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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평소 나는 이렇게 불렀으므로, 이 글에서도 이렇게 호칭한다)을 내가 알게 된 것은, 지금부터 20년 전의 일이다. 1996년 제11회 불이상 연구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그 상을 주관하는 단체 불이회(회장 : 홍라희)를 만드는 6인 중의 한 분이 회장님이셨다. 불이회의 초대 회장을 지내셨고, 그 당시부터(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작고하기까지 명예회장을 하셨다.
11회 불이상은 우리 스승 중의 한 분이셨던 불연 이기영 선생님께서 심사위원장을 맡으셨고, 그 심사위원의 한 분으로 회장님이 참여하신 줄은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지금 불이상은 연구부문과 실천부문의 두 분야이고, 불교학자를 대상으로 해서 수여하는 연구부문의 수상자들을 보면 이미 학계에서 상당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분들이다. 좋은 연구를 많이 축적한 분들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크게 그렇지 못하였다. 초기에 논문 10여편을 보고 했을 때이고, 동국역경원에서 번역에 종사한 경험들이 나름대로 평가를 받았다고 들었다.
1996년의 불이상을 마지막으로 불연 선생님은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리고 금년에 20주기 행사도 했는데, 그 20년의 세월만에 회장님이 우리를 버리시고, 새로운 인연을 찾아서 가셨다. 나는 지난 20년 동안 회장님과 인연을 맺어오면서, 늘 감사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불연 선생님께서 이 사바세계를 떠나실 때 참으로 제자라고 감히 말할 수도 없는 형편인 나에게 회장님을 소개해 주신 것같만 같은 은혜를 늘 느끼면서 살아왔다.
지금도 그런 것으로 아는데, 불이회 연구부문 수상자인 학자들에게는 불이회 회원들의 모임에 초청을 해서 강의를 듣는 전통이 있었다. 나 역시 초청되었다. 당시 장소는 회장님의 성북동 자택이었다. 이후 이 집에서 이사를 하셨지만, 그 당시 그 집에는 한 20여명 정도 모여서 공부할 수 있는 강당이 있었다. 타원형의 탁자가 쭉 둘러져 있는 별채였다. 처음으로 한 것은, "천수경"이었다. 이미 1992년도에 "천수경이야기"(현재는, "천수경의 비밀"로 개정판을 냈다.)를 냈기 때문에, 그것으로 교재를 삼아서 강의를 했다. 그러면서 아마도 강의 중에 의상스님의 "법성게" 이야기도 많이 했던 모양이다. 당시부터 나는 이미 의상스님 펜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강조 덕분으로, "법성게"를 이어서 강의를 했고, 마침내 "승만경"까지 하게 되었다. "승만경"은 1995년에 번역을 해서, 민족사의 경전시리즈에 해주스님의 "원각경" 번역과 함께 하나의 책으로 묶여져 있어서 교재가 이미 준비된 상태였다. 불이회 자체가 여성불자의 모임이었으므로, "승만경"은 한번은 공부를 해야 할 필연성이 있는 텍스트였다. 나중 이야기이지만, "승만경"에 원력을 세운 불교여성개발원의 전 원장 이인자 선생님이 주도로 "승만경" 번역불사에 내가 참여하게 되었고, 내가 했던 역본(구나발타라)과 다른 보리류지 역본을 번역해 냈을 때, 이 때 역시 회장님의 재정적 후원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1996년은 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일들이 있었던 해였다. 그해 나는 학위논문을 쓰고 졸업을 하기도 해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직 전임은 아니었다. 시간강사를 하면서, 내가 설립한 "백화도량" 법사를 할 때이다. 집은 의정부 용현동의 임대아파트에서 살 때이다. 이런 시절이었는데, 불이회의 상을 받고 또 강의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근래까지, 정확히 말하면 회장님께서 서두셔서 "불이회 사십년"이라는 불이회 역사책을 읽기 전에는 그 당시 내가 몇 번이나 강의를 했는지, 언제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도 기록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불이회 사십년"에는 그 모든 역사가 다 기록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나는 깜짝 놀랐다. 아, 이 불이회라는 여성불자들의 모임이 결코 간단한 조직이 아니구나. 감탄했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회장님은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지신 분이셨다. 평생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책을 6권이나 만드신 분이다.
"불이회 사십년"에 따르면, 내가 불이회에서 강의한 최초의 날자는 1997년 2월 5일이고, "천수경"은 4회, "법성게" 3회로 연속되다가, 다시 1998년 9월 2일부터 총 15회를 연속해서 "승만경"을 강의하였다. 모두 22회이다. 이 기록은 정병조 교수의 23회에 이어서 2위 기록이다.
2
회장님이 이 세상에서 베풀어주신 보시바라밀, 마음을 나누어 주시고 물질을 나누어 주신 일(마음을 나누어 주시지 않으면 물질을 나누어 주실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마음과 물질은 늘 함께 움직이다!)에 대해서는 불이회와 보덕학회를 통한 불사라는 점은 많은 분들이 지적하는 바이다. 그런데 그 밖에 하나 더 있다. 회장님의 보시바라밀의 차원은 세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이회와 보덕학회는 드러나 있는 것이고, 기록으로도 남아 있다. 남이 알 수 있는 베품이다. 하지만, 남이 모르는 보시바라밀이 더 있다. 이 점은 직접 회장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고백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다.(그래서 많은 분들의 증언이 필요하다.) 이를 나는 '개인적 차원"이라 이름붙여 두기로 한다. 이 개잊적 차원의 보시바라밀까지를 생각하면, 회장님이 베푸신 일들에 대해서는 미국의 CIA나 대한민국의 국정원이 나서도 다 정리할 수 없고, 다 알 수 없고, 다 덮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여기서 회장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개인적 차원의 보시바라밀에 대해서, 처음으로 밝혀두고자 한다.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내게는 대단히 기쁜 일이다. 하지만, 이 기쁜 일이 가능해지는 데 회장님께서 떠나셔야 가능했다는 조건이 슬픈 일이다. 아쉬운 점이지만, 그야말로 할 수 없다. 다만,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회장님을 만났던 사람은 회장님을 기억하고 만날 인연이 없었던 사람은 회장님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기를 원해서이다. 그런 까닭은, 회장님과 같은 분이 또 이 땅에서 출현해야 하고, 그러한 출현을 우리가 대망(待忘)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다시 불이회에서의 강의를 하던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2회나 되는 강의를 했으니까, 자연스럽게 그 전후에 회장님과도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내가 살아온 모습이나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대해서 늘 관심을 가져주셨다. 그때는 내가 동국대 불교대학 인도철학과의 전임교수가 된 뒤의 일이었다. 그래서 월급도 받고 있었고,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을 찾았던 때이기도 했다. 그러나 회장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래도 아직 뭔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던 것같다.
어느날 전화를 주셨다. 제게 연구비라고 할까요?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 이 최초의 제안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도, 정중히 사양하였다. 그 대신, 당시 인도에서 유학하고 있는 우리 학과의 후배에게 회향하였다. 그 학생에게 전달하면 어떻겠느냐는 나의 수정제안에 대해서 회장님께서도 흔쾌히 허락하셨다. 2번의 장학금을 유학생에게 전달하였다.나의 인도기행문 "배낭에 담아온 인도"(여시아문)에는 이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러고 나서 얼마를 지냈을까. 또 전화를 주셨다. 지난 번 주시겠다는 연구비를 또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때 역시 나는 사양했다. 그리고 내 연구실에서 조교를 하고 있었던 학생(외국인 학생)이 어려우니까, 장학금을 주셨으면 좋겠다고 수정제안을 드렸다. 이때도 흔쾌히 허락하셨다. 이 학생은 정확히 몇 번이나 주셨는지 알 수 없지만, 몇 년에 걸쳐서였다. 이 덕분으로 이 학생은 박사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때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있다.
회장님께서 나중에 쓰신, 아름다운 에세이 "방귀예찬"(숙대 국문과동문회 엮음, "숙우문학" 제3집)에 따르면, 1999년의 일이었다. 회장님께 처음으로 건강에 적신호가 떴던 때이다. 소식을 듣고서, 삼성서울병원으로 문병을 갔다. 노크를 하고 방문을 밀고 들어가니, 침대에 안대를 하고 누워계셨다. 수술 이후 회복 중이셨다. 간병하는 분의 이야기에, 안대를 벗고서는 나를 확인하시고서는 하시는 첫마디가 이랬다. "00 장학금 줘야 하는데 ---" (이 이야기를 회상하니, 코끝이 찡해 오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 학생은 뒤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와서, 국내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그러나 회장님의 의지는 굽혀지는 법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어째서였을까? 정확히 알 수 없는데, 나에 대한 직접지원의 의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어느날 이렇게 말씀하셨다. "외국대학으로 가서 공부하고 싶으면, 그럴 기회가 생기면 이야기하세요. 제가 도와드릴께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거기에는, 내 컴플렉스가 무엇인지 내 꿈이 무엇인지를 아셨기 때문이었다. 다 알다시피, 나는 이른바 '국내파'가 아닌가. 그래서 트라우마가 많았다. 우리 학교는 교수가 된 지 만 5년이 지나면, 1년간 연구년을 주는 제도가 있다. 그래서 그 당시 나는 꼭 5년만 하고서, 문조건 해외대학에 가서 1년을 공부하겠다는 '뒤늦은 유학의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아마도 회장님과도 나누었던 모양이다.
이 제안은 쉽사리 학생들에게 회향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200년 9월부터 2003년 8월에 이르는 1년간의 연구년을 일본 교토의 "북쿄(佛敎)대학"에 갈 때, 회장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대로 도움을 받았다.일본에 가서 쓴 1년 동안의 경비에 절반 이상이나 되는 큰 도움을 내게 베풀어 주셨다. 그때 회장님은 한일교류관계로 교토에 오신 적이 있었다. 연락을 주셔서, 산조 가와라마치의 어느 호텔(지금 이름은 잊었음)에서 아침을 사주셨다. 지금 보덕회 감사 김영애 보살님과 함께셨다. 이때 역시 금일봉을 주시고 가셨다. 물론 그 당시 조교수 신분이었지만, 회장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집에 가족들은 두고서 나 혼자 일본가서 공부하는 이중생활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 많은 책을 사고, 그 많은 복사를 하고, 가고 싶은 데 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회장님의 베품 덕분이었다.
그러나, 회장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은혜는 여기서 "결코" 끝나지 않는다. 나는 회장님을 통해서 보시바라밀이 "청해서 주는 것이 아님"을 "청하기 전에 살펴보고서, 배려하는 마음으로 베푸시는 것"임을 깨달았다. 배웠다. 결코, 한번도 공적인 일에서나 사적인 일에서나 도움을 청한 일이 없으셨다. 하지만, 회장님께서는 나의 형편을 늘 살피시기를 그야말로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내가 일본에서 공부한 인연으로 2004년 아이가 교토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진학한 것이다. 이때부터는 1년에 한 번 있는 불이회 시상식에 참여하였을 때마다(미리 전화 주신 일이 많다. 오느냐, 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 바쁜 행사의 와중에서도 나를 구석으로 불러가서는 하얀 봉투를 주신다. 겉면에 "玄郁이"라고 친필로 쓰신다.(필체가 매우 좋으시다!) 속에는 늘 엔화가 들어있다. 아들의 장학금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2005년부터 2006년에 걸쳐서, 아이가 고2-3년이었을 때 내가 집사람을 교토에 보내게 된다. 집사람은 "북쿄대학"에서 연구생(석사과정 들어가기 전의 코스)생활을 하면서 주말이면 아이를 만나고, 아이에게 삼겹살을 구워먹이게 되었다. 그때는 아예 매월 월급을 주시는 것처럼, 자동이체로 집사람 장학금을 100만원씩 꼬박꼬박 1년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시고서는 그렇게 해주셨다. 아내는 원래 국문과 출신이고, 특히 언어학에 취미가 있었다. 이때 일본에서 일본어를 공부한 덕분에 우리가 엄청 큰 도움을 받았음은 함께 "나무아미타불" 번역 독서회에 참여한 분들은 다 알 것이다. 일본 중세 고어가 많이 나오는데, 우리 중에 집사람이 있어서 그 어려운 난관을 많이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공덕은 회장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뿐만 아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이 모두 '교토유학파'가 되어서 일본에 들락날락 하면서 일본불교를 공부할 수 있게 되었던 것 아닌가. 그리고 그 일본불교 공부가 내 학문인생이나 신앙인생에 획기적인 전기(轉機)를 가져다 주었던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니 사실은 한번도 겉으로 나서지 않으셨지만, 2005년 이후의 일본불교사독서회(일본불교사연구소) 운동 역시 다 회장님의 공덕이 키운 불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몇 년 전, 보덕학회의 지원금을 주시겠다고 "일본불교사독서회 활동 계획안을 내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 그때, 나는 정중히 사양하였다. 이유는, 그 당시에는 이미 "일본불교사연구소" 간판을 내리고 일본불교사독서회로 개편하면서 자력갱생을 하려고 마음 먹었기 때문이었다.
3
나는 지금도 회장님께서 왜 그렇게 저를 사랑해 주셨는지, 알지 못한다. 보덕거사님에 따르면, "교수님이 열심히 한다고 좋아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열심히 하는 교수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고 --- 불이상을 받은 분들 중에서도 한 두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저를 좋아하셨다는 증거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 이외에 더 있다.
하나만 더 공개하고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몇 해 전의 일이다. "불이상 심사위원장을 해주면 좋겠다"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회장님의 뜻이라는 전언(傳言)과 함께 ---. 물론, 나는 당연히 정중하게 사양을 했다. 아직 나이로 보나, 학계에서의 학문적 위상으로 보나 내가 심사위원장을 맡아서는 권위라든가 상에 대한 승복(勝福)이라는 점에서 어려움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사위원으로만 참여한 적이 한 번 있다.
이 에피소드는 회장님이 얼마나 나를 믿고 아꼈는지를 나타내주는 것일 터이다. 그래서 나는, 회장님이 왕생하셨다는 부음(訃音)을 듣고서는 내 나름의 추모시, 내가 드리는 조시를 하나 지었다. 그 제목이 "전생의 어머니, 내생의 어머니"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생의 다겁생래 동안 윤회하는 동안 회장님이 어머니시고 나는 아들이었을 정도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금생의 이러한 애정을 내가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2014년인가, 회장님께서는 지금은 작고하신 김종서 선생님(경주 동대 김성철 교수님의 선친)의 후임으로 보덕학회 이사로 나를 위촉해주셨다. 이사가 되어서, 실제로 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보다 나로서는 회장님을 한 번 더 뵈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점이 좋았다. 행복했다. 회장님은 아침에 뵙고 나서 돌아서도, 저녁에 다시 뵙고 싶은 분이다. 그런 면목을 보이시고, 그런 마음을 보이신 분이다.
아, 그런데 회장님으로부터 이렇게 사랑을 받은 사람이 어찌 나혼자 만이겠는가. 그 분은 왜 나를 포함한, 우리들에게 그렇게 하셨을까? 그 이유는 명백하다. 다 하나의 이유 밖에 다른 것이 없다. 그것은, 우리가 다 보살로서 보살의 길을 실천해 주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은 "금강경"(회장님께서는 마취성 진통제를 거부하시고 "금강경" 사경으로 투병하셨다고한다)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일이었다.
"모든 보살을 잘 호념(護念, 배려, 격려)해 주시고, 모든 보살을 잘 부촉(付囑, 부탁)해 주신다."
이 말씀은, "금강경"에서는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하시는 말씀이다. 부처님이 모든 보살들에게 그렇게 해주신 것처럼, 회장님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보살로서 살아가기를 바라셨다. 나는 이 회장님의 바람을 잊지 않을 것이다.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눈물)
회장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고백합니다. 회장님, 사랑합니다.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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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모관세음보살, 그 자비 이 땅을 적십니다.
선지식이 선지식을 알아보시지 않고 뉘 알겠습니까.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부처님의 가피이자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