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보 My Life
글씨 그림 결합해 개인전 여는 게 꿈
서울고 총동창회 뉴스레터 14호(2018. 3. 12)
이해익(16회, 73세) 칼럼니스트
1945년생, 서울 생. 내 프로필의 첫머리다. 서울사람은 고향이 없다.
나는 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나 명륜동에서 자랐다. 때만 되면 천만 민족 대이동을 하는 고향 있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게다가 십 수 년 전 무슨 일 때문에 명륜동 성균관대학 쪽으로 갔다가 되게 실망했다. 자동차 왕복하기도 벅찬 도로에 조잡한 거리가 인파로 복작복작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널찍널찍한 한옥들에 거리가 쾌적했다. 우리 집 오른쪽 큰 나무 옆구리로는 상당히 큰 개울물이 풍요로웠다. 물속 돌멩이들을 제켜 가재를 잡고 환호성 지르곤 했다. 청명한 가을에는 빨간 고추잠자리가 일광욕을 즐기듯 느긋하게 비행했다. 망채를 들고 떼지어 뛰어다녔다. 스러져가는 매미울음이 더 크게 울리곤 했다. 지금도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다.
격변의 세월을 겪었다.
44년의 반포동, 방배동, 서초동, 우면동 등 강남생활을 접었다. 작년에 아현동사람, 즉 강북사람이 되고 보니 지난 70여 년이 눈물겨울 정도로 아련하다.
1945년생을 해방 둥(童)이라 불렀다. 내가 세상에 나온 지 꼭 한달 만에 광복을 맞았다. 집안의 겹 경사였다. 그래서 집안의 기대를 받았다. 반세기 가까이 8090선배들 꽁무니에 매달려 가난을 극복하느라 우리 세대 모두 젖 먹던 힘을 다해 뛰었다.
파란이 많았다. 6·25, 4·19, 5·16, 12·12사태, ‘1987’, 국정농단 등을 모두 겪었다. 이렇게 정신 없이 살다 보니 마음을 잡아주는 고향이 늘 그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딱하지만 고향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용케 70여년을 살아낸걸 보니 신기하기도 하다. 이번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게도 고향이 있지 않은가! 바로 서울고 시절 미술실이 나의 고향이다. 새삼스레 퍼뜩 깨달았다.
나에게 서울고 시절 미술실은 내 어린 시절 핵심인자들의
집결지이자 그 이후 삶의 모든 것의 뿌리였다.
1961년. 57년전 광화문 신문로 서울고등학교 교정 본관왼쪽 별채로 50평 남짓한 1층 건물이 있었다. 바로 미술실이다. 여기에는 밀로의 비너스, 줄리앙, 아그리파, 부루투스, 호메로스 등 석고상들이 우리가 그려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사과, 바나나 등 모조 정물들과 찌그러진 주전자, 때 국물이 흐르는 운동화 한 짝이 진열되어 있었다.
당시 우리학교는 경희궁 터에 있었다. 그러니 돌계단, 우물과 샘, 사시사철 옷을 갈아입는 뒷동산이 항상 그림소재였다. 이게 그림을 사랑하는 청춘들에게는 천국이 아니고 무엇이랴.
당시 국민소득 1인당 100달러 시절이었다. 그래도 우리 미술반원들은 수입한4B연필, 목탄, 켄트지, 수입산 붓과 물감들을 누렸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호사였다.
당시 미술교사 윤재우선생님(1917-2005)의 정열과 활약 덕분이었다.
그래서 미술재료들을
정기적으로 나눠줄 때는 선배가 후배들을 쥐잡듯 닦달했다. 군기를 잡기 위해 틈틈이 ‘빳따’도 들었다. 서울중·고등학교를 해방 후 단숨에 일으켜 세운 김원규 교장선생님과
호흡을 같이하며 미술영재를 키우기 위해 교육자로서 열정을 다하신 덕을 당시 우리가 톡톡히 누렸던 것이다. 서울대 11개 단과대학에 수석 입학하는 걸 언론에서 보도하며 경기고등학교 등과 경쟁하던 환경도 한몫 했다. 당시 미술반 주력멤버가 되면 그냥 설렁설렁할 수 없었다. 매일 수채화 한 점, 2~3일에 석고 데생 한 점을 그려내고 완성작품을 바닥에 깔아놓고 모두 돌아가며 보면서 의견을 주고받았다.
당시 미술반에는 고3으로 서시철형(14회, 전 조선일보 미술부장)이 있었다. 글, 그림에 모두 능한 선배였다. 그의 크로키(croquis)는 일품이었다. 그래서 서울고등학교 회보 경희지는 사진대신 그가 능수능란하게 그려낸 학교 교정 크로키로 도배되어 있었다. 조선일보가 현대적으로 글자체와 편집 틀이 업그레이드된 것은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업적이다. 고2에는 이우범형(15회, 동양화가, 삽화가)이 있었다. 별명이 부처님이었다. 모두 그를 중심으로 모였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 기성 삽화가로 활동했다. 수입도 짭짤해서 우리들의 물주였다. 화료를 받은 낌새만 보이면 우리는 그를 끌고 중국집을 찾았다. 탕수육과 빼갈을 홀짝거리며 그림과 인생을 읊었다. 서울고등학교가 낳은 문걸 최인호(16회) 소설가와 신문연재의 오랜 짝꿍이었다. 악필 최인호의 원고 글씨를 읽어내는 유일한 삽화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 슬프다! 두 분 모두 딴 세상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규남형(15회, 재미서양화가)도 고2였다. 인천 제물포중학교 출신이었다. 화풍이 아무래도 우리와 조금 달랐다. 그게 신선해서 많은 토론을 했다. 고1에는 강대옥(16회, 전 LG 전기부장)과 한상국(16회, 재미 건축설계)과 내가있었다.
윤재우 선생님과 미술반 선후배들에게
죄송스러운 마음 금할 길 없다. 강대옥은 서울공대 전기학과에 한상국은 연대 건축공학과에
나는 서울상대 경제학과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윤재우 선생님은 여름방학이 지나서야 화가 풀리셨다. 그제야 입학인사를 받으셨다. 내가 진로그룹 기조실에서 홍보·언론담당 임원 시절 여러 모로 선생님을 즐겁게 해드렸다. 기업 카렌다 용 그림을 사기도 했고 정상급 누드모델을 구해드리기도 했다.
17회에는 한운성 화백(서양화가, 전 서울미대 교수), 김상복 동문(전 보험교육원장), 장식 조각가(전 성심여대교수) 등이 있었다. 그 밑으로는 데생의 대가 계성근과 민정기 화백(20회, 서양화가)이 있다.
민정기는 미소년에 재주꾼이어서
선배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서울미대 시절에는 연극으로도 발군이었다. 슬픈 유태인 소녀의 작품 ‘안네의 일기’에서는 안네의 연인 피터 역을 맡아 꿈에서나 볼 수 있을 몽환적 연기로 뭇 여대생들의 가슴을 들뜨게 했다.
데생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아그리파 석고상 데생이 바로 그렇다.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의 정계진출을 돕고 로마제국을 측량하고 지리서를 저작해서 세계지도 작성의 기초를 닦은 장군이자 정치가였다. 데생은 서양문화사를 머리로 손으로 체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그리파는 동양적인 인물상에도 가깝고 골격이 뚜렷해 명암의 흐름을 확실하게 터득할 수 있다. 열심히 아그리파를 연필로, 목탄으로 그렸다. 곡면도 각면 석고상도 그렸다. 어른이 된 후 산업을 파악하고 기업을 진단하고 기업인의 업적을 평가하는 경영컨설턴트와 CEO연구가로 활동하는 동안 데생으로부터
수많은 영감을 얻곤했다.
미술실 벽에는 선배들의 걸작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 그 중에서도 김정남형(13회, 전 서울지방법원부장판사, 변호사)의 정물수채화는 환상적인 우리들의 아니나의 교본이었다. 마치 폴 세잔(Paul Cezanne) 처럼 큰 봉우리였다. 세잔은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20세기의 거장이다. 그렇게 색깔을 변화무쌍하게 또 대담하게 생략하면서도 디테일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림이라니! 김정남형의 정물수채화는 세잔의 ‘사과와 오렌지’처럼 가슴을 뛰게 했다.
그러던 중 노원부 선생님(서울고 1회, 서울미대 응미과 출신)이 새로 부임해오셨다. 어느 날 선생님이 미술실에 와서 정물수채화를 그리셨다. 점묘법의 쇠라(GeorgesP.Seurat)가 현신한 듯했다.
충격이었다. 내 그림도 변했다.
어려서부터 한문공부를 하고 붓글씨를 배웠다. 조금 커서는 서예대가로 유명하신 일중 김충현 선생님 문하에 입문했다. 중학교 시절까지 붓글씨에 열중했다. 고교시절 미술반 활동은 내게는 예능의 절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서미모(서울고 미술인 모임)2회
출품/ 구동존이(求同存異), 좌로부터 민정기회장(20회) 내외와
이해익(16회) 내외
대학에 들어간 후 데모 때면 선배들에게 차출당했다. 데모 전날 밤 포스터와 플래카드 작업 때문이었다. 또 선언문 등의 최종 마무리작업이 있었다.
그때 서울상대 경제학과는 사실 대학 데모의 산실이었다. 어떤 그룹이 데모를 주도하든 포스터, 플래카드, 선언문 다듬기 등은 내 몫이었다. 그래도 나는 경찰서 등에 잡혀간 적이 없다. 내 작업을 끝내면 데모와 멀리할 수 있도록 그들이 배려해 줬기 때문이다. 다른 그룹이 주도할 때도 내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첫 직장생활은 유원건설에서
시작했다. 해외건설업체였다. 당시에는 외국에 나가기가 힘들었다.
해외건설회사에서는
해외구경하기가
쉬웠다. 중동특수를 누리며 세계를 돌아봤다. 영국출신, 인도출신, 레바논출신 경영컨설턴트를 만나면서 인생의 진로를 새롭게 짰다. 한 회사에서 사장을 향해 뛰는 것보다 직장과 직종을 바꿔보는 게 필요하다고 느꼈다. 제조회사 진로그룹과 캠브리지로 옮겨 다니면서 체험이 필요했다.
기업을 바라보는 교수나 언론인들의 글보다 기업현장에서
겪은 경영자들의 글이 사회에 필요하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CEO를 위해서, CEO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과 경영을 글로 알리고 싶었다. 신문에 칼럼, 내 표현으로는 ‘이해익의 CEO에세이’가 탄생한 배경이다. 사실 이것도 되돌아보면 데생과 한학의 흐름이 기본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서울상대 은사로 강직하신 변형윤 교수님을 모시고 우리는 시민단체 경실련을 창업했다. 서경석목사(서울고 18회, 서울 조선족교회 담임목사, 전 경실련 초대사무총장)와도 교분을 쌓았다. 강철규 교수(전 서울시립대 교수, 전 공정거래위원장, 전 경실련 공동대표)는 상대 동기로 학생운동을 함께한 절친이다. 나는 초대 기업평가위원장으로서 경제정의 기업상을 만들고 연말에 시상식을 열었다. 격려도 비판이기 때문이다. 이 기업상 이후에 ‘한국CEO그랑프리’로 발전했다.
한국CEO연구포럼은 서울상대 은사이신 이현재 선생님(전 서울대총장, 전 국무총리)을 모시고 머니투데이와 공동주최, 서울대 경영연구소와 연구제휴로 매년 실시했다. 그러고 보니 내 사회활동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경영컨설팅. 둘째, CEO 칼럼니스트. 셋째, 시민단체활동. 넷째, 한국CEO그랑프리.
네 가지 모두 데생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나이70에 경영컨설팅, CEO그랑프리 두 가지는
깨끗이 접었다. 봉사가 되는 일은 힘닿은 대까지 해보고자 한다. 꿈이
있다면 글씨와 그림을 결합한 작품으로 개인전을 여는 것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