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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의 포인트/ 고린도전서 1:18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eyBqe7cRDfI
약 20년 전에 스타벅스가 실적 부진으로 어려웠습니다. 이유는 스타벅스는 약 4년간 커피 이외에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주력했습니다. 그 결과는 눈에 보이는 실적 악화였습니다. 결국 스타벅스는 영화와 음반 사업을 정리하면서 다시 핵심 사업으로 돌아왔습니다. 핵심을 놓치면 근본이 흔들립니다. 핵심을 소홀히 하면 위기를 만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도 성도도 이 핵심을 놓치면 흔들리게 됩니다.
신앙에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핵심과 상관없는 것들을 정리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가는 변화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진리를 파악했기 때문에 고전 2:2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능력을 알고 오직 십자가를 붙잡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 한 주간은 굉장히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지막 주간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셨고 결국 그곳에서 잡히시고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상 사역의 마무리를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과 논쟁도 하셨습니다. 비유를 통해서 진리를 드러내셨습니다. 또 이적으로 자신의 신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에서 잡히시고 재판 받으신 후에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의 목표는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목적으로 사셨습니다. 죽기 위해 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어느 날 느닷없이 억울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로 작정하시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를 향하여 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주일이 종려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종려주일을 지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에 죽으시고 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다음 주일이 부활주일입니다. 그리고 종려주일과 부활주일 사이의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를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의 포인트”입니다. 오늘 설교는 종려주일부터 토요일까지 예수님의 행적과 그 날의 포인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종려주일의 포인트는 구원입니다.
이날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나귀타고 들어가신 이유는 구약성경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슥 9:9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왔습니다.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위에 얹었습니다. 무리는 겉옷을 길에 폈고,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는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며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 21:9)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성전을 청소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21:13입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하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는데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집을 이용해서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성전 안에서도 사람들이 호산나 찬송을 계속했고 그 일로 주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논쟁하신 후에 성 밖 베다니로 가셔서 주무셨습니다.
종려주일의 포인트는 구원입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나귀타고 들어가실 때 사람들은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성전 안에서도 사람들은 주님께 호산나 찬송을 계속했습니다. 호산나는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마 1:21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말씀은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가 한 말입니다. 천사는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말했습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흑암과 멸망에서 구원하시고, 죄악과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질병과 문제에서 구원하시고, 가난과 대적에게 구원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2. 월요일의 포인트는 성전정화입니다.
월요일의 포인트는 성전정화입니다. 막 11:12-19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일주일 중 월요일에 행하셨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주무시고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침에 성전으로 가시다가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그 나무에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배가 고파서 시장하시던 차에 열매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화가 나서 나무를 저주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징적 사건입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수업 중에 학생들이 떠들면 선생님은 교탁을 탁탁 칩니다. 교탁을 치는 이유는 교탁이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떠들면 안 된다는 경고성 메시지를 보낸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저주도 마찬가지 성격입니다.
이 저주는 성전정화 사건과 연결 되어서 풀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은 곧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어제처럼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역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사람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셨다고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는 뒤이어 등장하는 성전을 상징합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성전의 기능을 잃어버렸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 하셔야 하고 그곳에서 백성들은 그곳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는 없고, 강도의 소굴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행위에 대해 분노를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고전 3:16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이 성전의 기능을 다하지 못한 것처럼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영적 성전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책망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영적으로 피폐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어린 아이들이었고 육신에 속한 자들이었으며 그들 가운데는 시기와 분쟁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몇 파로 갈라졌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심지어 그리스도파도 있었습니다. 교회에는 음행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교회는 그들을 징계하지 않았습니다. 교인들끼리 세상 법정에 송사도 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우상숭배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우상숭배를 피하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들은 은사를 사용하면서 질서를 파괴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말하고는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성전 된 자신의 내면을 청소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죄로 더럽혀져 있다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얼마나 불편하시겠습니까! 강도의 소굴로 변한 예루살렘 성전에 하나님의 임재가 떠났던 것처럼 우리가 죄악 가운데 계속해서 거한다면 성령님의 기름 부음은 약해질 것이고, 최후에는 성령이 떠나서 인생이 비참하게 된 삼손처럼 영적으로 비참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야 하며, 혹시 죄를 범하면 바로 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3. 화요일의 포인트는 “예수님은 누구신가?”입니다.
마가복음 11:20-13:37을 보면 마지막 화요일은 예수님께서 치열한 논쟁 한 가운데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녕 누구신가?”라는 질문이 예루살렘을 뜨겁게 달궜습니다. 사람들은 화요일에 이런저런 주제로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권위 문제로 도전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포도원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이 받을 심판을 예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세금 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화폐를 가지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대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부활 후에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어느 계명이 큰지 질문을 하였고 예수님은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외에 메시야와 다윗의 관계 그리고 사람들에게 문안 받는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난한 과부가 드린 적은 헌금을 보고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시니 제자들이 예수님께 성전의 아름다움이 어떠한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말씀하신 후에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
화요일의 치열한 논쟁의 핵심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았다면 그런 논쟁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 앞에 계신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초라한 인간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수많은 지혜로운 말씀과 놀라운 기적들을 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대의 사람들처럼 여전히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화요일에 일어난 치열한 논쟁의 결말을 보십시오. 허무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영생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요 17:3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 질문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너무 좋은 대답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칭찬을 들었습니다. 마태복음 16:16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에 관한 지식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 많은 지식 중에 진짜 중요한 지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나의 선지자이십니다. 나의 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오래전 대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늦은 밤, 어떤 여인이 술에 취해 건들거리며 가는 것을 보고 깡패들이 붙잡아 성폭행하려 하니, 그 여인이 하나도 놀라지 않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너희들 말이야, 내가 누군 줄 알아? 김용팔이 여자야.” 그러자 깡패들이 다 도망갔습니다. 김용팔은 그 당시 대구에서 소문난 조직의 두목이었습니다. 그런 두목의 여인을 건드렸다가는 어찌 될지 몰라 겁이 나서 도망친 것입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파워가 있는 이름은 김용팔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는 사망도 저주도 다 사라집니다. 마귀도 겁을 내고 도망갑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복을 고전 1:30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예수님을 아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십니다.
4. 수요일의 포인트는 사랑입니다.
막 14:1-11에 보면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일 방도를 찾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을 치료 받은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매우 값진 순전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가져와 깨트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여인의 섬김을 낭비라고 말하며 여인을 책망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고 하시고 그 여인이 한 일은 복음이 전파 되는 곳마다 전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막 14:9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그 여인의 섬김에 반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로 마음먹고 행동에 옮겼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갔습니다. 그들은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했고, 유다는 예수님을 어떻게 넘겨줄까하고 기회를 찾았습니다.
수요일의 포인트는 옥합을 깬 여인의 사랑입니다. 이 여인이 깬 옥합은 300데나리온입니다. 노동자가 1년 동안 번 돈을 하나도 쓰지 않아야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이 여인이 그렇게 비싼 옥합을 예수님께 부어드릴 만큼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의 마음에는 이런 고백이 있었습니다. “주님! 나를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옥합을 드립니다. 주여! 이 옥합은 당신만을 위해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제 인생도 이 옥합처럼 주님만을 위하여 드려지기 원합니다.”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올리버 크롬웰이 나라개혁을 위해 힘쓰다가 국왕의 미움을 받아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사형집행은 저녁때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와 함께 집행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됐는데도 종이 울리지 않았습니다. 종을 쳐도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종탑에 올라가 보니 한 여인이 종추에 매달려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크롬웰의 약혼녀였습니다. 크롬웰의 약혼녀는 자기를 사랑해준 크롬웰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 사실을 들은 국왕이 감동되어 크롬웰은 살려주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자신을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에 주님의 말씀에 목숨도 거는 것입니다. 단지 주님을 사랑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5. 목요일의 포인트는 아버지의 뜻입니다.
미국에서 4살 난 어떤 어린이가 상속을 받아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신문기자가 “그 많은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사탕을 사먹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또 하고 싶은 일들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고작 사탕이나 사 먹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인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막 14:12-72, 요 13:1-30을 보면, 목요일에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고, 떡과 잔을 나누셨습니다. 떡은 자신의 살이라 하셨고, 잔은 자신의 피라하셨습니다. 그리고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주님에게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무리들과 로마 군병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체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대제사장에로 끌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습니다. 닭이 두 번째 우니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습니다.
목요일의 포인트는 아버지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마 26:39입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자신의 뜻을 내려놓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셨습니다.
감사하게도 예수님께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제 구원 받은 우리도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신앙생활이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진짜 좋은 영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6. 금요일의 포인트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필리핀에 한 성도가 십자가의 고난을 체험해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십자가를 만들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산에 올라가면서 쓰러지면 옆에 로마군병과 같이 채찍으로 때리게 했습니다. 그는 차마 손에 못은 박을 수 없어서 노끈으로 묶었습니다. 그는 채찍을 맞고 피를 흘리고 탈진 상태에서 십자가 위에 매달렸는데 5분이 못되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으니 제발 내려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금요일에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종교지도자들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의 힘을 빌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쓴 죄패를 붙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서 6시간 동안 고통을 당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정오가 되었을 때에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오후 3시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후 3시에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는 모습을 본 로마의 백부장의 고백입니다. 막 15:39입니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사형을 집행했던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국회의원 같은 공회원이었습니다. 그가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그의 정치생명을 끝낼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리마대 요셉은 담대하게 빌라도를 찾아갔고,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하여 예수님의 시체를 자신의 무덤에 안치했습니다.
조용기목사님이 6.25 때 부산 매축지에 사셨답니다. 거기에 철로가 있었는데 석탄을 실은 기차가 지나가면 피난민들이 석탄차 위에 올라가서 석탄을 끌어 내렸습니다. 그러면 군인들이 와서 총을 쏘고 석탄 훔치는 사람을 잡았습니다. 조목사님도 석탄 훔치러 다녔습니다. 한 번은 가족을 다 잃고 아들과 피난 온 한 40대 아버지가 한 열 살 된 아들을 데리고서 훔치러 왔습니다. 아들이 기차 위에서 석탄을 끌어내면 아버지는 주워 담는데, 헌병이 뛰어 오니까 기차 위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다 뛰어 내리고 있었고 그 아들도 뛰어 내렸습니다. 그때 굵은 석탄 덩어리 하나가 기차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아이는 그것을 끄집어내려고 기차 밑에 기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차가 덜커덕하고 출발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저 아이 어떻게 해! 저 아이 어떻게 해!”하며 고함을 치지만 아무도 그 아이를 끄집어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비호같이 뛰어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움직이는 기차 밑에 뛰어 들어가서 아들을 밀어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기차 바퀴가 그 아버지 허리를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허리가 부러지는 소리가 “뚝, 뚝, 뚝”하며 들렸습니다. 그 아버지 죽어 가면서도 어린 아이를 보고 빨리 피하라고 손짓했습니다. 그때 조목사님은 중학생 시절이었으니까 ‘저 바보 봐라. 장가가서 아들은 또 낳으면 될 것인데, 왜 그 아들을 위해서 죽어. 장가가서 낳으면 될 것 아니야. 그 아들 때문에 왜 죽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려서 아버지의 심정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조목사님이 장가들어 자식을 낳고 보니 ‘내가 그 입장에 있으면 어떻게 했을까? 아무 생각 없이 살려 놓고 보자.’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사랑은 맹목적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뛰어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금요일의 포인트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성전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막 15:38입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을 상징합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커다란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야곱이 보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꿈에서 본 그 사닥다리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만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야곱의 꿈에 나타난 사닥다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요 1:51입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늘에 오르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는 능력입니다. 고전 1:18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멸망하는 자들이 볼 때는 미련한 것입니다. 반면에 십자가의 도를 믿고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때문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히 4:16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7. 토요일의 포인트는 십자가의 선포입니다.
토요일 예수님의 행적은 없습니다. 무덤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베드로 사도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셨던 때에 감옥에 있는 영에게 가셔서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말합니다. 벧전 3:19입니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성경의 난제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총신대 교수였던 권성수 목사님은 본문을 놓고 영들에 대한 해석 가능성 네 가지, 옥에 관해서는 다섯 가지, 전파의 내용 세 가지. 기간에 대한 가능성 세 가지 등을 어림잡아 나열하면서 이것들만 조합해도 모두 180가지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어 해석학의 미로라고 해석의 어려움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정확한 의미는 천국에 가서 주님에게 물어보기까지는 모릅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직후에 영으로 연옥이나 지옥 어디에 내려가셔서, 노아 당시에 구원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천주교인들은 이 교리를 ‘연옥’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흐름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나,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을 천국으로 이사 가도록 길을 여신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연옥 같은 곳이 정말 있어서 죽은 후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있다는 말인데, 이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도 죽음 후에 두 번째 구원의 기회가 있다는 가르침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좀 광범위하게 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옥에 가셔서 선포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어두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비밀을 선포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죄로 인하여 사망 가운데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십자가로 구속의 비밀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감옥에 대해서 몇 가지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갇혔던 빌립모 감옥도 있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마귀가 갇힐 무저갱도 있고 또 영적인 어두움도 감옥이라고 표현합니다. 저는 사 42:7을 근거로 여기서의 감옥은 영적인 흑암이라고 적용합니다.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 말씀을 보면 감옥과 감방은 영적인 어두움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은 영적인 어두움에 갇힌 자들에게 자신의 십자가로 이루신 구속의 비밀을 선포하셨다고 봅니다.
십자가는 죄로 죽은 자들에게는 영벌의 선포고, 살아있는 자들에게는 영생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구속을 믿는 자들은 구원이고 십자가의 구속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천국 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