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61-67 리브가가 일어나
인간적으로만 살펴본다면 이삭과 리브가의 만남은 그렇게 쉽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일에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시고 주선하셨기 때문에 여러 난관들이 선히 해결된 것입니다.
1. 본문 61-62절은
“(61) 리브가가 일어나 비자와 함께 약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가니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 (62) 때에 이삭이 브엘 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남방에 거하였었음이라” 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를 떠난 것이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 곧 그에게 주신 은총의 의지였다면 그 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을 경외했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점은 아브라함의 늙은 종의 행적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으며 리브가가 부모, 친척 아비 집, 곧 고향을 떠나 낯선 곳을 향하여 나아간 것도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인 것입니다. 때에 맞추어서 하나님의 은총이 이삭의 마음을 동하게 하시고 그의 행동을 부추겨서 그가 살던 남방에서 브헬라헤로니로 이동한 것으로 모세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2. 본문 63절은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약대들이 오더라” 입니다.
이삭은 아버지와는 따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식구가 너무 많았던지, 혹은 관습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이미 또 다른 한 여자와 결혼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불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이 집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것이 더 편리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산이 많으면 번민도 따르는 법입니다. 의심할 것도 없이 모든 복은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것이며 아브라함으로서는 자기 아들과 같이 사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이삭과 만나지 못하고 그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이삭의 효심은 대단히 컸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자기 의무를 다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그들이 같은 집에서 살지 못했다는 결점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또한 어떻게 되어서 이삭이 자기 아내를 집에 당도하기도 전에 만날 수 있었는가를 말해줍니다. 모세의 말에 따르면 이삭은 저녁에 ‘묵상하기 위해서’ 곧 ‘기도하기 위해서’ 나갔습니다. (소아흐)란 히브리 단어는 어느 것이든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마 자기 관습에 따라서 기도를 위한 조용한 장소를 찾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온갖 일에서 물러나 좀더 자유로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묵상 또는 기도를 하려 하고 있을 때 여호와께서는 이 즐거운 모임에 자기가 친히 임재하신다는 증표를 허락하셨습니다.
3. 본문 64-66절은
“(64) 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약대에서 내려
(65) 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구뇨 종이 가로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면박을 취하여 스스로 가리우더라
(66) 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고하매” 입니다.
1) 분명히 약대들을 본 이삭은 자기 신부를 보고 싶어서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늙은 종 엘리에셀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종의 대답을 들은 리브가는 자기 남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약대에서 내려 이삭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자들이 설명하는 ‘리브가는 놀라서 떨어졌다’ 고 하는 말에는 결코 찬동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여러 수행자들의 보호 아래 먼 길을 왔습니다. 그러므로 남자 하나를 보고 그렇게 놀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해석자들은 잘못을 범한 것이니, 모세의 말을 통해서 그 다음에 나와 있는 실질적인 해답을 깨닫지 못한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리브가는 이삭을 보자 약대에서 내렸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리브가가 그 사람은 자기의 주인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종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기가 우연히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그런 식의 의구심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집이 거기서 멀지 않다는 사실을 듣고 적어도 그 남자가 그 집안 사람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2) 모세는 또 말하기를 그녀가 면박(베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수줍음(아름다운)과 정숙의 징표였습니다.그래서 ‘결혼하다’ 란 말을 뜻하는 라틴어도 여기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것은 신부가 신랑을 향해 면박을 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똑 같은 의식이 그 조상들에게서도 지켜졌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부끄러워할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사과할 줄 모르는 것이 바로 이 시대의 방탕의 증거입니다. 이 시대에는 신부 의복도 온갖 정숙을 전복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만들어낸 것처럼 보입니다.
4. 본문 67절 상반절은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입니다.
이삭은 먼저 그녀를 장막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 다음에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 말의 순서를 통해서 모세는 정당한 결혼양식과 야만스런 결혼양식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또 분명히 말해서 결혼의 성스러움은 남녀가 짐승처럼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요청합니다 저들의 상호간의 신앙을 서약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다음에, 비로소 남녀가 같이 기거하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또 관찰 할 수 있는 것은 이삭이 아버지에게서부터 결혼하라는 폭군과 같은 강요를 받지 아니했다는 점입니다. 이삭은 그녀에게 정신을 집중한 후에, 자유로이 그녀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부부의 신의를 충심으로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5. 본문 67절 끝 부분은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입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이삭의 슬픔이 이제 비로소 진정되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슬픔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충분히 긴 시간이 경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삭의 마음씨가 상냥하고 유순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어머니에 대한 이 같은 사랑 또한 흔치 않은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살펴볼 때 결코 신앙의 조상들이 야만스럽고 마음씨 완악한 자들이었다는 생각을 품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짐승과 같이 굳음 마음을 품은 사람들처럼 되지 않도록 해줍니다.
그러나 슬픔이 적당한 시기가 되면 진정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슬픔이 지칠 줄 모르고 솟아 나온다거나 장래의 부활을 잊어버릴 만큼 극심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점에서는 이삭의 슬픔을 완전히 좋은 것이라고 보진 않겠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것 일체를 전부 저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충언하겠습니다. 결혼이라는 즐거운 기회가 오기까지 마음속에서 슬픔을 지울 수가 없었다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세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여러 은혜 중에 하나로 계산합니다. 이렇게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들에게 어떤 구제책이든지 허락하십니다.