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90
2월3일[연중 제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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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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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hKX6tZ1Pj0k (장동현 미카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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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이 어둡고 혼란스러운 시대, 갈팡질팡하는 우리에게 히브리서 저자는 삶의 지침이 되는 몇 말씀을 꼭 짚어 강조하고 있는데,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어찌 그리 가슴에 팍팍 와닿는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형제 여러분, 형제애를 실천하십시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인연을 접하게 됩니다. 예의 바르고 사랑스럽고 호의적인 사람들을 위해서는 누구든 기쁘게 맞이하며 대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까칠하고 불편한 존재, 남루하고 부담스런 대상을 환대하고 손님 대접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이런 면에서 노숙인들, 부랑인들을 최고의 손님, VIP 손님으로 여기며 환대하는 분들은 곧 천사들, 더 나아가서 주님을 대접하는 분들이 분명합니다.
“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해 주고, 학대받은 이들을 여러분 자신이 몸으로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
이런저런 이유로 갇힌 분들, 겨우 자유의 몸이 된 분들을 만납니다. 갇힌 세월 6개월, 1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분들이 겪는 고초나 트라우마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평범한 일상과의 단절,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단절이 가져다주는 고통은 엄청난 것입니다. 학대받은 사람들이 겪는 충격과 상처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그분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가 좀 더 간절해질 것을 히브리서 저자는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 욕심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세상만사 모든 기준이 돈이 되고 말았습니다. 돈이 모든 것 위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돈 없으면 어딜 가나 찬밥 신세에다가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비인간적인 물질만능주의, 극단적 황금만능주의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사방천지를 둘러봐도 의지할 곳 하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아군은 단 한 명도 없고 적군들만 수두룩합니다. 그러니 세상에 대한 기대를 줄이고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로 고정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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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TJK8oav8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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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을 인감의 힘으로 없앨 수 없는 이유>
많은 심리 프로그램에서 어렸을 때의 죄책감을 잊고 새롭게 살아가도록 권고합니다. 그러나 죄책감을 자기 힘으로 없앨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보내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죄책감도 인간의 능력으로 생기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것을 없애는 힘도 인간에겐 없습니다.
영화 ‘타임머신’(2002)에서 남자 주인공은 애인에게 청혼할 때 강도에 의해 애인이 총에 맞아 죽게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주인공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애인을 살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타임머신을 만들어 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리고 빨리 장소를 이동해 애인이 강도를 만나지 않게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차에 치여 죽습니다. 계속 과거로 돌아가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애인은 죽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며 인간이 하려는 노력이 넘을 수 없는 선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운명’입니다. 이 운명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죄책감은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양심에 의해 발생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문제는 이 죄책감을 자기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이미 발생한 사건을 없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지난 50년간 모은 130톤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24시간을 홀로 지내는 할머니 사연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교통사고를 7번이나 당하고도 여전히 위험천만한 8차선 도로에서 파지를 줍습니다. 파지를 가득 실은 할머니가 향한 곳은, 어마어마한 쓰레기 담벼락 앞입니다. 할머니가 쌓은 쓰레기를 담은 자루가 자그마치 길이 65미터, 높이 1미터 62센티에 달했습니다. 아흔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쌓았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크기입니다. 심지어 거대 쓰레기 담을 지나 들어간 할머니의 집은 쓰레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작은 체구의 할머니도 겨우 드나들 정도로 비좁습니다. 게다가 집 안은 오래 방치된 폐지와 쓰레기들이 썩어 악취와 오물들로 도저히 생활할 수 없어 보입니다. 대체 할머니는 왜 이토록 쓰레기에 집착하시는 걸까요?
할머니에게는 딸이 있습니다. 매일 전화도 합니다.
그러나 딸을 따라나서지 못합니다. 할머니는 왜 한사코 쓰레기로 묻힌 집을 고집하는 것일까요? 할머니는 본래 부자였다고 합니다. 자신은 편하게 컸는데, 딸을 키울 때는 매우 어려워진 것입니다. 할머니에게 딸을 부유하게 키우지 못한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쓰레기를 주워 모으면 언젠가 가격이 오르면 팔아서 딸에게 못다 한 책임을 다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냥 할머니가 그래도 최선을 다했으니 딸을 고생시키며 키운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법 싶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죄책감을 없애고 싶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이가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제작진은 130톤의 쓰레기를 깨끗이 치워주겠다고 말합니다. 쓰레기는 할머니가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50년간 모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 번에 치워줄 수 있다고 말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능력이 있는 이가 죄가 없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그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러한 능력이 있는 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을 향하여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마르 6,14)라고 말합니다.
그는 기적이 있으신 분께 무릎을 꿇을 겸손함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자신이 요한을 죽인 죄책감을 스스로 믿음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을 하시는 분께 그 죄책감이 사라지게 해 달라고 청해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고해성사 때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자신은 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해 달라는 식의 예절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자존심이 죽습니다. 자기 힘으로 하려는 마음이 죽는 것입니다.
저도 초등학교 때 축구공으로 커다란 학교 현관문을 깨 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반 선생님은 저희 가정의 처지를 알고는 아이들에게 돈 50원씩 가져오라고 하고 당신이 얼마를 보태서 그 문의 수리비를 보상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문을 깨 먹은 죄책감을 더는 갖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모든 죄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작은 것은 몰라도 인간은 자신이 준 그 피해를 온전히 보상해 줄 능력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 세상에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아드님까지도 죗값으로 지불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신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죄가 없다고 하시고 하느님의 능력을 믿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우리 죄책감이 사라집니다. 죄책감도 믿음입니다. 믿음의 영역은 믿음으로만 상쇄됩니다. 하느님만이 인간의 모든 죄를 없이 하실 수 있는 믿음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만이 우리 유일한 구원자가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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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전에 지도자의 자질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지도자가 있으면 조직은 발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도자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매우 힘들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인 밑에 순교자가 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똑똑하지만 게으른 지도자가 있으면 조직은 큰 문제가 없이 흘러갈 것입니다. 그러한 지도자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현상유지를 하면서 지낼 수 있습니다. 태평성대에는 이런 지도자도 좋습니다. 집집마다 밥 짓는 냄새가 그윽하고, 마을에는 아이들이 놀고 있습니다. 멍청하지만 부지런한 지도자가 있으면 조직은 엉망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지도자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늘 긴장하면서 지내야 합니다. 내일 일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름에 장작을 쌓아 놓으라고 하고, 겨울에 얼음을 쌓아 놓으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멍청하고 게으른 지도자가 있으면 조직은 부정과 부패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말 그대로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재난이 일어나기 전에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자리를 떠난다고 합니다. 그러한 지도자 밑에서는 유능한 사람들이 떠나기 마련입니다.
본당 사목자들도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주도적인 사목자입니다. 모르는 것도 없고, 막히는 것도 없습니다. 건축, 미술, 문학, 음악에도 조예가 깊습니다. 그런 본당 신부와 함께 지내는 교우들은 크게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본당 신부가 완벽하게 통제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런 본당 신부님 밑에서 보좌신부로 지낸 적이 있습니다. 5개 국어를 능통하게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두꺼운 책을 읽어보라고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말 그대로 ‘예’라고 따르면 되었습니다. 협조적인 사목자입니다. 모든 결정을 사목위원들과 상의해서 내립니다. 사목위원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신부님께 상의하고, 본당 신부님은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줍니다. 저도 그런 본당 신부님 밑에서 보좌신부로 지낸 적이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저를 믿어 주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식사 후에는 함께 묵주기도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수도자나 사목회에 모든 것을 맡기는 사목자입니다. 이상적인 것 같지만 때로는 갈등과 분열이 생기는 일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런 본당 신부님 밑에서 보좌신부로 지낸 적이 있습니다. 질서가 없는 자유는 무거운 책임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방관자와 같은 사목자입니다. 본당의 친교와 전례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교우들은 차라리 수도 사제가 되면 좋겠다고 말하곤 합니다. 제사보다 제삿밥에 더 관심이 많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이 건강하였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오늘 화답송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를 거슬러 군대가 진을 쳐도, 내 마음 두렵지 않으리라. 나를 거슬러 전쟁이 일어나도, 그래도 나는 안심하리라. 환난의 날, 그분은 나를 당신 초막에 숨기시고, 당신 천막 은밀한 곳에 감추시며, 바위 위로 나를 올려세우시리라.” 오늘은 서울대교구의 사제 서품식이 있는 날입니다. 24명의 새 사제들에게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엊그제 같은데 저도 벌써 사제가 된 지 32년이 지났습니다. 지나온 발걸음을 보면 늘 부족하고, 부끄럽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저를 아직 사제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오직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사제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제는 이슬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는 험한 파도에 흔들리는 작은 돛단배와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대한 굳센 믿음이 있다면, 다윗처럼 자신의 잘못을 겸손하게 뉘우친다면, 베드로 사도처럼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제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힘을 주실 것입니다.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새 사제들이 주님을 따르는 충실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를 청합니다.
주님!
새 사제들이 겸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맡겨진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성실함을 주소서.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사제가 되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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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14-29: 세례자 요한의 죽음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16절) 예수님의 명성과 업적의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이제는 헤로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는 그 소문을 듣고 당황한다.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다. 그는 부정한 죄를 지었고 그것을 계속 지적한 요한을 죽인 것까지 항상 마음에 부담이 있는데 예수님의 소문은 그를 더욱 당황하게 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죄책감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요한은 헤로데가 혼인의 계명을 파기하는 것을 보고, 광장에서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18절) 하고 외쳤다. 우리는 동료들도 똑같이 꾸짖어야 한다는 것을 요한에게서 배운다. 충고는 우리의 의무이다.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는 그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마귀하고만 상관없지, 모두 같은 축복을 받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헤로데는 꾸짖음을 들으면서도 그의 말을 기꺼이 들었다고 한다.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주겠다.”(23절) 호사스러운 왕실에서 죽음의 잔치가 열리고,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을 때, 왕비의 딸을 불러와 춤을 추게 한다. 그 딸이 간통한 어머니에게서 무엇을 배웠겠는가? 헤로데는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맹세인가? 헤로데는 소녀의 춤 한판에 왕국을 넘겨줄 만큼 욕정에 사로잡힌 포로였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어린 소녀의 춤 한판에 자기 영혼을 넘겨주고 있지 않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25절) 여인에 대한 사랑이 이겼다. 여인은 헤로데가 거룩하고 의롭다고 여기던 사람에게 손을 대게 했다. 자신의 음행을 다스리려 하지 않은 탓에 그는 살인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진절머리를 치며 내쳤어야 할 간통한 여인을 갈망한 까닭에,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인물로 알고 있던 세례자 요한의 피를 보고 말았다. 헤로데가 괴로워한 것은 참회한 것이 아니라, 자기 죄에 대한 고백을 한 것뿐이다. ‘손님들’ 때문이다.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28절) 헤로데는 자기 혀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그 머리를 헤로디아에게 주자, 그 여자는 심판관을 살해함으로써 모든 것을 해결했다고 기뻐했을 것이다.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말려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여기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왕의 잘못에 대해 자신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끝까지 지적할 수 있었던 그분의 예언자적 정신과 자세이다. 예언자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항상 하느님의 뜻을 전한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은 항상 진리 편에서 그것을 증거했기 때문에 항상 박해를 받았고 죽임을 당해 왔다. 우리 자신이 이 시대의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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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헤로데>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마르 6,17-20)
표현만 보면, 마르코복음서 저자는 헤로데를 ‘덜 나쁜 사람’으로, 헤로디아는 진짜 나쁜 사람으로 묘사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당시의 실제 상황을 생각하면, 복음서 저자가 헤로데를 감싸거나 변호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표현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것은, 요한을 당장 죽일 생각은 없었음을, 즉 ‘적당한 때’가 오면 그때 죽이려고 계획했음을 나타냅니다. ‘적당한 때’는 ‘백성의 반발이 없을 때’입니다. 아마도 헤로데는 여론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헤로디아는 아무 생각 없이 막무가내로 요한을 죽이려고 했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헤로데가 그 여자를 막았을 것입니다.
<헤로데가 백성의 여론을 신경 썼다는 말은,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세속의 힘만 두려워했다는 뜻입니다. 헤로데가 진짜로 두려워한 것은 반발하는 백성들이 로마 황제를 직접 찾아가서 고소하는 일이었습니다. 즉 그는 황제의 권력만 두려워했습니다.>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라는 말은,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는 백성의 여론이 두려워서 요한을 죽이는 것을 망설였다.”라는 뜻입니다.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요한이 헤로데를 꾸짖거나 비판하는 말은 듣기 싫어했지만, 그 외의 다른 말들은 ‘불순한 호기심’으로(루카 23,8-9) 잘 들었다는 뜻입니다.
<헤로데는 분명히,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이는 일은 ‘악한 일’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비판을 받아들여서 회개하는 것이 ‘선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악한 일’을 피하고 ‘선한 일’을 하려는 의지도 의욕도 없었습니다. ‘선한 일’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고, ‘악한 일’인 줄 알면서도 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기도 하고, ‘죄의 종’이 되어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요한 8,34)>
예수님을 재판할 때의 빌라도 총독의 모습도 헤로데와 같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에게서 죄목을(죄를) 찾지 못했다는 말을 세 번이나 했습니다. “나는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 그런데 여러분에게는 내가 파스카 축제 때에 죄수 하나를 풀어 주는 관습이 있소. 내가 유다인들의 임금을 풀어 주기를 원하오?"(요한 18,38-39)
“보시오, 내가 저 사람을 여러분 앞으로 데리고 나오겠소. 내가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라는 것이오."(요한 19,4)
“여러분이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목을 찾지 못하겠소."(요한 19,6)
빌라도의 말은 사석에서 개인적으로 한 말이 아니라, 총독으로서 또 재판관으로서 법정에서 공적으로 한 말입니다. 피고인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면 무죄선고를 당연히 내려야 하는데, 빌라도는 무죄선고를 내리지 못하고 군중의 의견만 묻고 있습니다. 총독으로서도, 또 재판관으로서도 전혀 권한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그는 공정한 재판을 신경 쓴 것이 아니라, 군중이 폭동을 일으키면 황제에게 문책 당하게 되는 것만 신경 썼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황제의 권력뿐이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빌라도와 헤로데는 같은 모습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알면서도,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선택하는 그 두 사람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9ㄴ-20)
오늘날에도 헤로데나 빌라도 같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의식하고 스스로 회개하지 않는 한 멸망을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실제로 헤로데와 빌라도는 비참하게 생을 마쳤는데, 저쪽 세상에서 가서 하느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도 분명히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해서 대가를 치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신앙인들도 헤로데나 빌라도 같은 모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상황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5.19)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2-24)
우리도 죄를 안 지으려고 애를 쓰는데도 짓게 되고, 선을 행하려고 애를 쓰는데도 그게 잘 안 되어서 비참한 심정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5) 그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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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는 세상의 사람 “헤로데”의 이름이 일곱 번, 하느님의 사람 “요한”의 이름이 일곱 번 거듭됩니다. 이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이 두 이름을 일곱 번씩 드러냄으로써 두 삶을 철저히 대조하고 서로 맞서게 하려는 듯이 보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가 이 가운데 어떤 삶을 살지를 곱씹어 보라는 것 같습니다.
또 오늘 복음에는 체포, 감옥, 구금, 처형, 죽음, 무덤과 같은 표현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표하듯 등장합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루카 1,76)라는 말씀대로 세례자 요한은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에 앞서 하느님의 길을 걸어간 선구자였습니다.
어머니 엘리사벳의 태중에서부터 성모님의 태중에 계신 예수님을 반기며 기뻐하던 요한은(루카 1,44 참조), 예수님에 앞서 광야에 나가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처럼, 그리고 그분에 앞서 고통 받는 ‘하느님의 종’으로(이사 53장 참조) 살아야 할 자신의 운명을 느끼고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이지만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마르 1,3)인 요한의 외침과 선구자다운 증언의 삶을 우리 삶에서 재현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세례자 요한이 외친 회개의 삶을 기억하고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죄를 씻고 악습을 끊어 내는 회개의 삶, 헛된 욕망을 정화하는 기도와 절제의 모범을 배울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처럼 진리를 상대화하고 복음의 가치를 희석시키며 세상의 정신에 따라 살아가기를 요구하는 이 세상에 대하여 복음의 진리를 담대히 증언하는 그의 용기와 정의를 위한 희생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참된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늘 좋은 영감을 주었을 것이고 그분께 희망이 되어 주었을 테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7)라고 말하며 늘 스스로 낮추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따르기 위하여 먼저 요한에게서 배웁시다. 그러고 나서 요한의 정신과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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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락 타태오 신부님]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세례자 요한이 수행한 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와 계심을 알려 준 선구자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엉뚱한 일로 죽임을 당합니다. 광야에서 단식하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선포하던 사람이 왜 괜히 헤로데의 결혼 문제에 개입하여 안타까운 죽음을 자초하게 되었느냐고, 여러분은 세례자 요한에게 질의하시겠습니까?
요한은 사법 절차를 밟아 목을 벨 만한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된 것도 아니고, 감옥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하루아침에 죽고 말았습니다.
요한이 왜 이런 ‘속된’ 인간사에 끼어들어 거기서 죽임을 당했어야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요한은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닦으려면, 주님께서 오실 길을 마련하려면 스스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만을 상대할 수 없고 이 세상의 불의와 악에도 맞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맞설 수 없는 헤로데였다 하더라도, 요한은 목숨을 내놓고 그에게 삶을 바꿀 것을 요구해야 했습니다. 마지막 예언자 요한의 죽음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오심을 맞이하기 위한 회개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을 거부하고 그를 죽여 버린 이 세상은, 지금도 회개하라는 호소를 듣기 싫어할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 요구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에서 필수적입니다.
요한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조롱거리가 될까 두려워하여 본능적으로 행동한 헤로데와, 거짓과 안일보다는 진실과 죽음을 선택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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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인한 알베르또 신부님]
저는 지금 신부가 되기 위해 젊은 사내들이 함께 모여 사는 산허리 빨간 벽돌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서품을 받고 신학교를 떠난 지 2년이 지나서 다시금 이 공동체에 몸담고 있습니다. 지금은 학생들과 함께 살기 위한 소임을 맡고 있지만, 처음 제가 신학생으로 입학을 했을 때는 너무나도 부푼 마음이었습니다. 모든 형제가 천사처럼 보였고, 그리고 너무나도 좋아 보였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처음의 그 마음은 조금씩 닳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마음을 제외하고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니까 부딪히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서로 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아무 문제 없이 살아온 나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정말 이 사람만 없다면 살아갈 만할 텐데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의 삶의 구조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공동생활의 원칙에 따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 사람과 함께 씻고 함께 기도하고 밥먹고, 그리고 함께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잠도 함께 듭니다. 그리고 피하려고 할수록 저 자신의 마음은 더욱 평화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려고 할 때 저는 자유로울수 있었고, 그리고 저는 더 깎여져야 하는 모난 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입니다.
저 자신의 부족함을 지적하는 이를 품을때 저는 저 자신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부족함을 치우고 덮으려고 그리고 모른척하려고 하였지만 그것은 바로 저의 모습이었고, 그런 부족한 저를 사랑하는 주님을 믿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잠시 저 자신의 부족함을 덮어버린다고 해서 잊히지 않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칼날을 오히려 그것을 보여준 이에게 오히려 들이대는 우리의 잔혹함이 도사리고 있음을 저 저 자신의 삶을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의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바로 하느님의 목소리,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요한은 일찍이 당시의 많은이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게 변화되고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삶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종교 지도자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잘못됨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을 통해 알수 있듯이 헤로데의 삶을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아마 율법학자들과 또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는 요한이 자신 앞에서 치워져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자신의 부족함을 바라보려 하지 않아서 결국에는 예수님마저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 그리고 결국은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묶여서 허덕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속박과 회피가 아니라 행복과 그리고 자유로움입니다. 나에게 있는 좋은 것뿐만 아니라 나에게 있는 부족함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나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넓게 사랑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리고 만날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지적하고, 그리고 우리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요한을 또 만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저에게도 헤로데와 똑같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요한을 껴안음으로써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겠습니까?, 아니면 오늘 헤로데처럼 핑계를 대고 그리고 단지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치워버리겠습니까?
우리는 헤로데의 전철을 밟지 않고 진정 나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뜻이 자리할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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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히브리서 저자와 시편 저자의 신념에 찬 두 고백 속에 우리는 세상의 권력과 폭력에 대한 두려움보다, 하느님을 향한 더 큰 희망을 지닌 이들의 믿음을 봅니다. 반대로 세상에 희망을 둔 이들은 자신이 차지한 재산과 권력, 지위와 명예를 잃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 여깁니다.
오늘 복음의 헤로데의 모습 속에서 한 인간의 가장 초라한 모습을 엿봅니다. 헤로데는 자기 생일잔치에 찾아온 고관들과 무관들 앞에서 권력의 욕망을 드러내고 싶었고, 그래서 손님들을 즐겁게 한 헤로디아의 딸에게 했던 호언에 책임을 지려고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리고 맙니다.
물론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존경했지만, 동생의 아내를 빼앗은 잘못을 비난하는 세례자 요한의 질책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체면과 자기기만에 빠진 헤로데의 결정으로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위대한 예언자는 한순간에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하지만 복음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은, 한 권력자의 명령에 따라 끝나 버린 세례자 요한의 운명이 아닙니다. 칭송받던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의 환생이라고 믿을 만큼 권력과 욕망을 지키기 위한 진퇴양난에 빠졌던 나약한 권력가와는 정반대로,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자신을 맡긴 세례자 요한의 신뢰에 찬 삶을 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려고 광야에서 회개를 요청한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께서 모순된 권력의 희생양이 되실 것을 미리 보여 주는 운명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의 계획과 의지를 넘어섭니다. 때로 우리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더라도,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자신의 숙명을 사랑하는 용기를 갖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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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여자는 기념일을 먹고 살고, 남자는 체면을 먹고 산답니다. 여자는 쉽게 감동하기에 그렇고 남자는 자존심을 세워주면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그렇다고 자존심을 건 맹세를 함부로 할 것이 아닙니다.
헤로데 왕은 요한이라는 인물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습니다.(마르 6,20) 그런데 그에게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게 되었고,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을 즐겁게 해 주었기에 그에게 원하는 선물은 무엇이든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어머니의 바람대로“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마르 6,25).하고 요구하였습니다. 너무도 당혹스런 일입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이 자기의 결혼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앙심을 품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앙심을 품는 사람은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욕심의 노예가 되어 그 앙갚음의 기회를 딸을 통해서 하게 된 것입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더니……,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이미 약속한 것이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습니다.(마르 6,26)
그래서 결국은 요한의 목을 베게 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결정권자의 입맛에 맞장구만 치는 간사한 사람으로 있었습니다. 요한을 제외한 그 모두가 잘못된 것에 대해 침묵을 지켰습니다. 자신에게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아무리 의인의 죽음이라도 대수롭지 않기 마련입니다.
의인의 목숨과 자존심을 건 헛된 맹세에서 하나를 선택했거늘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체면이 뭔지? 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 ‘다만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만(야고 5,12)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의로운 일에 자존심이 좀 상하면 어떻고 체면이 좀 손상되면 어떻습니까? 요한과 헤로데, 홀로 정의를 외치다가 죽어가는 한 예언자의 모습과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의롭고 정의롭게 사는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아 가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왕의 모습이 극적으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라는 말이 있듯이 헤로데는 자기 잘못에 대한 불안감을 마음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내가 목을 벤 요한이 되살아났구나.”하고 말하였습니다. 혹 내 무의식 속에 감추어둔 무엇인가가 있어 불안하다면 고해성사를 통해 그 불안을 없애야 하겠습니다. 매듭은 풀어야 합니다. 풀지 않고 놔두면 세월이 흘러도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법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 안에서도 그리고 어떤 공동체에서든 더 큰 것을 위해서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에 손상을 입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기쁨과 평화가 함께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2-13)
힘을 주시는 분을 통하여 어떤 처지나 여건 안에서도 꿋꿋하기 바랍니다. 주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요, 그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위신, 체면을 지켜야 할 때 지키십시오! 자존심을 내세워야 할 때 내세우십시오! 그리고 헛것인 줄 알았으면 곧 버리십시오! 서둘러 버리십시오! 정말로 승리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고 패배한 사람은 헤로데임을 잊지 마십시오.
헤로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권한을 남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자신의 안일과 욕망을 위해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스스로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항상 예수님의 삶을 미리 닦는 선구자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남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예수님을 닮기를 갈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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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보통 건물의 재건축 논의는 지은 지 몇 년을 기준으로 진행될까요? 보통 30년을 기점으로 재건축 논의가 진행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준공 30년이 경과된 건물만 재건축할 수 있습니다. 이 ‘30년’이라는 시간을 보면서, 저의 마음을 바라봅니다.
건축물도 30년이 지나면 새롭게 다시 짓는데, 제 마음은 옛날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원래 ‘나’는 어쩔 수 없다면서 새롭게 만들려는 논의조차 못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재건축된 곳은 너무 멋집니다. 물론 재건축 들어가기 전까지 많은 논의를 비롯한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이 과정을 거쳐서 재건축이 이루어지면 깨끗하고 멋진 공간으로 재창출됩니다.
우리 마음도 새롭게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지저분하고 복잡한 내 마음을 새롭게 다시 만들어야 깨끗하고 멋진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어!’, ‘변하는 것은 불가능해’, ‘나는 이런 마음이 편해’ 등등 자기 마음의 재건축을 가로막는 잘못된 마음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나의 멋진 미래를 위해 자기 마음을 새롭게 만드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갑곶순교성지를 처음 시작하며 경당을 지을 때 들었던 말이 생각납니다. 건축 설계사는 건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향해 이렇게 말씀해주시더군요. “신부님! 집 짓는 것의 반은 부수는 것입니다.” 먼저 완전히 부수어야 짓는 것이 수월해집니다.
자기 마음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안에 있는 부수어야 할 것을 찾고, 또 실제로 부수어야 합니다. 미움의 마음, 욕심과 이기심,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섣부름, 함께 보다 혼자의 마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부정적 마음, 나만 사랑받으려는 마음…. 이런 마음을 부술 때, 재건축이 멋지게 이뤄질 수 있습니다.
헤로데 임금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다, 엘리야다,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등의 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 임금은 이 소문에 깜짝 놀라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라며 두려워합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뒤에,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주었던 것이지요. 바로 헛된 맹세, 자기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 등으로 해서는 안 될 명령을 내려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것입니다. 분명히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깊은 반성과 함께 이제는 다른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변하려 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재건축이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소문에 두려워 떨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냥 포기하고 절망에 빠져서 가만히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새롭게 재건축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두려움 없이 기쁘게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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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양심>
마르코 6,14-29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그때에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양심>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마르 6,16)
헤로데는
요한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양심을 죽였고
그럼으로써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헤로데의 양심은
요한을 되살림으로써
사람이 아닌 자신을 죽였고
그럼으로써
다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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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형제애 실천을 하려면>
“형제 여러분,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해 주고, 학대받는 이들을 여러분 자신이 몸으로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
오늘 히브리서는 형제애 실천을 계속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형제애란 어떤 것입니까?
형제애란 일단 형제간의 사랑을 뜻하겠지요. 그러나 여기서는 사랑에 여러 사랑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고, 그 여러 사랑 가운데에서 형제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형제적인 사랑, Brotherly Love 또는 Fraternity는 모든 사람을 형제로 사랑하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이 정확한지 모르지만 자유, 평등, 박애라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프랑스 혁명 구호 중에서 박애가 실은 Fraternity를 형제애라 번역하지 않고 박애라고 번역한 것이지요.
여기서 박애란 앞의 평등과 연결하여,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널리 사랑한다는 뜻에서, 뒤집어 얘기하면 자기 형제만 좁게 사랑하는 것과 반대되는 뜻에서 그렇게 번역한 것 같은데 말 그대로 번역하면 형제애라고 번역해야겠지요.
그렇다면 히브리서가 말하는 형제애는 이것과 같은 뜻일까요? 같은 뜻도 있지만, 프랑스 혁명 구호와는 다른 뜻도 있을 겁니다. 아니, 다른 뜻이라기보다는 깊은 뜻 또는 넓은 뜻이 있을 겁니다.
히브리서가 얘기하는 형제애에는 하느님이 숨어 있지요. 모든 이의 한 아버지요 같은 아버지인 하느님 말입니다. 모름지기 형제란 한 아버지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손님을 그저 손님으로 보지 말고 천사로 보고,
감옥에 갇히고 학대받는 사람을 그저 불쌍한 사람 정도로 보지 말고 내가 그 경우에 처한 것처럼 보라고 오늘 히브리서의 가르치는데 사실 자기처럼 여기고, 자기 형제처럼 여기는 것만도 대단하지요.
일반 사회적으로는 손님이 내 물건 사주는 손님 정도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감옥에 갇힌 이는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할 범죄자일 뿐이고, 박해받는 사람은 나하고는 상관없는 사람일 뿐인 경우가 대부분이잖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이웃을 자기화(自己化)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는 이웃을 신화(神化)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더 대단할까요?
어떤 것이 더 어려울까요?
제게는 형제 안에서 나를 보는 것보다 형제 안에 숨어 있는 하느님을 보는 것이 더 어렵고 대단한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제는 일 마치고 오다가 손수레로 폐지를 줍는 영감님이 한 손은 손수레를 잡고 한 손은 담벼락을 잡고 꼼작 않는 것을 봤습니다.
갑자기 혈당이 떨어지고 힘이 완전히 빠져 그러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같이 본 젊은 사람과 함께 댁까지 할아버지를 모셔드렸는데 요즘 나이들이 많아 여기저기 아픈 제 육신의 형제들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태원의 희생자를 내 자식처럼 보는 것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버려지는 아이들을 내 아기 내 손자처럼 보는 것도 내 안에 인간적인 사랑이 조금만 있으면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은 신앙이 없으면 힘들고신앙인이라도 하느님 관상을 깊이 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이웃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그래서 형제로 보고 이웃을 사랑하는 형제애를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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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6,16)
<예수는 나에게 누구인가?>
오늘 복음(마르6,14-29)은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말씀과 세례자 요한의 죽음(순교)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입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오르내립니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되살아난 것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엘리야다.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헤로데도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합니다.
신성을 지니시고 오신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초대 교회 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근본 교리를 부정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 무리가 바로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한 아리우스 이단'입니다. 그 무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보지 않고,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나신 분,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계시는 분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교회 첫 번째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서기325년)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서기 381년)가 그 무리를 단죄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라는 예수님의 이 물음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예수는 나에게 누구인가?'
오늘 독서(히브13,1-8)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말합니다.
"돈 욕심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분께서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13,5)
잠시 있다가 떠나가는 인생입니다. 지나가는 것에 너무 집착하면서 힘들어하지 말고,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같은 분이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안에서' 자유와 해방이 되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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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 6, 16)
내 것이 아닌
하느님의
생명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우리의
교만입니다.
돌처럼 굳어가는
우리 양심입니다.
모든 불행의
근원은
멈추지 못하는
우리들
과욕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돌아갈 집은
언제나 예외없이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새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숨길 것이
없습니다.
살인의 부활이
아니라 사랑과
회개의 부활이
되어야 합니다.
되풀이되는
역사에서 삶의
교훈과 참된
삶의 가치를
배웁니다.
망가지고
버려진 생명까지
되살려 다시
소중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구원입니다.
잊혀지고
잊어가는
소중한 분들의
사랑을 다시
기억합니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에서
가장 멀리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양심은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양심의 길을
걸어간 세례자
요한에게서
주님을 만나는
사랑의 길을
봅니다.
우리는 어떠한
길을 걷고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양심성찰과
생명의 양식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며
사랑을 실천한
수 많은 세례자
요한의 희생을
기억합시다.
올려놓고
만나야 할 것은
우리들
양심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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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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