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청(江靑)
본명은 이운학(李雲鶴)이고, 산동성 제성(諸城) 출신의 여자이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막강 권력을 휘둘렀던 사인방(四人幇)의 핵심 인물로 1914년 출생이고~1991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강청의 할아버지 이순해(李純海)는 원래 2만여평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으나 아버지 이덕문(李德文) 대에 이르러 파산하였다. 강청은 1972년의 자술에서 "매우 가난한 수공업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는데, 사실 그녀의 아버지는 목공소 주인이었다. 이덕문은 처음에 목공소 견습공으로 들어가 뒤에는 목공소 주인이 되었으며, 그 뒤 다시 제성의 성문 부근에 여관을 차렸다. 이덕문의 본처는 원래 지주 집안의 딸이었으나 늙고 못생겼다는 이유로 이덕문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덕문은 50세에 다시 결혼하여 20여세의 젊고 예쁜 난씨(欒氏)를 첩으로 삼았다.
1914년 3월 난씨는 딸애를 하나 낳았다. 그러나 이덕문과 난씨는 아이를 임신했을 때 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까지 '이진남(李進男)'으로 지어놓았던 터이라 실망이 컸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이름을 다시 '이진해(李進孩)'로 고쳐 지었으니, 그녀가 바로 몇 십년 후 중국대륙을 떠들썩하게 흔들었던 강청이다.
강청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 이덕문은 이미 60세였으며, 위로 이복 오빠 이건훈(里建勛: 이간경"李干卿"이라고도 함)과 언니 이운하(李雲霞)가 있었다. 이진해는 6세 되던 해에 다른 여자애들 처럼 전족을 해야만 했다. 당시 산동 지역에는 여전히 전족이라는 악습이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이진해는 전족한 발이 너무도 아파서 밖에서 놀때는 몰래 전족을 풀어 버리고 집에 올 때 다시 전족을 하곤 했다. 이러한 일은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담한 행동이었다. 이진해는 어릴 때 담이 크고 남에게 죽고 못사는 맹랑한 성격의 소녀였다.
그녀의 이러한 성격을 잘 대변해 주는 어린시절의 한 에피소드가 있어서 여기에 소개한다.
이진해의 동네에 단운전(單雲田)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이진해는 그녀와 함께 잘 놀다가도 자주 싸우곤 했다. 하루는 단운전이 이진해를 보고, "넌 첩의 자식이야! 누가 모를 줄 아냐, 네 아빠는 이리, 네 엄마는 호랑이, 넌 새끼 호랑이야! 네 집에는 전부 나쁜 사람들 뿐이구나!"라고 놀렸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이진해는 당장 단운전에게 달려들었지만 도저히 그녀를 당해낼 수 없었다.
얼마 후 이진해는 길에서 놀고 있다가 마침 이복 오빠인 이건훈을 만났다. 당시 이건훈은 현(縣) 경찰국 소속 경관으로 한창 거드름을 피우고 있을 때였다. 이진해는 이건훈에게 달려가서 단운전과 있었던 일을 낱낱이 일러 바치고 원한을 갚아달라고 부탁하면서 분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건훈은 그녀에게 반드시 보복해 줄테니 안심하라고 약속했다. 다음날 이건훈은 순경들을 데리고 단운전의 집으로 찾아가서, "우리집을 이리 집안이라 욕한 놈이 누구야! 어서 나와!" 라고 외쳤다. 단운전은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담장 모퉁이에 꼭 숨어 있었다. 단운전의 아버지가 나와서 애들 끼리 싸우다 그런 것이니 참아라고 하면서 대신 사과를 하였지만, 이건훈은 오히려 자식교육을 잘못 시킨 부모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하면서 데리고 간 순경들과 함께 구타를 가했다. 이에 단운전의 아버지는 만신창이가 되도록 맞았으며, 그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강력하게 항의하던 단운전의 삼촌도 이건훈과 순경들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이 일로 단운전의 삼촌은 억울하게 죽고 말았으며, 단운전의 숙모는 생계를 잇기 위해 두 살밖에 안된 자기 애를 버려두고 남의 집 유모로 들어가야만 했다. 얼마 후 두 살 짜리 애도 엄마 젖을 먹지 못해 굶어 죽었다. 이때 이진해의 나이는 불과 일곱 살이었다. 처음에 그녀는 단운전에게만 보복할 생각이었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다. 이건훈이 단운전의 집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을 때 이진해는 열심히 단운전을 찾고 있었다. 그녀는 겁에 질려 숨어있던 단운전을 발견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겁나냐? 모두 너 때문에 생긴 일이야, 또 한 번 욕해 봐!" 이 일이 있은 뒤로 동네 아이들은 모두 그녀를 피해다녔으며 아무도 그녀와 함께 놀지 않았다고 한다.
이진해는 강청이 어릴 때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고 그녀의 공식적인 이름은 이운학(李雲鶴)이다. 그녀는 소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도 정식 이름이 없었다. 그때 그녀가 다니던 학교의 이사장 설환등(薛煥登)이 그녀의 다리가 가늘고 길다고 해서 '운학(雲學)'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그녀가 자술에서 '군계일학' 운운하면서 작명 경위를 설명한 것은 유명해진 뒤에 꾸며낸 이야기로 보여진다.) 이덕문은 성미가 급하고 거칠어 걸핏하면 자기 아내에게 손찌금을 하곤 했다. 어느 원소절(元宵節: 정월 대보름)에 이운학의 어머니 난씨는 실수로 넘어져 그릇을 깨뜨렸다. 이에 화가 난 이덕문이 삽으로 마구 때리는 바람에 그녀는 손가락이 부러졌고, 놀라서 울던 이운학은 따귀를 얻어 맞아 이가 부러졌다. 더 이상 고통과 멸시를 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난씨는 이운학을 데리고 그 집에서 나와서 살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가진게 없었던 난씨는 생계를 잇기 위하여 남의 집 종살이라도 해야 했다. 그녀는 이운학을 친척집에 맡겼으며, 이로부터 이운학에게는 가난하고 힘든 생활이 계속 되었다. 1926년 12세의 이운학은 소학교 5년 과정을 졸업하고 어머니와 함께 천진(天津)의 언니 집으로 가서 살았다.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그녀는 언니 집에서 별 하는 일 없이 몇 년을 지냈다. 1929년 봄 그녀의 형부 왕극명(王克銘: 당시 봉계군벌의 군관)이 제남(濟南)으로 전근되어 그녀도 언니 식구를 따라 제남으로 갔다.
거기에서 15세의 이운학은 산동실험극원(山東實驗劇院)에 들어가 조태모(趙太?)와 왕박생(王泊生) 등으로부터 연극과 고전음악을 배웠다. 이때 강청은 학력이 낮고(다른 사람들은 최소 중졸 이상이었음) 가난하여 동기생들로부터 갖은 멸시를 받았지만, 개성과 승부욕이 아주 강했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뒤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했다고 한다.
실험극원 입학은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첫 번째 전환점이 되었다. 연극배우 이운학이 없었다면 훗날 영화배우 남평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30년 실험극원은 정국의 변화로 문을 닫게 되었다. 이운학과 학생들은 왕박생을 따라서 북경으로 가서 '해명극사(海鳴劇社)'를 조직하여 순회공연을 하였다. 이때 그녀는 경극단에 들어가 제남, 청도, 연대(煙臺) 등지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곳의 사정도 이운학이 적응하기에게는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많았다. 연기 경력이 짧은데다 사투리가 심해서 북경인들에게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하였고 공연도 정기적으로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31년 봄 이운학은 다시 청도(靑島)에 있던 조태모(당시 청도대학 총장)를 찾아갔으며, 그의 배려로 그녀는 청도대학 도서관 직원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그녀는 도서관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중문과 수업을 청강하고, 유명한 현대문학가 문일다(聞一多)와 심종문(沈從文)을 알게 됨으로써 어느 정도 문학적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당시에 그녀는 조태모의 처남 황경(黃敬: 당시 청도대학 이과생, 이후 천진시장 겸 중국공산당 천진시위원회 서기 역임)과 사랑에 빠져 동거생활을 하였으며, 조태모의 아내이자 황경의 누나인 유산(兪珊)을 따라서 전한(田漢)이 창설한 극단 남국사(南國社)에 들어갔다. 당시 유산은 중국 연극계의 인기배우로 남국사의 일원이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동북삼성을 점령하여 각지에서 반일운동과 반장개석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운학은 황경과 함께 학생운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33년 2월 19세의 이운학은 황경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당시 황경은 중국공산당 청도대학 지하지부 서기를 거쳐 중국공산당 청도시 위원회 선전부장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이해 7월 배반자의 밀고로 황경이 국민당에 체포되는 사태가 발생하여 강청은 황급히 상해로 도망갔다. 이때 그녀는 당적을 상실하였다. 상해에서 그녀는 전한(田漢)과 그의 동생 전원(田沅)의 도움으로 서명청(徐明淸)이 책임자로 있던 '신경공학단(晨更工學團)'의 교사로 들어갔다.
1933년 겨울 체포되었던 황경이 아버지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상해로 돌아왔다. 그러나 황경의 부모님의 반대로 그들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따로 집을 구하여 다시 동거를 시작하였다. 1934년 1월 28일 상해에서 '1. 28' 항전 2주년을 기념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신경공학단의 단원들은 대부분 이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이 일로 이운학은 체포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이운학은 황경과 함께 북경으로 도망갔다. 북경에서도 그들은 동거를 계속하였으나 황경의 부모가 그들의 동거를 반대하여 생계비를 보내주지 않아 생계를 잇기가 곤란한 지경이었다. 결국 이운학은 황경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1934년 5~6월경 이운학은 이름을 이학(李鶴)으로 바꾼 후 다시 상해로 돌아와서 기독교 상해청년회 노동부의 소개로 여공 야학교에서 가창과 연기 등을 가르쳤다. 그후 다시 서명청이 있던 포동(浦東)의 야학교로 옮겨 장숙정(張淑貞)이란 이름으로 교사생활을 계속하였다. 1934년 10월말 이운학은 상해 조풍공원(兆豊公園: 지금의 중산공원 中山公園)에 옛친구 아락(阿樂)을 만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때 아락은 공청단(共靑團) 중앙 연락원으로 국민당 특무원들의 추적을 받고 있던 상태였다. 그들이 만날 무렵 아락은 이상한 낌새를 채고 급히 도망쳤으며 아락을 놓친 특무원들은 대신 이운학을 체포해 갔다. 그녀는 상해시 공안국에 약 1개월간 수감되었다가 기독교 상해 여청년회의 도움으로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때 마침 황경이 상해로 돌아왔으며, 마땅히 갈 곳이 없던 이운학은 황경의 큰어머니 집에서 황경과 함께 생활했다.
1935년 봄 그녀는 상해 업여극인협회(業餘劇人協會)에 들어가 유명한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의 여자 주인공 노라 역에 캐스팅 되었다. 이것은 그녀의 인생을 또 다시 바꾸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1935년 봄, "난 영원히 그날을 잊을 수 없다. 그날은 내 마음처럼 음산한 날이었다. 나는 한없이 따뜻한 고향을 떠나, 일생에 있어 가장 소중하면서도 다시는 얻지 못할 것을 버리고, 상해로 가서 ≪노라≫(≪인형의 집≫을 말함)를 공연하였다." "≪노라≫의 공연은 내가 본격적으로 희극계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되었다." (강청의 자술 중에서)
여기에서 강청이 "일생에 있어 가장 소중하면서도 다시는 얻지 못할 것을 버리고"라고 술회한 것은 바로 그녀와 황경 사이의 아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당시에 강청은 이미 임신을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무대에 서기 위해 낙태수술을 했던 것이다. 이 공연에서 그녀는 그간의 불행을 말끔히 씻고 세상에 이름을 떨칠 수 있기를 열망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예명을 남평이라 하였다. ≪인형의 집≫은 당시에 공연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작품으로 1935년 6월 27일 상해의 금성대희원(金城大戱院)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인형의 집≫은 첫 공연부터 연일 매진을 기록하면서 대단한 호응을 받았으며, 상해의 각 언론에는 노라역을 맡았던 남평에 관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인형의 집≫의 대히트로 강청은 불과 21세의 어린 나이로 다소 유명세를 타기는 했으나 대스타가 되기에는 아직도 험난한 길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관객이 적은 연극무대에서는 대스타가 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관객이 훨씬 더 많은 영화계로 시선을 돌렸다. 1935년초 전통영업공사(電通影業公司)가 상해에서 영화 ≪풍운아녀(風雲兒女)≫를 촬영하고 있었다. 이 영화의 주제가 의용군진행곡(義勇軍進行曲)이 바로 현재 중국의 국가이다. ≪풍운아녀≫의 제작이 끝날 무렵 강청은 전통영업공사에 들어갔다. 그후 강청은 전통영업공사의 세 번째 작품 ≪자유신(自由神)≫의 여군 여월영(余月英)역을 맡았다. 그러나 극중 여월영은 그다지 비중이 높지 않은 배역이어서 자못 실망이 컸었다. 이때 그녀는 당시 상해 영화계에서 영향력이 있던 영화평론가 당납(唐納)과 열애에 빠졌다.
당시 언론에서는 강청이 당납의 이름을 빌어 유명세를 타려 한다는 소문이 무성하기도 했다. 1936년 4월 21일 강청은 당납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으나 혼인 신고를 하지는 않았다. 그후 강청은 영화 ≪도시풍광(都市風光)≫과 연극 ≪흠차대신(欽差大臣)≫ 등에 출연하였으나 그다지 비중 있는 배역을 맡지 못하고 있었다. 연화영편공사(聯華影片公司)의 ≪낭산첩혈기(狼山?血記)≫에서 주인공 유삼(劉三)의 아내역을 맡았으나 그 역도 허명 뿐이었다. 1937년 5월 강청은 당납과 헤어지고 상해 연극계에서 매우 명망이 높던 연출가 장민(章泯)과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당납의 명성을 이용하여 영화계에서 스타가 되어 보려고 하였으나 영화계의 높은 벽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연극계로 돌아와 장민의 명성을 이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그녀의 계획은 또 다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일로 인하여 유부남이었던 장민은 아내와 이혼하게 되고 당납은 자살 소동을 벌이게 되어 여론이 그녀를 부도덕한 여인으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1937년 7월 상해에서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된 강청은 스타의 꿈을 접고 도망치듯 상해를 떠났다. 이때 그녀는 황경이 연안(延安)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연안으로 갈 결심을 하고, 마침 서안(西安)으로 가 있던 서명청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서명청은 섭검영(葉劍英)의 부인 위공(危拱)과 친분이 두터웠던지라 그녀의 소개로 팔로군 사무소로 가서 주은래(周恩來)의 부인 등영초(鄧潁超)를 만날 수 있었다.
등영초는 강청이 상해의 좌익극단에서 활동하던 배우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녀를 연안(延安)으로 갈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당시 연안에서는 진보적인 문화계 인사들을 적극 환영하고 있었던 터였다. 1937년 8월 말 강청은 연안(延安)에 도착하여 제3초대소(第三招待所: 서북여사"西北旅社"라고도 함)에 투숙하였다. 여기에서 그녀는 숙박부에 이름을 적으면서 '남평' 대신 '강청(江靑)'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강청'이라는 이름은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지은 것으로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청색(靑)은 쪽(藍)에서 나오지만 쪽 보다 더 푸르다.(靑出於藍而勝於藍)"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의미이다. 여기에서 "쪽", 즉 "남(藍)"은 바로 남평(藍萍)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강청(靑)은 비록 남평(藍)에서 나왔지만 남평 때 보다 더욱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겠다"는 의미이다. 둘째, 강청(江靑)이란 말은 당대(唐代) 시인 전기(錢起)의 시 성시상령고슬(省試湘靈鼓瑟) "곡이 끝나도 상수(湘水)의 여신은 보이지 않고, 강가의 산봉우리만 푸르구나(曲終人不見, 江上數峰靑)"에서 나왔다. 강청은 연안에 도착한 후 곧장 심사를 받았다.
2개월간의 심의를 거친 후 강청은 황경의 도움으로 다시 당적을 회복하고, 1937년 11월 중국공산당 중앙당교(中央黨校)에 입학하여 6개월간 교육을 받았다. 1938년 7월 7일 '7.7 항전' 1주년 기념행사가 연안에서 열렸다. 이날 오전에는 모택동(毛澤東)의 보고가 있었고 오후에는 문화행사가 있었는데, 이 문화행사에서 강청은 경극 ≪타어살가(打漁殺家)≫의 주연을 맡아 관중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공연을 끝까지 관람한 모택동은 배우들을 격려하기 위해 분장실로 들어가서 강청과 악수를 하고 담소를 나누었다.
이로써 강청과 모택동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강청이 연안에 들어갔을 때 모택동의 두 번째 부인 하자진(賀子珍)은 서안에 있었다. 해외의 많은 사람들은 강청이 모택동의 집에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에, 심지어 하자진과 크게 다투었기 때문에 하자진이 서안으로 떠났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하자진이 서안으로 떠난 일은 강청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강청은 평생동안 하자진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강청은 다른 사람에 비해 용모가 출중한 편이었으며 연기도 뛰어났다. 지금은 그녀를 삼류 배우라 폄하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 당시 상황에서 그녀는 분명 연안과 섬북(陝北) 지역의 인기배우였다.
그녀는 연기 뿐만 아니라 노래도 잘하였으며, 모택동은 그녀가 공연한 ≪타어살가≫를 좋아하였다. 그녀는 글씨와 문장에도 뛰어났고 특히 해서를 잘 썼다. 말타기와 포커를 좋아하고 뜨개질과 화장을 잘 하였으나 사격은 좋아하지 않았다. 1938년 4월 10일 노신예술대학(魯迅藝術學院)이 연안에 창설된 후 강청은 그 대학의 연극과 지도원을 맡았다. 1938년 8월 강청은 군위원회 사무실 비서로 발령받아 모택동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모택동과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은 사이로 발전하였다. 모택동과 강청의 연애설이 퍼져 나가자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중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사람은 장문천(張聞天)이었다. 그는 하자진이 우수한 공산당원으로 빛나는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험난한 장정(長征)을 겪으면서 여러 차례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녀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모택동의 결혼이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문제이므로 누구도 간섭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에서는 모택동의 결혼 문제를 토론에 붙여 모택동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강청에 대해서는, "오로지 가정주부와 사무 보조원의 신분으로서 모택동의 생활과 건강을 책임지고 돌볼 뿐, 당내의 어떠한 직무를 맡거나 정치에 간여할 수는 없다"는 규정을 두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후에 '약법삼장(約法三章)'이라고도 일컬어진 규정이다.
그러나 이 약법삼장의 원문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전하는 것이 없다. 다만 여러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 몇 가지 전하기는 하지만 그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그 중 대만측에서 공개한 자료가 가장 신빙성 있는 것으로 보여 여기에 소개한다.
이것은 당시 국민당 군대가 연안을 공격했을 때 중국공산당 중앙 비서장이었던 왕약비(王若飛)를 조사하던 중 그의 일기에 기술되어 있던 "약법삼장"의 내용이다.
첫째, 모택동과 하자진의 부부 관계가 공식적으로 정리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는 한 강청은 모택동의 부인으로 행세할 수 없다.
둘째, 강청은 모택동의 일상생활과 건강을 책임지고 돌보아야 하며, 차후 그 누구도 당중앙에 이와 유사한 요구를 제기할 권리가 없다.
셋째, 강청은 모택동의 사적인 업무와 생활에만 간여해야 하며, 20년 동안 당내의 어떠한 직무도 맡는 것을 금한다. 당내의 인사 문제와 정치 활동에도 절대 참여할 수 없다.
그 후 그녀는 이 규정에 묶여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어떠한 정치활동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1938년 11월 강청은 24세의 나이로 자기 보다 21살이나 많은 모택동(당시 45세)과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에도 강청은 명분상으로는 여전히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였지만, 실제로는 집에서 모택동의 생활을 돌보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이때 강청은 행동을 극히 조심하면서 항상 미소를 잃지 않되 말을 삼갔다. 그리고 모택동을 위해서 스웨터를 짜고 맛있는 요리를 만들며 노래도 불러주었다. 집에 사람들이 찾아오면 모택동이 부를 때를 제외하곤 좀처럼 얼굴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그래서 모택동의 집을 방문하였던 어떤 외국 기자는 그러한 강청의 인상에 대하여, "그녀는 솔직하면서도 겸손하고 사리에 밝은 현모양처 같았다."라고 기술하기도 하였다.
뛰어난 배우 출신 답게 자기의 속마음을 철저히 숨긴채 얼마나 완벽하게 현모양처역을 잘 연기해 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강청은 모택동과 결혼하기 전에 이미 네 번의 결혼 경험이 있었으며, 황경과 동거할 때는 임신도 하였으나 상해에서 수술로 낙태시켰다. 그때 그녀는 배우 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원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모택동과 결혼한 후에 그녀는 빨리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 아이가 있으면 무료한 시간을 달랠 수도 있고, 더욱이 '모택동의 정실' 자격을 확실히 다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40년 8월 그녀는 마침내 딸 이눌(李訥)을 낳아 모택동의 사랑을 받으면서 '정실'의 지위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그 후 그녀는 재차 임신을 하였으나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낙태수술을 한 후 다시 임신중절 수술을 하였다. 1949년부터 강청은 모택동을 따라 다닐 수 있게 되었으며 요양차 소련에 다녀 오기도 하였다. 이는 강청에 대한 규제가 많이 완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그녀는 일을 하고 싶다면서 공식적인 직책을 요구했다.
당에서는 신중한 상의를 거쳐 그녀에게 중국공산당 중앙 선전부 영화처 부처장이라는 직함을 주었다. 이 직책은 매일 출근할 필요도 없을 정도의 한직이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이때부터 당내의 공식적인 직함을 가지게 되었으며, 또 이를 기점으로 정치에 대한 야망을 키워갈 수 있었다. 그후 그녀는 또 전국 영화 지도위원회 위원(이후 문화부 영화국 고문으로 변경)을 겸임하면서 영화 ≪무훈전(武訓傳)≫과 유평백(兪平伯)의 홍로몽간론(紅樓夢簡論)등 사상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생각되는 문예들에 대한 비판운동에 앞장섰다.
1956년 강청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모택동의 생활비서로 임명받았다.
말이 생활비서이지 그것은 실제로 부부장급의 간부직이었기 때문에 당내에서 그녀의 위상은 한층 높아졌다. 1963년 12월 12일과 1964년 6월 27일, 두 차례에 걸쳐 문예문제에 관한 모택동의 지시가 나왔다. 모택동은 이 지시에서 건국 이후 문예계의 사회주의적 개조의 성과가 보잘 것 없으며 문련 산하의 각 협회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수정주의의 변두리로 굴러떨어졌다고 단언하였다. 이 지시는 정치적 운신의 폭을 넓히려고 계획하고 있던 강청에게 절호의 기회로 다가왔다.
1964년 6월 5일 ~ 7월 31일 경극현대희콩쿠르(京劇現代戱觀摩演出大會)가 북경에서 거행되었는데, 이 기간에 강청은 전면에서 나서서 경극혁명의 기수로 행세하면서, "경극혁명을 논한다(談京劇革命)"라는 제목으로 공개 연설을 하였다.
1938년 8월 하순에 연안에 들어간 이후 27년만에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가진 그녀의 연설은 이후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위한 신호탄이 되었다. "나는 이번 콩쿠르에 축하를 보냅니다. 여러분 모두 많은 노고를 아끼지 않았는데 이는 경극혁명의 첫 번째 단계로 이미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앞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경극혁명의 현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여러분의 인식은 모두 같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경극혁명의 현대화에 대한 신념이 확고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주의 경제 기초를 보호하는 문예를 창조해야 합니다. 방향이 분명하지 않을 때는 방향을 잘 판단해야 합니다" 이때부터 강청은 경극혁명(京劇革命)이란 이름 하에 문예계의 정풍운동을 주도하면서 극좌적 사조를 선동하였다. 중간인물론, 사실주의 심화론, 시대정신 회합론 등을 비판하고, 연구적 가치가 있는 문예론들까지도 "자산계급적 문학 주장" "반혁명 수정주의적 문학 주장"으로 몰아 무자비한 비판을 가하였다.
그녀는 또 전국을 다니면서 노동자/농민/군인 등에 대해 묘사한 연극 작품을 골라내어 현대 경극으로 개편하도록 지시하고, ≪홍등기(紅燈記)≫ ≪사가홍(沙家洪)≫ ≪지취위호산(智取威虎山)≫ ≪기습백호단(奇襲白虎團)≫ ≪해항(海港)≫ ≪홍색낭자군(紅色娘子軍≫ ≪백모녀(白毛女)≫ 등을 우수한 경극 현대화의 모델로 선정하였다.
마침내 그녀는 '프롤레타리아 문예혁명의 기수'라는 칭호를 듣게 되었다. 경극의 현대화에 앞장서서 많은 성과를 올린 결과 그녀의 이름은 제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산동성 대표 명단에 올라갔다.
1964년 12월 20일 ~ 1965년 1월 4일 제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가 북경에서 거행되었을 때 그녀는 인민대표 자격으로 인민대회당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그녀는 정식으로 중국의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던 것이다.
"경극혁명을 논한다"는 연설 발표 이후 전인대 대표에 당선될 때까지 그녀는 정치상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 것은 그녀가 공개적으로 진행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북경과 상해를 빈번하게 왕래하여 장춘교(張春橋), 요문원(姚文元) 등과 접촉하면서 극히 비밀스런 정치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