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식 토마스 신부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2티모테오 1,1-8 루카 10,1-9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은 유산입니다. 이 유산은 그 어떤 물질적인 유산보다 값지고
가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서간인 오늘 독서에서,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신앙의 유산인 믿음이
티모테오에게도 전수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신앙은 다른 이에게서 전해 받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듣는 것에서 오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0장 17절 참조).
우리는 험난한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지위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신앙을 전수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큰 유산을 자녀에게 선물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가정에서 배웁니다.
가정은 가장 작은 신앙의 공동체며, 가장 중요한 교육의 공동체기도 합니다.
바오로는 티모테오 안에 ‘진실한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진실한 믿음이란
‘위선이 없는 믿음’, ‘진리의 정신 안에 있는 믿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티모테오가 이 믿음을 잘 간직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티모테오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불태우게 합니다. 하느님의 은사란
티모테오가 받은 사목 직무를 뜻하기도 하지만, 이 직무를 위하여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더욱 뜨겁게 하는 것은
세례를 하나의 자격증이나 천국으로 가는 통행증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교리와 신앙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특히 우리 가정 안에서 전수될 것이며,
이것은 가장 큰 선교며 우리의 의무고 우리 신앙을 지켜 나가는 일입니다.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
**********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2티모테오 1,1-8 루카 10,1-9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오늘은 성 티모테오와 성 티도의 기념일입니다. 이들은 모두 사도 바오로가 선교여행 중에
만난 이들 가운데 눈여겨보았다가 선교의 협력자로 삼아서 제자 훈련을 시킨 후
에페소와 크레타에 파견한 선교사입니다.
이 두 사람말고도 사도 바오로의 협력자였다가 제자가 된 이들은 여럿이 더 있는데,
루카(콜로 4,14), 에바프로디토스(필리 2,25), 실라스(사도 15,40), 마르코(필레 1,24),
아리스타코스(필레 1,24), 데마스(필레 1,24), 프리스카와 아퀼라 부부(로마 16,3)
등이 그들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개척선교 노선은 이들 협력자와 제자들에 의해서 비로소 교회에
자리잡게 되었고, 후대 역사를 통해 계승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사도 바오로의 선교는 개척적인 특징이 많았습니다.
그가 사도단에서는 비주류 출신이어서 끌어주는 사람도 없고 함께 할 이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시작했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그러니 불러주는 데도 없는 데
무작정 찾아나선다든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굳이 천막 만드는 험한 노동을 해 가며
스스로 수입을 충당한다든가, 그냥 세례를 주고 떠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신앙으로 공동체를 이룰 때까지 기다린다든가 하는 그의 선교활동 특징들이
자칫 이어받는 후계자가 없으면 중단될 수도 있는 불안정성을 내포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안정하게 사도 바오로가 시작한 복음화 과업이 중단되지 않고
소아시아 지방과 그리스 일대 섬들에서 지속되었음을 알려주는 이들이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두 사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일흔 두 명의 제자들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신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이 파견기사는 네 복음서 중에 오직 루카만이 기록해 전해주는 이야기인데,
파견된 제자들이 명심해야 할 신앙적 원칙과 파견지에서 지켜야 할 수칙은
열두 제자의 파견기사와 동일하지만, 파견되는 제자들이 일흔 두 명으로 늘어났다는 점이
눈에 띄는 차이점입니다.
이 일흔두 명의 제자들은 애초에 열두 제자들이 파견되어 복음을 전하면서 합류한
예순 명의 아나빔들이라고 추정됩니다. 초대교회의 주류가 된 이들은 예수님께서 수확할 밭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보내달라고 청하여 받으신 일꾼들이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서 보면, 예수님 이래로 교회의 역사에서 하느님의 일꾼은 늘 부족했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은 이 만성적인 성소 부족 사태의 해결책은
하느님께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는 것, 단 하나뿐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되, 기도로 청할 때에는 “청하는 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믿고 기도하라”
고 일러주셨습니다(마태 21,22).
여기서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믿는 일이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구하는 일”
로서 그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곁들여 얻어지리라(마태 6,33)고도 일러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짚어 보면, 기도에도 믿음이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바오로 시대에도
그리고 우리 시대에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일을 하면 됩니다. 관건은 믿음입니다.
사실, 사도 바오로가 티모테오에게 당부한 것도 믿음이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2티모 1,6).
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2티모테오 1,1-8 루카 10,1-9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16년 입니다.
한국의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바둑이 있었습니다. 인공지능과 사람과의 바둑이라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바둑은 사람이 인공지능에게 이길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인공지능 알파고이 승리였습니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능력에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사람들이 인공지능에게 지배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생명들을 지배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양식, 사육, 재배’라는 이름으로 다른 생명의 숫자를 조절하였고,
우리의 입맛에 따라서 유전자 조작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인공지능의 지배를 받을 수 있다는 공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공지능이라는 프로그램을 인간이 만들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인공지능은 많은 정보를 알고, 계산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은 인공지능에 비해서 정보의 양이 적고, 계산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아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은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입력하고 나서야 모르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첫 눈에 모르는 것을 압니다.
정보를 다 입력하지 않아도 ‘몰라’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몰라’라고 쉽게 말 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람에게는 ‘자유의지’와 ‘초월적 자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자유의지와 초월적 자아는 하느님께서 천사보다 약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며
은총입니다. 그 자유의지와 초월적 자아는 사람이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자유의지가 겸손과 만나면 타인을 위해서 목숨을 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교만을 만나면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자유의지가 희망과 만나면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절망을 만나면 풍요 속에서도 근심과 걱정이 생기게 됩니다.
자유의지가 하느님의 영광을 만나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고, 성인과 성녀들이 따라간 길이고,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욕망의 덫에 걸리면 하느님의 아들이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못했던 큰 아들이 되고 맙니다.
헤로데가 그랬고, 율법학자와 바리사이가 그랬습니다.
제도와 직책으로 자유의지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과 인내 그리고 믿음과 희망으로 자유의지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 둔 까닭은,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고을마다 원로들을 임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에게 자유의지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고난이 다가와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유의지가 하느님의 영광을 만날 때 가능한 일입니다.
나의 자유의지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늘 기도하고, 언제나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