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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피낭 7 - 대성당을 보고 나와 시가지를 걸으며 루이 14세 패션을 떠올리다!
2026년 5월 14일 페르피낭 시내를 구경한후 다시 기차를 타고 스페인의 지로나로
갈 생각이라 죄네할 드골르가를 걸어 성문 카스티예문 Le Castillet 에
도착하니 문을 열지 않았기에..... 구시가지로 들어가 페르피낭 대성당을 구경합니다.
페르피낭 대성당 (Cathédrale de Saint-Jean) 은 생장 대성당 이라고도 하는데, 1324년에
건축 공사가 시작되어 185년 후인 1509년에 완공된 카탈루냐 고딕 양식의 성당
으로 분홍색 벽돌로 된 아치형 장식이 돋보이니 남프랑스의 고딕양식을 대표한다고 합니다.
엉겁결에 미사에 참석해 20여분을 함께하다가 대성당을 나와 뒤쪽으로 돌아가니 넓은 건축물이 보이는데,
긴 사각형 회랑이 둘러쳐져 있는 안쪽은 얼핏 공터로 보이니 무덤 캉포상토 Campo Santo 라고 합니다.
중앙 납골당은 1321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여기서 장례식이 이루어 졌으며 그후 복원되었으니
회랑에는 기둥 머리를 받치는 목재 리나입 등 매우 세련된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대성당의 완공에 200년 가까이 걸린 이유가 있으니..... 카페 왕조 필리프 4세는 아비뇽 유수와 성전
기사단을 탄압한 장본인으로 며느리들의 불륜으로 인해 분란을 겪었고 이후 지방
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그후 100년 전쟁이 발발했으니 공사를 계속할 수가 없어 늦어진 것입니다.
프랑스 왕위를 왕의 4촌인 필리프 6세가 잇느냐 아니면 외손자인 영국왕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왕이 되느냐
하는 명분 싸움에서 계기가 된 것은 모직업이 번창했던 플란데런 (벨기에 북부) 에서 일어난 반란입니다.
모직물을 생산하는 플란데런의 도시들은 양모를 생산하는 잉글랜드와 무역에 사활을 걸었는데
1336년 8월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를 지원하는 프랑스 왕국에 보복하기 위해
프랑스 본토와 속국들에 양모와 가죽을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반포하자 경악합니다.
잉글랜드가 양모를 팔지 않는다면 경제 위기를 겪을게 자명했으며, 또 플란데런 백작 루이 1세는 파리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프랑스왕에 충성하는 한편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고, 반항하면 가차없이 숙청
했으니 주민들은 프랑스 지배에서 벗어나 잉글랜드 편을 들기로 하면서 100년 전쟁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페르피낭 Perpignan (오크어 Perpinhan, 카탈루냐어 Perpinyà) 은 프랑스 남부
지중해안 스페인과 국경도시로 피레네조리앙탈의 주도인데 인구는 12만명이나
도시권까지 합치면 27만명이고, 주변에 평야가 많아 포도주, 과일, 채소가 생산됩니다.
스페인과 같은 카탈루냐어권인데도 근대 부터 프랑스 소속인데.... 원래 페르피냥은 루시용
백작이 다스리던 도시였으나, 1172년 후손이 없던 지라르 2세 백작은
자신의 땅을 바르셀로나 백작들에게 물려줌으로서 페르피냥은 카탈루냐에 속하게 됩니다.
1276년 아라곤 왕국의 왕이자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던 정복왕 하메스 1세가 마요르카
왕국을 건국했을 때, 페르피냥은 새로운 국가의 본토 (대륙) 영토의 수도가 됩니다.
이후 수십년은 이 도시 페르피낭의 역사적 황금기로 여겨지는데 70년 후인 1344년에 아라곤왕국의
페드로 4세가 마요르카 왕국을 합병했고, 페르피냥은 다시 카탈루냐 공국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골목길을 걸어서 궁전(?) 호텔 팜스에 도착하니 문은 11시에나 연다고 하고.... 조금
더 걸어서 자연사 박물관에 도착하니 역시 여기도 개점 시간은 11시(6월 1일 부터는
10시 반) 로 동일한지라 돌아오다 보니 거리에 다니는 여인들의 옷차림이 다들 세련되어 보입니다.
세월은 흐르고 프랑스는 강력한 중앙집권 하에서 유럽을 좌지우지 하는 나라로 성장하는데....
한국 예술종합학교 양정무 교수는 동아일보 ‘양정무의 미술과 경제’ 라는 칼럼에
쓴 ‘가발과 레드힐’ 루이 14세... 佛패션 노동자, 제철업보다 26배 많아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1661년 프랑스왕 루이 14세는 의복 칙령을 발표하니, 프랑스 궁정에서 국내산 의류와
액세서리만 착용해야 하고 최신 유행을 따르며 행사마다 알맞은 옷차림을 갖춰야
한다는 규정이었으며.... 궁정인들에겐 매년 여름과 겨울 두차례 의복을 교체토록 했다.
루이 14세의 법 집행 의지는 강력했다. 1687년 그는 아들의 옷이 외국산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이를
공개적으로 불태워 버렸다. 야생트 리고가 1701년에 완성한 루이 14세의 공식 초상화를 보면
자국의 의류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그의 정책적 결정이 30여년후 어떤 결과를 내었는지 잘 보여준다.
그림을 살펴보면 국왕이 입고 있는 의복과 장신구는 물론이고, 커튼 휘장과 카펫, 의자 등이 모두 프랑스
물품으로 가득 차 있다. 제일 먼저 눈길을 끄는 건 국왕의 목과 손목에 두른 화려한 레이스다.
최고 사치품 레이스는 베네치아에서 수입됐지만 루이 14세 결단 이후 프랑스 장인들은 레이스 제작에 나섰으니
초상화에 보이는 것처럼 폭이 넓은 화려한 레이스는 프랑스 장인들이 오랜 시간 공들여 제작한 것이다.
화려한 파란색 모피 망토 안에 보이는 은빛 드레스와 화면을 채운 붉은색 휘장도 프랑스에서 제작한 실크이다.
프랑스는 실크를 밀라노에서 수입했지만, 루이 14세의 결정 이후 프랑스 리옹 지역에서 대량 생산하게 됐다.
리옹 지역의 베틀 (비단을 짜는 기구) 수는 1660년 3296대 에서 1720년 5067대로
증가했다. 왕의 뒤쪽에 자리한 위엄 있는 팔걸이 의자와 함께 바닥에 깔린
고급 카펫은 루이 14세가 아낌없이 지원한 고블랭 (Gobelins) 공방에서 제작한 것이다.
루이 14세는 여러 패션 아이템을 유행시켰다. 초상화 속 루이 14세가 쓴 가발은 유럽 전역에서 유행했다.
가발과 함께 그의 패션 아이템으로 떠오른 것은 붉은 굽의 구두, 이른바 ‘레드 힐’ (talon rouge)
이었다. 루이 14세가 키가 작아 하이힐을 신었다는 통설이 있으나 그는 평균 보다 작은 체구가 아니었다.
추정컨대 하이힐은 원래 기병이 말을 다루기 위해 신던 실용적 신발에서 기원했다. 루이 14세는 여기에 붉은
굽과 화려한 장식은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는 패션 아이템으로 변모시켰다. 발레리노 시절 단련된 다리를
자신있게 드러내며 레드 힐을 착용한 그는 리본과 다이아몬드 장식이 달린 구두로 군주적 존재감을 과시했다.
레드힐은 1673년 프랑스 궁정에 도입되면서 단순한 장식이 아닌 왕과 특정 귀족의 차별적 권위를 드러내는
기준이 된다. 입궐 자격이 있는 혈통 귀족만이 구두를 신을 수 있었다. 레드 힐은 신발을 더럽히지
않는 고귀한 신분의 상징이자 국가의 적을 발아래 짓밟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표식으로 해석된다.
레드 힐은 프랑스 왕실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리고의 초상화 속 루이 14세가 드러내는 레드 힐은 이후 루이 15세
와 16세의 공식 초상화에서도 등장한다. 굽의 높낮이는 살짝 달라지지만, 붉은 색채는 여전히 강렬히 강조됐다.
레드 힐은 베르사유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루이 14세의 정적이었던 네덜란드의 빌럼
3세 조차 이를 착용했고, 영국의 조지 2세, 3세, 4세 모두 대관식 초상화에 이 신발을 신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 오스트리아나 독일, 18세기 포르투갈 궁정의 초상화에도 붉은 굽이 등장한다.
프랑스 혁명후 붉은 굽 구두는 귀족적 허영의 상징으로 조롱받았지만, 상징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영국왕의
시종들은 국회 개원식이나 행사에서 붉은 굽 구두를 신는다. 루이 14세가 도입한 레드 힐은 유행을
넘어 왕권의 과시와 차별적 권위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자 유럽 궁정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루이 14세가 각인한 드레스 코드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프랑스 사회 전체의 산업 구조에도 영향
을 끼쳤다. 실제로 프랑스의 패션 산업은 이때부터 놀라운 성장을 이룬다. 루이 14세
시대에 파리에서 일하던 임금 노동자의 약 3분의 1이 패션 관련 산업에 종사했다고 전해진다.
1847년 통계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96만 9863명의 노동자가 의류, 장신구, 신발, 레이스 등
패션 산업에 종사했다. 이는 당시 제철업 노동자 수가 3만 8000명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해 프랑스 경제에서 패션 산업의 비중이 일찍부터 컸다는 것을 알수 있다.
궁정 귀족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해마다 두차례, 여름옷과 겨울옷을 새로 맞추어야 했다. 베르사유에
상주하던 5000명의 귀족이 이행했는데 궁정 예복 한 벌의 가격은 노동자의 6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2000리브르에 달했다. 루이 14세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에게 더 큰 관심과 혜택을 줬다.
때문에 경제적 부담에도 패션은 귀족들의 경쟁을 심화시키는 장치로 기능했으며 이를 통해 왕이 귀족의
재산을 탕진시켜 권력을 약화시켰다고 해석하지만 귀족들에게 높은 연금으로 보상을 줬다는
점에서 귀족들을 예술과 패션에 몰두하게 만들어 정치적 긴장을 예술적으로 해소하려 했다고 볼수 있다.
루이 14세 시대의 패션은 궁정 내부의 유행에 그치지 않았다. 유럽 궁정과 상류층이 파리의 동향을 주시했고
각국 왕실은 프랑스에서 어떤 옷이 유행하는지 끊임없이 궁금해 했다. 이 결과 등장한 것이 인형 이었다.
폴란드 왕으로 즉위한 아우구스트는 파리에 거주하는 측근에게 프랑스 왕실의 복장에 대해 물으며
“단순한 드로잉만으로는 부족하니, 실제 인형에 옷을 입혀 보내 달라” 고 요구했다.
영국 왕실 역시 매달 프랑스에서 유행하는 옷을 입은 인형을 수입해서 최신 유행을 따르려고 했다.
세계최초 패션 잡지가 파리에서 탄생했다. 1672년 ‘메르퀴르 갈랑 (Mercure Galant)’ 은 유행을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옷 제작소 및 판매소등 구매정보를 안내했다. 천과 숄, 재킷, 바지, 가발에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번호는 판매처와 연결돼 있다. 패션이 ‘정보’ 와 ‘유통’ 을 기반으로 산업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72년간 프랑스를 통치한 루이 14세는 공(功) 과 과(過) 가 뚜렷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집권 말기에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시켰다고 비판받았지만, 프랑스의 고급스러움과 화려함의 시작을 알린 주인공이란 점은
부정할수 없다. 루이 14세는 전투적 군주이면서 유럽에 패션의 패러다임을 형성한 문화적 군주였던 셈이다.
돌아오다가 다시 페르피낭 대성당을 지나는데..... 성당을 보니 문득 동아일보 정양환 문화부장
이 오늘과 내일 칼럼에 쓴 “ 가톨릭 록스타와 화엄사 극락버거 ”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잠들어 있는 젊은이들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청년들이여, 신의 축복 아래 깨어나세요 (wake up)!” 지난달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별명은 빈자 (貧者) 들의 성자, 행동하는 개혁가…. 개중엔 “최초의
록스타 교황” (미국 음악잡지 롤링스톤) 도 있다. 아이돌 가수만큼 대중적 인기를 누렸으니 계기가 있었다.
2015년 교황은 본인 명의로 록 앨범 ‘깨어나라!’ 를 발매했다. 노래를 부른건 아니다. 청년들을 위한 설교에
음악을 깔았다. 물론 이전 교황들도 비슷한 시도를 했다. 허나 록 음악을 쓴건 프란치스코 교황이 처음이다.
유튜브에서 찾을수 있는 음악은 시작부터 놀랍다. 찌릿찌릿한 기타 리프(riff) 로 포문을 연다. 실험적 진보를
추구하는 프로그레시브 록 (progressive rock) 스타일이다. 교황의 온화한 목소리가 어색하지 않다.
누군가 “파파 (papa· 교황) 플로이드” 란 찬사도 보냈다. 전설적 록밴드 ‘핑크 플로이드’ 가 떠오른단 농이다.
너무 파격적이란 지적이 없진 않았지만 대다수는 반가워했다. 교황의 진정성 때문이다. 언제나 낮은 자세로
청년세대에 관심을 기울였다. 자서전 ‘희망(Hope)’ 에선 쌈박질을 일삼던 10대 말썽꾸러기 시절도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저 한마디. “다만 중요한 건 부끄러움을 아는 것” 이라며 젊은이들을 다독였다.
교황에 비할 바는 아니나, 국내 불교계도 MZ 세대 마음을 끄는 화젯거리들이 있다. ‘화엄사
극락버거’ 도 그중 하나다. 전남 구례군 지리산에 있는 화엄사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유서깊은 사찰. 봄마다 피어나는 홍매화가 아름답지만, 요즘 ‘꽃보다 버거’ 가 유명세를 탔다.
극락의 맛인진 모르겠다. 그래도 소셜미디어에선 난리가 났다. 콩고기로 만들어 “스님도 먹는 채식 버거”
올초 서울 쇼핑몰에 차려진 팝업스토어는 한달 만에 5000여명이 다녀갔단다. 함께
파는 ‘왕생 핫도그’ 인기도 만만찮았다. 둘 다 먹으면 극락왕생 (極樂往生) 한단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최근 조계종은 이렇듯 젊은 감각에 눈높이를 맞춘 시도가 적지 않다. 연애 프로그램 ‘나는,
솔로 (solo)’ 에서 착안한 ‘나는, 절로’ 열기도 기대 이상이다.
지난달 경남 하동군 쌍계사에서 열린 커플 매칭 행사는 24명 선발에 1300여명이 지원했다.
종교계의 이런 시도에 혀를 차는 이도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처신이 가볍단 가톨릭내 반발이
내내 따라다녔다. 하지만 천주교는 교황 재임 12년 동안 신자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아프리카는 1억 7600만 명에서 2억 8100만 명으로 60% 나 증가했다. 상당수가 10∼30대다. 불교 매체에
따르면 불교도 최근 3년간 꾸준히 신자가 늘고 있다. 특히 20대 여성 불자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종교가 허구한날 파격을 일삼을 필요는 없다. 중심잡고 위안 주는게 본질이다. 그래도 딱딱해 보이던 교계가
말랑한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는 노력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조계종 종정 성파 스님은 “바람 불고
눈보라 쳐도 산천초목은 솟아오른다” 고 했다. 정부는 막 솟아나는 청년들을 ‘표’ 로만 보지 않길 바라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