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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3. 묵상글 (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 나의 보물, 나의 자랑거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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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3.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나의 보물, 나의 자랑거리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들을 자랑하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보물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바오로 사도는 자랑거리에 관해 얘기합니다.
그래서 저도 나의 보물은 무엇이고,
나의 자랑거리는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생각게 됐습니다.
먼저 보물과 관련하여 생각해보니 마땅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필요 차원에서 보면 단연 컴퓨터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것인데
이것을 저의 보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오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는 금 십자가와 금목걸이가 있습니다.
금 십자가는 어머니가 아주 오래전에 주신 것인데
그것을 팔지 않고 간직하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머니의 사랑이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이것이 저의 보물이라고까지 생각지는 않습니다.
금목걸이는 제가 북한 일 할 때 어떤 자매님이 주신 겁니다.
그런데 주신 것이긴 하지만, 제게 준 것이 아니라
북한 일 할 때 팔아서 쓰라고 주신 겁니다.
거의 이십 년 전, 평양에 종합복지관인 <평화 봉사소>를 짓기 위해
자선 음악회를 하려고 표를 판매하였는데 그때 북한이 미사일을 쏴
사람들의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고 그래서 저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하루는 새벽 묵상을 하고 있는데 눈 뜨자마자 음악회가 생각났고,
어떻게 하면 표를 팔 수 있을까, 누구에게 팔 수 있을까
거기에 골몰하고 있는 저의 부끄러운 모습이 보였습니다.
수도자가 되어서 어찌 기도하지 않고 걱정하는지,
사람을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표 사주는 존재로만 보는지 그것이 너무
한심하였고 그래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는 마음을 내려놓았지요.
그런데 그날 오후 어떤 자매님이 자기를 밝히지 않고
당신의 결혼 패물인 금목걸이를 북한 일에 써달라고 하시며 보내오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제 욕심과 집착과 걱정을 내려놓고 수도자로 돌아가라고,
하느님께서 그 자매를 통해 깨우치시기 위해 보내신 거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매님의 소중한 것을 제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셈인데
당신의 소중한 것을 팔아 저의 수도 성소를 되찾게 하신 것이기에,
그것을 팔아서 돈 얼마를 북한 사업에 보태기보다 앞으로 주님의 일을 할 때
그것을 보면서 제가 올바로 마음을 잡기 위해서 간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제게 소중한 것이기는 하나 보물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이 새벽에 이런 생각을 하며 그러면 나의 보물은 무엇일까?
무엇이 나의 보물이어야 할까 생각해보니 순교자 라우렌시오가 생각났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황제가 교황 식스토 2세를 참형하고,
교회의 모든 보물을 바치라고 했을 때 교회의 재산관리를 하던 라우렌시오는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가난한 사람들을 황제에게 데려가
이들이 교회의 보물이라고 하였는데 제게도 마찬가지여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저의 자랑거리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겪은 그 수많은 고난을 열거하며,
그것을 견뎌낸 것을 자랑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약함과 약함을 드러내는 것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아직 바오로 사도의 이 단계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나의 약함이 바로 저의 자랑거리여야 하고
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저의 자랑거리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약할 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강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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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3.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의 경건생활,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 보물과 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보물’은 보석을 나타내는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 ‘주님을 경외할 줄 아는 지혜’(이사 33,6)를 상징하기도 하며, 또한 이스라엘을 보물로 견주기도 합니다(탈출 19,5;신명 7,6). 한편, 보물은 획득하여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으니 찾은 이에게 발견되며, 발견하기만 하고 차지하지 못한 이도 있고, 그런가 하면, 아예 찾아 나서지도 않은 이가 있고, 찾았으나 악용하는 이도 있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마라.”(마태 6,1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마태 6,20)
그렇습니다. 우리는 땅에 보물을 쌓아둘 수도 있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둘 수도 있습니다. 땅에 쌓아둔 보물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위해 쌓아올린 보물이지만, 좀 먹고 녹슬고 도둑 받을 수 있는 보물입니다. 하늘에 쌓는 보물은 하느님 앞에서 쌓아올린 보물이고, 영원히 남는 ‘의로움의 보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을 보면, 자신이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곧 값진 보물이라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눈이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의 눈이 자신을 보고 있는지, 하느님을 보고 있는지,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고 있는지, 하느님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마음은 어디에 있겠는가? 당연히, 주님의 마음은 분명, 여기 저희 안에 와 있습니다. 당신의 보물이 있는 곳에 당신 마음이 와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당신의 보물인지라 당신의 눈은 지금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당신 목숨을 내어주고 얻은 소중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제 마음에 와 있는 주님의 눈동자를 관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주님의 눈은 나를 향하여 있는데, 내 마음의 눈은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몸의 등불”인 “눈”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마태 6,23)
그렇습니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해질 것입니다” 곧 편견과 고정관념이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눈이면, 환하고 투명하게 볼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마음이 깨끗하면 볼 것”(마태 5,8)이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이 맑아져야 할 일입니다. 만약,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눈이 성하지 못하면”(πονηροσ)은 직역하면 ‘악하면’으로, 곧 ‘악한 눈’을 뜻합니다. 그러니 보물의 처신이나 사용이 악하지 않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리 보물이라 할지라도 악하게 사용되면, 오히려 자신을 어둠에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 21)
주님!
제게는 당신이 보물이오니, 제 마음, 당신께 사로잡히게 하소서.
항상 당신을 첫 자리에 두고,
그 어느 것도 당신 사랑보다 낫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제 눈이 항상 당신을 향하여 있고,
제 마음이 당신께 다다라 있게 하소서.
제 마음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 안에 저를 가두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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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3.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을 주님께 두라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하신 예수님의 의중을 살펴보십시오.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말씀은 보물을 하느님 뜻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음 두는 곳으로 몸이 가게 마련입니다. ‘마음을 산에 두면 산으로 몸이 가고, 마음을 바다에 두면 바다로 몸이 갑니다. 마음을 선한 곳에 두면 선한 곳으로 몸이 갑니다. 마음을 나쁜 곳에 두면 나쁜 곳으로 몸이 갑니다.’ 몸은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성한 눈은 맑은 눈입니다. 마음이 맑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흔들림이 없이 마음을 주님께 향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학부모는 하느님께서 최고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자녀가 입시를 준비하면, 성당에 가는 것은 잠시 쉬어도 된다고 말합니다. 네 마음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최고라고 하면서 기도하는 시간이 아깝고 성당에 머무는 시간을 아깝게 여기며 공부하라고 한다면 그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은 최고이십니다. 이 세상의 무엇과 한 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하느님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최고의 보물이십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과 세상을 동시에 차지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셨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7-8) .
세상의 사람들은 감히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지배하고 소유하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피곤하게 합니다. 서로를 섬기면 기쁨과 평화가 넘치게 되지만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서로를 섬기는 역할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부모는 부모로서, 아내는 아내로서, 남편은 남편으로서, 그리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몫이 있고 이웃과의 관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인정해 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기려 하면 반드시 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낮아지는 곳에서는 협력자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밤새워 기도하신 후 특별히 열 두 제자들을 뽑으셨는데 뽑힌 이들을 보면 아주 다양한 사람들입니다. 죄인으로 멸시 받던 세리 마태오, 혁명당원 시몬, 배반자가 된 유다, 베드로…예수님께서는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미래를 열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새 희망을 안겨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이웃의 허물을 보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자기를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용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때때로 기적을 베풀고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능력을 드러냈을 때, 트집을 잡고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소신 있게 당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도 시작한 일이 선하다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흔들림 없이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모든 멍에와 짐을 예수님께 돌려드리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늘 하느님께로, 그분이 보내주신 예수님께 머물기를 희망합니다. 다른 무엇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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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3.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가톨릭의 강점은 ’질서‘이고, 프로테스탄트의 강점은 ’자유‘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가톨릭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황님을 중심으로 교계제도가 있어서 같은 가르침과 같은 교리를 세계의 모든 교회가 공유하고 있습니다. 미사의 순서도 모든 교회가 같습니다. 언어만 다를 뿐 미사의 내용도 세계의 모든 교회가 동일합니다. 매일 세계의 모든 교회는 같은 말씀의 식탁에서 성찬의 전례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공의회‘를 통해서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시대의 징표에 따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지역교회의 어려움을 보편교회의 이름으로 도와 줄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두 한 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제성소의 부족으로 성직자가 부족한 미국과 유럽의 교회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성직자들이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역시 같은 전례를 사용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제가 미국에 와서 사제생활을 하는 것도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언어만 다를 뿐 신학, 교리, 전례는 모두 같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시작한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의 엄격한 교리와 교계제도를 거부하였습니다. 가톨릭의 전례도 거부하였습니다. 인문학의 토대가 되었던 르네상스와 자본주의 토대가 되었던 산업혁명은 프로테스탄트의 ‘자유’를 만나서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는 시급한 현안과 지역교회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전통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기에 다양한 신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아시아 신학, 아프리카 신학, 민중 신학, 정치 신학, 여성 신학은 성서의 가르침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목회자의 자질과 능력만으로 단일 교회를 세계적인 규모의 교회로 성장 시킬 수도 있습니다. ‘여성 사제, 여성 주교, 사제의 결혼’과 같은 제도를 필요에 따라서는 과감하게 도입할 수 있습니다. 교리와 법에 얽매이지 않기에 죄의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교계제도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기에 소신껏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의 강점과 프로테스탄트의 강점이 평행선과 같아서 절대로 만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가톨릭의 강점도, 프로테스탄트의 강점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유대인의 율법과 계명도 자신의 강점이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히브리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과 계명을 중요하게 여기는 정통 바리사이파라고 자신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유대인들에게 받았던 수난과 고통도 자신의 강점이라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톨릭의 강점도, 프로테스탄트의 강점도 모두 필요한 도구일 뿐입니다.
부족하지만 제게도 ‘강점’이 있고, 넘쳐나지만 제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 규칙적인 생활, 미리 준비하는 습관은 사제생활의 강점입니다. 우유부단한 성격, 틀에 박힌 생활, 조급한 마음은 저의 약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강점은 드러내고, 저의 약점은 보완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은 이미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의 강점과 약점을 봉헌해야 합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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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3.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
-“눈은 마음의 등불, 부단한 온갖 사랑의 수행”-
얼마전 화기애애했던 만남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도반들과의 만남이, 특히 시를 좋아하는 분들과의 만남이 그러합니다. 옛 선비들이 시를 나누며 만났던 모임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서로간의 대화는 물론 진솔한 느낌들을 시로 나눴습니다. 옛 선비들의 만남에 시는 필수였고 모두가 시인이었습니다. 조선의 대학자 퇴계, 율곡, 다산이 모두 불후의 시인들입니다. 며칠전 모임에서 모두가 공감했던 제 ‘환대’라는 시입니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
한번이라도 얼굴 찌프린 적이 있더냐
하루 이들 몇날이든
언제나
활짝 핀 환한 얼굴로
오가는 이들
맞이하고 떠나 보내는 이들
주차장 옆 코스모스 꽃 무리들
피곤한 모습 전혀 없다
볼 때 마다 환해지는 마음이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2000.9.27.
23년전 시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는 시입니다. 코스모스뿐 아니라 모든 꽃이 환대의 상징입니다. 무더위가 바야흐로 시작되려는 지금 주차장은 ‘상쾌한 기분’이라는 꽃말의 샛노란 금계국꽃들이 한창입니다.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정주영성과 쌍을 이루는 환대영성입니다. 환대를 통한 선교, 바로 정주수도회의 기본적 선교입니다. 저는 이를 일컬어 존재론적 선교라 칭하기도 합니다.
사랑의 정주, 사랑의 환대, 사랑의 선교, 모든 수행 앞에는 ‘사랑’이 붙습니다. 바로 부단한 온갖 수행의 사람들이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이런 분들을 만나며 기분이 좋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섬김의 삶을 사는 이들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들입니다.
최고의 영원한 보물이신 주님을 모시고 사는 이들은 저절로 끊임없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재미로 맛으로 기쁨으로 사니 바로 주님의 은총입니다. 어제 하루도 저는 이런 분들을 많이 만났고 강복과 더불어 안아드리기도 했습니다. 마침 목요일마다 사랑의 주방봉사차 오는 자매도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사는 분입니다. 반갑고 고마워 강복후 안아드린후 사진도 찍었고 덕담의 메시지와 함께 사진도 보내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미스 코리아 나가도 되겠습니다. 너무 멋지고 예쁩니다. 축하드리며 오늘 강론 선물합니다.”
강론쓰며 떠오르는 어제 면담성사를 봤던 분들이 모두 한결같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들임을 뒤늦게 깨닫고 감동합니다. 어제도 남한산성 부근 자기 농장에서 일을 끝내고 수도원을 찾아 사랑의 물리치료 봉사를 해준 형제님도 하늘에 보물을 쌓는 분임을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물리치료 끝낸후 감사하는 마음으로 강복후 안아드렸습니다. 그러니 집무실을 찾아 면담성사를 보는 분들이 저에게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 보물같은 분들이라 여전히 나눠드리는 다음 시입니다.
“사랑합니다!
감동에 벅차 당신을 안을 때마다 주님을 안 듯
당신을 안는다
주님의
살아 있는 보물을
살아 있는 선물을
살아 있는 성경을
살아 있는 성인을
살아 있는 소우주를 안 듯
당신을 안는다
당신은 이런 분이다
가슴 벅차 오는 기쁨이요 행복이다.”
이런 분들과의 상호포옹은 서로에게 위로와 구원이 되고 성화가 됩니다. 요즘 한 도반과의 주고 받는 인사는 “성화되십시오”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은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삶을 뜻합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들인지! 그대로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이 됩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온갖 부단한 사랑의 수행의 사람들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내적부요와 자유, 행복의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자선과 선행은 물론이구요. 반면 자기 중심의 이기적 물욕과 탐욕의 사람들은 반대로 땅에 보물을 쌓는 사람들이요, 결코 결코 마음의 허기를 채울 수 없으니 내적부요도 자유도, 행복도 요원합니다.
지혜로운 듯 하나 실상은 무지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텅빈충만의 사랑이 아니라 텅빈허무의 무지의 삶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음 복음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어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훔쳐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제가 매일 사랑의 강론을 써서 많은 분들과 나누는 일 역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 아, 온갖 부단한 사랑의 실천을 통한 하늘에 쌓여진 보물만큼 안전하고 확실한 것도 없습니다. 우리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이 있습니다. 최고의 보물인 하느님을 중심에 모신 이들의 몸은 지상에 있지만 마음은 천상의 하느님을 향해 있고, 이런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지칠줄 모르는 사랑의 수행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복음에 이어 나오는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복음도 참 적절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마음따라 가는 눈이요 몸입니다. 마음이 순수로 맑으면 눈도 몸도 맑고 밝아지고 무지의 어둠도 사라져 심신이 영육이 환하고 건강합니다. 부단히 하늘에 쌓는 사랑의 수행과 더불어 깨끗해지는 마음이요, 깨끗해진 마음은 더욱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에 투신하게 되니 날로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참으로 심신이 영육이 맑고 밝은 환한 삶입니다. 꽃같은 사랑의 환대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파란만장한 삶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최고의 보물이신 그리스도와 예수님과 하나된 삶이기에 지칠줄 모르는 사랑이요, 이런 사랑에서 기인한 온갖 사랑의 고난들은 하늘에 쌓여지는 보물들임을 깨닫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정신 나가 사람처럼 말합니다만,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이어지는 고난들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지면 관계로 인용하지 못하지만 이어지는 2코린 11,23-27절까지 읽어 보세요. 정말 불가사의, 초인적입니다. 어떻게이렇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된 삶이었기에 이런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발적 사랑의 고난이 가능했음을 봅니다. 사도의 그리스도의 사랑에, 교회의 사랑에, 겸손에 감동하게 됩니다.
“그 밖의 것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날마다 나를 짓누릅니다. 누가 약해 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들을 자랑하려합니다.”
하늘의 참 보물인 하느님과 사랑으로 하나된 그리스도의 일꾼, 바오로 사도였기에 이렇게 자기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는 감동적 고백이겠습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보물인 사도 바오로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살아 있는 보물이 되어 부단히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랑의 수행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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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3.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여러분,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이 말을 믿으십니까?
이 말을 우리는 모두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왜 아직도 우리는 세상 사는데 유용한 것들을 모으는데 여념이 없을까요. 왜 하늘보다는 이곳을 먼저 생각할까요?
왜냐하면 이곳은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지금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곳이 끝이 아니라는 말은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성인이 몇 명입니까?
103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처럼 우리나라에는 성인들이 103명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많습니다. 1만 명은 족히 넘을 것으로 교회사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고 동시에 하늘나라를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이 누구인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자신의 목숨을 봉헌했는지 증명할 길이 없어서 그들은 성인이라 불리지 못하지만, 그분들 역시 한국교회 역사의 성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라고 말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바보입니다. 우리는 잘 믿지 않는 그 하늘나라를 철석같이 믿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쌀 한 톨 주지 않는 천주를 위해 칼 앞에 목을 내 놓았으니 말입니다. 이런 바보 같은 이들을 우리는 신앙의 선조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성인이라 합니다.
그것 아십니까? 마음이 있는 곳에 몸이 있고 생각도 있고 즐거움도 기쁨도 희망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선조들은 하늘에 마음을 두었으니 지금 하늘에 몸도 있고 하느님 안에서 행복할 것은 당연합니다. 철부지와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차지한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달걀 만 있다면
달걀 만 있다면
명란 계란말이, 땡초 계란말이, 참치 계란말이….
양파 계란찜, 대파 계란찜, 스팸 계란찜….
달걀을 두어 개를 풀어 소금 반 티스푼 넣고
그 안에 애호박채를 썰어 넣으면 호박전이 되고,
그 안에 양배추를 넣으면 한국식 오코노미야키가 됩니다.
삶은 달걀 역시 우리 추억 속에 함께 해온 영혼의 간식이지요.
뜨거운 밥에 달걀 한 개를 ‘턱’하고 떨어뜨린 후 간장을 곁들이면 이 또한 완벽한 반찬이 됩니다.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필요한 날 아침에는 역시나 날달걀만 한 것이 없습니다.
오늘은 달걀 요리 어떨까요?
든든히 드시고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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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3.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자칭 미식가라고 말하는 신부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자주 맛집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한번은 저와 이야기하는데, 전에 함께 있었던 식복사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음식 솜씨가 끝내줬다고 하더군요. 조미료를 쓰지 않는데도 정말 맛있었다면서, 다시 본당신부가 되면 이 자매님을 부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우연히 식복사를 하셨던 자매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식가 신부님께서 홀딱 반할 정도의 음식 만드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여쭈었습니다. 그 비결을 듣는 순간, 저는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미료죠. 조미료 쓰지 않고 어떻게 맛있게 음식을 하겠어요? 신부님께서 스스로 미식가라고 하시는데,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신부는 미식가일까요? 사실 미식가는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합니다. 단지 식복사 자매님에 대해 좋게 보셨고, 그런 이유로 음식도 아주 맛있게 느꼈던 것이 아닐까요? 실제로 소문난 맛집을 찾아가 봐도 맛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한 가지는 가게 곳곳에 손님을 위한 배려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배려가 손님을 끌었던 것이고, 입맛도 좌우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맛보다는 배려 가득한 사랑에 우리는 단골이 되곤 합니다. 사랑에 중독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 중독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주님 안에 계속해서 머물고 싶을까요? 맞습니다.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하면 철저하게 주님의 뜻을 찾으면서 주님께 집중하면서 그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의 가정은 그리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가난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도 가난한 사람들의 봉헌물이었던 비둘기를 봉헌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난 속에서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2)
가난이 싫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가정은 행복한 가난의 표본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잘 따를까?’에만 집중하셨기 때문입니다. 재물이나 부가 그 자체로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노예가 되고, 마음을 빼앗긴다면 큰 문제입니다. 하느님을 바라보지 못해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 마음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입니까? 땅입니까?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있어야 주님께 중독되면서 참 행복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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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보이는 것에 의존하지 마세요. 길을 잃게 될 뿐입니다(막상스 페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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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3.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품에 벗을 모시겠어요>
사랑하는 벗이여
나 그대를
다른 누구의 품도
내 품도 아닌
다만 하느님 품에
모시겠어요
어느 누구도
나조차도
그대를
아파하지 못하게
어느 누구도
나조차도
그대를
망가뜨리지 못하게
어느 누구도
나조차도
그대를
빼앗아가지 못하게
고마운 벗이여
그댄 나의 보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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