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집 시섬동인지
초대시
박건호 <내 말은 잊어버려도 >외 4편
내 말은 잊어버려도
/ 박건호
내 말은 잊어버려도
깊숙히 웃음만은 익히리다
눈물을 거두어 가소서, 신이여.
마음 속
그늘진 어둠을
촛불로 밝혀 들고
무지개 언덕을 나는 가리다.
날개 없는 영혼을
내어 디디며
아직은 어린 그날을 기다리다
목이 마른 채
내 말은 잊어버려도
깊숙히 웃음만은 익히리다.
생일
/ 박건호
음력
정월
스무
이튿 날
온 마을을
떠들썩한 축제로 만들어 버린
지주의 장손
탯줄 가른 우렁찬 울음소리는
닭소리보다 밝은 아침을 몰고 왔느니
열여덟 살 손주 며느리는 대견스럽더란다
미역국 손수 받쳐 들으신
증조 할머니 부드러우신 한 마디는
(아가야, 참말 늬… 고생했느니라)
하늘이 그대로 쏟아져 고인
증조 할머니 마음 안에
한결 벅찼던 그날
하늘
/ 박건호
옛날 하늘 위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간다
눈부신 푸르름 속으로
혹은 햇살 속으로
자꾸자꾸 녹아 들어가는
나를 벗어나와
다시 손을 내밀어 보면
하늘은 없다
사람들은 어둠 속으로 떠나고
안녕이란 말도 없이
슬그머니 사라진 하늘
하늘은 내 유년의 기억에서
뽀오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가
나를 손짓하기도 한다
오늘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하늘이나 끌어 당길까
메밀밭 밤중에
/ 박건호
달밤을 걷는다.
메밀밭에 영아
네가 웃음을 짓고
네 웃음 반겨 달려가니
호젓이 빛나는 메밀꽃뿐,
하이얀 꽃잎마다 내가 젖는다.
손바닥 펼치면
별 이야기가 아련히 소근 거리는
옛날로 내가 밝게 핀다.
나의 영아야,
순수한 우리들의 강물은
어디에서 그쳤는가!
달빛과 메밀꽃과 나의 가슴과......
그리고
꽃으로 아롱져 온 네 목소리 앞에
나는 숨차게 달린다.
머언
그 달빛 아래
우리들의 마음을
질긴 명주실로 동여매게 해다오.
*대성고등학교 1학년 1966년 9월 18세 토우 박건호 책가방에는 교과서적 대신 문학책으로 가득했던 학창시절.
동덜미로 가는 고개가 등장한다.
이 고개 아래 저편 비탈진 메밀밭이 무대다.
헛바퀴만 돈다
/ 박건호
내가 굴렁쇠를 굴리면
네가 감기어서 구르고
네가 고무줄을 뛰면
내가 묻어서 뛰고
마음 잔잔한 양지 쪽에
웃음이 오고 가던 봄날을
신이 주던 운명의 잔에
철철 넘쳐 흐르던 우리들의 유년은
이제 때가 묻었는데
꽁꽁 얼음판을 미끄러져 달리던 달리던
거침없는 꿈이여
산너머 그 너머로
순하디 순한 즐거움을 둥둥 떠 나르던 종이연은
아주 실이 끊어지고
추억의 기슭에 너를 묻어둔 채
다시 팽이를 돌리면
무심한 세월이여 헛바퀴만 돈다.
첫댓글
시섬동인지 제23집 초대시를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이번 동인지에 초대시는 토우의 작품 중 그가 어린시절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詩을 선정하여 올려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