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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와 문자를 통해 회원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2016년 첫 답사지는 밀양으로 결정되었다. 참가 신청을 받고, 이한방 교수님께 일정을 짜 달라고 부탁드렸다. 답사자료집은 회원이신 동방사 백송현 사장님께서 인쇄를 해 주셨다. 답사를 위해 12인승 봉고도 렌트하였다. 당일 아침, 어린이 대공원에 모인 일행은 봉고 버스를 타고 밀양으로 달렸다. 봉고 운전에 서툰 나를 위하여 수헌씨가 운전대를 잡았다.
‣ 혜산서원(惠山書院)은 정평공 죽석 손홍량(靖平公 竹石 孫洪亮) 등 다섯 분의 일직손씨 선현들을 모신 서원이다. 정평공(靖平公)은 홍건적의 침입 때 안동으로 오신 공민왕을 충심으로 받들었던 분으로, 우리 백죽당(栢竹堂) 선조의 외조부가 되신다. 혜산서원 앞 입구에는 서원에 祭享된 다섯 분과 茶院書堂, 怡怡亭을 소개하는 글을 적어놓은 안내판이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옆에는 격재 손조서(格齋 孫肇瑞)의 신도비가 있었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격재선생신도비명 병서(格齋先生神道碑銘 竝書)를 지은 사람은 한말(韓末) 의병장으로 유명한 문소 김도화(聞韶 金道和)였다. 격재 선생은 단종(端宗) 때 시강(侍講)의 신하였는데, 단종에게 바친 충절을 생각하면 생육신처럼 추앙되어야 할 인물이라 평하고 있다. 생육신처럼 충절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韓國民族文化大百科事典』에 적힌 격재 손조서에 대한 기록을 보면, 학문과 시문의 대가로서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과 친교가 있었고 김굉필, 정여창 등을 가르친 것으로 나온다. 또 단종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 등이 죽은 후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절의를 지킨 인물이라 적혀있다.
격재선생신도비각(格齋先生神道碑閣)
상례문(尙禮門)을 들어서니, 혜산서원의 강당인 정원당(正源堂)이 보인다. 정원당 서편 앞에는 600여년의 수령을 가진 차나무가 서 있는데, 생각한 것보다 크기가 작아 의구심이 든다. ‘정원당’ 현판 밑에 붙어있는 分定記에는 향사를 지낸 날짜가 적혀 있었는데, 음력 2월 16일이었다. 내 생일날이라 혜산서원의 春享 날짜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정원당(正源堂)은 다른 서원의 강당처럼 좌우에 온돌방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중앙 대청과 온돌방 사이에는 들어걸개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들어걸개문에 있는 팔각형의 창살이 인상적이었다. 양쪽 추녀 밑에는 여의주를 입에 문 사실적인 모습의 용두(龍頭)가 조각되어 있다. 사찰 건물에서는 용두 조각을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서원 강당에 조각된 용두 조각은 보기 힘들다. 현재의 혜산서원은 1971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일직 손씨 문중의 서원들을 이곳으로 합치면서 세워졌다. 따라서 추녀 밑의 용두 조각은 전통적인 서원 건축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혜산서원 정원당과 차나무
혜산서원 정원당 추녀 및의 용두
강당 서편에는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있다. 일반적인 서원의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와는 다르다. 사당은 외인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이고, 문까지 잠겨 있으니 들어갈 수가 없다. 오래된 백일홍이 보여 사당 앞에 위치한 전사청(典祀廳) 뒤뜰로 들어가니, 보기 드물게 굵은 몸통을 가진 백일홍이 두 그루나 서 있다. 원래 이곳에 격재 손조서(格齋 孫肇瑞)를 모신 서산서원(西山書院)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 심은 나무가 아닐까 생각된다. 흔히 볼 수 없는 큰 백일홍을 배경삼아 서로 사진을 찍어 주면서 백일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분은 백일홍 두 그루를 근거로 원래 이곳까지 사당의 영역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였다. 흥선대원군에 의한 서원 훼철 때 사당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다. 혜산서원을 나오면서 보았던 소나무도 기억에 남는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상례문(尙禮門)앞 골목길에는 소나무가 정문을 지키는 무사처럼 양쪽으로 줄지어 서 있어 옷깃을 여미게 한다.
혜산서원 상례문 앞 소나무
다죽리(茶竹里) 손씨고가(孫氏古家)를 지나니 죽계서당(竹溪書堂)이 보인다. 수헌씨를 따라 들어가니, 단아한 건물이 서 있다. 건물 동편에 덧붙은 가적지붕의 모습이 특이하다. 비바람으로부터 서까래를 보호하기 위함인지 기와를 롤케익처럼 말아서 올렸다.
‣ 혜산서원을 나온 우리 일행은 이한방 교수님의 안내에 따라 오연정(鼇淵亭)갔다. 오연정으로 올라가는 길이 좁고, 경사가 급했기 때문에 밑에 봉고를 세워두고 걸어가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수헌씨는 자신있게 차를 몰았다. 위에는 의외로 넓은 주차장이 있었다.
오연정은 명종 때 문신인 추천 손영제(鄒川 孫英濟)가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별서(別墅), 다시 말하면 별장이다. 추천 손영제는 예안현감(禮安縣監)을 역임할 당시에 퇴계 선생에게 학문을 배웠고, 이러한 인연으로 도산서원을 창건할 당시에는 私財를 내어 창건을 도왔다고 전한다. 오연정 밑의 동네 이름이 ‘慕禮’인데, 추천 손영제 선생이 지은 것이다. 예안(禮安)을 사모한다는 의미인데, 여기서 예안이란 ‘退溪 先生’을 의미한다.
오연정은 임진왜란과 화재 등으로 여러 번 고쳐지었다고 하는데, 순조 때 지역 유림들이 모례사(慕禮祠)를 세워 추천 손영제를 제향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에 의해 훼철되면서 오연정만 남게 되었다. 후손들은 힘을 모아 1936년에 오연정을 확장하여 중건하였는데, 다행히도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였기에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갖게 되었다.
오연정(鼇淵亭)
오연정(鼇淵亭)은 밀양 최고의 답사지였다. 오연정은 상류에서 흘러 내려온 밀양강이 부딪쳤다가 휘돌아나가는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인쇄업체인 동방사를 경영하시는 백송현 선생님은 풍수에도 일가견이 있으셨는데, 오연정이 得水의 위치에 자리 잡고 있음을 설명해 주셨다. 담장 밖의 굵고 가는 소나무들 사이로 흘러가는 밀양강이 보인다. 마당에 서있는 나무와 기단 밑의 화초와 돌, 그리고 잔디를 통해, 조상이 남긴 유적을 보존하려는 후손들의 정성이 느낀다. 마당에서 오연정을 올려다보니, 푸른 물감으로 쓰여진 남벽루(攬碧樓)’ 현판이 보인다. 가까이 가보니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의 이름과 낙관이 보인다. 누각으로 들어가는 처마 밑에는 ‘영풍루(迎風樓)’란 현판, 안에는 ‘빙호추월(氷壺秋月)’이 쓰인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모두 검은 바탕에 흰 글씨이다. ‘빙호추월(氷壺秋月)’의 의미가 궁금하여 찾아보니, 빙호(氷壺)는 항아리에 들어있는 얼음이고, 추월(秋月)은 가을 달을 말하는데, 청렴하고 결백한 마음을 의미한다. 인터넷에서 ‘빙호추월(氷壺秋月)’을 검색해보니, 옛 사람들이 지은 만사(輓詞)나 제문(祭文)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이것은 ‘빙호추월(氷壺秋月)’이 고결한 선비를 표현하는 적합한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빙호추월(氷壺秋月) 현판
오연정 뒤편으로 올라가니, ‘모례서원경현사유지(慕禮書院景賢祠遺趾)’라고 적힌 비석이 서 있고 느티나무 아래에는 ‘오연(鼇淵)’이란 標石과 연못이 있다. 연못에는 바위가 세 개 있었는데, 어떤 분이 말씀하시길, 자라 세 마리를 표현한 것이라 하신다. 그런데, 정말 자라가 이 좁은 연못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鼇’가 큰 자라를 뜻하는 글자이니, 오연정은 자라와 어떤 연관은 있을 것이다. 이 연못에서 자라가 살지 않았다면, 자라는 어디에 있었을까? 혹시 ‘鼇’라는 글자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여 ‘鼇淵亭’이라 한 것은 아닐까? 상징적 의미라면 ‘오연(鼇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궁금하지만, 나의 얕은 지식으로는 답을 찾아낼 수 없다.
오연정 뒷편의 오연(鼇淵)
오연정 입구에는 거대한 크기의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은행나무는 후손이나 학생들을 가르치라는 교육적 의미가 있기에 서원 앞에 많이 심었다. 忘憂堂을 모신 달성의 예연서원(禮淵書院), 한훤당(寒暄堂)을 모신 도동서원(道東書院)은 모두 은행나무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니 이곳의 은행나무도 모례서원(慕禮書院)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겠다.
‣ 오연정을 본 후 월연정(月淵亭)으로 달렸다. 옛날 기차가 다니던 좁은 월연터널을 지나 도착한 곳이 월연정이었다. 우리 일행이 다닌 밀양 답사지는 좁은 길을 가야할 경우가 많아 덩치가 작은 봉고를 좋았다. 대형 버스는 통행과 주차도 힘들고, 더 많이 걸어야 하니, 시간도 더 많이 걸릴 수밖에 없다. 추화산(推火山) 자락에 위치한 월연정에 가기 위해 좁고 경사진 길을 올라야 했다. 올라가니 공사 차량과 자재가 곳곳에 쌓여있고, 일하는 인부들의 모습이 보인다.
월연정의 중심 건물인 쌍경당(雙鏡堂)은 복원 공사 중이었다. 다행히 일하시는 인부들이 없었기에 마음 편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쌍경(雙鏡)은 두 개의 달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은 밀양강과 동천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한 지리적인 특성을 감안하여 밀양강과 동천에 각각 비친 두 개의 달로 해석한다. 그런데 월연정을 잘 아시는 문중 어른의 말씀은 이와 달랐다. 월연대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어 밀양시청 문화관광과에 전화를 했었는데, 문중 어른의 전화번호를 주면서 직접 여쭤보라고 한다. 문중 어른께 전화로 문의를 드리니, ‘쌍경(雙鏡)’이 강에 비친 달과 산 위의 달이라 하신다.
월연대에서 바라 본 쌍경당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니, 월연정은 조선 중종 15년(1520) 월연 이태(月淵 李迨) 선생이 지은 것으로 원래는 월연사(月淵寺)가 있던 곳이었다. 월연(月淵)은 달이 비치는 연못을 의미하는데, 이는 쌍경당 앞을 흐르는 밀양강이 연못의 물처럼 고요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월연 이태(月淵 李台) 선생은 연못처럼 고요한 강에 비친 달을 보면서 학문을 궁구(窮究)하고 시를 짓고 친구들과 술잔을 들었을 것이다. 쌍경당 대청(大廳)에서 흘러가는 밀양강을 바라보니, 당시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상상이 된다. 그러고 보니, 월연정은 달이 뜬 밤에 와야 할 곳이었다.
그런데 월연정에는 또 다른 보름달이 숨겨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처마 밑을 보니, 거기에 둥근 달이 걸려 있었다. 창방 위에 놓여 장혀를 받치고 있는 화반의 모습이 보름달처럼 둥글다. 쌍경당을 지은 목수는 월연정(月淵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보름달과 같은 화반을 올렸다. 달이 뜨는 밤에 왔다면 분위기에 취해 보지 못했을 아름다운 화반을 나는 보았다. 남들이 뭐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보름달처럼 둥근 쌍경당의 화반이 월연정 건축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고 생각한다.
쌍경당의 둥근 화반
왼쪽 언덕 위에 있는 월연대로 갔다. 백송(白松)이 있는 곳이기에 반드시 봐야 할 곳이었다. 월연대(月淵臺)도 한창 보수 공사 중이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총 9칸인데, 가운데에 방이 설치되어 있었다. 천정이 낮아 키가 큰 사람은 머리가 닿을 것 같았다. 그런데 월연대를 둘러싸고 있는 담장이 너무 높았다. 월연대 위의 정자는 방안에 앉아서 흘러가는 밀양강과 쌍경당을 조망하기 위해 건축되었음을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높은 담장을 설치한 것은 애초에 이곳에 정자를 세운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내려와서 월연대를 올려다보니, 정자가 아니라 사당과 같은 느낌을 준다.
월연대 암벽의 한림이공대(翰林李公臺) 글자
월연대를 받치고 있는 암벽에는 ‘翰林李公臺’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고, 그 바위 위에 백송(白松)이 보인다. 껍질을 보니 소나무 같지 않은데, 잎은 솔잎이다. 돌연변이인지, 아니면 백송이란 품종이 따로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백송이 아니라 ‘翰林李公臺’라고 새겨진 글씨다. 옛날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글씨는 오늘날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도록 새겨져 있다. 사람들은 특별히 의도하지 않는다면 평소의 습관대로 행동한다. 바위에 새겨진 ‘翰林李公臺’에도 내가 짐작하지 못할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
첫댓글 정성과 공이 많이 든 상세한 답사기 잘 봤습니다.이런 글 이렇게 쓰기가 쉽지 않은데 수고하였습니다.근데 자료사진 보니까 인물이 들어간 사진은 선호하지 않는 것 같군요.같이 답사하다 보면 인물이 안 들어간 사진 찍기도 힘든데 말입니다.
저도 모르게 형성된 습관 같습니다. 인물이 조연이라면 괜찮은데, 인물을 주연으로 한 사진은 활용하기가 어려워서 유적 사진 위주로 찍게 된 것 같습니다.
수고 하셨읍니다
자세히도 기록하셨읍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4월에 발행되는 박약회 대구광역시 지회 회보에 실으면 어떻겠습니까?
다음 화요일에 편집회의 하는데 허락하신다면 파일을 hblee57@hanmail.net으로 보내 주소.월연(月淵) 이태(李迨)라는 자료가 있습니다. 다시 확인해주소
그렇네요. 어디에서 잘못된 자료를 가져왔던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