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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가을 겨울, 30년
오 미 선
올해 8월말이면 교사의 길로 들어선지 30년이 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올해가 초등학교 보건교사가 된지 30년이 되는 해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이니 나도 언젠가는 교직을 떠나는 날이 오겠지만, 숫자가 주는 무게감 때문인지 어떤 형식으로든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올 해 봄에는 유난히 이팝나무 꽃이 눈에 들어온다. 작년에도 똑같은 길로 출퇴근을 하면서 봐왔을 텐데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고 신선하다. 아니, 정말 요즘 처음 보았다. 처음 내 눈에 들어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진정한 발견이란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
이팝나무라는 이름은 입하 즈음에 꽃이 피기도 하고, 하얀 꽃이 쌀알처럼 보여서 유래 되었다고 하는데, 이팝나무 꽃이 이렇게 예쁜지 올해 처음 알았다. 하기야 눈으로 보면서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일들이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그래도 요즘은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니 나도 나이를 먹는가 보다. 풍성하고 예쁜 이팝나무 꽃처럼 교직에 발을 들여놓던 나의 마음도 봄꽃처럼 설레고 행복했다. 그러나 항상 기쁘고 행복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때로는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듯 가슴시린 기억들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견디고 살아가게 되어있다. 한 여름의 풀들이 무성하게 일어나듯, 초록의 녹음이 짙어지듯, 나는 햇병아리 보건교사 티를 벗고 어엿한 중견 보건교사로 거듭났다.
교직 생활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09년의 신종플루 대란이다. 그때 힘들었던 일은 아침 7시 30분까지 출근하여 교문에서 전교생의 체온을 재는 일이었다. 30학급에 전교생이 750명 정도의 학교에서 근무할 때인데 매일 보고와 통계까지 겹쳐서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그런 생활이 몇 달씩 이어질 때 참 힘들었다. 그래도 사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어떻게 보면 보건교사라는 입지가 확고해지고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나쁘기만 한 일은 없는 거다. 위기가 곧 기회가 되기도 하니 말이다.
늘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이었지만 때로는 특별한 감흥으로 기억나는 에피소드도 있다. 처음 발령을 받았을 무렵에는 봄, 가을로 채변봉투를 걷어서 기생충 검사를 하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검정고무신’이라는 TV만화에나 나올법한 옛날 고릿적 이야기이다.
마음 따뜻한 추억도 많았다. 아이들은 보건교사를 엄마 같은 존재로 생각하여 자질구레한 도움을 구하러 많이 찾아왔다. 바지 엉덩이 부분이 뜯어져 난감해 하던 준석이가 삐뚤빼뚤하게 종이 귀퉁이에 써놓고 간 글씨. "고맙습니다! 준석이가" 나는 아직도 그 메모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한번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유리창 너머로 어린 학생이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식당을 나오며 " 왜 그러고 있었어?" 물어봤더니 " 그냥요. 선생님 좋아서요." " 그래? 참 고맙네. 너 이름이 뭐야?" " 네, 1학년 5반 배서경이에요." 아직도 나는 그 예쁜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어디서 이런 순수하고 맑은 영혼들을 만날 수 있을까싶다.
내 인생의 봄날은 지나갔다. 직장생활을 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사느라 바쁘고 분주했던 내 인생의 여름날, 삼사십 대도 지나갔다. 이제는 바야흐로 사색의 계절 가을이 다가왔다. 요즘이 나에게는 가을 같은 계절이다. 직장에서도 업무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시기는 아니어서 마음의 여유를 찾으니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도 귀에 들어온다. 아침에 출근하면 보건실 옆 복도에서 6학년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웃다가 큰소리로 인사를 한다. "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늘따라 더 예쁘세요. 하하하" 농담인 걸 알지만 싫지는 않다. " 그래? 고맙네. 어쩌면 그렇게 말도 예쁘게 하니. 너도 예뻐! 하하" 아이들이 등 뒤에 있다가도 달려 나와 인사해주니 반갑고 고맙다. "안녕! 일찍 왔네." "안녕! 좋은 하루!" 먼저 인사를 건네면 아이들도 샘솟는 에너지로 밝게 인사를 나눠준다. 아이들에게서는 늘 밝고 활기찬 에너지가 나온다.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나는 고맙고 행복하다. 이처럼 좋은 직업이 어디 있을까.
겨울이면 나무들은 나뭇잎들을 내려놓고 자연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내 인생길에서도 언젠가 머지않아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내가 직무를 내려놓고 자연인으로 돌아갈 날 말이다. 더 나아가서는 인생의 무대에서 왔던 곳으로 조용히 되돌아가는 날도 오겠지 생각한다. 인생이라는 놀이동산에 입장하여 나는 지금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폐장시간이 되기 전까지 나는 자유놀이 이용권을 마음껏 사용하려고 한다. 아직은 나에게 시간과 기회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타보고 싶은 놀이기구 앞에서는 줄이 길어도 기다리는 여유와 인내를 발휘할 것이며, 무섭지만 재미있어 보이는 놀이기구 앞에서는 용기를 내어 보려고 한다.
30년을 돌아보면서 아쉬운 것은, 교직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 그 첫마음 만큼 아이들을 충분히 사랑해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그 첫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맑고 순수한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아픈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보듬고 치유해주는 따뜻한 훈풍 같은 선생님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첫댓글 다들 어렸웠던 시절을 보낼 때였는데 선생님은 좋 은추억이 있군요 . 항시 감사하는 마음은 나를 맑게 일깨워 주는 둥지아닐까요? 좋은글 잘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