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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만의 중국인문기행, 무이산에서 주희를
글쓴이 김태희 / 등록일 2026-04-14
“이 여행에 참석하신 분은 모두 5복(福)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래전 다산연구소의 ‘중국인문기행’에서 한 참가자의 말이었다. ‘시간’, ‘돈’, ‘건강’에다 ‘집안의 무탈’을 열거할 때까지는 수긍했는데, 이어 다섯 번째로 ‘천운(天運)’을 꼽았을 때는 그저 다섯을 채우기 위한 농담이라 여겼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여행길이 막히고 나서야 실감했다. 아, 그 모든 여정이 바로 천운이었구나.
코로나19로 중단되었던 중국인문기행이 지난달 무려 7년 만에 재개되었다. 인솔자 송재소 교수의 ‘찐팬’들로 정원이 채워져 참가자를 따로 모집할 필요가 없었다. 이번 여행의 주된 테마는 ‘주자(朱子)와 무이산(武夷山)’이었다. 주자는 주희(1130~1200)의 존칭이다. 조선 선비들은 주자를 존숭하면서도 정작 무이산에 가보지 못했다. 무이산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자 자연유산이다.
무이산 하늘에서 노닐고, 구곡에서 뱃노래를
여행 셋째 날, 무이산에 도착했다. 산골짜기 사이로 비안개 속에 펼쳐진 대홍포 차밭을 걸었고,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물이 발처럼 드리운 수렴동(水簾洞)을 마주했다. 삼현사 건물과 암벽의 글씨가 수렴동이 오랜 세월을 품은 인문 공간임을 말해주었다.
숙소인 ‘무이산장’은 운치가 있었다. 뜰에는 800살 넘게 산 장수의 신, 팽조(彭祖)의 석상이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팽조의 두 아들 팽무와 팽이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백성들에게 복을 지었고, 후세 사람들이 이를 기념하여 ‘무이산’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여행객들이 석상 앞에 향을 피워 가족의 장수와 안녕을 기원할 수 있었다.
이튿날 날이 개었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드러난 무이산 산봉우리의 생김새는 우리나라 산세와는 사뭇 달랐다. 천유봉으로 가는 길에 ‘무이정사’가 있었다. ‘이학종정(理學正宗)’, ‘도남이굴(道南理窟)’ 등의 편액이 주자학의 위상을 말해주었다. 강학 공간에서 송 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으니, 수백 년 전 옛 학자들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천유봉(天遊峰)에 오르는 길은 암벽에 새겨진 좁은 계단과 돌난간을 따라 가파르게 이어졌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한 물줄기와 바위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어느덧 산 중턱에 오르니 발아래 정자와 멀리 구곡(九曲) 물길, 대나무 뗏목 등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점심 식사 후에는 그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대나무 뗏목을 타고 9.5km에 이르는 아홉 굽이 계곡을 유람했다. 굽이마다 암벽에 주희의 ‘무이도가(武夷櫂歌)’가 새겨져 있었다. 조선의 저명한 선비들이 구곡가를 읊은 것은 주희에 대한 오마주였을 터. 필자는 그저 유유자적 물길 따라 풍광을 즐길 뿐이었다.
무이산에서 머문 셋째 날, 다시 비가 내렸다. 주희의 유적지를 둘러보며, 그의 스승들을 알게 되었다. 첫 스승은 아버지 주송이었다. 주송은 세상을 뜨면서 오부리에 사는 벗이자 학문적 동지인 세 사람(호헌·유면지·유자휘)에게 14세 아들을 부탁했다.
스승 유자휘(호: 屛山)는 주희에게 향장나무를 심게 한 후 ‘원회(元晦)’라는 자(字)를 지어주며 말했다. “나무는 뿌리에 빛을 감추어, 봄이 되면 화려하게 피어난다. 사람은 몸속에 빛을 감추어, 정신이 내면으로 충만해진다.(木晦于根, 春容曄敷. 人晦于身, 神明內腴.)” ‘회(晦)’는 주희의 이름 ‘희(憙)’와 대비된다. 외면의 화려함보다 내면의 충실함을 기르라는 스승의 가르침이었다. 주희가 16세에 심은 나무는 오랜 세월을 견디며 크고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내면에 충실하고, 머지않아 돌아오길
유자휘가 세상을 떠나기 전, 곁을 지키던 주희에게 자신의 세 글자 부적을 일러주었다. 유적지에서 몇 차례 마주친 글귀, 바로 ‘불원복(不遠復)’이었다. 〈주역〉 ‘복(復)’괘에 나온 문구, “머지않아 돌아오니 후회에 이르지 않고 크게 길하다(不遠復, 無祇悔, 元吉)”에서 따온 것이다. 잘못을 깨달아 되풀이하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자기 경계와 회복의 가르침이었다.
주희는 24세에 노스승 이동(李侗. 호: 延平)을 만났다. 이를 계기로 주희는 유교에 전념하여 이학(理學)을 집대성했다. 주자학은 주희 말년에 탄압을 받기도 했지만, 주희 사후 100여 년이 지난 후 국가적 공인을 받으면서 오랫동안 사상계에 군림했다. 그러나 절대화는 권력과 억압을 낳기 마련이다. 그 정교한 이론체계로 인해 도리어 교조화되고, 이(理)의 엄격함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옥죄기도 했다.
무이산 명승에 노닐며, 대학자 주희의 자취를 밟는 동안에도, 중동의 전쟁 상황을 간혹 체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로운 여행은 세상의 평화와 개인의 5복을 의미한다. 이란을 비롯한 중동, 그리고 우크라이나에도 하루빨리 전쟁이 종식되고 자유로운 여행이 가능하기를 바란다. 모두에게 여행의 축복이 깃들기를.
■ 글쓴이 : 김 태 희 (역사연구자)
- 다산연구소 이사장
- (전) 실학박물관장
[저서]
〈실학의 숲에서 오늘을 보다〉(빈빈책방, 2021)
〈실사구시 제창자 양득중〉(공저)(경인문화사, 2021)
〈정약용의 삶과 글〉(실학박물관, 2019)
〈반계 유형원과 동아시아 실학사상〉(공저)(학자원, 2018)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