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과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선 조건이 꼭 있더군요. 일단 돈을 번 다음 또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모두 마친 다음에 희생과 나눔을 실천하며 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세상 것들을 통해 자신을 만족시킨 다음에 주님의 뜻을 실천하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뜻을 실천하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들을 통해서는 ‘나’를 만족시키기 너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로또 복권만 당첨되면 나눔을 실천하면서 행복하게 살겠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복권에 당첨된 것입니다. 그는 3개월 동안 행복했습니다. 오랜만에 주변 사람들에게 인심도 팍팍 썼습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난 뒤,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의 돈을 탐내는 것만 같아 불안해지더랍니다. 그리고 큰 돈 같았던 당첨금이 그렇게 크지 않은 액수라는 생각도 들더랍니다.
세상의 것들은 이렇게 만족을 모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해서 끊임없이 세상의 것들을 통한 만족만을 채우려고 애쓰고 있지요. 이 만족을 과연 채울 수 있을까요?
1960년부터 1980년까지 MBA 졸업생 1500명을 대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언제 할 것인가?”라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돈을 번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겠다.’라고 답변한 사람은 83%로 1245명이었고, ‘돈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내가 원하는 일을 하겠다. 그러면 돈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17%로 255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후 이 1500명을 다시 추적해서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101명이 15억 원 이상의 돈을 번 백만장자가 되어 있더랍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전자의 질문인 ‘돈을 번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겠다.’고 대답한 사람 중에 정말 돈을 많이 벌어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1245명중 단 1명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처음부터 돈과 상관없이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한 사람은 255명중 100명이나 큰돈을 벌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먼저 실천하면 세상의 것은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세상의 것을 먼저 해야 한다고만 생각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구해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과정 안에서 금전적인 피해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지요.
우리는 주님을 내 안에 과연 모시고 있나요? 혹시 세상의 것을 쫓기에 주님께 내게서 멀리 떠나 주십사고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의 것보다 먼저 내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주는 두려움
-이승주 신부-
더러운 영들이 마침내 쫓겨 나가고 오랫동안 그 영들에 시달리던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되찾은 이 기적적이고 감동적인 순간에, 마을 사람들은 그 능력을
펼치신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달라’는 청을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를 모두 알아맞혔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한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입니다. 졸지에 손실을 보게 된
이천 마리의 돼지들 때문인지 자기들에게도 불똥이 튈까 봐 걱정을 해서인지
마을 사람들은 하느님의 구원을 두려워하며 거부하고 달아나려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느끼며 주님의 현존과 능력을
체험했다 말할 때 대부분은 자기들이 기대하던 바, 혹은 이상적으로
여겨왔던 바가 이루어졌을 때인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그 성령의 활동이
내 생활에 원하지 않는 변화를 초래하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나 손해를
유발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 앞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 원망하며 불편해하는
마음을 감추기 쉽지 않지요. 압살롬에게 쫓겨 달아나면서 사울의 친척
시므이에게서 온갖 악담과 저주를 들었을 때 다윗은 그의 머리를 베어 버리는
대신 그마저도 하느님 뜻으로 받아들이려는 진정한 순명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지고 가야 할 마지막 십자가는 구원 앞에 선 두려움입니다.
손을 내밀어 주세요
-이명옥 수녀-
“수녀님! 침대 끝에 누가 서 있어요. 학교 가는 길에 자꾸 어떤 꼬마아이가 보여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자꾸 보인다고 하소연을 하는 젊은이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친구들은 오랫동안 외톨이로 지냈거나 본인이 감당하기 힘든 외로움을 겪곤 했습니다. 세상에 발을 딛고 살고 싶지만 스스로는 자기 세계에서 빠져나가기 어려워 누군가의 손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동네 사람들은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묶어두고 휘어잡으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자기를 보호할 옷도 안 입고, 참을 수 없어 밤낮으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면서 더러운 영의 노예로 ‘무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토록 희망이 보이지 않는 그한테서 저는 주님이 심어둔 갈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자기 마음에 꿈틀대는 진짜 바람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는 지긋지긋하고 더럽고 힘센 마귀들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열망과 간절한 소망이 자신 안에 있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생명으로 다시 거듭나고 싶다는 소망! 예수님과 맞닥뜨린 순간 가슴 밑바닥 끝까지 비추는 희망과 생명의 빛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알아보는 이 사람의 진심 어린 갈망을 보시고 가엾이 여기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힘으로 휘어잡거나 묶어두는 방법으로 치유하지 않으시고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시며 그를 더러운 영한테서 빼내주십니다. 예수님의 손을 잡고 구원에로 나가도록 끊임없이 우리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할 가엾은 이웃은 없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빛으로 어둠을
-김찬선신부-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오늘 복음은 저를 의아해하게 하는 점이 한 둘이 아닙니다.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하면서도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까지 하는 거나
악령인 주제에 감히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께 말한다고 하는 거나.
제게도 그런 체험이 있습니다.
제가 잠깐 본당에 있을 땐데 어느 날 미사 중
2층 성당으로부터 오는 어떤 강렬한 힘이 느껴져 올려다보니
어떤 사람이 거기서 미사를 드리며 저를 내려다보는 것이었습니다.
평일 미사에는 신자들이 모두 1층에서 미사를 드리는데
그분만 혼자서 컴컴한 2층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도 이상했고,
무엇보다도 그분의 눈빛이 보통 강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직감적으로 정신이 온전치 않거나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미사 후 신자들에게 얘기를 하니
그분은 밤 12만 되면 칼을 들고 휘둘러
가족들을 공포에 몰아넣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가정 방문을 하여 그분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며칠 안 있어서 인사이동이 되는 바람에 직접 만나 확인치는 못했지만
그 체험은 너무도 강렬해서 지금도 기억이 선명합니다.
그런데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드는 생각은
그 영이 얼마나 대담하면
미사에 와서 하느님의 사제와 대결을 하나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때도 미사 드리는 내내 지지 않으려 눈으로 기 싸움을 했지만
지금도 저는 악령에 대해서는 아주 담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과연 영들의 각축장이고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더욱더 치열한 영들의 각축장입니다.
그것은 악령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자기들의 근거와 소굴로 만들려 하기 때문입니다.
악령은 하늘가기를 싫어하고 우리를 자기들 거처로 차지하려 하고,
우리가 안 되면 돼지 안에 머물지라도 이 세상을 떠나려 하지 않고,
자기가 머물던 지방도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악령들을 주님은 쫓아다니며 우리에게서 몰아내십니다.
주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시어
이 악령들과 대결을 하여 이기신 분이시지요.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면 악령은 마지막 발악을 하지만
나오라는 주님의 명령에 꼬리를 내리고 사라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인도로 악령과 대결하면 됩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악령은 고통을 미끼로 군림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인간은 두려워하면서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령을 두려워 피할 것이 아니라
직면하고 대결을 해야 하고 이겨야 합니다.
어떻게?
성령을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무장함으로써.
어둠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고
빛이 없으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둠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이 없는 겁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사라지는 것이고, 없는 것입니다.
빛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한
어둠의 세력이 있을 곳은 없습니다.
불신이 가져온 불안감
- 이진원 신부-
주변에서 보는 가장 안타까운 모습은 ‘불안감’ 속에 사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잘못하면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할까 봐 불안해하고, 청소년들은 성적이 떨어질까 봐 시험기간에는 주일도 거르기 일쑤다. 대학생들은 취업 걱정에 친구들과 경쟁을 하고, 취업을 한 뒤에는 세상에 뒤쳐질까 봐 불안해한다.
부모들은 자녀가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질까 봐 불안해서 아이들을 쉴새없이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돌려대고, 연인들은 서로를 잃게 될까 불안해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는다. 사람들 마음에 온통 불안감투성이다. 심한 경우 불안감으로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오늘 복음의 마을 사람들은 돼지 떼의 죽음을 보면서 예수님 때문에 무엇을 더 잃게 될까 봐 불안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나줄 것을 청한다. 마귀 들린 사람이 멀쩡해진 것보다 그에 대한 대가로 돼지 이천 마리를 잃은 것이 더 크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 마을에 계시면 벌어질 일들이 불안하다. 변화하는 것도 두렵고 예수님을 믿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불신’?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적이다. 그리고 불신은 그 사람에게 ‘불안감’?을 불어넣어 그 사람을 피폐하게 한다. 하느님께 대한 불신도 우리를 세상에 얽어매는 족쇄가 되어 돌아온다. 세상을 다스리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실 것을 믿는 만큼, 마귀 들린 사람을 낫게 하는 능력을 보고 믿는 만큼, 지금은 손해인 것 같은 그 신앙이 우리한테는 어떠한 세파도 이겨낼 수 있는 진정한 평화로 되돌아올 것이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비싼 금은 무엇일까요? 순금? 백금? 아니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금은 ‘지금’이라고 하네요. 하긴 지금이라는 현재의 시간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물론 많은 이들이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기는 하지만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시간은 현재라는 이름의 ‘지금’입니다.
사실 우리말을 잘 보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과거를 뜻하는 순 우리말은 ‘어제, 그제’입니다. 그리고 현재, 지금(지금이라는 말이 순 우리말로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지만 사실 한자입니다)을 뜻하는 순 우리말로 ‘이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래를 뜻하는 순 우리말은 무엇일까요? 이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글쎄 미래의 순 우리말은 없답니다. 이는 곧 과거와 현재는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미래는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과거는 현재를 잘 살기 위해서 필요하고, 현재는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미래를 걱정하는 행위는 가장 어리석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는 영어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현재를 뜻하는 영어 ‘Present’의 어원은 선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즉, ‘현재는 선물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라는 선물을 찾는데 몰두하고, 현재를 즐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2월의 첫날입니다. 2010년 1월 1일을 맞이했다고 오늘부터 정말로 잘 살아야지 하고 다짐하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대로 산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한 달이 후딱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과거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과거가 이렇다고 미래도 그럴 것이라면서 걱정하고 포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는 현재이니까요.
예수님께서는 지금 행해야 할 것을 절대로 미루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치유를 멈추지 않으시지요. 오늘 복음을 봐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들이 들린 사람을 곧바로 고쳐주십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포기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포기란 없습니다. 그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을 설득하려해도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면서 마귀 들렸던 이를 고쳐주십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잘 볼 수 있는 부분이지요.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고 따르겠다는 우리 역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포기하지 않고 지금 해야 할 일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더러운 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은 물론, 항상 주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행복 속에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내 곁에 있는 모든 더러운 영의 유혹에 대해 지금 당장 말하도록 합시다.
“더러운 영아, 나가라.”
인생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일은 자신의 많은 부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
<어제의 나를 거두어가시고>
-양승국신부-
언젠가 단골 이발소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날따라 늘 면도해주시던 자매님이 안계셨습니다. 그 대신에 ‘상당히’ 연세가 있으신 할아버님께서 어울리지 않게 하얀 가운을 입고 면도사 역할을 하고 계셨습니다. 제 앞 사람한테 면도하시는 폼을 봐서 할아버님은 ‘초짜’ 알바가 분명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 차례 때 저는 무서워죽는 줄 알았습니다. 하시는 것이 영 서투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세가 있으셔서 면도칼을 쥐신 손이 가늘게 떨렸습니다. 그런 할아버님께 얼굴을 맡겨드리고 있노라니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안 그래도 만만치 않은 얼굴인데, 칼자국이라도 하나 더 생기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머릿속에는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꼬마 때 들은 이야기, 어떤 이발소에는 무서운 이발사가 있다, 그 이발소의 특징은 사람들이 들어가기는 하는데 나오지는 않는다, 그 이발소에는 지하실이 있고, 어느 순간 이발의자가 자동으로 바닥이 밑으로 꺼져버린다...
어제 1월 31일은 가난한 청소년들의 사도이자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의 사부이신 성 요한 보스코(혹은 돈보스코)의 축일이었습니다.
돈보스코께서도 어느 날 저와 비슷한 체험을 하셨습니다. 돈보스코가 사제로 서품된 지 2년 정도 지난 때,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사랑으로 활활 타오르던 1943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머리를 깎으러 단골 이발소에 가셨던 돈보스코는 거기서 한 어린 소년을 만납니다. 당연히 그 소년은 갓 이발소 일을 시작한 왕초보였습니다. 바닥이나 쓸고, 이발 도구를 정리하고, 겨우 면도를 위한 비누칠 정도 하던 아이였습니다. 그 소년이 돈보스코의 얼굴에 비누칠을 하기 위해 다가왔습니다.
“친구야, 네 이름이 뭐지? 나이는 몇 살이고?”
“카를리노예요, 열 한 살이고요.”
“좋아 카를리노 비누칠을 잘 해다오. 아버지는 안녕하시냐?”
“돌아가셨어요. 엄마 밖에 안계세요.”
“저런 저런, 가엽구나.”
대화가 오가는 중에 카를리노는 비누칠을 끝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돈보스코는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를리노, 어디 가니? 면도를 해줘야지. 자, 이제 용기를 내고 면도칼을 가져와서 내 수염을 깎아다오.”
그 순간 주인이 깜짝 놀라서 달려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맙소사, 신부님! 이 아이는 초짜예요. 아직 면도를 못하지요. 그저 비누칠만 하는 아이랍니다.”
돈보스코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언젠가는 이 아이도 면도를 시작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내게 시험 삼아 한번 해보게 기회를 주는 것도 좋을 겁니다. 자 카를리노, 용기를 내거라!”
카를리노는 사시나무 떨듯 하면서 돈보스코의 수염을 깎았습니다. 사실 돈보스코도 카를리노가 면도칼을 턱 주변에 댈 때에는 등골이 오싹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너무 세게 깍은 곳도 있었고, 몇 군데 작은 상처가 나긴 했지만 카롤리노는 면도를 끝냈습니다. 돈보스코는 긴장으로 얼굴이 잔뜩 경직된 카롤리노를 향해 활짝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했다. 카롤리노! 이제 우리는 친구니까 자주 나를 만나러 와주길 바란다.”
나중에 카롤리노는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로 들어왔습니다. 그가 오라토리오에 들어오던 날 돈보스코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야, 보다시피 난 가난한 신부란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게 빵이 단 한 조각 밖에 남지 않는다하더라도 난 그걸 너와 나눠 먹을거란다.”
그 후 카롤리노는 훌륭한 살레시오 회원이자 돈보스코의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동반자가 되어 50년간 오라토리오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돈보스코는 당시 어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길거리 청소년들에게 다가섰습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억압과 죄와 고통의 족쇄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들을 해방시켜준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돈보스코는 그들 안에 깃들어있던 가능성을 눈여겨보셨습니다. 끊임없이 그들을 격려하고 지지했습니다. 그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그들에게 장밋빛 청사진을 펼쳐놓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 때문에 죽을 고생을 다하고 있는 한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더러운 영의 활동으로 인해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지 못하고 무덤가에서 살았습니다. 더러운 영이 활개를 치기 시작할 때 마다 그의 영혼과 육체는 처참하게 망가져갔습니다.
이토록 비참한 삶을 견뎌내던 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그를 사로잡고 있던 더러운 영을 몰아내십니다. 그를 자유롭게 만들어주시며 새 삶을 부여하십니다. 그가 지니고 있었던 태초의 아름다움을 회복시켜주시며 새롭게 출발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어제의 나를 거두어가시고, 새로운 나를 선물로 주십니다. 지난 날 내 삶을 휘감고 있었던 어둠과 슬픔의 자취를 말끔히 거두어가시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해맑은 하늘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와 늘 함께하시도록
-조명연-
어느 교도소에 교화를 담당하는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신부님은
죄수들을 매일 찾아가면서도 처음 본 사람처럼 늘 반갑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넵니다. 그러자 한 죄수가 “아니 맨날 얼굴 보면서 왜 인사는 또 하고, 또 하는 거요? 짜증나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신부님께서는 “어제 내가 본
당신은 어제의 당신이고, 오늘 본 당신은 완전히 새로운 오늘의 당신입니다.
하루하루 변화하는 당신이 반가워서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인사하는 것입니다”
라고 답변하셨다고 하네요. 신부님은 이렇게 상대방의 새로운 모습을
바라보았기에 매순간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모습이 바로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당시 부정적으로
평가받았던 병자, 세리, 창녀들을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 품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따르지 않습니다. 모든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는 것은 물론, 소외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손길을 보내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폐쇄적인 공동체 안에는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폐쇄적인 사람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하시도록 이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악령과 다르지 않지만,
-김찬선신부-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오늘 복음은 악령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아는 존재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과 같이 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는데
이 악령은 한 눈에 예수님의 정체를 압니다.
신통력이 있는 무당이나 점쟁이들도 사람의 정체를 아는데
악령은 그 신통력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의 정체까지 알 정도로 신통력이 뛰어난 존재입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기까지 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하고 그는 감히 말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까지 하는 존재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잘 알고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까지 하지만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하며
예수님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존재이고,
자신을 괴롭히는 존재로 예수님을 여기는 존재입니다.
관계를 맺으려는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사랑을 괴롭힘으로 여기는 존재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괴롭힘으로 여기기에 관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하느님과의 관계는 거부하고
하느님의 사랑은 괴롭힘으로 여기지만
세상과의 관계에는 집착을 합니다.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그러므로 악령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거부하고
이 세상과의 관계는 떠나지 않으려는 존재이고,
자기 영역, 자기 삶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고수하려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악령과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잘 압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하느님과의 관계가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살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괴롭힘으로만 느껴집니다.
고통을 통해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너무 밉고 원망스럽습니다.
우리도 내 삶에 안주합니다.
우리도 내 삶의 영역을 떠나려 하지 않고
내 삶의 영역에 누가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내 영역에 하느님이 들어오신다 해도 싫습니다.
내 삶의 안락함을 깨는 그 어떤 것도 싫습니다.
사랑이 좋지만 내 삶의 안락함을 깨는 것이라면
사랑도 싫고 귀찮습니다.
그래도
누가 나보고 악령이라고 하면 싫어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솔직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함의 표시일 수도 있지만
회개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표시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 아침,
희망을 가지고 다시 용기를 내어봅니다.
받아들이기 위해 버려야하는 것들
-전삼용신부-
어떤 선교사가 문명이 아직 이르지 못한 아프리카 오지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처음으로 본 것은 그들이 무거운 짐들을 손, 어깨, 머리 할 것 없이 이고 지고 다니는 모습이었습니다. 선교사는 그들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먼저 그들에게 문명의 이로움을 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수레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그런데 수레 하나를 다 완성해 갈 즈음에 고국에 잠깐 들어갈 일이 생겨서 원주민들 보고 수레를 한 번 이용해 보라고 하고서는 잠깐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일을 마치고 다시 선교지로 돌아오면서 그들이 수레를 잘 이용하며 자신에게 고마워할 것이라고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착해보니 만들어놓은 수레는 건들지도 않고 여전히 자신들의 방식으로 물건들을 나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연유를 물으니, “우리가 들고 다니는 것도 무거운데, 저 무거운 것까지 함께 끌고 다니라는 겁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수레가 무거워 보이고 짐처럼 여겨져서 사용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게라사 지방으로 가십니다. 돼지를 키우는 지역이라는 것은 비록 갈릴래아 지역이기는 하지만 이교도인들이 사는 동네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법에는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기 때문에 그들은 키우지도 먹지도 가까이 가기도 원치 않아했던 동물입니다.
역시 그 곳에는 군대라고 불리는 마귀 들린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곳에 마귀 들린 사람이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부재가 곧 지옥이고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무덤에서 살았다는 것도 곧 죄는 죽음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둠의 지역에 빛을 비추어주러 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그 마귀들이 수많은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는 청을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돼지 떼는 여기서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수많은 부정한 생활풍습을 상징합니다. 돼지가 부정한 동물이라고 말씀드린 것처럼 마귀는 부정한 풍습들과 함께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셔서 은총을 베푸셨는데 돼지 떼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더라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를 받을 때 하느님을 받아들이면서 끊어야 하는 것들이 동시에 많이 생깁니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들 중 많은 것들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남들과 싸워서도 안 되고, 거짓말을 해도 안 되고, 사기를 쳐도 안 되고, 부정한 죄를 지어도 안 되고, 주일날 일해서도 안 되고, 부부끼리 싸우고 미워해도 안 됩니다. 안 되는 것들이 수 없이 많이 생깁니다. 정말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짐스러워서 중도에 교리를 받다가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깁니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만 많이 생기니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그 게라사 주민들에겐 빛을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잃은 돼지 떼가 아깝습니다. 예수님께 더 이상 동네에 손해를 끼치지 말고 동네에서 떠나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은총을 주시고도 동네에서 쫓겨나십니다.
수레를 처음 본 원주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이 지고 다니는 짐들보다 수레가 더 무거워 보이기 때문에 수레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들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자신들을 더 힘들게 하려고 하는 것만 같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정말 손해막심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한탄의 세월의 연속이었습니다. 기껏 모세의 말을 듣고 이집트를 탈출했더니 좋은 것은 하나도 없고 보이는 것은 오직 사막뿐입니다. 언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도달할지는 기약도 없습니다. 이집트에선 부족함 없었는데 사막엔 물도 없고 고기도 없고 음식도 없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것이 후회가 되어 모세와 하느님께 한탄을 합니다.
사실 하느님을 믿는다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더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시기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방해를 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게라사인들이나 예화에 나오는 원주민들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맙시다. 당연히 내가 어둠에 있었다면 또 빛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면 어둠의 행실은 벗어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자녀들이 벽에 낙서해 놓은 것도 지우기 어려운데 오랜 시간 내 안에 묻어있는 때를 벗기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그래서 하느님을 따르는 것은 고생길입니다. 그러나 그 고생이 두려워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영원한 어둠밖에는 남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게라사엔 가시지 않습니다.
처음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잃어야 하는 것들이 많게 보이고 그것이 손해막급인 것처럼 생각이 들어도 하느님은 그것을 통해 영원한 행복을 주시려 하심을 믿어야겠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어둠의 행실 하나만 더 던져버린다면 그만큼 내 안을 빛으로 가득 차게 할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아들까지 사랑하는 다윗
-경규봉 신부-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은 총명한 야심가였다. 그는 자신의 친동생 다말을 욕보인 맏형 암논에게 앙심을 품고 2년 동안이나 기다리며 치밀한 계획을 세워 죽일 정도로 인내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민심을 사로잡은 후 다윗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도망친 다윗을 제거하기 위하여 앞장서 전투에 나섰지만 패배하고 목숨까지 잃었다. 하느님께서는 혈육의 정까지도 무시하고, 자신의 야심만을 채우려하는 그를 받아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윗의 군대가 압살롬의 군대와 싸워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다윗은 먼저 압살롬의 생사를 묻는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다윗은 통곡한다. 다윗은 “내 자식 압살롬아, 내 자식아, 내 자식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이게 웬일이냐? 내 자식 압살롬아, 내 자식아”(2사무 19,1) 하며 목놓아 울었다.
아들에 대한 다윗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잘 보여준다. 비록 압살롬이 자신을 배반하고 죽이려 했지만, 자식에 대한 다윗의 사랑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다윗의 마음에는 인간적인 욕심과 이기심이 전혀 없다.
이 점이 아버지와 아들의 차이점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죽일 수 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죽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했던 아들의 생사를 걱정한다.
루가 복음 15장에 나오는 비유와 같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영적으로 죽이고 유산을 물려받아 아버지로부터 멀리 도망쳤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면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잘되고, 크게 성공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를 떠난 결과 아들은 모든 것을 잃었고, 생계조차 꾸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낮추고 아버지께 돌아왔다.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늙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알아보고 아들에게 달려간다. 아들을 얼싸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며 잔치를 베푼다. 아들은 아버지를 버렸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한시도 잊지 않고 기다렸던 것이다.
다윗의 마음은 곧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신심 깊은 다윗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자신의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하느님의 사랑이 다윗의 마음속에 그대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아들을 미워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이 다윗의 마음속에 가득한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과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 아버지는 나에게 더 이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욕심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 우리는 아버지를 원망한다. 우리는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때때로 하느님 아버지와 대적하고,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며, 아버지를 죽이려고 한다.
우리는 아버지를 떠나 멀리서 자신의 생각과 욕심에 따라 살고자 한다. 그러나 아버지를 떠나고, 아버지를 죽이려할 때, 우리 자신이 삶의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고, 허무와 좌절에 빠지거나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압살롬과 둘째 아들은 잘 보여주고 있다.
비록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에 차지 않더라도,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신앙인이 되자...........◆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어떤 사람이 당대 최고의 부자를 찾아가서 이러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부자가 되는 비결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의 부탁에 이 부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이 세 가지 규칙을 지키고 있지요. 첫째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 둘째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하는 것, 셋째는 하느님을 믿고 의심하지 않은 것이랍니다.”
이 말에 질문을 던진 사람은 매우 실망하면서 말했지요.
“그런 것을 지켜야 된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좀 더 확실하고 구체적인 방법은 없습니까?”
이에 부자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당신은 아직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자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실천한다면 반드시 부자가 될 것입니다.”
부자가 되는 방법.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니지요. 문제는 알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 역시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즉,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실천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방법을 이스라엘 여러 차례 말씀해주셨지요. 바로 ‘사랑’의 실천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임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방법을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배경이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게라사인들의 지방인 것입니다. 그곳에서 수가 많아서 군대라고 이름 불리는 마귀들을 한 사람에게서 쫓아내시지요. 이는 마귀의 세력이 이교도들 세계에서 기승을 부렸다는 것을 뜻하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 세력을 평정시켰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 모두가 악으로부터 벗어나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을 통해 제정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옳기는 하지만, 더 이상의 자기들 재산상의 피해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합니다.
구원의 보증수표라고 말할 수 있는 예수님이 바로 코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말합니다. 혹시 우리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물질적인 이익만을 생각해서,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으로 인해서, 내 곁에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떠나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악에서 구하소서
-정인준 신부-
사제서품을 얼마 안 남긴 때 읽었던 한 일간지에 실린 청담 스님의 글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스님은 일생 끊기 힘든 세 가지 욕(慾)이 물욕, 성욕, 명예욕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나이가 많으셨던 그 스님은 물욕, 성욕도 큰 짐이었지만
그런대로 자유로울 수가 있는데, 명예욕만큼은 그 연세가 되시도록 끊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사제생활과 스님의 삶과는 서로 다르다고
하겠지만 진솔한 스님의 말씀은 두고두고 가슴에 새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게라사인들의 지방에서 주님께서 더러운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을 치유하시는 이야기를 놓고 성경학자들은 이런저런 주석을 내놓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남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악의 세계는
참으로 강하다는 것과 주님만이 그 악을 제어하실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악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주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악에서 저희 구하소서”라고 가르쳐주시며 용기를 내라고 하십니다.
어른들께서 “자신을 너무 믿지 말고 주님께 의탁하며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새롭습니다.
당신의 사명을 나누어 주신 예수님
-김은주 수녀-
예수께서는 더러운 영으로 인해 가족과 함께 동네에서 살지 못하고 무덤과 산에서 돌로 자기 몸을 치면서 비참하게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주신다. 스스로 학대하면서 홀로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은 대부분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심·탐욕·교만 등을 따라 사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움직임의 뿌리는 성령한테서 오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은 내 안에서 통합적 인격을 이루고 이웃과 더불어 살게 하기 때문이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보고 엎드려 절을 하고, 또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하면서 자기를 괴롭히지 말라고 부탁한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과 더러운 영의 영적인 움직임을 잘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당신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봤고, 또 하느님의 이름으로 청원하기도 하는 그 더러운 영의 실체를 어떻게 아셨을까? 바로 더러운 영이 하는 말속에 예수님을 ‘괴롭히시는 분’으로 알고 있는 그의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곳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리신 일밖에 하신 것이 없다. 그런데 더러운 영이 스스로 엎드려 절하고 소리치면서 자기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정체를 아시고 말씀하신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더러운 영이 떠나고 제정신으로 돌아와 예수께 같이 있게 해주십사고 청하는 그에게, 예수께서는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고 하신다. 이는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당신의 사명을 나누어 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자비를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군대입니다!
-오상선신부-
그대 이름은 무엇이뇨?
<악령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이름은 무엇이뇨?
<군대라고도 하지요.>
군대라니, 별 이름도 다 있구먼...
<수효가 많아서 붙여진 별명이지요.>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완전한 공동체가 아닌 이유는
그 구성원 대다수가 선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의 악한 사람 때문에도 사랑과 평화가 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의 힘, 죄의 힘은 그야말로 막강하게 느껴진다.
어느 공동체이든지 꼭 한 두 사람의 악한 마음과
시기, 질투심, 욕심이 공동체의 평화를 깨트리니
참으로 한 사람의 악한 생각이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악령이
자신의 정체를 <군대>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악한 생각을 가진 한 사람이
전 세계의 평화를 좌지우지 할 수 있음을
우리는 보아왔고
또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가정 공동체, 수도 공동체, 직장 공동체,
본당 공동체, 사회 공동체,
국가 공동체 곳곳에서도
작은 악의 씨 하나가 그 공동체를
온통 풍지박산으로 몰고감을 우리는 매번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때론 나의 악한 말 한마디가
공동체 구성원에게 뼈아픈 상처를 남기면서
공동체의 평화가 와해되고....
따라서 우리는
악의 '군대성', '집합성'에 늘 유의해야 한다.
선의 결속성은 자유를 지향하기에 느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악의 결속성은 구속을 지향하기에
군대성을 띨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소위 조폭이라고 하는 집단도 군대성을 띨 수 밖에 없고
악의 세력은 항상 결집을 하는 속성을 지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결집된 군대성을 깨트려나가는 것이
악에서 해방되는 길이다.
예수님께서 군대라는 악령을 쫓아내는 것은
바로 그 결집력을 와해시킴으로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워낙 단단하게 뭉쳐져 있기에
잘못 접근하다가는 더 큰 상처를 입게 된다.
단단한 것일수록 정곡을 찔러야 한다.
정수리를 꿰뚫어야 한다.
단칼에 내리쳐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도
이러한 악의 씨앗이 자라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악의 씨앗을 잘못 내버려두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게 된다.
그것은 악이 지닌 속성, 즉 군대성, 결집성 때문이다.
암을 조기에 진단해서 치료하지 않으면
급속도로 전신에 퍼져서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듯이
우리 안에 자리를 트는 악한 생각, 악한 마음,
미움의 감정, 이기심, 욕심, 교만과 시기, 질투 등을
조기에 제거해야 한다.
어설프게 접근하지 말고
정곡을 찌르고 정수리를 꿰뚫고,
단칼에 내리쳐야 한다.
수많은 돼지떼를 잃는 아픔이 있어도 말이다.
수많은 아픔과 손실로 여겨지는 부분이 있다손 치더라도
악의 뿌리, 악의 씨앗을 제거하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선행에 열중한다 하더라도
선이 악을 이기기는 불가능하다.
선의 자유에로의 느슨함이
악의 구속적인 결집력을 이겨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오늘 내 안에
악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지는 않은지 찾아보자.
그리고 과감히 그 악의 세력을 물리치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조기에 진단하고 제거해 나가자.
비록 아픔이 있더라도...
그 길만이 제대로 살길이다.
악령에 들렸던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악령에서 해방된 그는 진정 자유인이었으리라.
자, 나도 그런 자유인이 되자!
삶 안의 악령들...그리고 그들과의 전쟁
-상지종신부-
예수님과 수효가 많아서 군단이라고 불리우는 악령들 사이에 한판 전쟁이 벌어집니다.
악령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다른 살아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죽음의 세력입니다. 또한 악령들은 사람의 힘과 의지만으로는 도저히 휘어잡을 수 없는 엄청난 힘을 지닌 세력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세력들은 예수님 앞에서는 무기력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령들의 본 모습을 드러내고 이들을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쫓아내십니다.
악령은 ’전설의 고향’에나 나오는 귀신의 모습을 한 무엇이 아닙니다. 차라리 눈에 보이는 귀신의 모습이라면, 악령을 쫓아내달라고 예수님께 매달릴텐데, 이 악령들은 우리의 마음 안에,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안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자기 안에 악령이 있는지 없는지 분간하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못하도록 무덤과 같은 죽음의 울타리에 우리를 가두어버리는 악령들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이들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게 하는 악령, 남의 떡이 커보이게 하여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깔보게 하는 악령, 남이야 죽든 말든 나 혼자 배부르면 된다고 부축이는 악령, 남들은 무조건 잘못했고 자신만이 옳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악령, 무조건 이겨야한다고 생각하게 하는 악령, 돈이 최고라고 믿게하는 악령, 크고 작은 성취를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게 하는 악령,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악령, 정치는 정치인만의 몫이니 시민들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고 떠들어대는 악령, 생태계를 파괴하고서도 일부 사람들만이라도 편안하게 살면 된다고 조장하는 악령들 입니다. 조금만 살펴보면 참으로 수많은 악령들이 우리 안에,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악령들과 함께 희희덕거리며 살아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마냥 기쁜 일만은 아니라, 견딜 수 없는 쓰라린 아픔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신 복음은 우리 안에 있는 이 악령들을 들추어내고 이들을 우리에게서 쫓아내시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악령들에게서 벗어나야만 우리는 참으로 기쁜 마음으로 이웃과 하나되어 주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악령과 싸우실 수 있도록 예수님께 다가서야 합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알아보지 못한 악령들을 쫓아내어 혼자 사는 이기적인 삶의 상황, 즉 죽음에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 즉 생명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물론 악령들이 쫓겨나면서 우리 안에 수많은 상처를 내겠지만, 그럴수록 예수님께 다가섬으로서 완전하 새사람으로 거듭 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정신적인 '공허감'과 '결핍'이 바로 더러운 영의 정체
-이 민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연중 4주간 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 5장 1절부터 20절까지 입니다. 조금 긴 내용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게라사 지방에 가셨는데 거기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 한 명을 구마해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무덤에서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집이 아니고 죽은 자들이 누워있는 무덤에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정상적인 삶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삶이고 비사회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고 오직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를 묶어 둘 수 없었다고 합니다. 게라사 주민들은 쇠사슬을 이용해서라도 그를 묶어 두려 했지만 그는 쇠사슬도 끊고 쇠고랑도 부수어 버리는 무서운 괴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를 휘어잡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그는 더러운 영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더이상 어느 누구도 그를 돌보아 줄 수 없으며 이끌어 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쇠사슬도 끊고 쇠고랑도 부수어 버린 정도라면 어느 누가 그를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밤낮없이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짓찧곤 했다고 합니다. 이는 자해행위요 자기파괴행위인 것입니다. 자신을 돌보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삶에 있어서 생명의 영역이 아닌 죽음의 영역에 놓여져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과 마주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보자 얼른 달려와서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자신을 방어하고자 합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마을 사람들 어느 누구도 그를 통제하지 못했는데 그 사람이 오히려 예수님을 보자 스스로 꼬리를 낮추며 예수님께 하소연하다시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꼼짝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그러니 제발 자기를 괴롭히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고 합니다. 귀신인 주제에 구마자가 귀신을 내쫓을 때 하는 말을 합니다.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런 말을 썼겠는가 하는 것이고 또한 자신을 철저히 지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을 보고 더러운 영이라고 부르십니다. 마을 사람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을 통제하지 못했는데 그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벌벌 떠는 이유는 예수께서 더러운 영의 정체를 파악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더러운 영의 실체를 아시는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의 겉모습만을 봅니다. 미친 사람이라고, 제 인생 망친 사람이라고, 도대체 제 정신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더러운 영과 그 사람을 분리하시고 더러운 영만을 상대하십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더러운 영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더러운 영인 것이지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더러운 영이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제발 자기들을 마을 밖으로 쫓아내지 말고 부탁합니다. 그러다가 안 될 것 같으니까 한 가지 잔꾀를 부립니다. 자기들을 돼지떼 속으로 보내 달라는 것입니다. 돼지는 불결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있을만한 곳이라 생각하는 것이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계속 그 마을에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서 전부 자멸하게 되었습니다. 더러운 영들이 돼지떼 속으로 들어가니까 돼지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고 모두 호수에 뛰어들었습니다. 결국 더러운 영들도 모두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사실을 전해 듣고 달려 나왔습니다. 그들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 멀쩡한 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두려움에 사로 잡혔고 예수께 자기네 마을을 떠나 달라고 간청합니다. 쇠사슬로도 묶어둘 수 없었던 사람이 멀쩡한 정신으로 앉아 있으니 겁이 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 어떻게 구원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겁에 질려 무조건 떠나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귀신들렸던 사람은 자신이 회복된 것에 감사하면서 예수님 곁에 있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집으로 가족들에게 가서 주님이 그대에게 어떻게 자비를 베푸셨는지를 모두 알리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는 물러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선포합니다. 더러운 영에게 엄청나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아 복음의 선포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죽음의 세계 속에서 삶을 살았던 사람일지라도 예수님에 의해 구원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사람이 오히려 복음의 선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잠시 오늘 복음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묵상해 보겠습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도대체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일까요? 단지 귀신 들린 사람, 정신병 걸린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오늘 복음은 우리와 별로 상관이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어떤 정신병에 걸려 있거나 미친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무언가에 강하게 '중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중독'이라는 현상을 머리속에 떠올리고 싶습니다. 도박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 그는 누가 뭐래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를 붙잡아 놓고 가두어 놓아도 그는 도박장으로 달려갑니다.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서서히 자신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고 갑니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정신적인 '공허감'과 '결핍'입니다. 이것이 바로 더러운 영의 정체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나면 그 사람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게 되고 더러운 영이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러운 영이 아닌 하느님의 영, 즉 성령이 그 사람 안에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여러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 술에 중독된 사람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늘 제가 특별히 말하고 싶은 것은 TV 보는 것과 컴퓨터 게임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절제없이 무제한 TV 보는 것은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들며 머리속에 일어나는 현상은 마약을 먹고 일어나는 현상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서서히 중독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제가 안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마음의 공허함을 잊어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TV에 빠지게 되며 TV에 나오는 가짜현실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10년에서 12년을 평생 TV 보는 것으로서 시간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절제없이 무제한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무리 컴퓨터 게임을 하지 말래도 합니다. 결국 전원을 뽑아 버리고 컴퓨터를 박살내어도 어린 학생들은 PC방에 가서 기어코 하고야 맙니다. 하루 10시간 동안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가상 세계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거기에 사로잡혀 있고 중독되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경우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고 무언가에 미쳐 있습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면 상관이 없지만 많은 경우 우리 자신의 삶을 낭비하고 무력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면서 우리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변화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 자비를 선포함
-이중섭 신부-
오늘 복음은 혼돈과 죄악에서 벗어나 새로이 창조된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르코 복음 5장 1-5절에는 혼돈상태에 빠진 인간의 모습이 묘사됩니다.
세 번이나 등장하는 무덤이라는 단어는 이 사람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강조합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쇠사슬과 족쇄로 묶어놓았습니다.
그 당시에 쇠사슬은 매우 귀한 도구였습니다. 동네사람들이 왜
비싼 돈을 들여가며 악령에 들린 사람을 돌보았을까요? 그것은 그 사람과
동네사람들 사이에 공존하는 폭력과 혼돈의 상태를 잘 드러내줍니다.
어떤 사회든 죄악과 폭력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않습니다.
죄악을 남겨두어야 사회를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이 하나도 없는 사회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군대라는 마귀에 들린 사람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앞에서 서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그를 살리는 것이라고
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 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을 알려라.” 인간 앞에 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알려라.”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그분의 자비를
묵상하고 사람들에게 선포할 때 비로소 사람이 된다는 진리입니다.
`귀신들린` 오늘의 현실
-최연석 목사-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 실제로 본 사람이 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누구나 한두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마귀’ 또는 동양식 버전인 ‘귀신’이다. 우선 흥미로운 것은 성경에는 대부분 ‘귀신’보다는 ‘귀신들린 상태’ 또는 ‘더러운 영’ 등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곧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악한 세력의 총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귀신을 우리는 가끔 세상에서 본다. 지난번 탄핵사태가 났을 때 나는 사람들이 ‘귀신에 홀리지 않고서야’ 저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총선을 치르고 보니까 그런 생각은 나 혼자 한 것이 아니라 국민 대부분이 한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그 똑똑한 국회의원들이, 학자들이, 언론들이 입에 거품을 품고 달려들어 요절을 낼 것처럼 법석을 떨었다. 그리고 그 사태가 끝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조용해졌다. ‘미쳤다’는 말까지는 쓰지 못하겠지만 분명 제정신은 아니었다. 무엇에 홀렸을까? 지역주의·당리당략·개인의 이해관계? 하여간 무엇에 홀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 핵문제나 작전권 문제도 그렇고, 부동산 투기 문제도 그렇다. 지금도 방방곡곡에 나붙는 아무개 아들 고시합격이라는 현수막도 그렇다. 같은 물건이라도 백화점에 높은 가격을 매겨놓은 상품이 더 잘 팔린다는 세태도 그렇다. 우리는 혹시 있지도 않은 귀신에 홀려, 누군가 만들어 낸 귀신에 홀려 이렇게 광란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몇백만 원 한다는 핸드백을 그대로 위조하여 만들어 낸 사람이 붙잡혔다. 그 사람은 한 개에 삼천 원씩 받고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품을 만든 회사도 그 모조품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다고 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조금 유쾌했다. 때로는 귀신에 홀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귀신이 곡할 노릇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있는 모양이다.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 김효경 신부 -
한 주일을 시작하는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 을 고쳐주십니다. 더러운 영으로 말미암아 고생하는 사람을 그 영으로부터 구해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괴로움에 시달렸는지를 오늘복음은 그 가 무덤에서 살았다고 전해줍니다. 무덤은 산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닙니다. 사실 그의 삶은 살아있어도 산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지배하던 영의 이름은 ‘군대’였습니다. 군대로 번역된 로마시대의 레지온(Legion), 즉 군단은 그 수가 6,826명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도 강력하고 많은 영들에게 지배를 당하 고 있었기 때문에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그를 쇠사슬과 족쇄로 묶어두려고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이런 사람이 있 다면, 더러운 영 때문에 고생하는 그 사람이나 그를 지켜보며 함께 살아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큰 고통이 아닐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러운 영으로 고생 하는 사람을 영으로부터 구해주셨다는 이야기는 본인에게나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나 구원의 기쁜 소식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구원하심을 체 험한 주위 사람들은 구원보다는 자신의 인간적인 이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한사람 의 구원을 위해서 무려 2,000마리나 되는 돼지의 손실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고마 운 것은 고마운 것이지만 자신이 손해를 보았던 재산상의 불이익 때문에 구원자이 신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말을 합니다. 오늘 복음말씀을 묵상하는 우리들에게는 이 해되지 않는 일처럼 보이는 일이지만 이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
군종신부, 교포사목, 해외선교 , 본당신부를 하면서 공통적으로 느낀 점을 조금 속된 표현으로 하자면 “남의 밥 그릇에 손대지 말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재산상의 자그마한 손실에는 본당신 부도 하느님도 안 보이는 듯한 모습의 교우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대부 분의 경우 그에 따르는 처절한 보복이 교우들로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복 음의 이야기처럼 사람들이 예수님께 “저희 고장을 떠나 주십시오.”라고 공손하 게 청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크신 권능에 압도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개인 의 경험으로 보아서 봉변을 당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여겨집니다 .
그러나 마귀 들렸던 당사자는 틀립니다. 그는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 풀어 주신 일을 모두에게 알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이어서 그의 행적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라고 말입니다. 기쁜 소식의 선포는 제자들의 몫이지만 구원을 체험한 그 사람은 이미 그 몫을 함께 나 누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체 험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느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행위가 우리의 신앙생활 이고 그 생활의 구체적인 지향점이 복음선포입니다. 더러운 악령들린 사람은 살아 있으나 산사람이 아닐 정도의 힘든 시련이 있었지만 주님의 구원하심으로 말미암 아 참된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났고 오히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신앙의 모법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구원하심을 체험했다면 자신의 이익만을 따질 것이 아 니라 주님의 구원하심을 선포하는 참된 복음 선포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죄=우리의 죄
-이찬홍 신부-
신앙생활을 하며 듣는 여러 단어 중 죄고백은 우리를 늘 부담스럽게 합니다.
교회는 특히, 사순 시기나, 대림 시기에 자주 이 단어를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가 죄와 죄의식을 너무 강조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부담과 거부감을 갖기 이전에 죄와 죄의식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죄의식에는 건전한 죄의식과 불건전한 죄의식이 있습니다.
건건한 죄의식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집중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린 것에 대한 죄송한 마음에, “하느님 잘못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허물입니다. 이제, 당신께 드리니, 다시금 새롭게 시작하도록 도와주소서.” 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죄와 허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여러분께 권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올바른 양심성찰이요, 자신의 허물과 악습을 이겨내려는 노력입니다.
그런데, 불건전한 죄의식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보다는 자신의 죄 그 자체에 머뭅니다.
‘어떻게 내가 이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가?’ 하고 자책하며 자신을 옭아매어 힘들게 합니다.
또한 자신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자신에게 할 비난을 상대방에게 투영시켜 비난하고 단죄하며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고 여러 이유로 정당화합니다.
이처럼 자기 스스로 자기 안에 갇혀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의 화해를 거부하며 ‘남의 탓이다.’ ‘세상 탓’ 등의 이유를 대다가 결국 유다처럼 자신 안에 철저하게 갇혀, 심한 불안감과 자괴감에 하느님과 멀어지게 되고, 결국에는 하느님을 두 번 배신하는 행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불건전한 죄의식입니다.
건건한 죄의식은 예수님을 배신한 죄책감에서 극복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다의 마음이 아닌, 다시금 예수님께 돌아와 용서를 청한 베드로의 마음을 심어 줍니다.
죄 체험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게 되며 하느님 안에 더욱 굳세어지게 됩니다.
죄 체험은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더욱 굳세게 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디딤돌이 된다고 믿기에, 교회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죄와 죄의식에 대해 언급하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서두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오늘은 개인적인 죄가 아니라, 사회의 죄 곧 세상의 죄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복음에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역시 매 미사 때마다 성체를 모시기 전에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세상의 죄!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세상이 선하게 창조되었기에, 좋은 곳임을... 하느님을 마나고 체험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곳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종종 ‘세상이 악하다.’ ‘세상에 죄가 많고 우리를 유혹하며 죄로 이끈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세상 자체가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세속, 곧 세속주의의 구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하고, 요한이 알려주는 “세상의 죄”는 바로 세속주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속주의는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곧 세상을 하느님화 시켜 우상숭배하게 하는 주의 입니다.
이런 세속주의는 여러 모습으로... 환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달콤한 유혹의 손길을 뻗치지만, 그 중에서 우리 삶 안에 깊숙이 들어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 무엇일까 묵상해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에이, 이쯤이야! 나 하나쯤이야!’ 라는 안일한 생각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상 창조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쉽고도, 자연스럽게 사람의 마음에... 삶 안에 함께하여 사람의 그릇된 행동을... 잘못을 합리화시킨 것입니다.
이 말이 또 다른 씨가 되어 온 세상에 퍼저 더욱 세상을 병들게 하고 죄의 증식을 초래했는지 모릅니다.
‘나 하나쯤이야!’ 라는 말은 자신이 힘이... 잘못이 이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또한 있으나마나한 존재이기에 한 말입니다.
실제 이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계의 모든 사람이 ‘에이 나 하나쯤이야!’ 라고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하나가 바로 60억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나 하나쯤이야!’ 라는 말에서 죄의 연대성을 찾을 수 있듯이, 세속주의는 바로 나의, 우리의 죄 안에서 기인합니다.
우리의 죄가 바로 세상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자신이 먼저 변해야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때문에, 세상의 죄를 없애달라고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 청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 우리의 죄를 먼저 없애 달라고 청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외에도 세상의 죄는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죄들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사람의 욕심에 의한 것임을...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세상의 죄는 우리의 죄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분명, 세상이 있어 내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내가 있어서 세상 또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하고, 내가 죄를 피해야 세상 또한 적어도 나에게 해당 되는 그 만큼의 죄를 피하게 된다는 마음으로 우리 함께 생활해 봅시다.
그러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늘 우리에게 오시어 함께 살아가려는 예수님을 알아 뵙고 우리 역시 요한처럼 예수님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죄, 곧 나의 죄와 우리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십니다.” 아멘
해방자 예수
-강영수신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마르5,6-7)
군대 마귀는 예수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예수의 정체正體는 감추어져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예수의 모습은 나자렛의 목수요, 떠돌이 랍비이다. 그의 추종자들은 물론 그의 제자들마저도 변두리 인생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떼 마귀는 예수의 정체를 꿰뚫어보고 있다. 예수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빛을 가장 민감하게 감지하는 세력은 어둠이다. 감추어져 있는 예수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아보는 세력은 역시 악마이다. 빛이 있으면 물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역할은 해방이다. 무덤은 절망의 자리요 썩음의 자리이다. 속박과 암흑의 자리이다. 예수는 무덤 가운데 사는 사람을 해방시켜주신다. 그의 삶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끊어주신다.
예수는 그의 거처를 무덤에서 가족들 가운데로, 제 몸을 짓찧으면서 자신을 학대하던 사람에서 말씀의 선포자로 건너가게(Pascha過越) 하신다.
군대 마귀 들렸던 사람은 "주께서 자비를 베풀어 너에게 얼마나 큰 일을 해주셨는지 집에 가서 가족에게 알려라"(마르5,19)하신 말씀대로 말씀 선포자로서 변신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만나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베풀어주신 자비의 손길을 온 천하에 알려야 할 소명이 있다.(一明)
무덤에서 나와
-유 광수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호수 게라사 지방으로 가셨다. 그곳은 이방인의 지역으로서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없이 생활하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다.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이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가를 오늘 복음에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보여 주신다. 오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통해서 지금 우리의 삶이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를 깨우쳐 주신다.
오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살았던 무덤의 의미를 묵상하자. 그리스어로 무덤을 "므네메이온"(munemeion)이라 하고 라틴어로는 "모뉴멘뚬"(monumentum)이라고 하는데 "기념비, 기념관, 무덤, 묘비, 유적" 이라는 뜻으로서 죽음과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
한 마디로 무덤은 산 사람이 거처하는 곳이 아닌 죽은 이의 시체를 모셔 두거나 죽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건물이다.
공동묘지에 가면 적막과 스산함, 고독과 쓸쓸함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공포감이 맴돈다. 생명의 상징인 활동력과 싱싱함 그리고 기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죽음의 그늘만이 지배하는 곳이다. 무덤에서 살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공동묘지의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 마음에 생명이신 주님을 모시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아무리 겉은 번지르하고 기름기가 흐르고 건강미가 넘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덤에서 사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을 "회칠한 무덤 같다."(마태 23,27-28)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리 넓고 좋은 집에서 온갖 비싼 고급 가구로 장식해 놓았다 하더라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성령의 열매인 사랑, 용서, 기쁨, 친절, 웃음이 없고 대신 더러운 영인 더럽고 불순하고 음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그래서 매일 미움, 싸움, 질투, 분노, 시기, 무관심 등으로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다면 그곳은 무덤에서 사는 것과 같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다고 할 수 없고 이미 죽어서 들어가는 무덤의 삶을 미리 앞당겨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죽지 못해 산다." 라는 말을 듣는다. 살아있지만 산다고 말할 수 없는 무덤의 삶이다. 폭력이 난무하여 늘 공포 속에 살아야 하는 가정, 알콜 중독으로 가족들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가정, 아이들이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도 아무도 반겨 줄 사람이 없는 쓸쓸함과 외로움이 가득 찬 가정, 서로의 미움 때문에 찬 바람이 쌩쌩 도는 공동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공동체, 그래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공동체에서의 삶은 무덤에서의 삶이다. 그것은 가정일 수도 있고, 수도 공동체 일 수도 있고, 직장일 수도 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무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삶, 무덤의 삶을 사는 사람의 행동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그리고 하느님을 떠난 인간,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인간의 추악한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를 오늘 복음에서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삶을 사는 이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알콜 중독자, 마약 복용자, 음란 쾌락에 빠져있는 자, 중독성 도박, 음주 운전, 광란의 질주, 사기, 성 매매, 폭력 등 우리 사회를 불안에 떨게 하고 주위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같은 삶을 사는 이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우리 사회는 어쩌면 거대한 무덤과도 같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가고 있는 음란성 영화와 잡지, 비디오, 성인용 영화, 도박, 오락성 컴퓨터 등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확산되고 있는 현실이다.
더군다나 오늘날 3 명 중 한 명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신문 보도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가를 말해 준다.
거대한 무덤과도 같은 이 사회를 다시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겨자씨와 같은 예수님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어지러운 사회에서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이미 많은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아마도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살았던 우리들이 그런 것들을 버리고 말씀으로 거듭 태어난 삶을 살려면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한 바탕 소란을 피웠던 것처럼 우리 안에서도 엄청난 요동이 일어날 것이고 그로 인해 한 동안은 몸살을 앓아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신바람 나게 다니던 사람이 제정신으로 조용히 앉아서 말씀을 묵상하려면 온몸이 쑤시고 근질근질 할 것이고 정신은 계속 산만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이 생각나고 괜한 걱정이 들기 시작할 것이다. 어떻든 더러운 영들은 조용히 앉아서 복음을 묵상하도록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자기만 손해 보는 것 같고 바보가 되어 가는 것 같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고, 친하게 지냈던 모든 사람들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 것이다. 아무튼 무덤의 삶을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리라.
누가 무덤에서 죽은 이의 삶을 사는 이들을 생명의 삶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치유되었듯이 나도 그리고 우리 가족들도 모두 더러운 영에서 해방되어 제 정신으로 돌아와 주님 앞에 앉아서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일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
오늘 아침 성무일도의 기도 중에 "나는 낮선 길 가는 소경의 손을 잡아 주고, 가본 적 없는 오솔길을 살펴 주어, 캄캄하던 앞길을 환히 트이게 하리라. 험한 길은 탄탄대로가 되게 하리라. 나는 이 일을 이루고야 말리라. 결코 중단하지 아니하리라." 우상들을 의지하는 자들은 꼬리를 감추고, 부어 만든 형상을 보고 "당신들이 우리의 신이다."하는 자들은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리라.(이사42, 16-17)는 말씀이 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치유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을 만나는 것 뿐이며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복음 뿐이다. 복음을 따라 가노라면 나도 모르게 무덤에서 나와 생명의 길을 거닐게 되리라.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