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사도행전 22,3-16 마르코 16,15-18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베드로 대성전 앞에는 사도 바오로가 칼을 들고 사도 베드로는 열쇠를 들고 서 있는 상이 있습니다.
교회의 대표적인 성전에 두 사도는 교회 역사에서 큰 인물인 것에 대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주님께 대한 성실과 사랑이 남 다릅니다.
그리고 다마스쿠스 부근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던 사도 바오로 만큼 극과 극을 산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한 때는 열렬한 유대교 신봉자로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사람이
한 순간에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며 유대교인들 앞에서
반대의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주님과 지낸 열 두 제자들 중에 하나는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 살아생전에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뛰어난 필체와 성경지식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유대교의 그릇됨을 반박하며
이방인의 사도의 소명을 다 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다마스쿠스 부근을 지날 때 눈부신 빛이 사방을 비추는 가운데
그는 바닥에 엎어집니다. 그는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라고 질문하지요.
그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사도 22,8)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볼 수가 없었는데
그는 먹거나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주님으로부터 다마스쿠스로 가라는 말씀을 듣지요.
그는 그 도시에 있는 하나니아스를 찾아 갔고 하나니아스는 사울이 있는 집으로 가서
그에게 안수를 하자 곧 볼 수 있게 됩니다.
사울은 일어나 그에게 세례를 받은 후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립니다.
주님께서 부활 후에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복음선포의 사명을 주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5-16)
이미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선포의 사명을 주실 뿐 아니라 세례를 또한 받도록 하십니다.
구약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구분이 있다면 회개의 세례이지요.
하나니아스도 사울에게 세례를 줍니다. 사도 베드로도 개종한 사람들에게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 2,38)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날 세례를 받은 사람만도 삼천 명 가량이 된다고
사도행전 저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그를 땅으로 엎어지게 했고
눈이 보이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밤낮 사흘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또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무기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열정적이면서도 고집스런 사울을
주님께서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니아스가 교회를 박해하는 사울이 이해되지 않는 인물이기에 주님께 반문의 질문을 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나니아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사도 9,15-16)
우리는 때로 이해되지 않는 이웃, 때로는 그들에게 미움까지도 갖게 되고 지친 나 자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그들에게서 문을 닫기까지 하며 내 멋대로 그들을 판단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다마스쿠스에서의 행적을 보면 나 자신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이 늘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때로 주님께서 나를 변화시키고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시기 위해 나를 엎어지게 하고
곤경으로 몰고 가며 나를 눈멀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괴롭고 슬퍼서 먹고 마시지도 못하는 날들도 있게끔 궂은 날도 주님께서는
마련해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대한 믿음이 얕다면 ‘하느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지?’라는 질문을 수 없이 합니다.
그런데 내가 주님께 대한 믿음이 깊다면 곰곤해 생각하시는 성모님처럼 ‘이런 일을 통해서
주님께서 무엇을 워하시는 것이지?’라는 질문을 하며 내면을 향한 자성을 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순명의 덕을 쌓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고집불통의 나 자신을
얼마나 넘어트리고 눈도 멀게 하실른지요? 남을 내 식대로 판단한 좁아 터진 나 자신을
회개해야 합니다. 내 식대로 좋은 것만 골라 하고 귀찮은 것은
은근슬쩍 피하는 만성 기회주의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기를, 그래서 세상 끝까지 복음 선포의 열정을 주시도록
주님께 청하는 하루가 되도록 합시다.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
유광수 야고보 신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사도행전 22,3-16 마르코 16,15-18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18)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마르 15-17절)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신다.
그럼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적을 일으키는 일이다.
기적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복음을 선포할 수 없다.
우리 주위에서 매일 새로운 신상품이 개발되어 나오고 옛날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제는 웬만한 일로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아니 사람들에게 호감을 살 수가 없다.
맥빠진 강론, 생명력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는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듯한 전례,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성직자, 수도자들의 생활을 통해서는 복음 선포가 될 수 없다.
정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
단순한 말만으로 복음을 전할 때는 지나갔다. 그럼 어떻게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가?
어떤 기적을 일으켜야 하는가?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 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고 했던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
이런 기적은 꼭 어떤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만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믿는 이들에게는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라고 했다.
따라서 믿는 이라면 누구나 이런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기적들을 일으키는가? 이런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면 복음을 선포할 수 없다.
아니 복음을 선포한다 하더라도 아무도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또 이런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면 복음을 선포할 용기도 없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 수 있을까? 정말 이런 기적들이 믿는 이들에게
일어나는 것일까? 만일 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복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 아니 복음을 전하려면 반드시 이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끝 부분이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영적 여정을 다 끝마친 다음에 하신 말씀이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한테 불리움을 받은 그 때부터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예수님한테 직접 교육도 받고 또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신앙이
성숙해졌고 마침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체험한 후에야 비로서 받은 사명이다.
따라서 복음 선포자가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필요한 훈련과 교육을 받은 후에야 비로서 복음 선포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고서는 결코 복음 선포자가 될 수도 없고
또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갖지도 못한다.
제자들은 복음 선포자가 되기 위해서 자기들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렸고
불리움 받은 그 순간부터 예수님이 죽으실 때까지 끝까지 예수님만을 따라 다녔다.
그리고 때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절대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고 비록 자기들이 이해하지 못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길일지라도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제자들이 복음 선포라는 사명을 받게 된 것은 그냥 앉아서 받은 것이 아니다.
그만한 훈련과 희생, 포기, 교육을 통해서 받게 된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때로는 예수님한테 꾸중도 듣고 질책도 받고,
자기 자신까지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야 했다.
결국 복음 선포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바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복음 선포자가 되기 위해서는 완전히 예수님을 통해서 아니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먼저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런 자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을 낫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려면 우리 자신이 복음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제자들이 예수님 한테 처음 불리움 받은 그 순간부터 걸어갔던
영적 여정을 우리도 걸어가야 한다.
영적 여정을 걸어가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잘라 버릴 것은 잘라 버려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자신은 죽고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해야 한다.
그래야 복음 선포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 동안 너무 안일하게 예수님을 따랐는지 모른다.
그리고 예수님이 열 두 제자들을 교육시켰던 그런 방법을 따르지 않고
내 맘대로 예수님을 따랐는지 모른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마르코가 제시해준 영적 여정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제자들이 걸어갔던 그 길, 예수님이 열 두 제자들을 교육시켜나갔던 그 방법을 따라
우리의 영적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그런 자만이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며
믿는 이들이 일으키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야고보 신부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사도행전 22,3-16 마르코 16,15-18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윤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방황하다가
하느님을 만난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다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세속적인 성공을 꿈꾸고 세속에 맛들여 살다
하느님을 만나 하느님의 사람이 된 프란치스코 성인과도 다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열렬히 믿던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회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에서의 변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적대자에서 옹호자로의 변화이며
그리스도교 파괴자에서 전파자로의 변화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적대자에서 옹호자로의 변화란 어떤 것입니까?
한 마디로 얘기한다면 율법주의자에서 사랑주의자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의심하고 율법은 단죄하고 율법은 구속하고 율법은 억압하고
율법은 그래서 사람을 죽게 합니다. 자신도 죽고 남도 죽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믿고 사랑은 용서하고 사랑은 풀어주고 사랑은 부축하고
사랑은 그래서 사람을 살게 합니다. 자신도 살고 남도 살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는 우리,
우리도 율법주의자에서 사랑주의자로 바뀌어봅시다.
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