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북보은-선병국가옥을 찾아서
오랜 처마를 타고 올라간 지붕 위로 마른 풀잎이 자라나고,
갈색 솔잎이 하염없이 몸을 떨구어낸 기왓장과 황토벽을 거미줄 처럼 얽혀놓은
겨울 담쟁이가 회색 하늘 아래 시간 그림을 그려놓은 한국의 전통미,
옛 건축물을 볼 때면 참 아름답다는 느낌을 평안으로 가지게 됩니다.
속리산에서 흘러내리는 삼가천(三街천)이 큰 개울을 이룬 그 중간에
삼각주를 이루어 아름드리 소나무 숲속에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의 명당에 자리잡은
99칸 규모 큰 기와집이라지만 나랏님 대궐을 의식해서인지 원래는 130칸의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가옥이라 합니다.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토담길로 보아 가옥의 규모를 먼저 마음으로 느끼니
새로운 한옥을 만난다는 것 만으로도 야릇한 감흥에 휩싸이게 되는데
한옥의 선이 토벽의 선에서 먼저 시작되나 봅니다.

일작 지붕의 작은 쉼터 하나가 송림속에 아담하니 자리잡았습니다.

팔도장독대, 그속의 장맛
쉼터 옆 넓은 장독대에는 팔도 항아리가 놓여있고 그속에는 종가댁의
전통비법으로 담은 된장, 간장, 고추장이 자연 그대로 노출되어 익어갑니다.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함경도 항아리가 줄지어 섰는데
지방마다 제각각인 항아리의 특성을 적어놓은 표지판이 이채로운데다
항아리 모양이 다들 제각각입니다.

지난 "2006년 대한민국 명품 로하스 식품전"에서 1리터에
무려 500만원에 팔린 350년 된 덧간장(햇간장을 만들때 넣는 묵은 간장)도
이집 장독에서 나왔다니 장맛의 깊이를 대충 가름할 수가 있겠습니다.

윗대를 올라간 비문에는 조상의 공덕을 기리고, 그 옆으로
풍상을 겪은듯 한 사당이 송림 그늘속에 아담하게 자리잡았습니다.

효열각(孝烈閣)과 철비(鐵碑)
철재(鐵材)에 글자를 새겨넣은 금문(金文)의 철비는 처음보는 것이니
내눈에는 마냥 신기할 뿐이지만 이미 신라시대 때부터 철비가 있었다니
옛 문화의 단편을 다시 익히게 되는 기회도 가지네요.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사당은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제사를 올리는
양반댁의 전용물이지만 집밖에 있어도 집으로 간주될 만큼
정신적으로 선대와 후대가 이어지는 공간이기도 한다는 생각도 잠시,

사당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섰더니 뜻밖에서 비각이 서있으니 이곳은
제를 올리는 사당이 아닌 "효열각(孝烈閣)"이란 이름의 비각이었다는 것을 뒤에 알게 됩니다.
옛 양반댁의 비각이 이정도 규모라면 그 가세(家勢)를 가히 짐잘할 만 하겠네요.
묘한 정감을 주는 비각 모습에 쉽게 눈길을 돌리지 못하게 하네요.
한가지, 갈색 솔잎이 내려안은 줄 알았는데 솔잎보다 긴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스토로보잣나무란 생각이 드는데 혹 아니래도 상관없습니다.


130칸 한옥의 솟을대문을 들어서서
선병국가옥 세칸 솟을대문 앞에 서게 되는데 여느 양반집 솟을대문 보다
그 규모가 크고 뒤로 난 중문까지의 넓은 공간을 보면서 또 한번 놀라게 됩니다.

안담과 바같담에 둘러싸인 고즈넉한 가옥 앞에 서니
뒤편 멀리 보습산 허리를 감싼 하얀 운무가 한옥과 어울어져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 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솟을대문 지나 중문으로 다가서는 토지의 공간도 넓을 뿐더러
중문 역시 옛 양식 그대로 지어진 선이 아름다운 건축미를 자랑합니다.

안채로 들어서면 담장 아래로 화단이 조성되어 있는데 느티두릅나무가
우산 살처럼 드리워진 채 봄을 기다리니 한옥의 멋스러움과 잘도 어울립니다.

넓은 마당과 가장자리 정원수가 탁 터여지는 안마당에 서면
"H" 자형의 특이한 안채가 당당한 모습으로 일행을 맞이하는데


한옥의 선을 따라
팔작지붕의 빗물 흐름 이음세 부분이 제법 특이한 구조를 가진 건물입니다.

선병국가옥은 택이라 하기엔 건축 시기가 근대로 넘어오는 1900년초
개화기의 물결을 타고 개량식 한옥구조를 시험하든 때라
진취적인 기상으로 시멘트와 벽돌 등 새로운 건축자재가 사용되고
한옥의 규모를 크게하는 등 구한말 변화하는 한옥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학술적 가치를 지닌 중요민속자료 제13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곳곳에는 전통적인 한옥 양식이 접목되어 있으니 대청위의 올림문과
용마루의 선과 끝단, 암기와와 숫기와가 곱게 맞물려 있는 지붕이 그렇습니다.

어린 참새들이 정겹게 날아다니며 쉬기도 하는 기와 지붕을 보노라니
어릴적 내가 살았던 집도 9칸 기와집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에 떠올리게 되는데
지금은 그 옛집이 허물리고 양옥집으로 바뀐지 꽤 오래전의 일입니다.

오른쪽으로 살짝 비켜선 사랑채는 가운데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골방 약방 마루 등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안채를 둘러싼 "ㄷ"자형 행랑채는
대문간 문간방 행랑채 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또 한 사당채는
행랑채의 북쪽에 찻집 "아랑골"이 있는 사랑채와 축을 나란히 배열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행랑채와 헛간을 고시원으로 활용하고도 있는데
21대 종부인 김정옥(55세)씨가 그들을 직접 챙기고 있으며
최근에는 장담그기 체험 프로그램을 직접 운영하기도 한답니다.

재래식 화장실
선병국가옥에서 눈여겨 볼 만한 또 한 곳은 바로 재래식 화징실입니다.
땅을 넓게 판 뒤 크다란 통을 묻어두고 그 위에 세칸 화장실을 만들어
용변을 보면 그 내용물이 다 들여다 보이는데 "ㄴ"자형 작은 마루까지 있어
상당히 재미있는 건축 양식을 띄고 있어 이채롭습니다.

앞에 한 칸, 뒤돌아 두 칸,

얽히고 설킨 마른 덩쿨에 파릇한 봄싹이 돋아나면 또 다른
풍모와 운치를 자아낼 한옥이 아직은 계절의 온기를 느끼지 못함이 못내 아쉽습니다.

하지만, 까만 산머루가 힘겹게 기어다니는 토벽 사이로
옅은 봄기운이 스며들 때도 되었으니 우리가 돌아간 뒤에는
발빠르게 계절 하나 흥겹게 맞이할 것이란 생각을
균열된 틈새에 몰래 끼워두고 나옵니다.

들어가는 입구에 놓인 덩치 큰 소나무들은 아직도 보수와 증축공사가
진행중인 선씨 종가댁의 현재를 말해주는데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된 이 나무들로
선병국가옥은 앞으로 더 오랜 시간을 버티어 갈 것이 틀림없는
여지껏 내가 본 개인 한옥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가옥입니다.

여행을 다니면서 언제부턴지는 잘 모르지만 뒤돌아 보는 습관 하나가 생겼는데
돌아나오는 발걸음에 아쉬움이 담겨지는 건 충북여행에서
비단 이곳 뿐만이 아닐겁니다.

선병국가옥 안내
명칭 : 보은선병국가옥
충북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 154
선병국가옥내 "아당골" 사이트 : http://www.adanggol.com
043)542-9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