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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범 동국대 명예교수. ⓒ2005 데일리서프라이즈 박항구 기자 |
5·16쿠데타의 비밀과 정체 쿠데타를 한 주범들은 처음부터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떠들어댔다. 집권에 성공한 후에는 헌법에까지도 ‘혁명’이라고 써넣어서 세상을 웃겼다.
그들이 아무리 혁명이라고 참칭해도 군사반란이고 내란인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 헌정질서를 뒤집어엎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창출한 혁명이라면 그것이 민주주의가 아닌 것은 분명하고 그야말로 국가전복죄의 행위이다. 그런데 정치군인의 시도는 개인적 불평불만과 야심에서 발단한 불법적 권력장악이었다.
그러한 행위는 민주주의와는 인연이 없다. 결국 반공을 간판으로 건 군사파시즘으로 라틴아메리카식 권력게임이었다. 나라가 병들고 망해도 더럽게 망하게 되는 군부집권이 한국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로 당초부터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군대에 대한 전권은 미군 사령관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일개 소장이란 자가 기존편대에서 군부대를 뽑아내서 쿠데타를 할 수 있었을까?
당시 미군사령관 매구르더도 강경하게 원대복귀를 시키지 않고 몇 마디 떠들고 만 것도 이상하다. 미국도 기정사실로 추인해 간 지경이다. 참으로 이런 군대규율과 군체제가 있는가?
미국 중앙정보부(CIA)부장을 역임한 알렌 덜레스(아이크 시절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의 아우)는 영국의 BBC 방송프로에 출연해서 그가 재임 중 가장 성공한 정치공작은 한국의 5 ·16쿠데타라고 했다(오오에시노부(大江志乃夫), 戒嚴令, 岩波書店, 1992年 28쪽). 이 무슨 말인가? 그 진위는 다시 조사할만하다.
여기서 표면에 나타난 사실을 두고 살펴보자. 박정희는 일본제국의 괴뢰국 만군장교였다가, 일제패전(1945년 8월 15일) 이후 국방경비대 시절에 180도 전환, 남조선 노동당(공산당)군사부장으로 밀령을 받고 국방경비대에 침투조직공작을 하던 중 1948년 그 사실이 드러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 후 그는 군에서 불명예제대한 후 육군 정보실 문관으로 무급근무를 하게 된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해 군에 복귀, 장군까지 돼서 1961년에 쿠데타로 최고 권력자 자리까지 올라갔다. 쿠데타 주범의 간략한 경력이다.
1963년 대통령선거운동 당시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의 공산당 프락치 전력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것을 매카시즘적 모함으로 몰아쳐 동정표를 얻었다.
그 이후 그는 한 번도 전향의사를 밝혀 의혹을 해소하는 태도표명을 한 적이 없다. 보통사람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물론 그가 죽을 때까지 드러낸 주요 행적은 친일파인 야심가로서 행세한 것이다.
한국의 친일파는 ‘보수-우익’인가? (1) 일본 극우의 파트너로서 친일파가 일본 극우와 다른 점 - 일본의 극우나 우익은 나치스처럼 민족주의적 정서를 당연히 띠고 있다. 우익의 특성이 대개 민족주의적 성향을 띤다.
그러나 한국의 친일파는 아무리 ‘우익’이라고 자처해도 그들은 민족반역자이고 매국노로서의 계보를 이어오고 있다. 외세 상전의 종속된 자이기 때문에 민족애나 조국에 대한 충성이 없고 상전을 받든다. 이 점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스스로가 주인이기를 애당초 포기한 자이다. 자존심과 긍지를 잃은 정신박약아이다.
(2) 친일파는 보수주의자인가? - 한국에서 ‘보수주의’란 말은 서양의 관념을 표준으로 해 보면 보수주의가 아니다.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친일파가 보수하려는 것은 원래의 영국 에드먼드 버크가 말하는 귀중한 자랑할 만한 전통과 제도의 보수가 아니다.
원래의 보수주의는 자랑할 만한 전통과 역사적 제도의 발자취에서 인간의 시행착오를 겸허하게 받아드리는데서 오는 교훈을 따르고, 사회를 이성적 개인의 집합으로 보기보다 유기적인 전체로 가정해서 적응 할 것을 주장한다.
그런데 친일파의 보수는 그런 것이 결여된 채 그들의 부정하게 축적한 재산을 기반으로 한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것이다. 특히 그 식민지적 잔재와 과거의 오욕의 흔적 때문에 떳떳치 못한 것을 독재권력에 편승해 매카시즘의 방편으로 그 파수꾼노릇을 함으로써 자기 자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결국 “말이 많으면 빨갱이”란 우격다짐과 억지 논법으로 밀어붙여 온 것이다.
(3) 한국의 반공은 자유 민주주의를 고수해 왔나? - 한국의 반공은 친일파 집권과 그 시대의 기득권질서의 고수하기 위해 반공을 내세운 매카시즘으로 밀어붙였다. 결국 무리한 관권동원과 사조직의 테러리즘 동원이란 양면작전의 행동 돌격을 감행했다.
한국 친일파는 반공을 내세워 자유 민주주의에서 핵심인 인간의 생명권과 개인의 존엄성 존중과 인격주체로서 각자의 사상 신조 양심 및 세계관의 고백의 자유를 철저히 유린했다. 일제 친안유지법체제의 잔재인 전향강제와 사상탄압의 보안관찰과 사상을 이유로 차별했다.
그리하여 좌익적 신조를 지지한다는 혐의를 받게 된 자에 대해 차별, 고문하고 학살을 자행했다. 대표적 사례가 빨갱이 혐의자에 대한 무법적인 집단학살이다. 20세기 자유사회에서는 특정 이데올로기를 믿는다는 혐의를 받았다는 이유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법이 용인되는 나라는 없다고 하는데 말이다.
(4) 좌익혐의자 학살 등은 예외상황에서 자위책으로 불가피했는가? - 공권력이나 공권력이 묵인한 사적 폭력이 아무리 예외적 상황에서라도 법률에 근거가 없이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가사 그런 일이 일시적 실책, 실수라고 한다면 매카시즘이 60년을 지속해 오는 것은 일시적 상황이 아니라, 일상적 상황이 아닌가? 그러한 사태에 대해서 변명의 사유가 되지 못한다.
(5) 일본 극우 우익의 궤변과 친일파의 사죄 거부를 비교하면 - 일본의 극우나 우익은 결코 진심으로 사과 사죄한 적이 없다. 그들은 한국 침략이 한국인에게 축복이었고 아시아 침략은 해방전쟁이었다고 하며, 패전을 한 것이 분해서 못 견딘다는 감정이다.
한편 한국의 친일파는 친일 반민족과 매국행위가 문명 근대화의 불가피한 과정이므로 오히려 선각자이고 친일파의 공적은 칭찬받아야 하는데 오해를 해서 매도당한다고 불평한다. 일본의 극우가 자기 정당화를 하는 궁극적 근거나 배경은 신인 천황의 명령은 절대로 잘못을 인정할 수 없다는 황국사관(皇國史觀)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 친일파는 상전의 위세와 권위에 승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노예근성이 도사리고 있다.
일본 극우의 군국주의 선전물과 친일파의 정신구조 박정희가 이승만시절의 친일파와 다른 것은 노골적으로 일본 극우와 거래를 한 것이다. 정계와 관료계 뿐 아니고 경제 문화계의 유착이 더욱 깊숙하고 단단하게 맺어졌다.
전두환이 1979년 12·12쿠데타 모의를 착수하기 전에 일본대사에게 사전 통고할 정도면 알아볼 정도이다(박선원의 워릭대학 제출 학위, 박선원, 냉전기 한일협력과 국제정치-1980년 신군부 등장과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 國際政治論叢 제42집 3호 2002년 한국국제정치학회, 258쪽). 이와 같이 박정희 이후에도 친일파의 일본 극우 우익과의 연대는 절대로 동요함이 없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일본 극우 우익의 실태와 한국 친일파의 공생구도를 살펴보자.
(1) 일본 집권층은 패전 후에도 지배 실세 - 침략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정치경제 사회문화계의 집권세력은 패전 후 일시적으로 군대해체와 특무기관의 정비 등 손질이 있고 일부 민주개혁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 뿌리는 그대로 남고 집권의 주도세력으로 유지됐다.
일본의 자유민주당은 현재도 집권당이지만, 자유 민주주의와 연관이 거의 없다. 오히려 국수주의적 정객중심 재벌비호기득권 수구연합체라 할 것이다. 이 점은 우리가 해방 후 계속해 친일파가 주도세력이 되어 온 것과 동일하다.
(2) 일본지배층의 세계전략으로서 영미해양세력과의 협조 - 나카소네가 가장 정치의 스승으로 자문역으로 인정한 것은 관동군참모 세지마 중령과 오카사키히사히코이다.
세지마는 국내정치 총자문역이고 오카사키 전 대사는 대외관계의 전략가로 인정한다. 오카사키 히사히코가 쓴 ‘전략적 사고란 무엇인가?(中央公論新書)’는 지정학적 전략론으로 영미해양세력과 손을 잡아야지 일본은 번영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일본이 영미제국주의의 극동의 헌병보조원역할을 해서 한국을 문호개방하고(1876년 강화도함포외교),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를 꺾어서 중국에 대한 서구의 기반을 굳혀주고(1894년 청일전쟁), 러시아의 남진을 영미제국의 지원으로 물리쳐주는 전쟁으로 강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차 대전 후 영미와 대립한 것은 큰 실책이란 것이다.
(3) 한국 친일파의 세뇌용 선전물의 실태를 통해 본 일본 극우의 주장은 - 한국의 친일파로서 신세대의 신생친일파의 하나로 볼 오선화는 ‘반일을 하는 한국의 미래는 없다’고 하는 협박성 궤변서까지 내고 그러한 3류 이하의 출판물은 조영남의 빈곤한 내용물로 꾸며진 친일찬양론과 함께 일본 극우의 귀여움을 받고 있다.
일본 극우의 일선 선발대 역할을 자담하고 나선 것은 구로다 야스히로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원이다. 한국의 외국서점가에는 그의 지저분한 책이 널려있고, 그를 국영방송에서 모시고, 어느 대학에서는 강사로 초청해서 대접을 하고 있다.
그런 기류 속에서 시모지요 마사오(下條正男)의 ‘독도(죽도)는 한·일 어느 쪽의 것인가’하는 약 올리고 분쟁을 기정사실화하는 기록으로 남게 할 책이 나와서 진열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경도지사로서 일본 극우를 대변하는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대담집 ‘일본의 힘(文藝春秋社 2005년)’이 한국 친일파의 눈길을 끄는 모양이다.
그는 신헌법인 민주헌법 제정발표로부터 무성격의 나라가 되었다고 한탄하고 그와 함께 대담한 다하라(田原總一郞)는 태평양전쟁은 자위를 위한 전쟁이었다고 해서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 뿐인가? 나카가와 야쓰히로(中川八洋)는 ‘일본의 핵무장의 선택(德間書店)’이란 책에서 북한에 대한 핵폭탄공격을 제안한다.
한국친일파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總理學’이란 지도자론에서 패전은 최대굴욕이라 해서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은 없고 세계일등국이 되어 복수할 것을 제의하면서 천황을 국가원수로 하고 군대를 가지는 군사국가로 하는 헌법개정을 제안한다. 이미 그러한 개헌은 수순을 밟고 있다.
국제관계의 철칙 - 인정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거래 한국의 친일파나 그 아류는 미국이 없으면 당장 망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과 손잡고 있는 일본 극우의 연대가 끊어지면 국제적 고아신세가 되어 살아남을 수 없다고 걱정한다.
그러한 전제에서 미국이나 일본에 대하여 그들 비위를 거스르며 우리의 입장을 고집하다가 갈등을 빚게 되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화를 자초한다고 하며 그런 행태는 친북 용공 좌익이라고 소리 지르고 있다.
그러나 국제관계는 나라마다 각기 이해관계인 자기 국익에 따라 처리된다. 우리가 아무리 미국과 일본에게 짝사랑을 한다고 해서 봐주지 않는다. 국제관계속에서 자기 위상과 생존의 전략법칙을 따라서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국민적 슬기와 단합의 힘을 결집시켜 나가는 것이다.
19세기 강화도 조약으로 개방되던 당시부터 주로 미국과의 국제관계를 보자.
- 1876년 일본군함 운양호원정은 미국지원 하에 자행된 제국주의 함포외교. 당시 일본은 영미 제국주의 보조헌병역할을 함.
- 1904년 러일전쟁은 영미제국주의의 지원 하 일본이 러시아 남진견제.
- 1905년 카츠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은 한국을 일본예속 하에 넘겨줌.
- 을사조약 후 미국공관이 제일먼저 철수해 일본제국의 조선국 식민지화를 인정.
- 1919년 윌슨의 민족자결원칙은 아시아민족과 관계가 없음.
위 사정은 제2차 대전 이전의 사정이라 하자.
- 제2차 대전 당시나 그 후 일제의 패전 때까지 미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거부.
- 일본 항복 후에도 일본민주화 정책계획 같은 정책준비가 한국에 대해선 없이 친일파를 기용하는 냉전대결구도로 나아감.
- 1951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체결 당시도 미일은 한국을 당사국에서 배제.
- 그 후 아시아에서 미일 파트너십과 한미관계는 다른 차원으로 되어 구성돼 오늘에 이름.
우리는 국제관계에서 냉철하고 슬기롭게 단합된 힘으로 타개해 나가야 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다른 나라와 협상도 하고 압력도 가하며 타협과 절충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현대사에서 너무나 순진한, 아니 백치에 가깝게 스스로 무장해제한 채 특정외세 의존함으로 실수를 한 과거가 있다. 오늘날 친일파의 민족반역적인 외세의존의 무책임한 대응을 다시 되풀이 하게 해선 안 된다.
한상범 동국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