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시와산문 현상공모 수상자 특집____남현이
황사 점차 물러나 외 1편
남현이
아침마다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날카로운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빳빳하게 굳어있는 몸을 겨우 일으켜 거실로 향한다.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다 뜨지 못한 눈으로 베란다 창문을 흘깃 본다. 휴대폰으로 ‘오늘의 미세먼지 농도’를 확인한다. 서울의 미세먼지 농도 188. 대기질 나쁨. 짙은 황사의 영향으로 미세먼지의 농도가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따뜻한 봄을 넘어, 초여름을 향해가고 있지만 황사와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계절의 여왕 5월이 먼지의 여왕에게 자리를 넘겨줘야 할 것 같다.
밖을 나서면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유모차에 앉아있는 아기부터 나이 지긋한 노인들까지 각양각색의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각자의 삶을 위해 지하철역, 버스 정류장으로 우르르 걸어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흡사 무서운 전염병의 지배를 받는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나도 사람들과 같은 무리가 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알록달록 책가방을 메고, 분홍색 파란색 마스크를 쓴 채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모습이다. 조잘 조잘 할 말이 많은 데 작은 마스크가 아이들의 이야기를 방해하는 것 같다. 조금이라도 빨리 걸으면 금세 흘러내리는 마스크를 다시 주워 코와 입을 가리기에 바쁘다.
나의 어린 시절 등굣길에는 가방 속 엄마가 싸준 따끈한 도시락, 서늘한 아침의 온도를 높였던 친구들과의 수다, 그리고 짓궂은 남자 아이들의 장난이 있었다. 혹시 요즘 아이들의 학교 가는 길은 눈앞을 가리는 희뿌연 공기와 마스크를 쓴 어른들의 차가운 눈동자로 점철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하철에서 한 번 더 확인한 황사 농도는 올해 중 최고를 기록했다. 더불어 휴대폰 안을 가득 메운 정보들은 불안을 넘어 공포를 선사한다. 황사와 미세먼지로 인해 유발 될 수 있는 이름도 낯선 무시무시한 병들. 그 병으로 인해 곤두박질치는 삶의 질, 그리고 이를 예방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공기청정기와 약, 음식들이 휴대폰 화면을 튀어나올 듯 발버둥 친다.
시야를 가리는 황사를 뚫고 일터에 도착했다. 한동안 일을 놓고 싶었는데, 고심 끝에 낯선 사람들과 함께 다시 일을 시작했다. 같이 호흡을 맞춘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약속된 시간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서먹하다. 오래된 관계가 편한 이유는 서로의 감정과 행동, 심지어 그 순간의 판단까지 예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통한 기간이 짧으면 우연히 눈이 마주칠 때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 된다. 네모 반듯한 회의실에 모여 동일한 목표를 향해 가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색하고 민망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의 의견을 조율한다. 이런 시기에 가장 많이 부딪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이전에 켜켜이 쌓아놓은 나의 굳건한 ‘편견’과 오래된 ‘습관’이다.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이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일을 하면서도 예전의 내가 해왔던 방식, 과거의 기억, 혹은 내가 아는 누군가의 경험을 상기한다. 모두를 위해 가장 옳은 방법을 찾기 전에, 내 시선에서 좋은 것을 선택한다. 나와 다른 의견을 틀린 판단이라고 속단한다. 상대방의 눈을 보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배려하기 전에, 내 안의 무수한 소리와 기억들이 거대한 황사가 되어 나를 뒤덮는다. 아집과 신념, 짐작과 경험이 뿌연 먼지가 되어 온 몸을 에워싼다. 아침부터 공들인 화장이 옅어지고, 입술에 핏기가 사라진다. 빳빳하게 다림질한 옷에 구김이 가고, 이따금 커피나 주스를 쏟기도 한다.
일터에서의 치열한 공방을 마치고, 또 다시 황사를 지나 집에 돌아온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말끔하게 씻어낸다. 고작 하루 입은 옷이지만 행여나 미세먼지가 다닥다닥 붙어서 해를 끼치고 병을 유발할까봐 세탁기에 넣고 빨래를 돌린다. 위잉 위잉 잘도 돌아가는 세탁기를 멀뚱히 바라본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 돌이켜본다. 쨍쨍한 햇빛을 받은 바닷가의 고운 모래가 바람에 날리듯, 작은 입자가 된 후회들이 세탁기가 내는 소음에 맞춰 넘실거린다. 이런 저런 회한들이 허공에 떠다닌다. 아까 그 말은 하지 말걸.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던 그 사람에게 난 왜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이해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했을 때, 그 사람의 표정이 좋지 않았어. 괜히 미안한 마음을 감추려고 입을 비죽 내밀었던 것 같아.
세탁기가 제 할 일을 모두 마쳤다. 무겁게 젖어있는 빨래를 꺼내 거실로 가져간다. 리모콘으로 TV를 켠다. 잔뜩 주름진 옷을 요란하게 턴다. TV에서는 기상 캐스터가 내일 날씨를 이야기 한다. 올해 들어 최고 농도를 기록한 황사와 미세먼지 때문에 하루 종일 힘들었던 이들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고 한다. 며칠 동안 날씨 예보마다 화면을 가득 채우던 구름은 온데 간데없고, 앙증맞은 우산과 눈곱만한 빗물 그림이 모니터 가득 떠오른다. 기상 캐스터는 밝은 목소리로 오늘 늦은 밤부터 내일까지 전국적으로 비가 올 것이라고 외친다. 비가 내린 후에는 다시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캐스터의 목소리가 조금씩 잦아든다. 우산과 빗물의 그림 아래 박혀있는 일곱 글자에 시선이 꽂힌다.
‘황사 점차 물러나’
내일이면 며칠 동안 계속됐던 황사가 물러난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불평했는데 때가 되니 비가 내리고 황사가 뒷걸음질 치며 미세먼지의 농도도 줄어든다고 한다. 그러나 지독한 황사처럼 나의 시선과 마음을 가로막는 굳건한 편견과 오래된 습관은 좀처럼 물러날 줄 모른다. 한동안 보지 않았던 책처럼 먼지 쌓인 내 자리를 지키려 한다. 집에 돌아오면 늘 후회하면서도 기어이 다음 날에 다시 주워 담고야 마는 억지와 오기를 이제 내려놓을 때가 된 것 같다. 신념이라는 착각을 머금고 있는 고집과 아집이 내 삶의 다음 여정을 위해 순순히 물러나주길 원한다. 황사가 지나가고 비가 내리듯, 이전의 어리석음이 물러난 자리에 새롭고 선한 지혜가 비처럼 쏟아지길 바란다. 그 비를 오랫동안 맞고 싶다. 빗속을 하염없이 걷고 싶다.
그 밤, 신라의 밤
여대생 세 명이 첨성대에 올라갔다.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신 그들은 첨성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다가 성에 차지 않았다. 한 명이 외벽을 밟고 올라가 관측 문에 걸터앉았고, 이어서 나머지 두 명도 올라가 함께 ‘셀카’를 찍었다. 아마도 SNS에 올릴 ‘인증샷’을 위한 행위였을 것이다. 여대생들은 만취한 상태도 아니었고,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서였다. CCTV에 촬영된 여대생들의 모든 행동들은 조금의 망설임이 없었다. 그들의 휴대폰 카메라 플래시가 캄캄한 경주의 밤을 여러 차례 밝혔다. 이윽고 경찰들이 출동해서 제재를 가했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천사백 년을 굳건히 버티며 서 있던 첨성대는 치기 어린 이들에 의해 훼손 될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한 나라의 역사를 증언하는 존재는 한순간에 ‘좋아요’를 많이 받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그런 사람이 있다. 분명히 알지만 항상 낯설고, 좋지도 싫지도 않은 어떤 감정이 들지 않는 사람. 지나가는 말, 의미 없는 소리일지라도 밥 한번 먹자는 말이 안 나오는 건조한 관계. 만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어떻게 사는 지 궁금하지 않은 사람. 누군가를 통해 안부를 들어도 뒤돌아서면 금세 잊어버리는 존재. 나에게 경주가 그런 곳이었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4박 5일의 시간을 내어준 도시. 열일 곱, 지독한 사춘기의 한 조각. 하지만 그 이후로 단 한번, 아주 잠시라도 경주를 떠올려본 적이 없었다. 우연히 다시 경주에 가야 한다는 걸 알았을 때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그저 가족과 함께 가는 여행에 의미를 두었다.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네 시간을 달린 후, 드디어 경주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다 왔네, 하고 무심한 시선을 보내고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매끄럽게 쭉 뻗은 찻길의 양 옆으로 경주를 지키는 무수한 나무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듯 다 함께 넘실거렸다. 바람을 품은 나뭇잎들의 소리가 황홀한 합창처럼 울려 퍼졌다.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서, 경주에 오는 이들을 그렇게 진심을 다해 환영하고 있는 듯했다. 웅장하지만 싱그럽고, 포근하면서도 시원했다. 마치 지금까지 내가 거했던 모든 공간들을 빼곡하게 쌓아올린 거대하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 마침내 경주에 다다른 듯 했다. 눈앞에 펼쳐진 경주의 모든 풍경들이 설랬다. 고개가 아프도록 높이 솟은 빌딩도, 눈앞을 가리는 뿌연 매연도 없었다. 어딜 가든 푸른 잎사귀를 부지런히 흔드는 나무들이 점잖게 서 있었다. 적당히 큰 나무 위에는 오직 하늘 뿐 이었다. 나무를 뚫고 솟아오른 건물도 간판도 없었다.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곳. 다시 찾은 경주는 그런 곳이었다.
내가 알던 경주와 다른 곳이라는 걸 알았을 때 가슴이 두근거렸다. 숙소에서 짐을 풀자마자 찾은 곳이 바로 첨성대였다. 경주에 오는 수많은 이들처럼 의무를 수행하듯 첨성대로 향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지금껏 동전 안에 갇혀서 제 존재의 의미를 제대로 알리지 못했던 첨성대가 점점 가까워졌다. 하나씩 하나씩 정성스럽게 깎고 만지고 다듬어 차곡차곡 쌓아올린 365개의 돌들이 하나 되어 우아한 자태를 드러냈다. 첨성대를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모든 공간을 부드럽게 가르는 듯 유연하고 신비로운 아우라가 느껴졌다. 하늘을 향하고 있지만 땅의 기운을 품고 있는 영롱한 건축물이었다. 첨성대를 두고 진정 신라 시대의 천문 관측대인지 선덕여왕의 신성화를 위한 상징인지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내가 온 몸으로 느낀 첨성대는 분명 하늘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창조된 존재였다.
그 밤. 모두가 잠든 신라의 밤. 촛불을 든 학자들이 걸음을 재촉하며 첨성대로 향했던 이유, 좁은 첨성대 꼭대기에 빼곡하게 앉아 졸음과 불편함을 감수했던 연유는 하늘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목이 아프도록 하늘을 쳐다봤던건 백성이 농사지을 시기를 정확하게 정하기 위해서였다. 나랏일을 하는 어떤 이들은 권력을 잡기 위한 욕망의 속삭임에 순응하며 잘못된 길을 밟는 자신에게 그럴싸한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신라의 학자들은 백성들의 숭고한 노동이 헛되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아무도 일하지 않는 밤에 첨성대에 올랐을 것이다. 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을 보며 쏟아지는 잠을 뒤로하던 학자들의 고단하고도 의미 있는 움직임. 권력자들이 권위에 취해 휘청거릴 때에도 신라의 어둠을 가르며 첨성대에 올랐던 이들처럼,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자 지독한 피로를 감수했던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도 이만큼 지탱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지금껏 신라의 밤을 참 많이도 노래한건 아닐까.
첨성대의 신비로운 위엄에 취해있을 때 맞은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새까만 스커트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열일곱의 나였다. 이토록 황홀한 경주 땅을 밟고 첨성대를 눈앞에 두고도 그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든 것이 다 낯설고 서먹했던 고등학교 1학년 봄. 쫓기듯 떠나 몰아치는 계획으로 이루어지는 수학여행이 즐겁지 않았다. 그저 고등학교를 수료하기 위한 교과 과정에 불과했다. 할 수 있다면, 이 땅의 공기에 취해보라고, 첨성대를 온전히 바라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첨성대를 쌓아올리기 위해 손가락이 부르트고 지문이 없어지도록 돌을 매만졌던 선조들의 숨결과, 첨성대 위에서 해가 뜰 때까지 새로운 삶의 길을 찾으려고 애썼던 학자들의 순수한 열망을 느껴보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었다.
뚱한 얼굴로 관광버스에 올라타는 그 때의 날 보면서, 눈앞에 귀한 존재가 있어도, 그 가치를 못 본 체 지나쳤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창조된 이유와 각자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가치를 생각하지 않기에 아무렇지 않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함부로 훼손한다. 서로의 가치를 제대로 보는 눈이 있다면,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켜켜이 쌓인다면, 지금 이 땅을 사는 이들의 외로운 가슴에도 고결 하고 기품 있는 첨성대가 세워지지 않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캄캄한 인생의 밤이 찾아올 때마다 각자의 마음 안에 지은 첨성대에 올라 반짝이는 별을 보며 곤고한 삶을 위로 받고, 새로운 내일을 꿈꿀 수 있기를. 그 밤, 신라의 밤처럼.
남현이 /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2017년 『시와산문』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