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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성령 충만의 달☜
모든 생명의 양식(복음)을 등한히여기면, 사탄에게 영생의 기쁨을 빼앗기게 됩니다.
창9:1-7절) 문제가 있는 출발
우리는 어떤 일이처음부터 문제를 안은 채. 시작되는 것을 볼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두 젊은이가 성격이나. 신앙이나. 다른 여건들이 전혀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어서 결혼한다고 합시다. 이 부부는 처음부터 문제를 안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모는 이 결혼을 위하여 집이나. 가구나. 가전제품들을 장만할 것입니다. 또 결혼 당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들을 축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언가 문제를 가지고 출발하는 깊은 사정을 아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걱정이 태산 같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래, 문제는 있지만. 열심히 살아봐. 인생이 다 그런 거지*하는 마음으로. 그들이 아무쪼록 잘 살기만을 바랄 것입니다.
본문은 홍수가 다 지나가고. 이제 노아와 그의 식구들은 새로운 땅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노아와 그의 아들들을 축복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축복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평범한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한 마디 한 마디 속에는 무언가 깊은 사정을 아는 분만이 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이 새로운 세상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하십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씀들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완전히 기쁜 마음으로 축복하시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많은 문제를 안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 반, 염려 반* 심정으로 이들을 세상에 내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에는 세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세 가지의 축복은 세 가지의 문제점이기도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야생동물에게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셔서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야생동물의 사나운 본성은 그대로 둔다는 것입니다. 맹수는 단지 먼저 사람을 공격하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는 사나운 맹수들이 노아의 배 안에서 다른 짐승들이나. 사람들과 아주 평화롭게 공존한 사실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습니다. 맹수들은 배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사나운 짐승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맹수의 야성을 없애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 대신 나쁜 성질은 그대로 가지고 있되, 단지 먼저 공격하지는 않도록 두려운 마음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위험은 있다는 말입니다. 즉 맹수가 먼저 공격은 하지 않겠지만, 길을 잘못 든다 든지 맹수를 잘못 만나면, 죽는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축복 반 염려 반의 말씀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자손들에게 육식(肉食)을 허용하셨습니다. 처음에 창조하셨을 때에는 육식을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육식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한번 농사 지으면, 백 배, 천 배의 결실이 맺혔기 때문에 사냥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짓고 난 후에는 땅이 그 힘을 현저하게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굶는 사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굶으면, 어떻게 됩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때부터 살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용하신 것은 전에는 못 먹던 맛있는 고기를 먹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홍수가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땅은 힘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농사가 잘 안 될 것이기 때문에 육식이라도 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축복 반, 염려 반*의 말씀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약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이 새로운 세상은 사람들이 다시는 서로 미워하거나. 싸움을 해서 피 흘리는 일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고. 죽이고.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 흘린 자에게서 꼭 피를 찾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홍수 이전에는 사람을 죽인 자도 살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동생을 죽인 가인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살인자는 찾아서 처벌해도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살인자를 죽여도 좋다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보복을 허용하신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그런 자를 처형해도 좋다는 허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아무 문제가 없는 완벽한 세상에서 살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선제공격을 하지 않을 뿐이지, 맹수는 그대로 존재합니다. 즉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굶어 죽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살기 위해서 육식을 해야 하는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또 심지어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도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는 출발이지요. 이들은 처음부터 문제를 안고, 삶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사는데, 아무 문제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없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문제가 있는 중에서 우리를 살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문제를 안고, 시작하는 노아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Ⅰ.맹수가 너희를 두려워하리라
하나님께서 맹수에게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셔서 해치지 못하게 하셨다는 이야기는 너무 원시적인 말로 들립니다. 왜냐하면 요즘 사람들에게 맹수는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맹수들은 모두 동물원에서 사람들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총의 위력 때문입니다. 총이 나오기 전까지는 사자나 코뿔소 같은 맹수를 잡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새총이나. 막대기로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택시 운전사가 소변을 볼 때, 멧돼지로 오해하고. 엽총으로 사살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욥기에 보면 *누가 악어를 잡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악어가 사람을 피해 다니고, 사람들은 악어를 사육하고 있습니다. 만약 맹수들이 미쳐서 사람들을 공격한다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맹수의 공격을 안 받아봐서 잘 모릅니다.
그러나 시베리아나. 알래스카에서 얼음 대륙을 횡단하는 사람들의 옛날이야기를 들어 보면, 밤에 불을 피워 놓고 있으면, 온 천지가 두 개 씩 불빛으로 꽉 찬다고 합니다. 이리떼나 들개들의 눈이 빛나는 것이지요. 그 이리들이 덤벼들면, 사람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출애굽 때, 곧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맹수까지 풀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개구리 해병대를 보냈을 뿐인데도 애굽은 완전히 항복했습니다. 또 하나님이 파리들로 사람들을 공격하게 했을 때, 애굽 사람들은 견디지 못했습니다. 애굽의 정규군대가 파리를 이기지 못했어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짐승들이나 새나 미물들에게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사람들을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9:1-2절)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 손에 붙였음이라”
하나님께서는 맹수나 사나운 새들의 야성을 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사나운 맹수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단지 그들이 사람을 공격하지 못하게 막으셨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 속에 있는 본질적인 죄 성을 아셨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악한 자들입니다. 우리의 뼛속까지 악한 본성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이. 악한 본성 때문에 홍수로 이 세상을 멸망시키지는 않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홍수로 인간을 멸하시지 않으려면, 순간순간 인간의 죄 성을 차단해야 합니다. 그렇게 차단하는 것 중에 하나가 맹수들입니다. 인간이 범죄 할 때마다 맹수가 공격하고 자연이 사람을 덮치게 함으로써 인간의 죄가 더 자라지 못하도록 막으시겠다는 뜻이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숲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이 맹수들은 인간의 죄가 어느 수준으로 올라가면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먼저 공격하지 않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맹수들을 붙들고 계시며, 개구리와 파리와 모기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붙들고 계신 손을 놓으시면, 맹수는 언제든지 인간의 적이 될 수 있습니다. 숲속에 있는 맹수들은 미친개처럼 덤벼들 것이고 파리와 모기와 바퀴벌레가 인간들을 덮칠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시면, 모기도 몇 분 안에 몇 십 만 마리로 불어납니다. 메뚜기도 붙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억제하고 계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붙들고 계십니다.
8:22절)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연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 한 번도 기근이나 홍수가 없으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들을 완전히 멸망시킬 홍수나 지진은 없겠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성과 불확실성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항상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이 편안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손이 이 세상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맹수들의 입을 막고 있고, 수많은 개구리들이 강에서 올라오지 못하게 막고 있으며, 파리나 벌떼들에게 일정한 곳에서만 서식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편안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붙들고 계신 손을 잠시라도 놓으시면, 모든 것이 무질서와 혼돈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을 지속적으로 보내셔서 모든 것을 붙들어 놓습니다.
자연이 미치지 않고. 정상적으로 흘러가도록 하나님의 성령이 매순간 붙들고 계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1분 1초라도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서 거두신다면, 바로 그 순간에 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즉 소는 밭을 갈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주인을 받아 버리고, 돼지들은 전부 울타리에서 뛰쳐나올 것입니다. 닭들은 아이들을 쪼아대고, 개구리들은 육지로 다 기어 올라올 것입니다. 자연이 미치면. 사람들은 살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선조들은 자연의 이상변동에 대단히 민감했습니다. 그래서 개나리가 겨울에 피거나. 쥐들이 집단이주를 하면, 굉장히 두려워했습니다. 또 이상한 새가 나타나서 깍깍거리면서 며칠을 울어 대는 것을 불길한 징조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집작은 많은 경우에 들어맞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선조들은 성경은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자연이 어느 한구석에서 퍼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걷잡을 수 없는 붕괴가 온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을 거두고 계심을 자연의 작은 변동을 통해서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시니 겨울에 개나리가 피고 목련이 핍니다. 사람들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영을 거두실 때는 짐승들이나 미물들이 먼저 그것을 깨닫고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불안으로 미쳐 날뜁니다.
쥐들은 성령에 민감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영을 거두려 하시면, 쥐들이 전부 떠나거든요. 이런 현상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미물들도 하나님의 영으로 미치지 않고 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죄 성을 가지고 있으며, 말할 수 없이 교만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는 긍휼로 하나님의 영을 땅에 보내서 자연과 질서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영국이 망한 것은 *이신론(理神論)* 때문입니다. 이신론은 옥스퍼드의 천재들이 생각해낸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기는 하셨지만, 간섭하지는 않고. 저절로 굴러가게 만들었다는 이론입니다.
마치 시계공이 시계를 만들고. 테이프를 감아 놓으면, 저절로 가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절로 굴러간다는 이 이신론(理神論)이 영국을 망쳐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멀리 서서 구경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쉴 새 없이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고. 붙들어 주시고. 하나님의 성신(聖神)을 보내서 모든 일반은총을 통하여 자연이 미치지 않도록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라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암은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병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암을 억제하는 어떤 힘이 있어서 암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억제하는 힘을 제거하시면, 누구든지 암에 걸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계속 하나님의 영을 보내셔서 기본적인 질서를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고쳐 주시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맹수가 덤벼들지 않는 수준에서, 자연이 미치지 않고,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수준에서, 어느 정도의 건강이 보장되는 수준에서 하나님의 영을 보내어 이 세상을 붙들어 주겠다고 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만약 자신이 주의를 하지 않아서 맹수가 있는 곳에 간다든지, 혹은 무리하게 몸을 사용해서 병에 걸린다든지, 아니면 정도 이상으로 교만한 마음을 먹을 때에는 지체 없이 자연의 응징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 성을 홍수로 다스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자진해서 죄를 억제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을 때마다 홍수로 다스린다면, 결국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것을 하나님은 아셨던 것입니다.
홍수로 다스린다면 제2의 홍수, 제3의 홍수가 계속 일어나서 결국 어떤 인간도 살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을 이 땅에 보내서 자연 질서를 지켜 주시다가 죄가 어느 정도 이상이 될 때마다 하나님의 영을 거두심으로써 짐승들이 공격을 하게도 하고. 홍수가 나게도 하고, 기근이 나게도 해서 사람들이 겸손을 되찾게 하며, 죄가 갈 데까지 가지 않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언제 멸망합니까? 두려움이 없을 때, 멸망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두려운 것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으로 계속 기다리셨습니다. 노아 홍수 이전에는 가인이나 라멕 같은 살인자도 살려 주시면서 사랑으로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떻게 했습니까? 갈 데까지 가버렸습니다. 즉 악해질 만큼 악해 졌고. 더 이상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껏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순간순간 징계하심으로써 인간이 극단적인 죄악까지는 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숲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맹수는 완전히 변화된 맹수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공격하지 못하게 막고 계실 뿐입니다. 하수구에 있는 수많은 모기들도 하나님께서 막고 계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교만해지면, 하수구의 모기가 급증할 것이며, 공격할 것입니다.
그때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 영을 우리에게서 거두고 계신 때인 줄 아십시요. 사람들이 인정사정도 없고, 눈물도 없이 서로 짐승처럼 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능력 없이 인간은 이 세상에서 한순간도 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밥 먹고 직장생활 하고 숨 쉬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이 자연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며, 수많은 미물들과 맹수들을 지켜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이 아닙니다.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사역은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의 속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이것까지는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실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Ⅱ.육식의 허용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두 번째로 축복하신 내용은 육식의 허용입니다.
9:3절)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아마 육식을 좋아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이 명령이 너무나도 당연하며,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육식을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사람들은 살아 있는 짐승을 잡아먹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모두 사람들의 친구였지. 식량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어제까지 같이 놀던 개나 닭이 밥상에 오르는 것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개다리를 뜯으면서 *왜 싫으냐? 이거 굉장히 고단백질이야*하지요. 하지만 애들은 어제까지 같이 뛰어 놀던 닭이 해체되어 양념이 돼가지고 밥상에 올라와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에게는 개나 닭이 먹는 대상이 아니라,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애들은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친구로 생각하지. 양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키우던 개가 팔려가는 날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웁니다.
개가 어른들에게는 영양의 보고가 될지 모르지만. 애들에게는 친구입니다. 친구가 팔려가는 데 어떻게 안 울 수가 있습니까? 최초의 사람들은 살아 있는 짐승을 잡아먹는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때는 땅이 엄청 위력을 발휘해서 한번 농사를 지으면 백 배, 천 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살아 있는 것을 잡아먹을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이 죄를 짓고 난 후에는 농사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땅이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식구들이 겨우 얻을 정도밖에는 열매가 맺히지 않았고, 그나마 흉년이 들면, 굶어 죽는 사람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무엇을 보았습니까? 맹수가 다른 짐승들을 잡아먹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때 섬광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저렇게 해서도 살 수 있구나. 다른 짐승을 잡아서 먹을 수도 있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잡아먹어 보니까 별로 맛이 없어요.
그런데 구워서 먹으니까 맛이 기가 막힙니다. 거기에 소금을 치고. 참기름을 치니까 더 괜찮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홍수전에 육식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육식을 허용하신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것은 축복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양보조항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앞으로도 식량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홍수는 끝나고. 새로운 천지가 열렸지만, 땅은 그 힘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며, 최소한의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열매밖에 맺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식이라도 해서 먹고 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피까지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식을 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양보조항이기 때문에 생명의 존엄성까지 파괴하면서 육식을 즐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식은 죄의 결과로 생긴 기근이나 가난 때문에 허용하신 것이지, 사람들이 당연히 동물들을 다 잡아 먹을 권한이 있다거나. 몸보신을 위해 무엇이라도 먹어도 된다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형편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먹을 것도 흔치 않았는데, 고기가 어디 있습니까? 고기 먹을 기회는 굉장히 드물었어요. 어떤 때는 국에 된장이 덜 풀어진 것을 고기 덩어리인 줄 알고 힘을 다해서 집었다가 실망한 추억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동네에 잔치가 있어서 돼지라도 한 마리 잡으면, 그때야말로 영양보충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지요. 그것을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피는 마시지 말아야 합니다. 영양보충은 해도 좋지만. 육식을 즐기고. 그것을 취미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돼지야 우리가 너를 잡아먹는 것은 즐거움 때문이 아니란다. 살려다 보니까 어쩔 수 없구나. 좌우간 우리를 위하여 죽어 주어서 정말 고맙다* 하는 심정으로 먹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보신탕은 가난한 서민의 유일한 영양보충이었습니다. 이것을 외국인들이 이해할 순 없지요. 가난한 서민들의 사정을 그들이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최초의 사람들과 짐승들에게 채식만 허용하셨습니까? 이것은 먹는 문제에서 공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서로 나누어 가지는 교제가 되어야지. 공격이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사람과 짐승들이 서로 공격하지 못하도록 전부 채식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성도의 교제였습니다.
아이들을 보십시오. 아이들은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하루 종일 친구들이나 개와 더불어 놉니다. 어른들은 개를 보면, 복날을 떠올리지만. 아이들은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하루 종일 놀아요. 왜냐하면 먹는 것보다 교제가 더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만약 우리가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생활은 엄청나게 풍성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에너지와 정력을 먹는 문제에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옳은 일일까? 우리는 먹지 않으면, 무엇보다 사람을 만날 일이 없고 교제할 일이 없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교제가 먹으면서 이루어지니까요. 그러나 만약 먹지 않고.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수 있다면, 그 교제가 얼마나 풍성하겠습니까?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몸의 일부분은 곧 혀라고 생각합니다. 이 혀가 얼마나 예민해졌는지. 생선회의 신선도에서 육류의 질긴 정도, 그리고 탕의 매운 정도까지 아주 정확하게 평가를 해냅니다. 그래서 우리 몸에서 가장 요물스러운 부분이 이 혀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대접한 음식을 혀로 맛보았는데, 별로 시원치 않을 때, 인격 전체가 불쾌해지는 것은 이 혀가 얼마나 요물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제일 엄한 벌을 받아야 할 부분이 곧 이 혀일 것입니다.
이 혀로 온갖 좋은 것을 다 누리고 이 혀로 온갖 못된 말을 다 하니까요. 불집게로 이 혀부터 뽑힐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용하신 것은 양보조항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기근 때문에 도저히 농사가 안 되니까 굶어 죽지 않도록 가축이라도 잡아먹으며 살라는 뜻이지, 이 혀로 온갖 맛 좋은 것을 다 구별하여 이 식당 저 식당 돌아다니면서 혀를 최대한으로 예민하게 만들어서 혀로 사는 인생을 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2:22-24절)...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어마나 더 귀하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채식이냐, 육식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먹는 문제를 극복하고. 본연의 자세를 되찾느냐? 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사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먹을 것을 먼저 염려하십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을 살아도 기쁨으로 사십시오. 넉넉하게 사십시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Ⅲ.살인자를 처벌하라
하나님께서는 홍수 후에 인간들 사이에는 여전히 살인이 있을 것인데, 살인한 자는 반드시 처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9:5-6절)네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홍수 심판 후에도 인간들은 여전히 미워하고. 죽이리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살인자는 반드시 찾아서 처벌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보복이 허용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합법적인 절차를 통하여 처벌하라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곧 이 명령에서부터 정부가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정권이 생기게 된 것은 단순히 사회계약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해결되지 않은 분노가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자연 상태로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서로가 보복하고. 공격해서 이 세상은 피투성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개인적인 보복을 하지 못하게 하고, 피 흘린 자를 합법적으로 처벌하게 하기 위해서 이 사회에 정부를 세우게 하시고. 공권력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권을 잡은 자가 하는 일이 모두 옳다는 뜻이 아니라, 정부를 세워서 사람들의 악한 본성을 억제하고. 개인이 개인에게 사적으로 보복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부에 대하여 지나치게 환상적인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대권을 잡으면, 갑자기 이상적인 사회가 오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환상입니다.
또 중소기업 청이 생겼다 해서 중소기업이 많은 혜택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환상입니다. 정부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능력이 없습니다. 단지 사람들 속에 있는 악한 본성을 제어해서 강한 자가 개인적인 야욕으로 약한 자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이 정부의 기능입니다.
어떤 정권도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 적이 없습니다. 행복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지, 정권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회적인 제도를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죄 성을 통제하심으로써 이 세상이 스스로 멸망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정부가 없으면, 그야말로 무정부장태에 빠져서 사람의 악을 저지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되고, 그러면 또 홍수가 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을 잡은 손에 칼을 주셔서 악이 어느 수준을 넘지 못하도록 막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이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며, 더 많은 죄를 짓는 수단으로 정권을 전락시켰습니다. 그때의 정부는 하나님의 사자가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입니다.
배에서 나온 노아는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또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예상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우리 인간의 죄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홍수로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멸망 했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의 문제를 안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노아에게 다시는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을 테니. 배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배를 버려라. 그 배는 다시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인간은 또 죄를 짓겠지만. 다시는 홍수로 인간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 성에 어떤 장치를 하셨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해결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임시방편과 응급처치에 불과했습니다. 위험한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자연이 질서를 지켜 줄 것인가, 둘째는 사람이 사람을 지켜 줄 것인가. 셋째는 양식이 모자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충분히 주의하기만 하면. 맹수에게 당하는 일은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인간의 마음에 대하여는 사회의 공권력을 통해 서로 피 흘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양식이 떨어지면, 살아있는 짐승을 잡아서 생명을 유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의 이 축복은 완전한 문제의 해결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를 뻔히 보시면서도 임시방편으로 막으시고, 그들이 살 수 있도록 축복하신 것이지요. 그러면 참된 문제의 해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께서 오셔서 그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셔야 합니다. 노도(怒濤)같이 쏟아지는 홍수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끄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한 방울이 하나님의 진노를 완전히 막았습니다. 그 전의 것은 임시방편이자 응급처치로서 완전한 해결방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건강한 몸이 아닙니다. 지식이나 명예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성령을 주셔서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한꺼번에 제일 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곧 노아 홍수 때입니다. 지옥에 가보면, 아마 홍수 동창회라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2차 대전 동창회, 한국전쟁 동창회도 있지만, 노아 홍수 동창회가 지옥에서 가장 막강한 파워를 행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으로도 하나님의 용서를 끌어낼 수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용서받게 했으며,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하나도 없도록 완전히 치료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의 피가 나의 모든 죄를 용서했다는 것을 단순히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 용서를 여기서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누리는 사람은 자기 모습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집니다. 즉 키가 작은 것, 늙은 것, 학력이 짧은 것, 전공이 맘에 들지 않는 것, 우리 집이 가난한 것, 우리의 모습 전부 받아들여집니다. 다 용납이 되고, 기쁩니다. 전에는 아버지가 미워서 지나갈 때마다 일부러 아버지 구두를 밟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진짜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아버지를 끌어안고. *사랑해요 아버지*라는 말이 입에서 나와요. 이유는 모르지만 무조건 사랑합니다.
또 전에는 뚱뚱한 몸을 보고 *이게 사람인지 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학대하고 괴롭혔는데, 이제는 자기가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뚱뚱해도 좋아, 풍성하잖아!* 이것이 진정으로 용서받은 자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해결 방법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고, 존귀한 성령을 우리 안에 퍼부어서 우리를 새 사람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속에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이 불타도 성령의 사람은 타지 않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머리털 하나, 옷 하나 탄 냄새 없이 안전하게 보존될 것입니다. 우리 집 위에 있는 기 왓 장 전부가 마귀라 하더라도, 모든 마귀가 밤새도록 소리 지르면서 공격한다 하더라도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나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굶어도 살아요. 모세가 40일 주야를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산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양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모세가 40일 주야를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하나님과 교제한 것은 우리가 천사보다 탁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는 안 죽습니다. 우리는 코로나 재앙 장기화로 침체되어서 힘이 없는 것이지, 굶어서 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스스로 *나는 굶었다. 그래서 힘이 없다. 그러므로 쓰러져야 되겠구나*하고 쓰러지면. 몰라도 절대 안 쓰러집니다. 결혼하는 날에 밥을 많이 먹는 신부는 문제가 있습니다. 신부는 그날 아무것도 안 먹어도 기뻐요. 너무나 기쁘기 때문이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습니다.
성령이 내 속에 계시면 굶었는지. 안 굶었는지. 잘 모릅니다. 막 날아가고 싶습니다. 절대로 타 죽지 않습니다. 유황불이 쏟아져도, 지옥 한가운데서도 안 타 죽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성령이 주시는 일반은총으로 삽니다. 그 일반은총을 조금이라도 거둔다면, 이 세상은 완전히 혼돈과 지옥으로 변할 것이며, 사람들은 미쳐 날뛰는 짐승과 곤충의 공격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온 우주와 자연을 붙들고 계신 성령이 우리 속에 퍼부어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은혜로 살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참된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그것이 곧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축복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우리는 먹는 문제에 매일 수 있습니다. 또 정부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한번 큰소리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영(靈)이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분이 역사하시도록 기회를 드리십시오. 내 속에 있는 성령이 얼마나 강한 분이며 전능하신 분이신지 드러내실 기회를 드리십시오. 한번 경험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 성령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에 똥배를 채우려고 하고. 이 세상의 권력을 잡으려 하고. 다른 것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이 내 속에 계시면.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히 복되게 살게 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죄악이 많아도, 아무리 질병이 날뛰고. 매일 사고가 많다 하더라도 성령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아-멘
찬송가 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율법서(모세 오경)
▣ 예배 7월 17일(주일)
주일 예배와 헌금 봉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천국시민된 특권과 은혜감사
*매일 새벽 4-5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집시다.*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오늘의 기도제목 ▣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주님! 셀(cell)공동체, 예배공동체, 선교공동체로 부흥.성장케 하옵소서.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하신 주님! 내게 맡겨주신 재물과 나의 생명 주님께 드려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 교갱원의 엄격한 규칙을 지켜 낙오자 없이 모두 성숙한 복된 신자가 됩시다. ▣ 癸卯年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세워 성장하는 해* ※후반기는 필(必)히 행정서식을 작성제출해야 교갱원소속 A급셀(cell)로 새출발 할 수 있습니다. 교갱원카페. 카톡.천국백성이 은혜받고 감사하며, 기도로 화답하는 것은 필수.기본상식. 후원계좌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내용)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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