것이다.”(성규21,6-7).
“모든 것에 앞서 모든 것 위에 병든 형제들을 돌보아야 한다. 참으로 그리스도께 하듯이 그들을 섬길 것이니, 이는 그분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병들었을 때 너희는 나를 찾아 주었다’하시고 ‘너희가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성규36,1-3)
“만물의 주님이신 하느님께는 온갖 겸손과 순결한 경건심으로 간청해야 할 것이다. 많은 말로써가 아니라, 마음의 순결함과 통회의 눈물로써 우리 간청이 들어 허락되는 것임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가 하느님의 은총에서 영감을 받은 열정으로 길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한다. 모든 이가 모여 있을 때 기도는 짧게 할 것이며,”(성규20,2-5ㄱ)
고전중의 고전이 베네딕도 규칙입니다. 1500년전 작품이 오늘 현대인의 감각에도 무리없이 마음에 와 닿아 감동을 줍니다. 이 모두의 답이 기도로 수렴됩니다. 참으로 기도가 모두의 기초임을 깨닫습니다. 기도하는 인간, 바로 인간의 정의입니다. 기도없는 인간 상상할 수 없습니다. 피정지도때 참 많이 강조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우리 수도자의 삶이 기도로써 시작되어 기도로써 끝나듯 피정도 그러합니다.
기도는 공기와 같습니다. 기도를 숨쉬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와 삶은 하나입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이요 광신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은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느님과 생명의 소통이 사랑입니다. 그러니 이런 기도가 없는 삶은 살아있다 하나 실상 죽어있는 삶입니다.
참으로 살기 위해, 영혼이 살기 위해 기도입니다. 정신건강, 영혼건강, 마음건강을 위한 우선적 수행이 기도입니다. 기도 역시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참으로 기도맛으로 살아갈 때 영육의 건강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기도뿐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요 설명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며칠전 들은 감동적인 일화도 나눕니다. 눈만 열리고 마음만 열리면 늘 새로운 기적의 연속인 삶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젊은 천문학자들 모임에서 결코 “놀라움의 감각(sense of wonder)”을 잊지말라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니 환경에 앞서 기도로 마음을 늘 새롭게 바꿔야 합니다. 제 신심 깊은 60대말 동창 신부에 대한 일화입니다. 34년전 수녀원 입회부터 지금까지 영적아버지로 모시는 어느 수녀님이 들려준 내용입니다. 34년간 두분의 한결같은 영적우정이라니 참 놀라운 기적이요 기도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신부님의 별명은 ‘베들레헴(배둘레햄-배둘레가 햄이라는 아주 배가 나온 비만을 빗댄 말)’이었습니다. 항암 30차례로 끝났고 배는 없어졌고 완치되었습니다. 항암 투병중에도 기쁘게 살면서 본당 소임에 마지막처럼 생각하고 책임을 다했습니다. 배가 없이 마른 분이었다면 벌써 항암치료중에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신부님뿐 아니라 이해인 수녀님도 그 혹심한 항암치료를 견뎌내고 완치될 수 있었음도 비만이었다니 하느님의 섭리가 참 오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두분의 치유에 결정적인 처방약은 기도였음을 깨닫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기도가 그처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중의 기도가 오늘 복음의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앞서 주님의 충고 말씀이 참 적절합니다.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한다는 베네딕도 성인과 일치합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왜 주님이 다 아시는데 기도합니까? 우리가 아쉬워서, 필요해서, 참으로 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하느님께 의존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며 참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말 필요한 것 하나는 하느님 한분 뿐임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후대의 제자들인 우리들에게 당신의 노하우인 당신의 기도를, 주님의 기도를 전수하십니다. 예수님의 단순하고 본질적인 가난과 겸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압축 요약된 기도입니다. 전반부 셋은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는 수직적 차원의 기도요 후반부 넷은 일상생활에서 본질적 필요로 하는 수평적 차원의 내용들입니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홀로 바치는 기도가 아닙니다.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모두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니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고 서로간에는 형제들이 되니 하나의 인류가족이 형성됩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바치는 기도요 바로 이 기도가 날로 예수님을 닮아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해줍니다.
우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루어지게 해달라는 청원입니다. 하느님께 일방적으로 맡겨드리는 무책임한기도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도록,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도록 우리의 분투의 노력을 다한 협조가 필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나한테 달린 듯이 노력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침내 우리 하나하나가 하늘 나라의 실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넷은 우리의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에 기본적 필수 요소들입니다. 참으로 군더더기 없이, 환상이나 허영없이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하는 위의 체 청원과 후반부의 네 청원입니다.
바로 “1.일용할 양식, 2.잘못의 용서, 3.유혹에 빠지지 않음, 4.악에서의 구원”이란 네 본질적 청원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거품이나 환상은 사라지고 이 넷만 또렷이 남게 됨을 볼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간절한 청원과 더불어 우리의 협조가 또 필수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한, 이웃을 용서하기 위한,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한, 악에서 구원되기 위한 분투의 노력이, 수행이 함께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진인사대천명, 지성이면 감천이라 말마디가 모두 이를 요약한 말마디입니다. 제가 평전을 읽으면서 이들의 천재성을 부러워하면서도 이들이 노력에 천재였다는 사실을 통절히 깨닫습니다. 타고난 천재가 노력에도 천재니 타고난 천재는 아니라도 노력에는 천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대표적인 조선의 대학자 퇴계, 율곡, 다산의 평전을 읽으면서 참 감동했고 많이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참 좋은 반려자가, 협조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우리의 책임에 최선을 다하는, 목숨을 내놓은 헌신적 노력의 모습니다.
“주님의 기도”에 용서가 또 첨가됩니다. 그토록 용서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용서에 앞서 잘못한 형제들의 허물에 대한 용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위해서도 용서가 필수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몹시 불편하고 자유롭지 못합니다. 평화도 기쁨도 없습니다. 마음이 따라가지 못해도 용서의 지향으로 먼저 용서를 던져놓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체를 모시세요. 때가 되면 은총으로 용서하는 마음이 찾아 옵니다.
기도중의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날로 하느님 중심의 참삶을 살게하고, 하느님 아드님,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본질적 깊이의 참나를 살게하는 기도입니다. 이의 빛나는 모범이 가장 예수님을 닮은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감동적인 대목 일부를 나눕니다.
“나는 하느님의 열정으로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여러분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자제하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내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걸고 말하는데,... 나의 이런 자랑을 아무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내가 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아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얼마나 깊이 그리스도를, 형제를 사랑하며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얼마나 깊은 일치의 관계에 있는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기도를 체화體化한 바오로 사도임이 분명합니다.
성서의 요약이, 모든 기도의 요약이, 예수님의 전삶의 요약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평생 공부해도 여전히 초보자임을 깨닫게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와 미사의 관계는 절대적입니다. 주님의 기도의 ‘원(原)자리’는 미사전례중임을 깨닫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되는 주님의 기도요, 무엇보다 주님의 성체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기도를, 하늘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아멘.
----------------------------------------------------
230622.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어디서 들은 것인지, 혹은 읽은 것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내용이 제 머릿속에 있습니다.
‘기도하십시오. 청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기도와 청함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믿으십시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기도하는 순간 그 기도가 이루어졌음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이미 우리 아버지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봉헌해야 하는 기도는 주님께서 알려주신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미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졌음에 감사함과 동시에 아버지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의 전반부는 하느님 아버지를 찬미합니다. 또한 아버지의 뜻이 하늘과 땅에서 모두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기도’의 후반부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함과 동시에 악에서 구하심을 청합니다.
주님께서 알려주신 ‘주님의 기도’는 우리 신앙생활의 지침이고 나아갈 방향입니다. 즉 우리의 신앙생활은 찬미와 감사로 가득 차야 합니다. 만약 우리 안에 찬미와 감사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 절대로 기쁨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와 우리를 악에서 구해주시기를 바라는 기도는 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성찰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과연 나는 하느님을 섬기는지, 아니면 나 자신을 섬기는지, 그리고 그렇게 악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찬미와 감사가 있는 곳에 기쁨과 희망과 용서와 사랑이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우리가 삶을 살아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절망과 어둠 속에서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흘러넘치기를 희망합니다.
썬크림
사실 썬크림을 잘 바르지 않았습니다.
저뿐만이 아니고 많은 남성분이 그러하리라 생각됩니다.
우선 썬크림을 바르면 답답합니다.
그리고 어떤 썬크림은 눈이 따갑습니다.
잠시 후 눈물을 만들어 내는 썬크림도 있습니다.
그래서 잘 안 썼습니다.
그런데 한 분에 제게 썬크림이 왜 중요한지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그 사진 안에는 썬크림을 쓴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의 피부의 노화가 다르게 진행되었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노화가 두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방할 수 있는 것은 예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불편하고 답답해도 조금씩 썬크림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기도도, 성당 가는 것도, 이와 같을지 모릅니다.
불편하고, 답답하고….
그래도 나중을 생각한다면….
조금 더 내 몸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해보세요.
지금보다 조금 더 예쁜 영혼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
230622.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고해성사를 주고 보속으로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한 번만 정성껏 바치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겨우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죄에 비해 보속이 너무 적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보속만큼 무겁고 중요한 것이 있을까 싶어서 이 보속을 드립니다.
어느 유명한 영성가로 알려진 신부님의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신부님은 매번 주님의 기도 딱 한 번을 보속으로 주신다고 합니다. 이 주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이고, 이 기도의 내용 역시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 중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 뜻이 먼저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먼저였습니다. 이 부분만으로도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게 되니 말입니다. 실제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면 늘 탈혼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짧은 기도가 아닌 아주 긴 기도가 됩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는 성모송,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바치는 영광송까지 더하니 어떻게 가벼운 기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중요하고 그 무게가 대단한 기도입니다.
사람들은 제게 너무 쉬운 보속을 준다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너무 어렵고 힘든 보속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송한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드립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늘 먼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9)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빈말을 되풀이하는 기도,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는 주님이시기에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고, 그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뜻은 주님의 기도 후반에 나오는 용서를 통해 구체화 됩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용서를 통해 사랑이 가득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마태 6,12)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우리의 용서가 선행되어야 우리의 잘못도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하기를 너무나 어려워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이유를 찾으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멀어질 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깊이 묵상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 안에서만 우리는 참 행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라(정호승).
------------------------
----------------------------------------------------
230622.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을 닮게 하소서>
당신의 뜻 따라
당신께 드리고픈
우리의 단 하나의 기도는
당신을 닮게 하소서
당신께서
우리보다 앞서
우리를 헤아리듯이
우리가
벗들보다 앞서
벗들을 헤아리게 하소서
당신의 뜻 따라
당신께 드려야 하는
우리의 단 하나의 기도는
당신을 닮게 하소서
당신께서
하늘에서도
땅을 품으시듯이
우리가
땅에서도
하늘을 아우르게 하소서
우리가
온유와 자비와 평화의
당신의 이름이 되게 하시고
우리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당신의 나라가 되게 하시며
우리가
의로움과 섬김과 살림의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당신께서 우리에게
늘 그러하듯이
우리가 벗들에게
맛난 밥으로 먹히고
따뜻한 품을 내어주며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어
올곧고 착한 길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뜻 따라
당신께 드릴 수 있는
우리의 단 하나의 기도는
당신을 닮게 하소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