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구 루치오 신부
연중 제3주간 수요일
2사무엘 7,4-17 마르코 4,1-20
씨앗과 밭
“자, 들어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을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고....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잘 자라
열매를 맺었는데, 열매가 삼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백 배가 된 것도 있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마르4,3.8-9)
모든 농부는 씨를 뿌리고 난 후 그 씨앗이 싹이 나고 자라서 많은 열매 맺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입니다.
당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말씀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입니다.
아니 당신 자신이 말씀의 씨앗입니다. 복음사가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요한1,1)
당신은 이 세상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씨앗 안에는 생명이 들어있습니다.
씨앗 안에는 푸른 잎이 있고, 가지가 있고, 꽃이 있고, 열매가 들어있습니다.
진리와 생명, 부활과 하느님 나라가 들어있습니다.
그 씨앗에서 생명의 싹이 돋으려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요한12,24)
당신은 한 알 씨앗처럼 죽었습니다.
문제는 밭입니다. 세상은 씨앗인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탐욕의 길바닥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 모질고 사나운 돌멩이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
시기 질투와 이기심의 잡초가 무성한 마음 밭을 지닌 사람들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요한1,10-12)
말씀이신 당신을 믿고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예수님, 저희가 믿음의 사람이 되어 말씀이신 당신께 歸依하게 하시고,
잘 가꾸어진 부드러운 마음 밭으로 당신을 받아들여 하늘나라를 열매 맺게 하소서.
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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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규봉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3주간 수요일
독서 : 사무엘 하 7,4-17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며 사랑하시는 하느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이민족과의 전투에서도 승리함으로써 안정을 찾았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자신의 도성으로 삼고, 왕궁까지 건축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굳혔다.
이제 그는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족장이 아니라
예루살렘 도성에 정착하여 통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자리를 굳혔다.
그는 힘들게 떠돌아다니기보다 예루살렘에 영원히 안주하고자 했다.
신심 깊은 다윗은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도성이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도성이 되고,
하느님으로부터 축복과 보호를 받는 도성이 되기를 원했다.
그는 계약의 궤를 모셔왔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성전을 짓고자 했다.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는 성막이 아니라 예루살렘 도성에 고정된 성전을 지음으로써
하느님께서 다른 곳이 아니라 오직 예루살렘에만 영원히 머무르시기를 원했다.
성전을 건축하려는 다윗의 마음에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심이 드러난다.
“나는 이렇게 송백으로 지은 궁에서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아직도 휘장 안에 모셔 둔 채
그대로 있소.”(2사무 7,2).....
다윗은 좋은 집에 살면서도 하느님께서는 성막에 머무르신 다는 점이 죄송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전을 건축하려는 다윗의 마음에는 인간적인 욕심도 담겨져 있다.
이동할 수 없는 고정된 성전, 그래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떠나시지 못하게 하려는
인간적인 욕심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신심 깊은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생각과 욕심만으로 하느님의 성전을
건축하지는 않았다. 예언자 나단에게 하느님의 뜻을 구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는 사시지 않는다.
하늘은 나의 옥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그러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어떤 집을 지어 줄 것이며 내가 쉴 곳이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만든 것 아니냐?”
(사도 7,48-50)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은 결코 인간이 만든 집에 사시는 분도 아니시고,
예루살렘이란 한정된 곳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신심과 속내를 너무도 잘 아신다.
그래서 다윗의 후손이 성전을 지을 것을 말씀하시고, 더불어 그와 그의 자손에게 축복을 내리신다.
나아가 영원한 왕위를 약속하신다.
하느 님께서는 다윗의 신심을 보시고, 그의 후손 가운데 영원한 왕위를 누릴
그리스도가 탄생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속내를 너무 잘 아시는 분이시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사람의 욕심과 이기심을, 너무 잘 아신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베푸시기를 원하신다.
비록 사람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더라도,
비록 사람이 자신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구하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신다.
다만 하느님과 우리를 잇는 끈을 놓지 않고,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통로를 막지 않으면,
신앙이란 끈과 통로를 잃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베푸시는 아버지이시다.
다윗이 하느님의 성전을 예루살렘에 짓고자 한 까닭 안에는 자신의 욕심이 담겨져 있다.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고, 자신의 도성을 지켜주시기를 바라는 욕심이 담겨져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 욕심을 잘 알고 계시지만, 다윗을 나무라시지 않고,
그와 그의 가문을 축복하신다.
나아가 영원한 왕위를 누릴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약속하신다.
하느님은 그처럼 좋으신 아버지이시다.
마치 어머니가 품에 안은 갓난아이를 사랑하듯이, - 울거나 웃어도, 젖을 먹거나 젖을 흘려도,
어머니 품에 오줌과 똥을 싸도, 오직 제 입밖에 몰라도,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하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너무 잘 아신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의 울음 소리만 들어도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신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베풀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느님을 생각하기보다 자신만을 생각하더라도,
비록 죄와 잘못에 빠질지라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처럼 잘 알고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도 다윗처럼 축복을 받을 것이다.
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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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국 알로이시오 신부
연중 제3주간 수요일
2사무엘 7,4-17 마르코 4,1-20
욕심이 차지한 공간
학위 논문을 쓸 때 평소 아껴주셨던 교수 신부님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이야기 끝에 “좋은 논문을 위해서는 과감히 버려야 한다”고 충고해주셨습니다.
잘 알겠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박사학위를 두 개나 가지신 신부님이야 버릴 것이 많겠지만
한 문장 적어 나가기도 힘든 제게는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논문을 반 정도 쓴 이후에야 그 충고를 이해하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잘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삶에서도 유효함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친절한 설명이 곁들여 있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숙제로 남는 것은 어떻게 하여야 나 자신이 좋은 땅이 될 수 있느냐,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올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기적인 생각이 악마로 변할 때 말씀은 내 마음에 들어올 수 없고,
세상 재물에 걸려 넘어질 때 말씀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내 명예를 추구할 때 하느님의 영광은 꽃피울 수 없게 됩니다.
한마디로 욕심의 크기만큼 마음속에 하느님의 말씀이 머물 공간은 더 줄어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논문을 위해 버려야 하듯 하느님과 말씀을 위해 욕심을 버릴 때
좋은 삶은 가능할 수 있습니다.
부산교구 구경국 알로이시오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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