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집이고 집안에 문제 하나쯤 없는 집이 없을 것입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여자들은 음식 걱정을 하고 남자 형제들은 이번에도 또 큰소리는 나지 않을까 걱정하며 이번에는 서로 양보하고 서로 용서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명절을 맞이하지만 영락없이 또 형제들 간에 다툼이 생기고 부모님 앞에서 큰소리를 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피를 나눈 형제들인데! 이유가 욕심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는지요. 이 욕심은 물질적인 욕심일 수도 있고 자존심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차라리 서로 만나지 않고 지내는 것이 더 좋지 않겠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사탄을 쫓아낸다면 서로 갈라져 망해버리는 것처럼 우리의 가족이 서로 갈라진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기다리고 그리고 조금씩 양보합시다. 성령은 우리를 평화와 일치로 향하게 하십니다.
수원교구 이철구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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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한 세례자 요한 신부
연중 제3주간 월요일 2사무엘 5,1-7.10 마르코 3,22-30
어떤 물체든 단면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없습니다. 모든 사물과 물건은 입체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런 입체적인 구성을 쉽게 내적, 외적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입체적인 구성은 물론 사람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모든 사람과 사물의 입체적인 부분들을 제대로 보고 살아갑니까? 쉽게 말해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두루 잘 살핍니까?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니 삶의 경험상 흔히 우리들은 사물이든 사람이든... 일면 밖에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래서 외형만을 보고서 전체를 판단하기 십상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특정한 존재 또는 현상을 바라보는 안목에 있어서 어느 일면만을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것을 우리는 ‘편견’이라 합니다. 그럼 편견에 치우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발생할까요?
편견 또는 선입관에 사로잡히면 사리를 제대로 분별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들은 지독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율법에 대해 체계적으로 제대로 공부한 자신들뿐이라는 편견입니다. 그리고 그 편견 속에서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합니다.
입은 것도 그렇게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 꼬락서니도 그렇고... 어디서 굴러먹다가 왔는지도 모르는 예수라는 사람의 외적인 모습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라삐’라는 칭송의 소리를 듣기에는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라삐’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말이 그들 귀에는 무척 거슬렸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참된 복음의 말씀도 그들 귀에는 제대로 들릴 리 없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님과 어긋나게 된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구세주 예수님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신앙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까? 혹 우리 역시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은 아닙니까? 율법학자들처럼 내가 만든 구세주 예수님을 바라고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본당에서 함께하는 형제자매들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신앙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까?
혹 나 혼자만 잘났다는 편견에 빠져버린 신앙생활 속에서... 그래서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을 만큼 굳어진 자신의 생각과 판단 속에서... 형제자매들을 평가하고 분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편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편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해 주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인생의 거울로 삼는데 주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모든 것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고 혹시나 모를 편견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혹 내 자신이 편견 속에 빠져 쓸데없는 아집과 고집을 부리지 않는지 살펴봅시다. 특히 구원의 길을 향한 우리의 신앙의 면은 더욱더 꼼꼼하게 살펴보도록 합시다. 아멘.
대구대교구 김용한 세례자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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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3주간 월요일 2사무엘 5,1-7.10 마르코 3,22-30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일부의 사람들은 그분께 악령이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런 반응은 예수님의 업적이 일상 안에서 쉽게 일어날 수 없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놀라운 업적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은 그것이 악의 힘에서 오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의 일은 바로 악의 힘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특히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실감하면서도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무엇인지 궁금해합니다. 모든 죄와 신성을 모독하는 어떤 말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없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표현이면서 우리에게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오늘 복음의 28절과 관련되어 보입니다.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업적을, 모든 죄와 모독하는 말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스스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탈출기에 나오는,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다음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탈출기 34,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