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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좌지기(宥坐之器)
항상 곁에 두고 보는 그릇이라는 의미로, 마음을 추스르고 가지런히 하기 위해 스스로 마련한 기준을 이르는 말이다.
宥 : 너그러울 유(宀/6)
坐 : 앉을 좌(土/4)
之 : 갈 지(丿/3)
器 : 그릇 기(口/13)
옛날의 임금들이 너무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 좌석의 오른쪽에 비치해 두고 항상 보던 기기(敧器, 기우는 그릇)로, 마음을 바르게 하기 위해 스스로 정한 기준을 비유하는 말이다.
욕심을 경계하는 선인의 가르침은 많지만 이를 잘 따르기는 어렵다. 사람의 욕심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농서지방을 얻은 뒤 촉 땅까지 넘본다는 득롱망촉(得隴望蜀)이나 겨를 핥다 쌀까지 먹는다는 지강급미(砥糠及米)가 잘 나타낸다.
만족을 알면 욕되지 않는다고 지족불욕(知足不辱)이라 가르쳐도 작은 것을 욕심내다 소탐대실(小貪大失)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기 마련이다.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고 깨우쳐주는 계영배(戒盈杯)라는 것이 있다.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란 뜻대로 절주배(節酒杯)라고도 한다. 술을 가득 채워서 마시지 못하도록 어느 정도까지 차면 술잔 옆의 구멍으로 새어 나가게 만들었다.
조선 후기의 거상 임상옥(林尙沃)이 한 도공이 만든 계영배를 늘 곁에 두고 과욕을 다스린 끝에 큰 재산을 모았다는 얘기가 최인호 작가의 장편 상도(商道)에 자세히 소개돼 유명해졌다.
유좌지기는 자리의 오른쪽에 두어 경계하는 기구이다. 여기서 유(宥)는 오른쪽을 가리키고, 순자(荀子)의 유좌편(宥坐篇)에 설명이 있다. 유좌지기는 다른 말로 기기(敧器)라고도 한다. 여기서 기(攲)는 기운다는 뜻으로, 물이 가득 차면 뒤집어지고, 비었을 때는 조금 기울어지며, 절반 정도 차면 반듯하게 놓이는 그릇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왕이 앉는 자리의 오른쪽에 기기를 놓고 보면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알맞게 처신하도록 경계하는 데 사용하였다. 군주가 중용(中庸)의 미덕을 갖추기를 바라는 궁리라고 하겠다.
앉은 자리의 옆에 두고 항상 마음을 다스리는 그릇이란 이 성어도 계영배와 같은 구실을 한다. 비거나 차면 기울고 엎어지지만 양이 적당하면 바로 서 있는 그릇이다. 옛 군주들이 자리 가까이 두어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것을 스스로 경계했다고 한다.
순자(荀子)의 유좌(宥坐)에서 유래했는데 공자가어(孔子家語) 삼서(三恕)편에도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공자가 노환공(魯桓公)의 사당을 찾았을 때 의례용 기구에 대해 묻자 사당지기가 항상 곁에 두고 보는 그릇이라 말했다.
孔子觀於魯桓公之廟, 有敧器焉.
공자관어노환공지묘, 유기기언.
孔子問於守廟者曰, 此爲何器.
공자문어수묘자왈, 차위하기.
공자(孔子)가 노(魯)나라 환공(桓公)의 사당을 찾았다가 기기(敧器)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사당지기에게 물었다.“저것은 무슨 그릇입니까?”
守廟者曰, 此蓋爲宥坐之器.
수묘자왈, 차개위유좌지기.
“옛날의 임금들이 너무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 좌석의 오른쪽에 비치해 두고 항상 보던 기기입니다.”
孔子曰, 吾聞宥坐之器者, 虛則欹, 中則正, 滿則覆.
공자왈, 오문유좌지기자, 허칙의, 중칙정, 만칙복.
공자가 말했다.“나도 유좌지기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속이 비면 기울고 알맞게 물이 차면 바로 서며, 가득 채우면 엎질러진다고 하더군요.”
孔子顧謂弟子曰, 注水焉.
공자고위제자왈, 주수언.
弟子挹水而注之, 中則正, 滿則覆, 虛而欹.
제자읍수이주지, 중칙정, 만칙복, 허이의.
공자가 제자를 돌아보며 말했다.“물을 따라 보아라.”제자가 물을 들어 따랐는데, 정말 알맞게 물이 차니 바로 섰고, 가득 차니 엎질러졌으며, 비니 기울어졌다.
孔子喟然而嘆曰, 旴. 惡有滿而不覆者哉.
공자위연이탄왈, 우. 악유만이불복자재.
공자가 탄식하며 말했다.“아, 가득 차 엎질러지지 않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子路進曰: 敢問持滿有道乎?
자노진왈: 감문지만유도호?
자로(子路)가 나서서 물었다.“감히 묻겠습니다. 가득차도 엎어지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까?”
子曰: 聰明叡智, 守之以愚;
자왈: 총명예지, 수지이우;
功被天下, 守之以讓;
공피천하, 수지이양;
勇力振世, 守之以怯;
용역진세, 수지이겁;
富有四海, 守之以謙.
부유사해, 수지이겸.
此所謂損之又損之道也.
차소위손지우손지도야.
공자가 말했다.“아무리 지혜로워도 우둔한 모습을 지켜야 하고, 공훈이 천하를 덮을 정도로 커도 겸양의 미덕을 지켜야 하고, 아무리 용감하고 힘이 세도 겁먹은 모습을 지켜야 하고, 아무리 천하를 다 가질 정도로 부자라고 해도 겸손한 모습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덜고 또 덜어내는 도라는 것이다.”
이를 테면 스스로 자기경계를 실천한 것인데, 직위가 오를수록 뜻을 줄인다, 벼슬이 높아질수록 마음을 낮춘다, 녹이 많아질수록 넓게 베푼다는 게 그의 정한 기준이었다고 한다. 지나친 것은 오히려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거니와 절제 없는 과도한 욕심이 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다.
기기는 기울게 만들어져 있어 세우기 어려운 그릇인데, 선인들은 이 기기를 놓고 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알맞게 유지하여 너무 지나치거나 부족하지 않게 조절하는 경계로 삼았다.
재산을 좀 모으면 뽐내고 싶어 거들먹거리는 사람을 많이 본다. 그런 위인일수록 필요한 곳에 잘 쓸 줄 몰라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다. 갑질로 패가망신하는 예가 최근에도 여럿 나왔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조금 힘 있는 자리에 오르자마자 완장권력을 뽐내기 위해 아랫사람을 괴롭힌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권력이 영원할 줄 안다.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이 끊임없이 흔들린다. 마음, 지성, 치타, 에고는 아트만에 대하여 살펴보자. 마음, 지성, 치타, 에고는 아트만은 모두 마음의 다른 표현이다. 마음이 교만함에 물들어 자기를 최고로 여길 때, 그 마음은 에고(自我)로 나타난다. 에고는 마음의 양식 중 하나다. 마음이‘이 세상에서 내가 최고다. 누구든지 내 앞에 서면 별볼일 없는 인물이다’하고 말한다면 그 때의 마음은 곧 에고이다.
반면, 마음이 곰곰이 심사 숙고할 때 그 마음은 지성이다. 그리고 마음이 아무 방향 감각도 없이 우왕좌왕할 때, 어디에도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이리저리 헤맬 때 그 마음은 치타라고 불린다. 지성은 방향 감각을 가진 마음이다. 과학자가 실험실에 앉아서 원자 분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그 마음이 지성이다.
그리고 마음이 아무 목적 없이 젖어 있을 때, 백만장자나 대통령이 되는 망상에 젖어 있을 때 그 마음은 치타이다. 이 때 그 마음은 마구잡이로 물결칠 뿐, 질서도 없고 조직적이지도 않다.
반면, 마음이 질서정연한 생각의 체계를 따라 움직이면 그 마음은 지성이다. 그리고 아트만은 아무 생각 없이 고요한 상태에 있을 때, 즉 우주와 내가 하나(梵我一如)라는 진리를 깨달아 고요한 상태에 있을 때의 마음이다.
바다에 파도가 친다고 하자. 그대는 이 파도가 바다와 따로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바다가 요동칠 때 우리는 파도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아트만이 동요되어 술렁거리면 그것이 마음이다. 그리고 마음이 잠잠해지면 그것은 다시 아트만이 된다. 그러므로 아트만이 동요된 상태가 마음이며, 마음이 고요하게 평정된 상태가 아트만이다.
마음, 지성, 치타, 에고 및 아트만은 모두 마음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마음, 지성, 치타, 에고 및 아트만을 모두 가질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을 성(性)이라 하고 이 성의 상태에서는 아무런 마음(관념)도 없기에 고요하다.
그것을 깨달음의 경지라고 하고, 예수는 성령을 찾은 천국의 삶이라 하고, 석가는 모든 것은 무(無)임을 깨달아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는 열반의 경지라고 말하고, 힌두교에서는 모든 개인에 내재하는 원리인 아트만이라고 한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진아(眞我)이다. 그러나 여기에 마음이 작용하면 그것이 에고가 되고, 치타가 되며, 때로는 지성이 되는 것뿐이다.
인간의 마음은 갈대와 같이 끊임없이 흔들린다. 수많은 서양의 철학자 및 공자, 맹자 등 수많은 동양의 사상가들은 이렇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하여 이 이야기에 나오는 유좌(宥座) 그릇 같이 어떤 좌우명을 삼아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인 성(性)에서 인간의 마음은 아무런 흔들림이 없는데 인간의 욕심이 자신의 마음을 계속 흔들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간파한 사람들이 바로 예수, 석가, 노자 및 수많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다.
예수와 석가가 말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다. 인간의 본질일 뿐이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면 마음의 흔들림이 사라진다. 혼자 있을 때는 고요하고, 누구와 같이 있을 때는 어울려(和) 놀고, 어떤 일을 할 때는 신나게 그 일과 놀 뿐이다.
인간의 본질은 신나게 어울려 노는 것인데,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은 삶을 번뇌하고 싸우며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본인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일 뿐이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경(詩經)의 상송(商頌)에 있는 장발(長發)이라는 시를 감상해 보자.
濬哲維商 長發其祥.
洪水芒芒 禹敷下土方,
外大國是疆 幅隕旣長.
有娀方將 帝立子生商.
깊은 지혜 있는 상나라 오래도록 상서로움 나타났도다.
홍수가 크게 넘쳐흐를 때 우 임금이 천하의 땅을 다스려,
밖의 큰 나라들을 정리하니 강토는 넓고도 넓었도다.
유융씨 따님 다 자랐으니 하늘 님이 아들 세워 상을 낳으셨네.
玄王桓撥 受小國是達 受大國是達.
率履不越 遂視旣發,
相土烈烈 海外有截.
설 임금 늠름하고 굳세어 작은 나라 맡아도 잘 다스리고 큰 나라 맡아도 잘 다스리셨다네.
예법 따라 어김 없으시고 행동에 나타내 보이시며,
그의 손자 상토도 공적이 빛나 멀리 나라 밖까지 평정하셨네.
帝命不違 至于湯齊.
湯降不遲 聖敬日躋,
昭假遲遲 上帝是秪,
帝命式于九圍.
하늘 님 명에 어김이 없고 탕왕에 이르러서 성취하셨네.
탕왕께서 때마침 태어나시고 성스럽고 경건함을 날로 더하여,
오래도록 신의 강림 비시고 하늘 님 따르고 공경하시어,
하늘 님 명으로 세상에 모범 되셨네.
受小球大球 爲下國綴旒 何天之休.
不競不絿 不剛不柔,
敷政優優 百祿是遒.
작은 법 큰 법 모두 받아 아래 나라에 모범 되시고 하늘의 미덕을 다 누리셨다네
다투지도 탐내지도 않고 억세지도 연약하지도 않아
너그러이 정사를 베푸시니 온갖 복록이 다 모여든다네
受小共大共 爲下國駿厖 何天之龍.
敷奏其勇 不震不動,
不戁不竦 百祿是總.
武王載旆 有虔秉鉞,
如火烈烈 則莫我敢曷.
작은 법도 큰 법도 모두 받아 아래 나라 품어 주시어 하늘 님의 은총을 누리셨다네
널리널리 용맹을 떨치어 떨거나 동요하지 않으시고,
놀라지도 두려워도 아니하시어 온갖 복록 다 차지하셨네
용맹하신 탕왕 깃발 세우고 위무도 당당히 큰 도끼 잡고,
불같이 타오르는 그 모습 아무도 감히 당할 자 없도다.
苞有三蘖 莫遂莫達 九有有截.
韋顧旣伐 昆吾夏桀.
昔在中葉 有震且業,
允也天子 降于卿士,
實維阿衡 實左右商王
한 그루터기에 난 세 개의 싹 순조롭게 자랄 수가 없어 온 세상이 다스려져 안정 찾았네
위나라 고나라 치신 다음 곤오와 하나라 걸왕을 치셨다네
옛날 은나라 중엽에 와서 두렵고 위태로운 일이 있거늘,
진실로 하늘이 내신 아들께 훌륭한 신하 내려주시니,
그가 바로 아형인 이윤이니 상나라 임금을 보좌하셨다네.
탕 임금의 태생과 업적을 기리는 노래이다.
법과 원칙에 의해서 살아야 하는 현대 및 미래사회에서 우리 자신의 모든 모순과 갈등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의식을 끌어올리는 의식혁명일 뿐이고, 그 외에는 우리의 모순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의식수준을 끌어올리면 딱 그만큼의 모순과 갈등이 사라진다.
사회나 국가가 각 개인의 행복을 보장하여 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행복은 우리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그 행복은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행복은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다만 그것을 다시 찾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의식혁명이고, 누구든지 깨달음이라는 최고의 의식수준에 도달하면 예수와 석가가 말하는 천국의 삶, 열반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 宥(유)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갓머리(宀; 집, 집 안)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권하다'의 뜻을 가진 有(유)로 이루어졌다. 음식을 권하며 '편히 있게 하다'에서 '용서하다'의 뜻도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너그러울 관(寬)이다. 용례로는 죄를 너그러이 용서함을 유죄(宥罪), 서로 용서하고 화합함을 유화(宥和),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함을 서유(恕宥), 죄인을 용서하여 놓아 줌을 유석(宥釋), 죄를 용서하여 없애 줌을 유제(宥除), 잘못을 용서하여 방면함을 유면(宥免), 은혜를 베풀어 관대하게 다룬다는 은유(恩宥) 등에 쓰인다.
▶ 坐(좌)는 회의문자로 머무는 곳을 뜻하는 土(토)와 마주앉은 사람을 나타내는 从(종; 두 사람)의 합자(合字)이다. 사람이 마주보고 멈춘다는 뜻이다. 전(轉)하여, 그냥 앉아 있다, 또 앉은 채로 있다의 뜻으로 쓰인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설 립/입(立), 누울 와(臥)이다. 용례로는 함선이 암초에 얹힘을 좌초(坐礁), 책상 다리를 하고 앉음을 가부좌(跏趺坐), 팔기 위하여 물건을 늘어놓은 널조각을 좌판(坐板), 간섭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음을 좌시(坐視), 우물 속에 앉아 하늘을 쳐다본다는 좌정관천(坐井觀天), 자리에 편안히 앉지 못한다는 좌불안석(坐不安席), 서로 대립하여 겨루고 대항함을 각립대좌(角立對坐), 앉아서 천 리를 본다는 좌견천리(坐見千里),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린다는 좌이대사(坐而待死), 옷매무시를 바로 하고 단정하게 앉음을 정금단좌(正襟端坐), 창을 베고 갑옷을 깔고 앉는다는 침과좌갑(枕戈坐甲), 섶나무 위에 앉고 쓸개를 걸어 두고 맛본다는 좌신현담(坐薪懸膽), 사귐을 끊어서 자리를 같이하지 아니함을 할석분좌(割席分坐), 바늘 방석에 앉은 것처럼 몹시 불안함을 여좌침석(如坐針席), 혹은 앉기도 하고 혹은 서기도 함을 혹좌혹립(或坐或立), 마루 끝에는 앉지 않는다는 좌불수당(坐不垂堂), 어떤 자리에 오래 붙어 앉아서 다른 데로 옮기지 아니함을 좌지불천(坐之不遷), 가만히 앉아서 성패를 관망함을 좌관성패(坐觀成敗), 밤중부터 일어나 앉아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린다는 좌이대단(坐以待旦), 벌지 않고 먹기만 하면 산도 빈다는 좌식산공(坐食山空) 등에 쓰인다.
▶ 之(지)는 상형문자로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이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나 어조사로 차용한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딸이 시집가는 일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 즉,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함을 이르는 말 지남지북(之南之北) 등에 쓰인다.
▶ 器(기)는 회의문자로 噐(기)의 본자(本字)이다. 犬(견; 개)은 고대(古代)의 식료(食料)로서 무덤에 묻혀지는 일이 많았다. 개고기를 네 개의 접시에 쌓은 모습으로 먹을 것을 제각기 덜어 먹는 접시나 그릇을 뜻한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그릇 명(皿)이다. 용례로는 전쟁에 쓰이는 온갖 기구를 무기(武器), 호흡 작용을 맡은 기관을 호흡기(呼吸器), 제사 때에 쓰이는 그릇을 제기(祭器),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는 데 쓰는 연장을 흉기(凶器), 사람의 덕량과 재능을 기량(器量),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대기만성(大器晩成), 국가를 다스릴 기량이 있음을 간국지기(幹國之器), 깨어진 그릇 조각을 서로 맞춘다는 파기상접(破器相接), 마룻대와 들보로 쓸 만한 재목이라는 동량지기(棟梁之器), 군자는 일정한 용도로 쓰이는 그릇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군자불기(君子不器), 이미 망가진 일을 고치고자 쓸데없이 애를 씀을 이르는 파기상종(破器相從), 큰 그릇을 작은 데에 쓴다는 대기소용(大器小用), 쥐를 잡으려다가 그 옆에 있는 그릇을 깨뜨릴까 염려한다는 투서공기(投鼠恐器), 사람의 기량은 깊고 깊어서 헤아리기 어려다는 기욕난량(器欲難量)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