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극장 길따라 생각따라 / 박얼서
<1>
대학로의 밤은 옛 그때처럼 뜨거웠다
젊음의 열기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작은 오케스트라로 군림하던 저 통기타
발랄한 음률에 추억까지 펼쳐 놓는다
내가~ 말없는~ 방랑자라면~이 세상에~ 돌이~ 되겠소~
내가~ 님 찾는~ 떠돌이라면~이 세상~ 끝까지~ 가겠소~
발길을 옮긴 이곳의 밤은 더 이슥해져 있었다
거리가 온통 술에 취해 비틀거렸다
좁은 골목길에 취객들을 비집으며
긴급출동 순찰차가 지나가고
누군가는 길바닥에 쓰러지고
응급차가 숨차게 달려오고
내 발길이 야식집을 지나고, 노래방을 지나고
호객행위 아줌마를 뿌리치는 동안
이내 곧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여명에 아침에 햇살에 하늘에 구름까지도
세월의 시계는 잘 돌아가고 있다
아무런 고장 없이 작동 중이다
아침 햇살이 눈총처럼 쏟아지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히 숨어버린 간밤의 소란들
밤새껏 분주하던 삶의 그림자들
야식집도 호객행위도
감쪽 같이 사라졌다
그래서 누군가 말했나 보다
'역사는 매일 반복된다고 '
<2>
사람들은 일 찾아 인연 찾아 어디론가 바쁘고
나는 나를 찾아 나홀로 길을 걷는다
낯선 동네 입구를 지나다가
문득 커피 자판기를 만나는 일이라든지
불쑥 사나운 개가 짖어대는 일이라든지
누가 나를 이유없이 훑어보고
째려보는 일들까지도
길은 나에게 늘 친숙한 채 반기면서도
길은 나에게 늘 낯선 상대다
<3>
걷다 보면갑작스레 소나기를 만나 당황할 때도 있지만
걷다 보면
반가운 시골 오일장을 만날 때도 있다
걷다 보면
절경인 송림정에 올라몸을 풀어놓는
낮잠의 행운도 있고
걷다 보면
얽히고설켰던 의문점 그 하나가
예상외로 쉽게 풀릴 때도 있다
걷다 보면
수 년째 탈고를 미룬 채로
덮어두었던 시제(詩題) 그 한 줄의 꼬리가
번뜩 손에 잡히기도 한다
<4>
오지에 들어서면
작은 베낭은 오아시스다
생수와 음료 비스켓 초코렛 배터리까지
다 챙겼는데도 왠지 발길은 가볍다
길 양편의 산맥들이 내 발길을 응원한다
강물이 세월과 함께 그 흐름을 지켜왔다면
산은 역시 높은 이상을 상징함이다
드높은 기상으로
우뚝 솟은 뚝심 그대로
푸르름에서 엄동설산의 풍상까지도
아무 말없이 견뎌낸 세월둥이들
이게 다 우리의 강(江)이요
우리의 산(山)이요
우리의 길(道)이다
오늘의 시간 위에 내 발길을 얹는다
바라보는 눈길도 함께 얹는다
기암의 준봉들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는 호연지기다
<5>
걷다 보면
낯선 풍경인데도 아련한 향수 한 점
어렴풋이 다가서기도 한다
도로와 철길이
큰 강줄기를 가운데 품은 채
나란히 굽어 휘어지는 풍광 앞에서
잠시 발길을 멈춘다
이런 명소야말로
위치와 각도만 잘 맞춰주면
강물과 철길에
도로와 내 발길까지 함께한
공존의 길이다
<6>
걷다 보면
잘 정돈된 가로수길, 꽃길도 있고
빈촌의 골목길, 돌담길도 만나고
오르막 산길도 가야 한다
지금 여기
논두렁 밭두렁 사이를 걷는
이런 길이야말로
외갓집 처마 끝의 빗물을 받아먹던
또랑길 두렁길이야말로
내겐 더 편안하면서도
발길마저 행복하다
길은 언제나 내게
많은 생각과 질문들을 던졌고
함께 고민해 주었다
그때마다 길은
나에게
많은 것들을 따져 물었고
많은 걸 가르쳤다
<7>
도보여행은 발품을 얻는 행복이다
뚜벅뚜벅 생각하며
뚜벅뚜벅 살피는 일이다
한걸음 한걸음 나를 찾아가는 일이다
어제를 곰곰이 따져보는 일이다
<8>
걷다 보면
서운함이 곧 미안함이 되고
걷다 보면
지독스럽게 막혔던 집착과 고집들이
시냇물처럼 온순해져
흘러내리기도 한다
걷다 보면
천인단애의 벼랑 끝도 만나지만
걷다 보면
전망좋은 호숫가 외진 벤치에 걸터앉아
고단함을 씻는 기쁨도 있다
<9>
걷다 보면
어느덧 작은 포구가 있는길 끝에 이르러
지난 추억을 회억해야 한다
인생길이란 처음 가보는 낯선 여행길이기에
누구나 단 한 번뿐인 여행길이기에
사람들은 그 길 위에서
오늘이라는 그 길 위에서
많은 발길의 흔적들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나처럼 많은 이야기들을말하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